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1] >
삶의 순간순간, 비참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사들인 물건이, 정작 상대방에겐 사소한 것에 불과했을 때 역시 그러한 순간 중 하나였다.
물건이 아니라 행동이라 해도 마찬가지.
랭무튼 백작이 느낀 비참함이 어떠하랴.
전 왕국에 추태를 널리 알렸으며, 가장 아끼고 신뢰하던 기사를 제 손으로 베어내고, 군인 사백을 죄인으로 처형했다.
군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군대를 키우는 데에 걸리는 시간, 그리고 막대한 양의 황금이 대체 얼마이던가. 그것들이 전부 처치 곤란한 고깃덩이로 탈바꿈했다.
정작 그렇게 움직인 시엔은 걸어나가 대적과 노려보고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대적이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며 줄행랑을 놓았다.
명예 성자에게 대적을 쫓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대적이 나타난 것이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대적이 참으로 사정 좋은 때에 나타났으니 오히려 티란디스의 대공자를 도운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심증만으로 어떤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문을 흘려볼 수는 있겠지만, 시엔이 워낙에 민심을 가진 인물이라 통하지 않을 수법이었다.
그 끔찍하고 부정한 것조차 감히 대적하지 못하는 광휘의 주인이시다. 성흔을 앞으로 내미니 거인이 땅을 헤엄쳐 겨우 도망쳤다더라. 과연 교단에서 증명한 성자이시다.
성자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영지가 어떤 꼴이 되었을지. 참으로 다행이며 은혜가 아니겠는가.
영민들이 모여서 떠드는 것이 시엔의 칭송이었으니 영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영민들이 모여서 떠드는 이야기가 시엔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군인이 도적질이라니. 세상에.”
“하긴, 군인 놈들이 패악을 부리는 것이 하루이틀이에요?”
“이번에야 걸렸으니 이 꼴이지, 안 걸리고 넘어간 건이 없겠어?”
군인은 특권 계층이었다. 영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니, 그 봉급에서부터 면책에 이르기까지 그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그러니 본디 영민들과 마찰이 잦았다.
이러한 때에 한 개 대대 전체가 작당하여 도적질을 하고 또 그를 이끈 것이 영지 제일의 기사라 칭송받던 이가 아니던가.
“게다가 디스하스 경이 주도하기까지 해서.”
“경은 무슨. 바라마엘 놈이지.”
“이거 불안해서 살겠나.”
군대와 기사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이 또한 랭무튼이 잃어버린 것이었다.
랭무튼 백작이 이를 갈 수밖에는 없는 이유였다.
티란디스라 하면 이제 얼굴이 먼저 화끈거렸다. 덩달아 일을 사주한 흐레이그도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속이 터지는 일은, 양쪽 모두에게 이빨을 들이밀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티란디스에겐 밖으로 알려지기가 그 상단을 상하게 한 주체가 변졀한 랭무튼의 군인들이며, 오히려 명예 성자에게 은혜를 입은 꼴이었다.
대적은 떠났으나 오염된 땅은 그대로이니, 군대까지 대거 잃고 난 지금 흐레이그를 적대할수도 없다. 오히려 더욱 따르며 수족을 자처해야 추후 이만한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랭무튼 백작이 뒷목을 잡았다.
목 근육이 돌덩처리처럼 굳고, 머리 속이 죄어 두뇌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이 아찔하기만 했다.
화병이라 불리는 증상이었다.
“후우. 후우.”
랭무튼 백작이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버텨야 했다. 영지가 이처럼 잃은 것이 많을 때일수록 그 주인이 굳건히 서야 하는 법이니까.
똑똑.
이 때에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문을 여니, 흐레이그에서 전한 서신이라 하인이 공손히 두고 떠났다.
“빌어먹을 흐레이그.”
랭무튼 백작이 봉인을 풀었다.
「친애하는 랭무튼 백작 귀하
요 근래 전해 들은 영지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또한 어려운 때에 큰일을 겪으시어 심려가 크실 때니, 그저 마음에 그치는 위로가 아니라 영지 운영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곧 수송대가 출발할 것입니다.
흐레이그와 랭무튼이 오랫동안 이웃으로 화목하였으니,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할 뿐이니 백작께서는 저어하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오냐. 당연히 받아야지.”
흐레이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즉각 유감을 표시하고 나섰다. 왕국의 제후급 귀족으로서 제 아래 속한 가신을 관리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의 배후가 누구던가.
작위의 승격을 거론하며 꼬드긴 것이 누구인데.
