< 30. 둑이 무너지고 [2] >
연회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대체 무슨 소리인가 눈을 깜박거리는 이, 경악하여 시엔을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 악단이 왕가의 행진곡을 연주하자, 모두 반사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연주가 멈추자, 새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내 연회에 참석해 주어 대단히 고맙소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군.”
델피르 왕자는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훌륭하게 말문을 텄다. 예법 선생이 구석에서 싱글벙글 웃는 낯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그대들이 놀라는 것도 내 이해하오. 내 비열한 음모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오. 티란디스의 보호가 닿아 이리 보전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인 것 같아 이리 나타나게 되었소.”
그제야 손님들이 티란디스의 행보를 제대로 이해했다.
국정의 안정화 이후 중립 파벌을 이끌기 위해 왕실에 반항했던 것이 아니었다.
왕자를 보호하고 있었으니 그 뜻이 무엇이랴. 왕자를 왕위에 올려놓고 말겠다는 심산이었다.
즉, 진짜 반역이었다!
손님들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데에 성공하면? 이후 왕국의 실세가 누가 되겠는가. 그리고 나면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게다가 이제는 명분도 밀리지 않았다.
왕실의 적통이 여기에 있으니, 빼앗긴 왕세자의 지위를 돌려받겠다는 명분으로 반역에 대항할 수 있으리라.
내전. 전쟁.
귀족들의 뇌리에 선명히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세상에.”
“많이 놀라셨습니까?”
“그럼 안 놀라게 생겼나? 내가 오길 다행이었군. 안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면, 서부 귀족들에겐 선택지가 없다.
티란디스의 병력이 보통 수준이랴.
서부에 자리잡아 티란디스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이후 벌어질 내전에서 왕세자가 승리하더라도, 티란디스와 가까운 영지는 확실하게 쑥대밭이 되고 말리라.
가장 가까운 적부터 처리하려 들 테니, 왕세자파는 멀고 티란디스는 가까웠다.
“백작께서 직접 참석하여 주셨음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사실은 자네가 아니라 후작님을 믿었지. 후작께서 허투루 움직이실 분이 아니니.”
“후작님께선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식적인 입장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진실입니다.”
“허.”
다나타난 자작이 중얼거렸다.
“내 아들놈이 자네 반만 따라갔으면 좋겠네. 후작님께선 자식 복도 타고나셨나.”
“글쎄요.”
시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 복이라. 자결하여 다른 영혼에게 신체를 내어준 자식이라도 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시엔의 애매한 대답에 자작이 다시 물어보려는 참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둘 사이에 파고들었다.
“대공자.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겐가?”
“백작님.”
“전쟁이야. 전쟁이란 말이네. 자네가 전쟁을 아는가? 전쟁을 감당할 수 있다 감히 말할 텐가?”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미 제가 전쟁을 치른 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기껏 야만인 토벌 말인가? 내 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님을 모르겠나? 자네의 전쟁일세. 자네의 전쟁이야. 야만인 토벌과는 달라.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느냔 말일세. 그건.”
“제가 하고자 하니, 못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엘와즈 백작이 시엔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영주이자, 서방 국경의 책임자였다. 그녀가 군인이며 또한 무인이자 기사가 아니던가.
백작이 냄새를 맡았다. 코가 아니라 어떤 직감에서 느껴지는 냄새. 피를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종류의 유형이 가지는 그런 비린내였다.
“백작님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국경의 수비가 중함을 압니다. 중립을 지키시더라도 그 누가 할 말이 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그러나 백작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내 아직은 지켜보겠네. 자네를 모르니 함부로 가문의 명운을 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하는 거 봐서. 대놓고 유리한 쪽에 붙겠다는 선언이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중립을 지키기만 해도 시엔에게는 큰 이득이 아닌가. 국경의 병사를 빼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큰 군대를 가진 적을 좌우로 두는 것은 영 개운치 못한 일이었으니.
“내 하나 충고하지.”
“감사히 듣겠습니다.”
“전쟁의 승패란 감히 확언할 수 없을 것이나,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초전이야. 더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면, 괜히 숨기지 말고 드러내 적을 압도하게.”
시엔이 미소 지었다.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 * *
왕국에 연이어 충격스러운 소식이 이어졌다.
