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3] >
「시엔 샤인 티란디스 귀하
가시렌 왕국의 할른폴드에 성전사대를 이끌고 다녀왔어요.
결과적으로 토메쏘의 추적에는 실패했어요. 왕립 불꽃 연금술사에 가명으로 활동 중인 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국왕의 탄신제 기념행사에 출전한 후 실종.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예요.
시엔도 들었겠지만, 할른폴드에 끔찍한 일이 있었어요. 할른폴드 참사에 대한 소문은, 오히려 축소된 일면에 불과해요.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이전에 새로운 종교에 대해 이야기했던가요?
참사 후 조사된 바로는, 이미 스스로 와해된 이후였어요. 증언으로는 그들의 신, 그러니까 인간의 신이 스스로 부정하여 믿음을 저버렸다 하더군요.
이렇게 뒤늦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에 시엔을 본 것 같은데. 보았다고 해야 하나. 워낙에 현실 같지 않아 환상일 수도 있겠지만.
웃긴 소린 거 알고, 또 그 꼴 뵈기 싫은 비아냥이나 할 거란 걸 알아요. 이상한 소리인 거 나도 아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시엔이 혹시 그 자리에 있었나요?
뷔아 샤인 세러헤드가.」
“대체 언제 적 이야기야?”
시엔이 편지를 툭 던졌다.
뷔아에게서 온 편지였다. 시엔이 랭무튼 영지로 출발한 직후에 도착했다고.
“환상은 무슨. 쯧.”
외연과의 연결 당시, 그 상황이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던 모양. 확실히 어쩔 줄을 몰라 멍하니 서 있더라니.
시엔이 답장을 작성했다.
일이 있어서 답장이 좀 늦었다. 무슨 일인지는,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전해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런데 정신머리를 대체 어디다 두고 다니길래, 산 사람과 헛것을 구분하지도 못합니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뒤를 이어 거기 있기는 했으나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그냥 돌아왔다고 쓰려던 시엔이 멈칫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투한 암살자를 발견했다. 암살자를 보냈다는 것은, 이젠 정말로 파국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사방에 적이 많으니 교단으로 가는 편지라 하여 누군가 엿보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아시다시피, 할른폰드는 먼 타국의 수도입니다. 외인이며, 또한 왕국의 귀족인 제가 공식적으로 방문할 자격 혹은 수단이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이니 거짓말이 아니다. 눈치가 있으면 알아듣고, 없으면 못 알아들을 터. 성녀가 알아서 이해할 일이니 안면 익힌 사이에 답장은 이만하면 충분하리라.
시엔이 밀납을 붓고 인장을 찍어 봉인했다. 이제 신전에 전하면 될 텐데. 시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 둘은 마침 시약을 사러 나간 참이었다.
시약이란 그 종류가 수만 가지에 이르고, 배합 비율에 따라 또다시 효과가 천차만별이니 아무나 심부름꾼으로 쓸 수 없었다.
그러니 쓸 사람이 직접 구매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 이유로 남는 이가 항상 곁을 지키는 누렁이 뿐이었다.
“신전에 보내 줘.”
“예, 주인님.”
시엔이 봉투를 내미니, 누렁이가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어쩐지 포상이라도 내리는 모양새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누렁이가 자리를 뜨고 나서, 시엔이 집무실 한편을 바라보았다.
융단 위에 웅크린 거대한 늑대가 한 마리. 그리고 그 푹신한 털가죽 속에 폭 파묻혀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는 어린아이가 하나.
어린아이는 자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했던가. 그 말은, 깨어있을 때는 절대 아름답지 않다는 뜻이리라.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내내 해피 드리머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해피 드리머라 부르기도 애매했다. 더 상위의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 원래 희귀하여 기록이 별로 없으니, 상위의 격을 얻은 개체는 시엔이 아는 바로 사상 최초이리라.
그러한 강대한 악령이 하루를 꼬박 괴롭혔으니, 암살자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있었다.
* * *
“장미 둘. 여기는 장미 셋. 제발 응답하라. 장미 하나와 교신이 끓어졌단 말이다. 어떻게든 구출 작전을, 제발.”
자울이 애원했다.
밤새 딸 걱정에 한 숨을 못 자고, 또 한나절이 되어가도록 초초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슬슬 부아가 치밀고 있었다.
‘푸른 장미가 이렇게 큰 게 전부 누구 덕인데. 스승님과 내 연구가 아니었으면 송수신기도 없고, 송수신기가 없으면 지금의 푸른 장미도 없어. 그런데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
그러나 장미 둘, 계획 본부에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울이 푸른 장미의 핵심 인물이고, 에블리는 최고의 현장 요원이 아니던가.
