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5] >
해피 드리머는 토라진 모양새였다.
악령이 브로치 안쪽, 등을 보인 채 제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원래 제 둥지에서야 비로소 잠에 들어 행복한 꿈을 꾸는 악령이었다. 그 안식의 시간을 포기하고 시엔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일 정도이니 삐쳐도 단단히 삐쳤다.
아마 제 장난감을 빼앗았다 이리하리라.
하지만 금화 오만 개를 악령의 장난감으로 던져주기는 무리가 아닌가. 너무나 많은 금액이었다.
금화 오만 개.
푸른 장미가 거절하기엔 지불 할 수 있는 역량이 되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지출이 되겠지.
하지만 암살자의 통신 부호가 장미 하나라 하니, 분명 푸른 장미에서도 핵심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아비가 송수신기의 개발자라 하지 않았던가. 에블리가 아니라 그 아비의 눈치를 봐서도 그만큼의 재화는 지불하지 않을까 하고.
베른닐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금화 오만 개라. 말도 안 되는 금액 아닙니까? 겨우 암살자 하나를 위해 내겠습니까?”
“오만 개라 해도 그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야 충분히 내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아마 안 주려고 할걸.”
“예? 그럼 왜 오만 개를 부르셨습니까?”
“오만 개뿐이라면 받아낼 수 있었겠지. 문제는 포기 선언이야.”
절대 실패하지 않는 암살자의 가지는, 역시나 그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스스로 포기 선언을 하는 순간, 푸른 장미의 가치는 곤두박질치고 말리라.
금화 오만 개 따위, 금화 오만 개를 따위라 취급할 수 있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뭐. 어떻게 나오나 보고. 대답을 들어보면 어떤 꿍꿍이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셋 중 하나야.”
“셋 말입니까?”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로 재교섭에 나서는 경우였다.
금화를 더 지불 할 용의가 있으니, 포기 선언만은 할 수 없다 할 수가 있었다.
시엔이 보기에 가장 좋은 반응이었다. 이때다 하고 금화를 마구 뜯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두 번째로는 교섭 결렬이었다.
이때는 뭐, 에블리를 인질로 삼아 그 아비라는 마법사를 빼돌릴 수 있으리라. 수양딸이라도 태도를 보아하니 그 부정이 보통이 아님을 알겠다.
송수신기 기술을 가졌다 하니 그 마법사를 확보하면 역설계하여 다시 만드는 것 보다 더 나은 마도구를 훨씬 빠르게 생산할 수 있으리라.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교섭에 응하는 거지. 이게 제일 골치아픈데.”
“교섭을 하겠다는데 말입니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교섭을 받아들이겠다 한다면, 당연히 다른 속셈이 있을 테니까.”
“다른 속셈이라.”
시엔이 삐뚜름이 미소지었다.
“괜찮아. 나름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까.”
* * *
후작성의 직할도시 체른노아의 외각. 싸구려 저택 안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금화 오만 개와 암살 포기 선언. 금화는 그렇다 치고, 포기 선언은. 불패의 전설이 끊기고 말겠군.”
“금화는 충분히 지불 할 수 있는 금액이다. 추후 성자를 노리지 않겠다는 맹세도 가능하다. 하지만 포기 선언은 잃는 것이 너무 많아.”
“그러나 장미 하나가 걸린 일이지. 게다가 장미 하나는 장미 셋과 한 묶음이니, 하나를 포기하면 바로 장미 셋 또한 이탈하게 될 테고.”
“일류의 암살자는 또 키울 수 있지만, 송수신기를 관리 개량할 마법사는 다시 구할 수 없어. 장미 셋이 이탈하면, 송수신기의 조정, 그리고 파손분의 수리 제작이 최소 5년 동안 불가능하게 될 거야.”
결국, 푸른 장미의 악명과 장미 하나 셋의 묶음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푸른 장미의 악명이 끊기는 것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성공을 자랑하는 암살자. 의뢰인이 암살로 얻는 이득보다 더 큰 보수라는 방침이 바로 그 신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스터 로즈.”
결국 수뇌부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몸값을 지불하면, 장미 하나와 셋을 계속 확보할 수 있지. 그러나 지불하지 않으면, 장미 하나와 셋을 잃는다. 하나.”
마스터 로즈가 말을 이었다.
“장미 하나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대상을 꿰뚫지 못했다. 인질 협상을 거부한다면 의뢰를 속행해야 할 텐데, 계획은?”
좌중이 침묵했다.
하녀 둘은 끔찍한 마녀임이 드러났다. 생존자의 보고였다.
그리고 늙은 하인 역시 그 비슷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생존자가 없어 그 능력은 모르지만, 시체들을 보아 병기의 흔적이 없었다. 손으로 잡아 뜯고 으스러뜨린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것도 산채로.