-델피르 왕자가 생존해 있었다!
그것도 티란디스에 보호 아래였다.
서부 귀족이 다시 뭉쳤다. 잦은 연회가 연이어 열리며 서부 귀족 간의 교류가 잦으니, 다시 뭉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모든 왕국의 귀족이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전. 내전이 목전이구나.
어떤 이는 탄식하고, 누구는 눈을 빛냈다.
그러나 모두 생각은 같았다.
그렇다면 어느 편에 붙어야 할까.
세력으로 따지면 왕세자파가 우세했다.
흐레이그로 대표되는 북부 귀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무엇보다 현 왕실을 뒷배로 두었으니까.
그러나 방어는 공격보다 유리했다.
중요 요새를 기점으로 방어에 나서면, 세력이 불리하더라도 패배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1왕자파는 작정하고 방어 태세를 취하며 시간을 끌 터였다. 군대를 양성하고 세력을 포섭해 나간다면 지금의 열세 또한 언젠가 동수를 이루고 말리라.
상황이 이렇게 되니 국왕이 분노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반역자 놈들! 반역, 반역이야!”
“고정하십시오, 폐하.”
“고정?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반역이야, 반역이란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 진심으로 반역을 저지르고 있어!”
국왕이 흐레이그 공작을 노려보았다.
“자네 계책이 틀렸군. 공주를 빼앗기자마자 바로 군사를 소집해 밀어버렸어야 했어. 덫에 걸렸으니 힘이 빠지길 기다려? 오히려 제 무리를 불러모아 힘을 키우지 않았나!”
“송구하옵나이다, 폐하.”
흐레이그 공작은 억울했다.
공작이라도 티란디스의 속을 알았겠는가.
기껏해야 이후 권력 구도를 위한 삐딱선이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내전을 유도하기 위해 왕실의 심기를 건드려 온 것이 아닌가.
“왕명으로 군대를 소집해. 차라리 잘 되었어. 이참에 불순한 것들을 전부 치워 버려야 해.”
“송구하옵니다, 폐하. 왕명으로 소집한들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젠장! 너무 늦었어!”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중립파 귀족들이 군대를 내놓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다그치며 내놓으라 하면 오히려 역효과였다. 오히려 그 가증스런 티란디스에 합류하게 만들 수가 있었으니까.
지금으로선 그네들이 중립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도 손해는 보지 않는 셈이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흐레이그 공작.”
“예. 폐하.”
“당장 군대를 일으켜 저 무도한 것들을 처단하라. 이는 왕명일세.”
결국. 흐레이그 공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국왕의 판단이 옳은 것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대치 구도가 만들어지면 상황은 더 어려워질 터. 반역의 불길이 서부에 한정된 지금 재빨리 꺼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진화의 희생자는 모두 흐레이그와 그 파벌이 떠안게 되리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오나, 폐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뭔가?”
“왕실의 무기고를 개방하여 주십시오.”
왕실의 무기고.
최고 등급의 공성 병기를 포함한 가장 위험한 종류의 전략 무기는 일반 귀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오로지 왕실만이 소유하며, 국운을 건 전쟁에 있어서만 사용되는 강력한 병기들이었다.
“아무렴, 개방하다마다. 반역자들을 처단하는데 왕실의 무기고가 문제겠나. 무기고로 되겠나? 왕실 마법병단 역시 파견해 주겠네.”
왕실 마법병단. 왕가 직속의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마법사 부대는 역시 귀족들에게 금지된 것이었다.
마법사 몇이 전장을 바꾸는 힘을 가졌으니, 마법사 부대라면 그 능력이 어떠하겠는가.
흐레이그 공작이 눈을 빛냈다.
왕실의 무기고와 마법병단이라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군대가 상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만, 이참에 서부를 아예 재기 불능으로 짓밟아 놓을 기회였다.
서부가 황폐해지고 나면, 동부와 남부 역시 더는 왕실에 반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터.
그리고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 흐레이그의 시대가 시작되리라.
“감사합니다, 폐하. 신 흐레이그, 이 목숨과 바꿔서라도 승리를 쟁취하여 바치겠습니다.”
* * *
영지 내부의 첩자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거창하게 첩자라 할 것도 없다. 그저 평범한 이가 금화 앞에서 입을 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군대가 집결하고 있었다.
