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6] >
시엔이 눈을 부비며 생각했다.
아. 잠이 늘어서 큰일이네.
실제로 재림 후의 삶을 살면서 자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특히나 낮잠의 달콤함을 깨닫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랭무튼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엔이 얼마나 단잠을 자고 있었는지 피부는 반들반들 윤이 나고, 머리는 헝클어져 기이한 조형을 갖췄다. 눈을 비비며 눈곱을 바깥으로 살살 밀어내니, 부모 앞에서도 하지 않을 버르장머리 없는 모양새가 아니던가.
“어흠.”
“아. 백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시엔 샤인 티란디스입니다. 거처가 많이 누추하지만, 음?”
시엔이 지내고 있는 천막이 랭무튼의 재산이었다. 사실 시엔이 손님이고 백작이 주인인 셈이라, 그것이 누추하다 하면 예의인가 아니인가. 시엔이 잠시 갈등했다.
자다 일어났더니 머리가 덜 도나?
“뭐.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크흠.”
랭무튼 백작이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편하게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으니 어차피 잘 된 일이었다. 흐아아아. 시엔이 내친김에 하품마저 푸지게 뱉어낸 후,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어쩐 연유이십니까? 도착한 지 오래인 손님을 이제야 맞이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실 텐데.”
영지에 발을 디딘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얼굴을 내미냐는 뜻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착한 지 오래인 손님이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않았지.”
백작이 응수했다. 그 말도 맞았다. 원래는 자에바 일행과 함께 먼저 백작을 찾는 것이 예의가 아니었던가. 백작의 말이 그러한 뜻이었다.
“찾고자 해도 이 산중에서 나갈 수 없는 몸이라 그리 되었습니다.”
“······내 이해하겠네.”
“이해라.”
시엔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낮잠이 개운하기가 쉽지 않은데, 순진무구의 의사 놀이 이후엔 눈만 감으면 자고 일어나면 개운했다.
“좋습니다. 백작님께선 대화를 하고자 하시는군요. 누구는 영 말이 통하질 않아서.”
“당신!”
“당신은 너무 가신다니까 그러네.”
시엔이 자에바의 으르렁거림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이내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하니 날카로운 눈빛이 백작을 향했다.
“먼저. 백작님께 여쭤야겠습니다. 무엇을 약속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귀족가의 행사에 이유가 없는 법이 없으니. 허나. 무리한 행사라는 점은 알고 계셨겠지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평범한 상단이 아니었습니다. 호위에 붙은 용병이 사십에, 일꾼 중 절반을 군인으로 채워넣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상사를 막고자 여러 번의 훈련을 마쳤습니다. 실상, 고도로 훈련된 병력으로 방어를 갖춘 상단이었습니다만.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유감을 표하는 바이네.”
“모르는 척을 하시겠습니까?”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세상에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이러한 습격이 도적의 소행이라 믿는 이가 있겠습니까?”
시엔의 말이 맞았다.
또한, 백작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상단의 규모를 확인했을 때에, 이미 증거가 없다 우기는 수 이외에 자연스레 처리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게다가 애초에 습격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티란디스가 왕실에 반항하여 뻗대고 있으니 그 경고를 전하기 위함이라.
노회한 백작이 모른 척을 했다.
“그렇기에 더욱 엄중히 조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나.”
“엄중한 조사라. 그럼에도 영애께선 계속 조사를 방해하시더군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후로 티란디스의 조사에 어떤 간섭도 없도록 하지.”
“꼬리를 다 잘랐습니까? 이런. 그럼 이건 이제 필요가 없겠군요.”
시엔이 침상 아래의 가방을 풀어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병 안에 사람의 머리를 넣고 액체를 채운 것이었다.
시엔이 병을 놓았다.
쨍그랑. 유리가 튀고 보존액이 사방으로 번졌다. 머리가 땅 위에 놓이고, 시엔의 발바닥이 그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제 영민이 목숨을 걸고 수집한 증거이나 이제는 못 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퍽. 시엔의 신체가 이미 사람을 초월했기에, 머리가 박살이 나 그 내용물이 땅에 흩어졌다.
사람의 머리를 발로 부수어 짓뭉갰으니 그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랴.
“웁.”
자에바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엔이 발을 들어 신발의 밑창을 확인하곤, 빈 땅을 찾아 비비며 묻은 것을 닦아냈다.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이러한 인물이 명예 성자라고?
세간의 평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밟아 부수어 꺼리는 기색이 없고 그 행동이 자연스럽다. 사람이 일부러 행동하려 해도 그 성정이 맞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않은 법이거늘.
파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더럽게. 냄새도 나잖아.”