그러면서 뒤로는 물자를 보내겠다 하니, 일단 받아두고 입을 다물라 하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흐레이그에 빚을 하나 지워둔 셈이라 영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흠. 잠시 물러나 있거라.”
“예, 백작님.”
랭무튼 백작이 하인을 물렸다.
하인들이 전부 물러나고 나서야 랭무튼 백작이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편지칼을 사용해 접착 부위를 살살 긁어낸 후, 봉투를 온전한 모양으로 펼쳤다.
그러자 그 안쪽에 든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푸른 장미의 가시가 이미 침투하여 독을 품었습니다.」
푸른 장미.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암살자였다.
암살자란 그 이름이 높아질수록 살아있기 힘든 이들이었다. 대륙에 이름을 떨칠 정도라면 그 실력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빌어먹을 티란디스 놈 같으니.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나대더니.”
랭무튼 백작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이 정도면 흐레이그에서도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그 암살자를 쓰는 데에, 선금으로만 한 개 성채를 쌓을 황금을 요구로 한다던가. 애초에 그만한 금력과 힘을 갖춘 이가 아니라면 선이 닿을 수 없는 그런 수단이었다.
“티란디스에 초상이 나면 그때 조문 정도는 해줘야겠군.”
크흐흐. 백작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 * *
티란디스의 귀환 행렬.
이제 후작령까지도 하루가 남았을 뿐이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티란디스령 인근에 이르렀다. 티란디스 근방의 영주들은, 지금은 중립이라 해도 한때는 티란디스의 가신과 같았다.
후작의 행사는 담백했다.
파벌의 귀족들에게 베풀지언정 요구하지 않는 편이었다. 당연히 지금 왕국의 정세가 티란디스에게 불리하다 해도 돈독한 이웃이었던 이들. 선뜻 귀빈의 숙소를 내어주는 것이 당연했다.
귀빈의 숙소라 오히려 도둑이 드는 법이 없으니, 창고의 경계는 허술한 편이었다.
시엔이 밤바람을 쇠러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사실 밤산책에 취미는 없으나, 시엔의 피보호자가 오늘따라 간식을 내놓으라 유난을 떨지 않겠는가.
그렇게 밖으로 나온 시엔이 창고로 들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지금 안에 든 것이 티란디스의 재산이었다.
베른닐이 검손잡이를 붙잡았다.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니.”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는 뒷모습 같은데.”
“뭐 해? 안 가고.”
파린이 손으로 붙든 시엔의 소매를 흔들며 보챘다. 도시에 들어오며 도마뱀을 구워 파는 것을 보았는데, 궁금하니 기어코 먹어보겠다며 생떼를 써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잠깐 확인 좀 해 보고.”
“뭘 확인해? 그 인간이잖아.”
“그 인간?”
“그러니까. 그 인간. 그러니까. 그 둥글둥글한 늙은 인간 있잖아. 약해빠졌고. 늙었고. 어. 그러니까.”
어린 용은 인간의 이름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시엔 옆에 붙어 계속해서 듣는 것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던가.
이쯤이면 한둘은 기억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으니 기실 타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시엔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일행 중에 일단 늙은이고. 둥글둥글하다니 살집이 있는 인물일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해당하는 이가 딱 한 명뿐이었다.
“엠파스툰.”
창고 안에 짐마차가 들었으며, 거기에 가득 실린 것이 사람의 머리였다. 시엔의 영민을 살해한 머리들을 시엔의 땅에 효수하기 위해서였다.
엠파스툰이 제 자식을 잃었다. 어떠한 심정으로 원수의 머리를 둔 곳을 찾는지, 시엔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뭐 해? 빨리 가자.”
파린이 재차 소매를 잡아당겼다.
“뭐. 가지.”
“괜찮겠습니까?”
“별일 있겠어?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려보지 뭐.”
* * *
도마뱀 꼬치는 닭과 오리의 중간쯤 되는 맛이 났다. 살코기가 그러한 것이고, 정작 고기는 얼마 안 붙고 뼈만 잔뜩이었다. 뼈는 씹어먹을 수 있기는 하나 식감이 썩 좋지 않았다.
파린이 다리 하나를 떼어먹곤, 바로 시엔에게 꼬치를 넘겼다. 시엔이 남은 다리 중 하나를 떼어먹고 나서, 항상 고생하는 호위 기사를 위해 양보했다.
돌아와 누렁이에게 파린을 떠넘기고 혹시나 해서 창고에 들렀더니, 늙은 상인이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엠파스툰?”
“아. 대공자님. 어쩐 일이십니까?”