게다가 수양딸이라 해도 부녀 관계가 워낙에 돈독하니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한 명 역시 떠나보내야 하리라.
푸른 장미의 일원으로 탈퇴란 제거뿐이니, 그게 핵심 인원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해 봐야 했다.
자울이 마침내 장미 둘의 목소리를 받았다.
[장미 셋. 여기는 장미 둘.]
“오. 어떻게, 어떻게 하기로 되었나?”
[붙잡힌 장미 하나를 탈환할 교섭 작전이 수립되었다. 현재 인질 확보를 위한 요원 파견 중이다.]
“자세히, 자세히 말해봐. 그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대상은 제 사람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대상의 하인 셋이 전부 밖으로 나왔다. 하녀 둘은 침실 수발을 드는 것으로 추정, 하인 하나는 늙은이라 아마도 오랜 인연이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하인 셋을 인질로 잡아, 후작가와 교섭하여 에블리와 교환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울이 그제야 한숨 돌렸다.
그러나 아직 에블리와 교신이 되지 않고 있으니, 그저 어떻게든 빨리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었다.
* * *
본디 감옥이란 인간의 악의가 결실을 맺는 장소였다. 가둬두어 인간의 공포를 계속해서 키우고, 또한 가장 큰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여야 했으니.
암실 차단 감옥 역시 그 산물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더 괴로울 수 있을까 하는 창의적인 발상이 만들어낸 장소. 완전한 어둠 속에서 사람의 감각은 극대화되어, 하루가 일 년같이 길게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소리의 차단이 그 감각을 비트니 예민해진 사람이 환청을 듣거나 심지어는 헛것을 보는 일마저 흔한 일이었다.
그러한 지독한 감옥의 문이 열렸다.
그그그그. 육중한 철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자마자 희끄무레한 것이 시엔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히힛, 히힛, 흐힛.
반투명한 것이 시엔에게 달라붙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팔다리가 밧줄처럼 길게 늘어나니, 이내 시엔의 몸통을 칭칭 휘감았다.
아니 이건 또 뭐람.
이젠 완전히 다른, 훨씬 높은 격의 무엇인가가 된 해피 드리머가 나름의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뭐. 사람의 수십 배는 긴 팔다리를 한 것이 한 사람을 꽁꽁 동여매고 있는 꼴이었다.
대가 약한 이가 보곤 기겁하여 충분히 바지를 적실 만한 광경이었다.
시엔에게야 어차피 부리는 것의 애교였지만.
뭐. 이것도 나름 귀여우니 상관은 없겠지.
시엔이 별 내색 없이 감옥 안에 들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에블리의 모습이 보였다.
감옥 바닥은 누워 불편하도록 부러 울퉁불퉁 평평한 곳이 없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암실에서 예민해진 사람이라면 한없이 불편하여 잠들기조차 쉽지 않으리라.
에블리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시엔의 주변을 멍청하게 훑을 뿐이었다.
“흠. 정신이 있나?”
“으, 어······.”
대답 대신, 말이 되지 못한 소리만 돌아왔다.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은 모양. 시엔이 느긋히 서서 암살자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에블리의 시선이 초점을 되찾았다.
“아아, 도련님. 저를 꺼내주세요. 이 끔찍한 장소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에블리가 애원했다. 몸을 일으키려 드나, 뒤로 묶인 손을 허리에 딱 붙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니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에블리가 비척이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곤 일어서기를 포기한 꼴로 뺨을 바닥에 붙인 채 간절한 소리를 냈다. 어느새 그 사슴 같은 눈에서 눈물이 줄줄줄 흘러나왔다.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도련님. 제발, 잘못했습니다.”
시엔이 잠시 생각했다. 어제 보니 연기가 보통이 아니던데. 지금 보이는 행동이 연기인가 아닌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뭘 잘못했는데?”
“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가두지 말아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제발요.”
“그러니까 뭘 잘못했냐니까?”
“끄윽, 잘못했어요, 제발,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지독한 암실에 반쯤 정신이 나간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속은?
시엔이 여상한 말투로 툭 던졌다.
“날 암살하려 든 것도?”
에블리가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연기란 원래 고도의 기술이었다. 특히 상대를 속이려면 더욱 그러했다.
현재 뒤집어 쓴 주제와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한시도 쉬지 않고 판단하여 끊이지 않고 꾸며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머리가 아무리 비상하다 해도, 예상지 못한 상황 앞에선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시엔의 시각 역시 인간을 초월했다.
그 짧은 순간 스쳐간 당황을 놓치지 않았다.
“쯧. 어차피 시간문제야.”