“나중에 누렁이보고 치우라 하지 뭐.”
시엔이 남은 잔해를 발로 슥슥 밀었다.
파린이 마뜩찮은 눈길을 던지다 이내 이불을 뒤집어썼다. 시엔이 킬킬대다 다시 자리에 앉아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님. 귀족에겐 귀족의 방식이 있는 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티란디스가 영민을 잃었으니, 그만한 것을 얻을 기회임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백작이 직접 온 이유가 이러한 것이리라.
이제 백작이 불리한 판이 되었다. 그러니 불미스러운 일은 대충 봉합하고 그만한 보상을 논의해 보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잃은 영민을 다른 것으로 보상받아 채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죄를 공표하고, 직접 칼을 휘두른 모든 머리를 분리하여 건네주십시오. 대충 사백 개쯤 되겠군요. 마법사의 머리가 하나, 기사의 머리도 하나는 있어야 할 겁니다.”
“자네는.”
“사백 개가 너무 많다 생각하시면, 하나로 대신하여도 좋습니다. 아래에 둔 삶들의 잘못을 귀족이 대신하는 것이니, 이 참사의 사주가 결국 백작님 혹은, 보아하니 영애께서 관여하셨겠군요.”
습격에 관여한 모든 이를 처형하라. 아니면 그 죄를 짊어지고 백작 본인의 머리를 내놓으시던가. 아쉬우면 딸의 머리도 좋다.
백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아쉬워도 참을 수 있는 선이 있는 법이었다. 백작의 표정이 사나웠다.
“보아하니 영민하고, 또한 잔혹할 줄 아니 좋은 영주가 되겠어. 그러나 아직 젊어. 사지에 와 있음을 모르는 겐가?”
“사지라 말씀하시니 좀 그렇군요. 누가 들으면 위해를 가하겠다는 협박으로 알겠습니다.”
“정세를 읽게. 이 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 한들, 무언가 바뀌는 것이 있다 생각하나?”
이미 왕세자가 정해졌으니 1왕자파의 세력이 분해되었다. 흐레이그가 왕국 제일의 위세를 자랑하며, 또한 이 근방이 전부 그를 따르는 지역이었다.
이 자리에서 독심을 품고 시엔 일행을 처치하더라도, 먼 위치에 있는 티란디스가 무엇을 도모할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
그러한 협박이었다.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작께서 영지를 살리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까? 밖에는 대적이 돌아다니며 땅을 죽이고, 안으로는 도적으로 민심이 사나운 와중에 명예 성자가 불미스러운 일로 사라졌다. 귀족 가문 하나는 확실히 사라지게 되겠군요. 같이 죽자 하십니까?”
“자네가 날 궁지로 몰아넣지만 않으면 같이 살 방도도 있겠지.”
“이젠 속을 숨기지도 않으시는군요.”
시엔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음차원 에너지가 움직이고, 시엔의 의지가 악령을 깨웠다. 쉐도우 스토커. 주인의 그림자 속에 깃들어 따르는 악령이었다.
“억!”
바라마엘이 제 발을 움켜쥐었다.
기사가 신은 군화의 바닥과 윗부분에 구멍이 나 선혈이 흘렀다. 가시가 빠르게 흩어지니 바라마엘의 발에 구멍이 뚫려도 누구도 어떤 수법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작이 노성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시엔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라마엘의 발에 구멍이 났다. 누가 한 짓인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녕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노옴!”
“기사가 지병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갑자기 피가 흐르니 당황스러울 따름입니다. 아. 혹여 제가 한 짓이라 여기십니까? 혹시 증거라도 가지고 있으십니까?”
“너, 감히, 네놈이.”
백작이 뒷목을 부여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엔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아, 그런데. 불미스러운 일이라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어떤 귀족이 제 살길도 없이 아무 데나 발길을 들이겠습니까?”
할 테면 해봐라.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혈압이 오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기사께서는 빨리 신관을 찾는 편이 좋겠군요. 피를 보았으니 대화를 계속할 분위기는 아닌 듯합니다. 백작님께서는 빨리 용단을 내려주시지요. 그게 어떤 결정이건 간에 말입니다.”
시엔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바라마엘, 발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힘줄과 뼈가 상하지 않았다 하더군요. 바로 치료받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발에는 살점보다 뼈와 힘줄이 더 붙었다. 뼈와 힘줄을 피해 찔렀다는 것은, 상해를 가할 의도는 없으나 이 정도의 수단을 갖췄다 밝힌 것이었다.
“일이 고약하게 되었어.”
백작이 혀를 찼다.