“대상에 대한 정보 수집부터 큰 오류가 있었다. 대상은 한 개 공작조를 간단히 제압할 수준의 인원으로 엄중한 호위를 받고 있다. 또한 후작가 내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원 검증 방식이 있어 장미 하나가 시도 이전에 제압당했다. 정보부장. 할 말 있나?”
“죄송합니다.”
“작전부장. 새로 드러난 정보를 바탕으로, 유의미한 작전 수립이 가능한가?”
“대상은 대귀족의 대공자입니다. 외유에 기사단 전력의 호위가 따르니, 정면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요원 침투 후 빈틈을 노릴 수밖에 없으나, 후작가의 인원 검증 방식을 모르니 도시에 배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빈틈을 위해, 그것도 가까운 곳이 아니라 도시에 요원이 상주해야 한다는 뜻이로군.”
마스터 로즈가 고개를 저었다.
“의뢰를 포기하면, 그 즉시 우리는 다른 의뢰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 장미 하나와 셋을 잃고 또한 임무의 속행을 위해 기한 없는 작전대기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마스터 로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푸른 장미가 왜 푸른 장미인가! 우리는 전설이자 신화다. 실체 없는 공포이자 죽음이다.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기에 푸른 장미가 있다.”
어째서 암살 대상의 가족과 지인들이 복수를 포기하는가.
상대가 푸른 장미이기 때문이었다. 패배하지 않는 암살자.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 복수하고자 하는 이는 없다.
어째서 푸른 장미의 의뢰금이 그토록 높을 수 있을까. 암살이 성공하여 얻는 이득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암살단.
푸른 장미가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절대적인 사형 선고. 그러한 믿음이 의뢰인을 움직였다.
단 한 번의 실패로 이 모든 것이 깨졌다.
푸른 장미는 전설이 아니라 살아 존재하는 것이 되며, 실제 없는 죽음이 아니라 그저 실력 좋은 암살자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장미 하나를 발화시킨다.”
“하지만, 그리하면 장미 셋이.”
“장미 셋은 거래에서 제외시킨다. 이후 대상 측의 배신으로 장미 하나가 당했다고 하면 그만이다.”
“오오, 과연.”
장미 하나는 푸른 장미가 만들어낸 암살자 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수천, 수만의 가면을 자유자재로 쓰니 세상 모든 여인을 연기할 수 있었다. 전투지능이 높아 위험 상황에도 유연히 대처했다. 신체가 강인하고 단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 이미 대가가 불릴 실력까지 있었다.
그러한 장미 하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심각한 정신 불안 상태였다.
그러한 아이들을 거두어 특수한 훈련을 시켰다. 제 불안을 속 깊이 감추고 가면으로 봉인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개중 발화가 있었다.
교모하게 심어 둔 세뇌의 중심이었다.
특정한 언어를 통해 절대적인 명령 수행을 유도했다.
발화 상태에 빠지면 제 몸을 살피지 않고 명령 수행에 들어갔다.
인간이 가진 모든 생명력이 일시에 기폭제가 되어 그 순간에는 아름드리나무를 간단히 뽑고 바위를 짓이겨 가루로 만들 괴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지만.
푸른 장미가 키운 현장 요원에게 심어놓은 마지막 안전 장치였다.
“인질 교환에서 장미 하나를 발화시킨다.”
“하지만, 그러면 마스터가 직접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발화는 최후의 수단이자, 수뇌부만 아는 비밀이었다. 발화가 가능한 이는 마스터 로즈 한 명 뿐이었다.
마스터 로즈가 사나운 웃음을 머금었다.
“어차피 대상이 죽고 나면 저들은 혼란에 빠질 터. 몸을 빼내는 것쯤이야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마스터 로즈가 결정을 내렸다.
“장미 셋에게 전달하도록. 푸른 장미는 그간 장미 셋이 기여한 헌신을 잊지 않았으며, 장미 하나의 복귀를 위한 교섭안을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 * *
자울의 연락은 빨랐다.
[금화 오만 개 가치의 재화를 지급하겠습니다. 지급 일시는 일주일 후, 인도 장소는 귀하 측에서 결정하여 주십시오.]
“거래 성립이네.”
[그 아이는 무사합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최고급 객실에서 호의호식하는 중이니까. 감시가 붙긴 했는데, 나름 인자한 인물이니 문제는 없을 거야.”
[믿어도 되겠습니까?]
“금화 오만 개짜리 인질을 홀대할 이유가 있나?”
[그럼 목소리라도, 목소리라도 들려 주시면.]
“나름 명예 성자가 하는 말이잖아? 믿어. 거래 장소는 추후 결정해 알려줄 터이니 계속 대기하도록.”
