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2] >
에블리가 갈등했다.
순순히 잡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침투 후 인심을 얻는 단계가 아니었던가. 자는 시간 외에 후작저를 마구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일을 도왔다. 이후 그녀가 어디에서 무얼 하건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후작가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열성으로 일을 도운 셈이다.
그러니 일단 잡혀야겠다.
정체가 들켰을 리도 없거니와, 푸른 장미에서 배신자가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무언가 다른 오해가 있거나, 혹은 오해로 만들어야지.
“앗, 왜, 왜 이러세요? 저, 저는 아무것도…….”
에블리가 당황한 척을 했다.
그 사이에 기사들이 양팔을 붙드니 이제 어쩌냐는 듯이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일단 포박해.”
삽시간에 수갑과 족쇄를 찬 꼴이 되었다.
그러나 암살자가 능력이 없으면 이름을 떨치고 살아남았겠는가. 수갑을 푸는 일 정도야 마음먹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유증이 남아 그리 사용하고 싶은 수단은 아니나, 정 안되면 손뼈를 빼내 수갑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에블리가 가련한 모양으로 애원했다.
“도련님, 저는, 제가 무언가 잘못이라도.”
“흠. 이래서 되겠어? 밧줄 가져와.”
그러나 대공자가 대답 대신 밧줄을 청했다.
이내 하인이 후다닥 뛰어 가져온 밧줄을 손에 쥐고, 에블리의 손바닥과 손등을 칭칭 감아 단단히 매듭을 지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에블리의 허리에 밧줄을 감고, 뒤로 찬 수갑에 바짝 붙여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 나니. 어깨를 꿈틀거리는 일 외에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해도 속박을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제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 걸렸다 생각이 들었다. 겨우 일개 시녀를 이렇게 단단히 매어둘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공자가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이거 누가 들였어? 어디 출신이래?”
“이번에 새로 들인 아이입니다. 라우드란드 서쪽의 신힐이라는 촌락 출신입니다.”
“토박이라고?”
“촌락의 인명 대장에 신고된 바를 확인했습니다. 에블리 로즈 올해 스물일곱. 또한 촌락에 사람을 보내 그 외양을 확인한 결과 그 본인이라 확인했습니다.”
“흠.”
대공자가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궁리할 때에 하는 버릇인 듯, 그 품새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상한데. 신원 증명에 다녀온 이. 그리고 확인을 해 준 이들까지. 전부 잡아 와.”
“이 아이는 어쩌지요?”
“감옥에 넣어 둬. 엄중히 경계하도록.”
* * *
목욕을 마치고 만찬을 즐기니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가져온 머리들을 어떻게 할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식사 자리에서 무슨 소리냐는 카레네의 핀잔에 일단 광장에 쌓아두는 것으로 급히 마무리 지었다.
집무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높이 쌓인 것이 모두 처리해야 할 서류였다.
랭무튼 영지에서 팔자가 좋았으니 감내해야 할 것이리라. 그러한 생각으로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나, 사람 마음이 돌아오자마자 일을 하기엔 영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히 다른 생각이 들 수밖에.
암살자라.
기실 과거 강대한 흑마법사가 암살자를 맞이한 적은 몇 번 없었다. 천 년 전에는 흑마법사가 망령을 보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런 점도 있거니와, 제국의 총파괴에 암살자가 나설 일이 없었다. 청야 전술. 시엔보다 앞서 국토를 불태워 보급선을 완전히 끝장내 말려죽였으니.
암살자야 뭐 처형이나 하면 그만이고.
애초에 별 위협이 아니니 관심을 크게 가질 이유가 없다. 생각을 털어버린 시엔이 브로치를 풀어 손에 올려놓았다.
흑마법사의 눈에, 악령과 거기에 끌어안긴 망령 하나가 비쳤다.
-캬햐햐, 꺄하하하하.
여인의 정신나간 듯한 웃음소리. 해피 드리머가 망령 하나를 휘감아 연신 즐거운 듯 깔깔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해피 드리머에게 희롱당하여 괴로운 망령이 하나.
-으으······.
바라마엘 디스하스. 주인에게 충정을 다하니 궂은일과 부정한 일마저 기꺼이 해낸 이였다.
어찌 보면 훌륭한 기사라 하겠다.
죄 없는 이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베어내길 망설이지 않고, 그러한 행위를 뻔뻔하게도 감춰내던 사내.
그러한 모든 죄를 주인을 위해 지겠다 죽는 순간까지 담담하였으니, 그 영혼이 가진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걸 어쩐다······”
이대로 해피 드리머의 장난감으로 두어 줄곧 괴롭게 만들어 둘까. 강력한 충성과 신념도 오랜 고통 속에 남아나지 못하는 것이니, 최후에 이르러 그 빛을 잃고 어둠에 삼켜지리라.
그때에 음차원 에너지를 불어넣으면 새로운 악령이 탄생했다.