“잠깐 짐 중에 찾을 것이 있네요. 엠파스툰은 어쩐 일인가요?”
“······잠이 안 오니 잠시 들렀습니다. 원수가 썩어가는 냄새란 의외로 맡을 만하다 생각이 드는군요.”
“괜찮나요?”
“괜찮아야 합니다.”
엠파스툰이 말했다.
“자식이 일곱인데 개중 가장 아둔한 놈이 페이르 녀석이었습니다. 셈도 느리고 눈치도 모자라, 상인으로 아무리 노력하든 거상은 못 될 그러한 녀석이었지요. 사실 상행을 이끌만한 자질이 못 되는 놈인데. 그래도 자식이니 먹고 살 방도나 하라 끼워 넣은 것입니다.”
“부정을 고백이라도 할 셈인가요?”
시엔이 부러 농을 던졌다.
엠파스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상단을 이끌며 티란디스를 모신 것이 일평생인데 그 정도를 부정이라 하실 셈입니까?”
“뭐. 그도 그렇네요.”
“덕분에 자식을 사지로 몬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 좀체 잠이 오질 않는군요. 그래서 기분 전환이나 할까 나온 참입니다.”
분위기가 다시 애매해졌다.
그러자 엠파스툰이 다시 말했다.
“저는 상인입니다, 대공자님. 큰 상인은 손해를 입어도 마음이 상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손절은 상인의 미덕입니다. 아직 일곱 자식 중 여섯이 남았으니, 잃은 것에 가슴 아파 앓기보단 남은 것을 보다 보듬고자 합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질 않지만요.”
그리 마음먹었다면 여기에 기웃거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엠파스툰이 대답했다.
“대공자님께서 그 원수를 모두 찾아 이리 한데 모아두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상단의 무장을 해제하여도 감히 건드는 치가 없을 터이니, 다른 자식의 안전을 찾아 주신 셈입니다.”
“저야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귀족의 행사가 상인과 다르지 않음을 압니다. 제 자식의 죽음으로 다른 이득을 취하셨다 해도, 이후로 상단을 건들 이가 없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엠파스툰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엠파스툰의 시선이 따뜻하니, 머쓱해진 시엔이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핏값은 피로 치러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대공자님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까지만 조금 가슴 아프고자 하니 이 늙은이는 없는 셈 치시지요. 그나저나, 찾을 물건이 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머리 중 기사였던 것을 좀 보려는 참이었네요.”
“머리 중 특별히 붉은 천으로 싼 것이 그 치의 것입니다. 함께 찾아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밤중에 머리를 헤집어 하나를 찾았다. 시엔이 천째 들어 옆구리에 끼니, 엠파스툰이 물었다.
“머리는 어디에 쓰려 하십니까?”
“엠파스툰만 알고 있어요. 영혼도 그 쓰임새가 있는 법이라, 개중 뛰어난 것은 여러모로 쓸 데가 있네요.”
엠파스툰이 멈칫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쓰겠다는 것이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성자라는 이가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에 쓰느냐는 물음 대신, 늙은 상인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청할 뿐이었다.
“부디 죽어서도 고통받게 해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거든.”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푸른 장미. 현 대륙에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악명 높은 이름이었다.
본디 암살자란 세력을 가진 이가 알아서 만들어 쓰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암살이란 실패해도 죽고, 성공해도 결국 암살자가 죽을 수밖에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잡아 특정한 행위로 세뇌하거나, 혹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임무를 완수할 충정을 새기거나.
푸른 장미의 악명이 높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암살자가 임무를 완수하나 잡히지 아니하고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임무를 맡아 사람을 죽이기를 반복, 그것이 계속되니 자연히 명성이 높아지고 세상에 소문이 돌았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최강 최악의 암살자.
그러나 기실 푸른 장미란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고도화된 집단이었다.
에블리 로즈는 그 일원이었다.
하인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피고, 인간관계를 조성하여 사람을 조종하고 움직이게 하니 교모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수법은, 암살 대상을 직접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빈틈이 보이면 직접 처리하고, 사건이 일어난 이후엔 이미 빈틈없는 무고의 증거를 마련한 이후. 조사에서 유유히 빠져나갔다.
후작저에 시녀로 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푸른 장미에겐 넘치는 황금이 있었고, 그를 통해 영지의 토박이로 위장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으니까.
‘시엔 샤인 티란디스라.’
이번 목표는 자그마치 명예 성자였다.