[잠깐……]
시엔이 수신기를 책상 위로 툭 던졌다.
“흠.”
“결국, 골치 아프게 되었군요.”
“이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시엔이 흉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수신기를 손에 쥐자, 거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젠장! 빌어먹을! 개 같은 새끼! 사지를 찢어버릴 새끼!]
“말이 심한데.”
[악! 앗, 그게 아니라.]
“뭐. 이해할 수 있어. 아무리 사람 잡는 인간말종 암살자라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딸이겠지.”
[…….]
“체른노아 서쪽, 배울림 숲. 중앙 부근에 캐러밴 야영지로 쓰던 커다란 공터가 있어. 일주일 후에 거기서 보지.”
[그.]
“왜 할 말이 있나?”
[죄송합니다. 제가 홧김에 이성을 잃었으니, 부디 노하지 마시고.]
시엔이 냉소했다.
“딸이 어지간히 소중하긴 한 모양이지? 내가 네 딸에게 화풀이라도 할 성싶은가?”
[그게 아니라.]
“사람 잘못 봤어. 그러니 안심하고 두 발 쭉 뻗고 자라고. 알겠지?”
시엔이 다시 송수신기를 놓았다.
* * *
에블리는 감옥에서 객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누가 봐도 성한 꼴이 아니었다. 눈 아래 검게 그림자가 드리우고, 행동은 삐꺽삐꺽 녹이 슨 인형처럼 딱딱했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떠는 소리를 내니 잔뜩 공포에 질린 모양새였다.
감시역을 맡은 누렁이 측은한 눈빛을 던졌다. 손녀딸이 살아 있었다면 저 정도 나이가 되었을까.
비록 적이나 적대하기를 스스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죄를 깨달아 이토록 두려워하니, 아직은 갱생의 여지가 있으리라.
누렁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두렵느냐.”
“그그그그게, 그그게”
누렁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내 전신에서 검은 신성이 피어오르니 객실 안이 부자연스러운 그림자 속에 잠겼다.
그러나 검다 뿐이지 이 또한 신성이었다. 에블리가 신성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누렁이가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니, 에블리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게 올 거예요. 날 비웃고 놀리고 떨게 만들고, 그리고.”
“그리고?”
“날 심판, 심판하고 말 거예요.”
“심판이라. 허허.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나는 죄를, 사람을 많이 죽였어요. 죽으면 끝이 아니었어요. 내가 죽인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요. 내 주변에 있어요. 주변에, 그래요, 지금까지 계속 날 노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게 와요. 죽은 자를 이끄는 아이가, 심판, 심판의 때가.”
에블리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누렁이가 말했다.
“사람을 많이 죽였느냐?”
“많이, 아주 많이요. 내가 그랬어요.”
“그래서 괴롭고 두려우나.”
“맞아요. 그들이 나를 노리고 있어요. 죽음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내가 죽인 모든 인간들이 날 죽이고 말 거예요.”
에블리의 몸이 떨렸다.
“그리고 나면, 영원히 고통받게 될 거예요. 죽어도 끝이 아니니까.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될 거고, 그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어떡하죠? 너무 무서워요. 죽는 게 아니라, 죽고 난 다음을 감당할 수 없어요.”
“참으로 어리석구나.”
누렁이가 준엄한 눈빛으로 에블리를 바라보았다. 한 종교의 지도자였던 이의 위엄이 솟았다.
에블리의 눈에 희망이 서렸다.
“절 구해주실 수 있으세요? 너무 무섭고, 무서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네 두려움과 고통이 모두 네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이란다.”
“어떤, 어떤 어리석음인가요?”
“네가 올바른 신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블리의 눈에 실망이, 뒤이어 분노가 자리 잡았다. 광기 어린 분노였다.
“신은 없어요! 신이 있다면, 날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그 신을 말함이 아니란다. 천신께선 지상에 관여하지 않으시니, 땅 위의 사건은 모두 인간의 행사란다.”
“하지만 신을 섬기라면서……”
“네가 스스로를 신도로, 주교로, 성황의 자격으로 또한 너 스스로를 임명해야 한다. 또한 너 자신이 신전으로, 봉헌으로, 산 기적으로 오롯한 너의 신을 섬긴다면 그때야말로 네가 진실로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누렁이의 전신에서 검은 신성이 뿜어져 나왔다. 에블리의 표정이 몽롱하게 물들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는 어떻게 하면…….”
“급할 필요는 없단다. 나 또한 이러한 깨달음이 오래지 않았으니, 사는 동안 너무나 오래 헤매 슬플 뿐이구나. 그러나 네게는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있지 않으냐. 그러니 우리 천천히 알아가자꾸나.”
누렁이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래. 먼저, 지상 가장 위대하신 분을 알고 있느냐?”
<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5]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