시엔이 혀를 차며 말했다.
“신원을 재확인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니, 네 위장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키고 말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잘못했으니.”
“내가 암살자라고 인정한 거지? 암살자는 재판이 필요 없지. 베른닐, 화형식을 준비하라 해.”
“도련님. 그게.”
베른닐이 토를 달았다.
기사가 보기엔 심한 처사로 보였던가. 시엔이 베른닐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와는 달리 뾰족한 말투로 되물었다.
“두 번 말하게 만들래?”
베른닐이 바로 알아들었다.
“그게 아니라.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언제 태울 겁니까?”
베른닐이 한술 더 떴다.
시엔이 받았다.
“아. 최대한 빨리. 오늘 만찬 전까지 태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구경꾼이 별로 안 모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태우려면 완전히 어두울 때 태워야 구경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흠, 그것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런 걸 오래 데리고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보거든.”
에블리가 당황했다.
이대로 연기를 계속하다간 산채로 불타게 생겼다.
“잠깐. 잠깐만요!”
“뭐야?”
“저는 암살자가 아닌, 어, 윽. 으. 아닌데.”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자연스러울까 모르겠지? 억울하게 몰려 화형을 당할 처지라면 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후. 젠장.”
에블리가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에 감돌던 처연한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무감정한 냉막한 여인만 남았다.
방금 전까지 몸을 가누지 못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에블리가 능숙하게 몸을 세워 바닥에 앉아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시엔이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베른닐 역시 시엔을 바라보았다. 베른닐이 말했다.
“워. 진짜였습니까?”
“그럼. 내가 빈말하는 거 봤어?”
“그나저나, 암살자 주제에 말이 짧지 않습니까? 몇 대 치면 예의를 차리지 말입니다.”
호위 기사가 제 주인을 암살하려던 암살자를 보았으니 이제는 가축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에블리가 급히 말을 바꿨다.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알아.”
“예?”
시엔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보면 안다고. 무고한 이를 죽이면, 그 죄가 몸에 달라붙거든. 나는 그게 보여. 하녀라고 처음 보는 것이 사람을 수없이 죽였네? 그런데 평범한 촌락 출신이라.”
“제 연기가 어색했던 건 아니죠?”
“그게 중요해?”
“음. 있잖아요. 저는 그러니까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의뢰는 깔끔히 포기할 테니까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날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음, 저 시녀로 열심히 일했잖아요. 그러니 결과적으로 보면 해를 끼치지는 않았는데요······.”
에블리가 시엔의 눈치를 보았다.
“그. 음. 그리고. 저는 죽이시는 것보다는 풀어주시는 것이 도련님께도 이득인데요.”
“이득이라. 말해 봐.”
“이후로는 티란디스에 관련해서 어떤 의뢰도 안 받자고 할게요. 그리고 또 음, 한 건, 아니 두 건! 두 번 공짜로 일하는 건 어때요?”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살자란 가문에서 키워 반쯤 소모품으로 쓰는 것이었다. 본디 성공하고 살아 돌아오지 못하니 스스로 독을 삼켜 잘린 꼬리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의뢰라 하니 어느 가문의 소속이 아닌 셈이며, 두 번이라 하니 그 정도의 실력과 수단을 갖췄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푸른 장미라.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시엔 역시 대륙에 악명이 자자한 암살자의 이름 정도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세상에 암살자가 어떻게 의뢰를 계속 성공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후작님께 듣지 못하셨나요? 티란디스 후작님 정도 되는 대부호께선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누가 날 죽이라 의뢰했지?”
“저는 몰라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예요. 의뢰인의 정체는 접수 요원만 알고 있으니, 현장 요원들은 그저 대상이 누군지만 전해들을 뿐이거든요.”
“그런가? 뭐. 대충 누가 의뢰했는지는 알고 있으니 상관은 없는데.”
“그럼 풀어주시는 건가요?”
에블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시엔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태울 건데.”
“어째서!”
“누가 의뢰했는지 알 것 같으니 네 증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암살자니 태우면서 누가 사주했다 실토했다 발표하면 그게 바로 명분이니 그게 제일 이득이잖아.”
왕가 아니면 흐레이그가 의뢰를 했으리라.
어차피 암살자임을 알았으니, 불태우고 나서. 왕가를 끌어내리기엔 아직 이르니 흐레이그가 암살을 사주했다 발표하면 될 일이었다.
“저희 푸른 장미는 절대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최고의 비수예요. 저희의 보수 책정을 아시나요? 암살이 성공했을 때 의뢰인이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더 많은 황금을 필요로 한답니다. 두 번이나 공짜라면 요새 두 개는 절약하시는 셈인데요.”