푸른 장미가 명예 성자를 암살했다 소문이 퍼지다면, 그 악명은 지금까지의 것보다 훨씬 커다란 것이리라.
물론 교단에서 눈에 불을 켜겠지만, 원한이 두려웠다면 암살자가 되지도 않았다.
“에블리? 라운드에 커튼을 쳐야 하는데, 혹시 경험이 있니? 주인님께서 곧 돌아오실 텐데, 바로 만찬에 드실 터라 일손이 달리는구나.”
“예, 물론이에요, 집사장님. 맡겨만 주세요.”
대답하는 에블리의 웃음이 상냥했다.
후작저에 시녀로 든 지가 벌써 일주일이었다.
매사에 열심이며 진심으로 웃는 낯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다. 누구에게나 상냥하여 제 할 소임을 마쳤음에도 다른 하인의 일을 자청하여 돕고, 그러면서도 일머리가 뛰어나 뭐든 척척 해내는, 젊은데 야무지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아이.
에블리가 후작저에서 받는 평가였다.
남자 하인들에게는 머리가 세 개 달렸다며 다른 일면으로도 인기가 치솟는 중이었고.
그렇게 바쁜 때에 바쁘게 일하여 시간을 보내니, 마침내 암살 대상이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답다기보단, 선이 얇은 얼굴이 여리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엔 어딘가 얄미운 듯한, 기본적으로 냉소가 자리 잡은 그런 청년.
그런데 옆에 낀 꼬마는 또 뭐야? 아들인가? 눈 색도 머리색도 다르나, 그 분위기가 완전히 빼다 박은 꼴이었다.
그러나 뭐. 암살 대상이 아니니 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겠고.
아무리 고급 마차라도 오랜 여정에 피곤한 말도 하건만, 오랜만에 돌아와 그저 그뿐 다른 내색이 없었다. 생김과는 다르게 상당히 강인한 인물일 확률이 높겠지.
에블리가 시엔의 뒤를 훑었다.
얼굴에 빛이 나는 듯한 미남이 한 명. 차림새를 보니 호위 기사인 모양. 베른닐이라는 기사의 미모에 대해 하녀들이 떠드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아마 그 본인인 모양.
그리고 전속 하녀가 둘. 둘 모두 미모가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인계를 고려해도 좋겠네. 하나라면 모를까 미인 둘을 거느렸으니, 미인 셋이 되기는 쉬우리라.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도련님보단 호위 기사가 내 취향인데. 치정의 끝에 제 주군을 찌른 기사라는 그림은 어떨까. 듣자하니 기사가 제대로 된 인물은 아니라는데 잘 흔들면.
에블리의 머리에 판단과 수단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대륙에 명성을 날린다는 것이 보통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법이었다.
그리고 늙은이가 하나. 이런.
에블리가 저도 모르게 돋아나는 소름을 애써 진정시켰다.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에블리는 눈으로 보아 사람의 그 속이 대충이나마 들여다보았다. 달리 설명할 데 없는 타고난 감각이었다.
간혹 저러한 유형이 있었다.
맹종. 인간보다는 사냥개 혹은 꼭두각시 인형에 가까운 치들. 제 주인의 명령을 절대적인 진리로 따르며 수행하는 부류였다.
‘늙은이는 조심해야겠네.’
에블리가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에블리가 시엔과 눈이 마주쳤다. 성자의 무심한 눈빛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옳지. 반응이 있네.’
에블리가 미소를 지었다. 예쁜 미소였다.
수만번을 더 연습하여 만든 완벽한 미소. 수줍음과 반가움이 가득 담긴 그러한 깨끗한 웃음이었다.
시엔이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언제 저를 보았다고 수줍은 듯 해사한 미소를 짓는지. 그러나 저택의 행사가 허술한 것은 아니니 내 영민이라 오다가다 보았을 수도 있고.
그것까지는 좋다 치더라도.
-저주한다! 저주해! 저우우!
-죽어죽어죽어죽어······
-네 살점을 기필코 씹어먹으리라. 뼈를 삶아 부수어 먹으리라. 골수 하나 핏방울 하나 모조리 갈아 마셔 세상에 그저 오물로 바꿔 내놓으리라!
멀쩡한 외양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수의 망령이 매달려 저주와 원망을 퍼부었다. 시엔이 보기에 당연히 눈길이 갈 수밖에.
무엇보다 개중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
-빌어먹을 암살자 년! 찢어 죽이겠다! 내 기필코 찢어 죽이고 말겠다!
시엔이 손가락을 들어 여인을 가리켰다.
“저거 붙잡아. 제압해.”
<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