흐레이그에서 네 개 대대와 세 개 기사단이, 팡토스에서 두 개 대대, 궤헬에서 두 개 대대, 에스트레헴에서 두 개 대대…….
첩보에 따르면 그렇게 모이는 군대의 숫자가 합쳐 일만 오천에 달했다.
병무관 카레네의 말에, 시엔이 다시 물었다.
“우리 병력은?”
“필사적으로 모아도 일만이 한계야. 그것도 우리 오천을 전부 내보낸다는 전제 하에.”
“그것밖에 안 되나?”
“아직도 눈치를 보겠다는 거지. 군대 파견을 꺼리고 있으니까.”
“흠.”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한 방에 몰아쳐 끝내려는 심산이네.”
“그렇게 녹록한 상황이 아냐. 첨탑보다 높은 크기의 투석기.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유성투인가. 왕실의 무기고를 열었네.”
유성투. 별을 쏘는 병기라니 그 이름부터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세상 가장 거대한 투석기의 이름이었다.
사실 만드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저 투석기를 크게 만들면 되는 일이니. 물론 크면 클수록 그 기술이 필요하나, 그 부분을 마법의 힘으로 메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유성투의 탄환이었다.
그 거대한 발사대가 쏘아 올릴 거대한 바위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면 구할 수 없다.
그물로 자갈을 묶어 쏘는 방안이 있으나, 그 역시 현지 조달은 불가능한 수준이라 봐야 할 터였다.
왕실의 무기고가 무서운 이유는 그러한 탄환을 이미 준비하여 바로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뿐이랴.
요정목과 미스릴로 설계한 이동탑은 막강한 방어력으로 성벽에 붙어 병사를 끌어올렸다.
당하는 입장에선 강력한 마법이 아니면 도저히 파괴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아다만티움 충차는 또 어떠한가.
요새의 파괴를 그저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강력한 공성 병기도 함께이리라.
“마법병단이 움직였을 수도 있어. 왕실에 시약 납품이 벌써 일주일 째 끊겼다고 해. 마법사들이 시약을 끊을 이유가 무엇이겠어?”
상단으로 상계를 잡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첩보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레네의 표정이 진지했다.
시엔이 손을 저었다.
“아. 마법병단은 괜찮아.”
“시엔! 진지하게 굴어.”
“아니. 진짜로. 왕실의 무기고가 귀찮을 뿐이지, 어차피 마법병단은 오히려 자리에 있는 게 더 나아. 좋은 구경꾼이 될 테니까.”
“무슨 뜻이야?”
“간단하지.”
시엔의 주변으로 검은 화살들이 떠올랐다.
무영창 시전이었다.
“총력전으로는 승산이 없어. 아니, 승산이 꼭 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후환이 있는 수법을 쓰기는 그렇지. 이기든 지든 피해가 엄청날 테고.”
“그럼?”
“그러면 겁을 줄 수밖엔 없지. 총력전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해. 적들이 전선을 넓히고 지엽적인 교전을 시도하도록.”
내전은 왕국 간의 전쟁과 그 양상이 판이했다.
왕국 간의 전쟁과는 달리,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지이며 또한 자신의 병력이었으니까.
서로 제 영지를 최우선으로 지키며 소모를 최소화하려 눈치를 보니, 전선은 길어지고 전투는 잦아들었다.
그때부터는 누가 더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있느냐의 싸움이었다.
소수 정예.
긴 전장을 기동성 있게 돌아다니며, 변수를 만들고 지역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그런 창이.
그리고 시엔이 바로 세상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다.
“내가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도, 적이 보기에 강력하지 않으면 그뿐이야. 검술에 대해 잘 모르면 대가의 움직임이 무서운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마법병단이라면 안다?”
“그러니까 마법병단이 관객이 되어주면 오히려 내겐 도움이 되는 거지. 겁을 잔뜩 줘서 총력전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큰 오류가 있잖아.”
“오류라. 귀를 열고 듣지.”
“네 마법이 마법병단에게 확실한 공포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계획 아닌가?”
“그럼 오류가 아니지.”
시엔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서 용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누군지 알아? 바로 마법사들이거든.”
< 30. 둑이 무너지고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