협상은 없다. 죄를 공표하고 범인의 목을 베어라. 티란디스 대공자의 뜻은 명확했다.
그렇다고 협박이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기사의 발에 아무도 모르게 구멍을 낼 수 있었을까. 그게 굳이 발이 아니었을 수도, 그 대상이 굳이 기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사지에 있음을 모르느냐 협박을 했지만, 실상 천막 안에서 사지에 든 이는 대공자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방도가 없구나.”
“아버지!”
“방도가 없어. 이 시간에도 우리의 땅이 상하고 있단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땅이, 네게 물려주어야 할 땅이 시커멓게 썩어들어 가는 중이니.”
“하지만.”
“3대대는······ 처형한다.”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고 가주가 목을 내놓을 수도 없고, 다른 딸도 아닌 자에바의 목을 칠 수도 없다.
애초에 바른 영주가 서야 영지가 발전하는 것이니, 백작은 아직 할 일이 많았으며 자에바는 뒤를 이을 귀중한 손이었다.
“꼭 대대를 처형할 필요는 없잖아요. 목이 사백 개라 했으니 숫자만 맞춰 주면. 빈민이라던가.”
“이미 증거가 필요 없는 판이다. 허어. 너무 욕심을 부린 게지. 애초에 우리가 꾸인 일임을 왕국 귀족 누구라도 모르는 이가 있겠느냐? 놈이 납득하지 못하면 숫자가 맞더라도 움직이지 않을 터이니.”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대를 처형해야겠지. 사사로이 이득을 탐하여 멋대로 작전을 이탈하고 무고한 상단을 습격하였다는 죄목이면 될 것이다.”
책임을 쥐고 그 주인이 목을 내놓던가, 아니면 모든 범인을 처형하라 했던가.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 주인의 책임을 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기사의 목은, 하아. 어쩔 수 없구나. 바라마엘, 기사단의 하위 서열에서 한 명을 뽑아 주게나. 그의 남은 가족은 내 작위를 걸고 평온한 삶을 약속하겠네. 그의 아내며 부모, 자식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도록 대우하여 줄 것이니.”
군대의 머리를 원한다면 어차피 일을 도모한 대대를 넘겨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사마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당장 관여한 이가 바라마엘 디스하스 경, 영지 최고의 기사이자 최고의 부관인 인재 중 인재가 아니던가.
그러하니 다른 기사에게 죄목을 씌워 넘겨줄 수밖에는.
그러자 바라마엘이 대답했다.
“백작님. 다른 기사를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제 목을 베어주십시오.”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자네를 어찌 잃을 수가 있겠나. 내 절대 그럴 수는.”
“대공자가 이미 저를 범인이라 확신합니다.”
“하나 증거가 없지 않는가.”
“그간 대공자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건 이미 범인을 확정하여 알고 있습니다. 첩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명예 성자라 하여 어떤 미지의 능력이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안 되네. 다른 이도 아니고 자네를.”
“영주님. 매일 밤으로 잠이 들면, 그때의 날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깨지 않는 꿈입니다. 수천 번을 계속하여 무고한 이를 베어 겨우 아침이 오기를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바라마엘이 담담히 고했다.
무엇보다 죄. 죄가 노기사의 발목을 붙들었다. 눈을 감아 꿈에 나타나는 것이 온통 그때의 그 장소였다.
항복을 외치며 자비를 구하는 무고한 이를 해치던 그때의 그 광경이었다.
“제 행동에 후회는 없습니다. 주군께서 명령하심에 따른 것이 제 의무이니, 그에 따른 모든 고통을 제가 감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천 번, 아니면 수만에 이르는 같은 상황 속에서도 바라마엘은 한 번도 상인들을 베기에 주저한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적 종자로 들어가, 평생을 백작가를 섬기며 살았다. 그간 충성을 다하여 주군이 그것을 알고 귀히 여겨 주셨으니 충분히 누린 삶이었다.
이제 목이 필요한 때에 기꺼이 바치리라.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충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이를 잃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모두 누구 때문이랴. 어리석은 명령을 내린 모자란 주군의 탓이오.
장내가 숙연해졌다.
-짜증나! 짜증나! 빌어먹을 것! 어째서 괴로워하지 않는 거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바라마엘에게 달라붙은 해피 드리머가 잔뜩 심통이 나 짜증을 부렸다.
끔찍한 악몽 속에서도 기사가 흐트러지며 괴로워하지 않으니 그간 괴롭힌 산 것 중에 가장 지독하고 더러운 종자였다.
* * *
많은 이들의 죽음이 확정되던 순간이었다. 한 기사의 충성 때문에,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운명의 끝이 결정된 이가 한 사람.