아니면 해피 드리머의 먹이로 던져줄 수도 있다. 격이 높은 영혼이니 해피 드리머가 먹어 더욱 강력한 능력을 가지게 되리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해피 드리머가 삼신기라 하여 희귀한 것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악령이 아니던가. 이때에 힘을 불어넣으면 어중간한 악령 하나보다 더 쓸모가 있으리라.
시엔이 브로치를 툭 두드렸다.
-히히······.
시엔의 허락을 얻은 해피 드리머가 바라마엘의 목덜미를 와그작 물었다. 목을 한 점. 손가락을 하나. 뒤이어 옆구리를 한입.
-끄으으······.
잔뜩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영혼째로 한입 한입 뜯어먹히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망령에 악령이 그저 기뻐하여 날뛸 뿐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해피 드리머가 이내 바라마엘의 영혼을 몽땅 집어삼켰다.
-아아. 아아아아.
무언가 반응이 있다.
시엔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화악. 브로치 바깥으로 해피 드리머가 쏟아져 나왔다. 제멋대로 현상 세계에 나온 악령이 허공에 떠올랐다.
반투명한 외양에 창백한 빛이나 색이 돌아왔다. 시퍼런 귀화가 흩날리며 모여드니 화려한 드레스가 되어 해피 드리머를 감쌌다.
해피 드리머의 몸뚱이가 점차 줄어들었다.
성장을 역행하는 듯, 주름이 펴지고 몸이 줄어드니 어느새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소녀의 형상을 갖추고 섰다.
소녀가 눈을 떴다. 미숙한 손길로 그린 화장이 지나치니 눈가가 온통 시커먼 꼴이었다.
소녀의 모습으로 화한 해피 드리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입이 귀 아래까지 찢어지며, 그 속에 흉악한 삼각의 이빨이 잘 맞물려 반짝거렸다.
품에 안긴 인형이 꿈틀거렸다. 얼기설기 만들어진 재봉 인형이나, 그 얼굴만은 사람의 것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그간 악령이 삼킨 망령들이었다.
“호오. 이건 처음 보는 건데.”
악령의 존재가 단숨에 격을 뛰어넘었다.
이전에 버닝 신이 소드마스터를 집어삼켰으나, 녀석이 실상 정신이 병들어 격 자체는 아주 높다 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라마엘의 망령은 달랐다.
살아서 해피 드리머의 정신 공격을 내색하지 않고 버텨낼 정도의 정신력을 가지고, 오명을 뒤집어써 후대에 길이길이 개자식이 됨을 알면서도 죽음을 자청했다.
그 정도로 강인한 영혼이었으니, 해피 드리머의 극적인 성장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데 네가 뭘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분명 이전보다 많은 일이 가능할 터인데.”
해피 드리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엔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마침 지하에 네가 좋아할 만한 죄인이 있구나. 가서 마음껏 괴롭히려무나.”
-히히.
해피 드리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실 그저 휙 날아가도 되는 것을. 굳이 바닥에 스미듯 내려앉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악령 나름대로의 애교이리라.
* * *
자울 미느승은 천문관이나, 창공탑에 적을 두지 않았다. 미등록 마법사였다.
그의 스승은 한때 창공탑에 적을 두고 자연과 기상을 연구했다. 그러나 창공탑의 내부가 이미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연구와 성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창공탑의 직위들이 출신과 스승을 따져 제 파벌을 끌어다 앉히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위에 앉은 것들이 재능 있는 후배를 보아 함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하여 방해하고 연구를 가로채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참된 선배를 멍청하고 바보 같다 손가락질하는 수준이니. 이미 마탑이라 부르기 민망한 지경에 이르렀다.
스승이 탑을 떠나 연구를 완성하니, 매질 속 소리의 전달에 대한 것이었다.
소리의 파형을 마력으로 전환한 후에 인간 불가청 영역의 안정된 기파로 재전환하는 마법이었다.
장애물을 초월하여 넓은 범위에 전송하니, 마법척 처리를 통해 재변환하면 먼 곳의 소리를 손실 없이 전달이 가능했다.
스승의 마법이 지금의 푸른 장미를 만들었다. 스승이 개발한 초기의 송수신 장치는 암살에 있어 최고의 도구였으니까.
내부의 침투자와 바깥의 조력자, 그리고 본단의 장미들과 자유롭게 소통하여 상황을 주고받았다.
그러한 과정으로 안밖으로 완벽한 준비가 만들어졌다. 변수에 대처하기가 쉬웠다.
대륙에 악명을 떨치면서도 꼬리가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암살이 가능한 이유였다.
자울이 스승의 연구를 이어받은 지가 벌써 사십여 년이니, 그간 개량에 개량을 반복하여 겨우 몇 캐럿에 지나지 않는 보석에 마법을 새겨 송수신 장치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렀다.
[저거 잡아. 제압해.]
에블리의 송수신기에서 들려온 소리에, 자울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상한데. 신원 증명에 다녀온 이. 그리고 확인을 해 준 이들까지. 전부 잡아 와.]
자울이 급히 송신기를 조작했다.