“의뢰 한 건에 요새 하나 수준인가.”
“그, 그럼 세 번, 세 번은 어때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난 암살을 좋아하지 않아.”
“어, 그 정의라던가. 비열한 수법이라던가. 더러운 수단이라던가. 그런 생각이신 건 아니시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암살 한 방이면 수많은 영민의 피를 아낄 수 있으시지 않나요? 그걸 생각해 보시면.”
시엔이 제 사람을 아끼는 것이 과하다고 했던가. 에블리가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피를 아끼는 게 아니라 독을 삼키는 거지. 성벽을 보수하겠다고 아래의 바위를 파내 쌓아 올리던가? 얼간이나 하는 짓이지.”
시엔이 부리는 것이 흑마법이니 애초에 잔혹하고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리치를 부리고 인간을 그저 실험체로 보는 후배를 거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대죄인을 풀어놓는 것은 또 어떠했던가.
그러나 시엔이 암살을 싫어했다.
암살이란 결국 개운하지 못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암살로 인해 승리해도 패배자는 절대 승복하는 법이 없었다.
패배한 이가 마음으로부터 졌음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의 집요함이란 언젠가 다시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순간의 편리를 위해 미래의 화를 자초하는 수단. 그러니 피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일로 미뤄두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물론 암살이 요긴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는 시엔의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리라. 정 안되면 순진무구를 풀어놓아. 음.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력한 수단을 경계하라 했다. 당장 부패한 환희에게 편법을 쓰지 말라 잔소리를 들어 놓고는.
대죄인의 소환이 가능하니 꼭 그리로만 생각이 가는 모양이었다. 세상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풀어놓겠다니.
심지어 시엔에게조차 재앙이었다.
그저 시엔에게 호감을 가진 것뿐이나, 순진무구의 호의는 세상 가장 지독한 악의와 같은 것일 수도 있음에도
시엔이 스스로를 반성했다.
순진무구를 소환하는 건, 적어도 통제가 가능한 수준의 경지에 오른 다음으로 해야겠지.
“음. 도련님?”
“교섭을 시도하려면, 좀 더 가치 있는 조건을 걸어 봐.”
“어, 그럼 네 번? 다섯 번은 어떠세요?”
“횟수를 늘린 들 의미가 있나. 암살자를 신뢰해 달라는 것도 무리수고.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해. 네 몸값으로 내게 뭘 지불할 수 있을지.”
시엔이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해피 드리머에게는 조금 실망이었다. 하루를 꼬박 괴롭히는 것 같더니만, 암살자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은가.
암살자가 바라마엘보다 더 강력한 신념으로 강인한 영혼을 지니기라도 했을까.
그럼 불태우는 편에 이득이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었다. 버닝 신의 불꽃으로 태우면, 악령이 새로운 격을 얻어 진화하게 되리라.
“자, 잠깐만요!”
“뭐야?”
“순순히 협조해 드렸으니까, 제발 여기서 꺼내주세요. 제발요, 네?”
에블리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뭐?”
“저, 저를 혼자 두지 말아 주세요. 하다못해 불이라도 켜 주시면. 앗, 아아······!”
에블리의 표정이 공포에 물들었다. 시선의 초점이 조금 이상했다. 시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엔 어깨 너머에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히히힛.
해피 드리머가 천진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둡지도 않은데······! 그래, 여기가, 여기기 저주받은 거야. 절 데려가 주세요, 여기 두지 마세요, 제발. 차라리 발가벗겨 길거리에 매달아두기라도 해주시면, 아니,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제발 여기만, 여기만은······.”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당돌한 암살자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비굴하게 꺼내달라 외치는 죄인만 남았다.
시엔이 내일 보자 했다.
관객이 없는 연기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연기자가 가면을 내려놓자 그제야 그 안의 여린 속살이 드러나고 말았다.
영문 모르고 투옥된 가련한 하녀, 그리고 당차고 당돌한 암살자. 가면을 쓰며 자신을 속여 숨기니 그 순간은 공포를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혼자일 때는 아니었다.
-또 놀자?
“힉! 들었죠? 들으셨죠? 여기 뭔가 있어요! 저거, 저, 저거!”
시엔이 미소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해피 드리머가 시엔이 보아도 참으로 강력하다 싶으니, 멀쩡한 것이 이상하다 싶더라니. 잘 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하루 더 놔두면 훨씬 협조적이 되겠네.
에블리가 연신 애원하며 간절한 눈빛을 쏘았다.
“꺼내, 꺼내 주세요, 절 데려가 주세요, 제발. 제발······.”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 보자고.”
<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