“엣취.”
“마법사님?”
“날이 쌀쌀해서 그런가?”
땅지기가 코 밑을 문질렀다.
* * *
백작이 마음을 정했으니 행동은 빨랐다.
백작은 사실 별로 빠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단죄가 먼저이며 대적의 해결이 그 이후라 시엔이 강경히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에도 영지가 병드는 와중이라, 이미 결단을 내렸으니 더 이상의 피해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3대대는 4대대와 함께 급히 편성된 제압 훈련에 들어섰다. 이미 항복한 적을 상대로 그 신병을 제압하는 그런 내용의 훈련이었다.
그리고 훈련 중의 일이었다. 족쇄와 재갈, 안대를 차고 나니, 그대로 마차에 차곡차곡 실려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웁. 웁.”
“우웁.”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단단히 붙들어 매놓았는지, 용을 쓰며 안면 근육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도대체 풀릴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마차에 실려 이동하는 것이 시간이 넘어가자, 슬슬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 불안한 소리가 재갈에 막혀 그저 말이 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울렸다.
마침내 마차가 어딘가에 멈춰 섰다.
어쩐지 거친 손길에 질질 끌려가는 것도 잠시, 수천이 넘는 거대한 야유가 3대대를 집어삼켰다.
“우우우!”
“죽여라, 죽여!”
동시에 돌멩이 따위가 날아들어 머리가 깨지고 몸통을 치댔다. 3대대의 병사들이 이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제압되어 손쓸 도리가 없는 것을. 강제로 밀고 차고 끄는 손길에 이끌려 어느새 무릎을 꿇고 나니, 영주의 지엄한 목소리가 마법을 타고 크게 울려 퍼졌다.
“기사 바라마엘 디스하스. 및 3대대 413명. 그리고 마법사 에크반 리브. 이들은 사익을 쫓아 작당하여, 탑리프 상단의 행렬을 습격, 무고한 이를 해치고 그 물품을 약탈하였다. 군대가 주인의 뜻 없이 행동하였으니 이는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이다. 또한 타인의 재물을 탐내 그 목숨을 손상하였으니 이 또한 사형을 피할 수 없는 중죄이다. 그런 이유로 죄인을 참수하여 지상의 정의를 바로잡을 것이다.”
웁웁. 그제야 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깨달은 병사들이 꿈틀거리며 난리를 쳤다. 개중엔 이미 바지를 적신 이도 있었으며, 극히 일부는 이미 포기하여 얌전히 목을 내밀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포기하여 얌전히 목을 내미는 이는 자신의 죄를 알고 괴로워하는 이들이라. 양심이 있어 죄를 아는 이는 얌전히 삶을 포기했다.
그러나 몸부림치는 이들은 어떠한가.
전쟁이 없는 시대에 사람을 벤 이들.
술을 먹고 서로 대화하기로 내가 몇을 잡았네, 내가 머리를 베고 팔을 잘랐다 자랑스럽게 떠들던 이들이었다.
군인이 작전에서 죄책감을 갖지 아니하니 사실 그 모든 것의 일차적 책임은 그 주인에게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무고한 이를 해하여 가책을 갖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가슴을 편 이들이니 그 머리가 떨어지고 피가 흐르는 것이 당연한 순리였다.
일고의 동정할 가치도 없는 백정들.
가장 앞에 그 주동자가 무릎을 꿇었으니 한때는 가문 최고의 기사였던 이다. 백작이 직접 검을 들어 그 앞에 나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하네.”
바라마엘이 대답 없이 그저 앞으로 목을 내밀었다.
칼이 떨어졌다.
칼날이 뒷덜미로 들어가 목젖 앞으로 나왔다. 머리가 제 자리를 잃고 추락했다.
뒤이어 처형인으로 나온 기사들이 검을 들어올렸다. 죄인의 숫자가 사백이 넘으니, 기사단이 총동원되어 연신 머리를 쳤다.
그만큼의 피가 흘렀다.
“와아아!”
“백작님 만세!”
“만세!”
군중들이 환호하여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네들이 보기엔 전부 도적에 불과하니, 영주가 친히 목을 베어 심판하여 무도한 세상에 정의를 증명한 셈이었다.
백작이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가장 아끼던 기사, 오랜 친우였던 이를 제 손으로 베어낸 회한이 고스란히 그 눈빛에 깃들었다.
그러자 시엔이 앞으로 나섰다.
단상에서 내려와 피로 흠뻑 젖은 대지를 밟고, 구르는 머리와 온전하지 못한 몸뚱아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뒤를 일행이 따르고, 티란디스의 기사가 따랐다. 그 뒤로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행렬을 이뤘다.