“젠장, 여기는 장미 셋. 장미 셋. 장미 하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장미 둘의 지원 요청한다. 다시 한 번 전달한다. 장미 둘의 지원 요청한다.”
[장미 둘. 송신. 무슨 문제인가?]
“목표에게 꼬리를 잡혔다. 현재 신원 증명 인원 수배 중이다.”
[수배 규모는 어떠한가.]
“증언자 모두를 소환할 셈으로 보인다.”
[지원 불가. 평범한 촌놈들에게 황금을 아무리 쏟아봐야, 결국 영주의 권위 아래 실토를 하고 말 것이다.]
에블리 로즈의 신원을 사는데 많은 황금이 들었다. 적당한 촌락을 잡아 전체를 매수하여, 에블리 로즈라는 인물을 장미 하나와 바꿔치기했다.
후작가의 하인을 뽑는 일이라 그 정도 신원 확인이 기본이니, 신원을 증명하는 모든 이를 매수하고 나면 가짜가 진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입을 막을 수는 없나?”
[불가. 이전 상단 사건에서, 목표는 영민에게 큰 집착을 보였다. 촌것들을 제거해도 장미 하나의 의심이 풀릴 것이라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제거한 후 큰 화를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제길, 그럼 이대로 놔두자고?”
[침착하라, 장미 셋. 장미 하나는 최고의 현장 요원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능력이 있다.]
“큭.”
자울이 입을 다물었다.
에블리는 자울의 양녀였다.
과거 마적이 쓸고 지나간 마을에서, 우물 속 제 부모의 시체를 뜯어먹으며 살아남은 아이를 거두었다. 이후, 독하고 잔인하며 피를 보는 것을 즐기는 최고의 암살자가 탄생했다.
그렇다 해도 자울에게는 세상 하나뿐인 딸이었다.
[침착하라. 장미 셋. 같은 경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모든 경우에서 장미 하나가 손상 없이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젠장.”
결국 알아서 할 테니 놔두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에블리가 알아서 잘하기도 했으니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울이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혹여 무슨 고초를 겪는 것은 아닌지.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에블리의 속삭임이 자울의 귓가를 두드렸다.
[아빠. 나 좀 큰일 난 것 같은데.]
자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니! 지금 어디니? 다친 데는 없고? 무슨 몹쓸 짓이라도······”
[그런 건 아니고. 포박된 채로 지하 감옥에 갇혔어. 그런데 이거 포박이. 못 풀겠네.]
“못 풀다니, 네가 못 푸는 포박이.”
[몰라. 처음 묶이는 방식인데, 아예 어떤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 어떻게 해? 이대로 모르는 척 연기를 계속하면 돼? 신원 증명을 다시 하려는 모양인데.]
“자력 탈출이 안 된다는 거지? 신원 증명을 막을 방법이 없대. 구출대를 조직할 테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겠니?”
[몰라. 사방이 캄캄해서 보이는 게 없어. 뭔가 지하로 끌려오긴 했는데, 창도 없고. 철문이 엄청나게 두꺼웠어. 틈이 하나도 없으니 그냥 세상이 암흑뿐이야.]
“세상에. 너 괜찮니?”
[아빠는. 아직도 내가 애야? 어둠이야 한참 전에 극복했어. 그런데 온통 캄캄하니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전혀 모르겠네. 내가 얼마만에 연락한 거야?]
“그게.”
[쉿, 잠깐. 누군가 있어. 잠깐 끌께.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나요? 응? 안녕하세요. 어. 음. 아가씨라 불러드려야 하나요? 이런 곳엔 어쩐.]
송신이 끊겼다.
자울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스승이 살아계셨을 적엔 당장 회초리가 날아들던 경박한 버릇이었다.
버릇이란 녀석이 으레 그렇듯, 고쳤다고 생각했으나 초초해지자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다행히, 송신이 금방 이어졌다.
[아빠. 음. 얘는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아. 하긴 이런 암흑 천지에 있으면야. 나처럼 훈련받지 않았으면 정신 놓기 딱 좋지.]
“괜찮아? 해코지라도 당하면.”
[아냐. 열여섯? 열일곱? 그쯤 되는 여자애야. 오래 갇혀있었나? 피부가 완전 창백해. 그래도 참 곱네. 햇빛을 안 쬐서 그런가? 나도 임무 없을 때 암실에 좀 들어갈까 봐.]
“피부가 창백하다고?”
[응. 핏기가 하나도 없어. 좀 징그러울 정도인데. 그것만 빼면 예쁘장한 계집앤데.]
싸악. 피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울이 파랗게 질린 낯으로 되물었다.
“암실······ 이라며? 보이는 게 없다면서?”
[응. 빛줄기 하나도 없네.]
“너, 그런데 그 애가 창백한지 어, 어떻게 알았니?”
[응? 그야 딱 보면. 어?]
그때였다.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터져나온 거대한 성량의 광소.
자울이 놀라 손에 든 송수신기를 떨궜다.
<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