죄인이 들어온 길을 따라 시엔이 걸어 나가니, 군중이 신관의 꽁무니에 붙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이 대로를 따라 이어졌다.
활짝 열린 성문을 따라 도시 바깥에 이르자, 펼쳐진 평야 한편 멀지 않은 장소에 거대한 적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위험하니 더는 접근하지 마시지요.”
시엔이 홀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명예 성자가 검게 변색된 땅에 이르자, 군중들이 주먹을 꽉 쥐며 긴장했다.
시엔도 조금 긴장했다.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는 몸에 침투한 질병을 한곳에 모아 제어하니 만병이 무효였다.
그러나 질병이 꼭 말을 듣는 것만 있지는 않으니, 개중 불치라 하는 것들마저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크롸라라라라.
대적이 세상 가장 끔찍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산 것이 살며 듣는 가장 끔찍한 소리이나, 시엔의 귀에는 달리 들렸다.
「안심하고 들게. 자네의 신체가 이미 질병과 독기, 기생충을 허하지 않는 단에 이르렀으니. 그 과정이 불연하여 기해한 것이나 이미 연하여 이른 것을 어찌하겠나.」
대죄인이 그렇다는 데야.
시엔이 안심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수많은 군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시엔이 부패한 환희에 앞에 도달했다.
그렇다 해도 상당히 먼 거리라. 어차피 보이는 것이 뒷모습이니 시엔이 표정이 어떠한들 누구 하나 알 길이 없었다.
시엔이 웃으며 말했다.
“편안히 쉬셨습니까?”
「내 삶의 가장 훌륭한 순간들이었네. 이러한 평온이 어느 무상한 시간 이후에 찾아온 것인지. 자네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그러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나 좋은 순간이 언제나 찰나와 같구나. 내 이제 나왔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음을 알겠다. 그렇지 않은가.」
같은 수법을 써먹을 수 있는 것은 두 번뿐이었다.
이후에도 같은 일을 벌인다면, 그때는 십중팔구 성자가 대적을 불러 이득을 취한다 이야기가 나오고 말리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렇습니다. 만약 다음에 나오실 때가 된다면, 그때는 무수한 인명을 상대하시게 될 겁니다.”
「내 현상의 즐거움이 크나, 그러한 삶의 단절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러니 네가 초월에 이를 때를 그저 영원을 찰나와 같이 인내하여 기다리겠다.」
참으로 인자한 말이었다.
세상 가장 끔찍한 외양을 가진 대죄인의 말이기도 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보니, 계속 초월이라 말씀하시는군요.”
「정상에 이르지 못한 이에게, 그 경치를 아무리 설명한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초월이 어떠한 것이다 설하여 네게 공허한 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네 스스로 초월에 이르면, 자연히 심계가 열리고 혼백이 세상과 통해 선경에 들게 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야.」
대죄인이 말을 이었다.
「자. 손을 뻗게나, 마법사여.」
“또 연극을 하실 셈입니까?”
「극이란 다른 말로 삶이라 하네. 초자아에 새겨진 본성을 감추어 쓰니, 사는 모든 순간이 극과 같은 것이야. 그러하니 극이야말로 마땅히 군자의 취미가 아니겠는가.」
반절은 알아듣지 못할 말이나, 멋지게 포장을 잘 해냈다는 것은 알겠다.
시엔이 웃음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크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거인이 돌연 일어나 두려운 기색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공포에 질렸다 말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으로 성마르게 물러나다가, 이내 발이 꼬여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세상이 떨리는 충격이 이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성벽에서 부스스 돌가루가 떨어졌다.
거인이 몸을 일으키려 드나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듯 몇 번을 다시 넘어지고, 땅을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시엔에게 멀어졌다.
-고오오오오오오!
이내 비통한 비명이 세상을 집어삼키더니, 거인이 땅을 찢는 시늉을 하여 바닥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
채 전부 열리지도 않은 구멍에 성급히 몸을 들이미니, 상반신은 땅에 박히고 하반신이 반대로 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뚝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시엔이 눈을 끔벅거렸다.
누가 보아도 겁에 질려 볼품없이 달아나는 꼴이 아닌가. 취미가 어쩌니 하더니, 연기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연극임을 알고 보는 시엔조차 감탄한 정도였으니, 그를 지켜보는 수천의 군중들은 어떠하겠는가.
성자가 손을 뻗으니, 괴물이 감히 대적조차 못 하고 꼴사납게 도망을 쳤다.
그러한 광경에 군중들이 환호하여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대적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의 환희가 그 자리를 가득 메웠다.
<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