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31화 (131/268)

<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5] >

세상 가장 끔찍한 몰골을 한, 부정하기 짝이 없는 대적의 등장이었다. 그러하니 사람이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소름끼치는 울부짖음.

산 전체가 울리는 거대한 충격음.

그리고 한 일이 무엇이던가.

그저 자리에 앉고 또 누웠을 뿐이니 전혀 공격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당황했다.

끔찍한 것이 나타나 습격한다면야 도망치건 맞서 싸우건 할 일이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저 누웠을 뿐이라면?

도망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부로 건드려 볼 수도 없다. 그런 이유로 캠프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 의지가 되는 이가 누구겠는가.

사람이 제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장애물을 만나면, 자연스레 천신을 찾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주교와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쩌면 좋냐는 그런 시선들이었다.

주교는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했다.

주교 역시 겪어본 바가 없으니 대처할 법을 몰랐다. 다행히도, 이 자리에 샤인이 한 명 있지 않았던가.

“세상에, 어찌 저런 끔찍한. 마치. 이 세상의 죄악이 형상으로 난 것 같습니다. 어찌, 이런. 천신이시여.”

주교가 시엔에게 주교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겠으니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달라는 뜻이었다.

시엔이 대답으로 주교에게 안도를 선사했다.

“죄악의 형상이라. 정확한 표현이시네요.”

“형제님? 형제님께선 저 끔찍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제가 어떤 연유로 샤인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받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의 만병이 형상을 이루었으니. 그때에 왕국군도 야만족도 전부 그저 같은 인간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에 홀로 대적을 맞이하여 그분의 기적을 지상에 증명하니. 아아.”

신전에서 공식으로 기록한 시엔의 치적이었다. 대주교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제님께서 이미 상대하여 물리친 적이로군요! 세상에, 천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가혹한 시련에 항상 답을 함께 내려주시니.”

군중의 표정 역시 기대감에 차올랐다.

그 유명한 명예 성자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리라 하는 그런 기대였다.

“이전에 만났을 때. 그 본질을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이 먼저 공격하여 창칼을 들이밀지 않는 한, 세상의 인명을 해하지 않겠다 대답을 받았습니다.”

“하나, 저러한 부정한 것이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시엔이 대답 대신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나무 사이로 저 멀리, 산의 능선에 누운 회백색의 거인이 보였다.

양팔을 머리 뒤로 둘러 머리를 베고,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포갰으니 참으로 편안해 보이는 자세가 아닌가.

확실히 적의는 없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충분치는 않은 대답이었다.

주교가 다급히 시엔을 붙들었다.

“그, 그럼 이대로 놔두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걸 노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예? 형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이 먼저 공격하여 창칼을 들이민다면, 그때는 인명을 해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을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그런 간악한……”

그러자 성기사 하나가 물었다.

“토벌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이전에 한 번 돌려보냈으니, 같은 방법으로 시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엔이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개중엔 자에바와 그 말 많은 기사마저 시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 새삼 사람의 뻔뻔함에 감탄을 할 수밖에.

시엔이 히죽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명예 성자 이전에 한 영지의 대공자입니다. 귀족이란 저를 섬기는 이를 먼저 귀애하여 보살피는 이라, 이러한 위험에 함부로 몸을 던질 수가 없음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아아. 군중의 탄식이 이어졌다. 일부는 일부러 소리를 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다른 귀족의 영지를 위해 굳이 위험에 뛰어들지 않겠다는데. 누가 감히 강요할 자격이 있으랴.

* * *

대죄인, 부패한 환희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맑은 하늘, 상쾌한 공기. 햇볕이 상처에 드리우니 온몸에 짓쳐오던 통증이 누그러지고, 바람이 불어 환부를 식히니 몸에 찬 열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아. 참으로 좋은 세상이구나.

심층 심연이 어떠한 곳이던가.

유황과 황산이 녹아든 대기가 습하기 짝이 없어 하루와 일 년, 백 년, 천 년. 그 셀 수 없는 무구한 시간 동안 축축한 곳이었다.

대지는 항상 끓어오르고, 바닥에선 염분 진한 해수가 분수처럼 높이 치솟았다.

멀쩡한 이도 병자가 되어 앓다 죽어갈 곳이니, 만병을 품었으나 죽지 못하는 몸은 하염없이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현상 세계는 어떠한가.

이미 고통의 역치가 높아 그 막대한 통증에도 견디어 낸 대죄인이었다. 천신이 직접 관측하여 정돈된 곳에 나와 병세가 줄어드니 아프지 않은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대죄인이 몸을 일으켰다.

겨우 하룻밤 잠을 청했을 뿐이나, 인근의 나무가 모두 제 본연의 색을 잃었다.

일부는 누렇게 뜨고, 일부는 붉게 물들거나 곰팡이가 가득 피어 붙었다. 심지어는 구멍이 뻥뻥 뚫린 것도 있었다.

전부 선 채로 죽은 나무들이었다.

죽어버린 것이 나무뿐만 아니었다.

어느새 땅이 검게 물들었다. 독충이 우글거리는 썩은 늪이 되어 악취가 피어올랐다.

본디 깨끗한 것을 찾는 것이 지성인 법이다. 대죄인이 몸을 일으켰다.

자연이 상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리라.

죄인의 시간과 인간이 말하는 시간은 단위가 달랐다.

삶을 해하면 그로부터 이어질 인간의 역사가 상하지만, 땅이 상하면 삶들은 그저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 아니던가. 죽은 삶은 돌아오지 않아도, 죽은 땅은 돌아오는 법이었으니까.

부패한 환희가 몸을 일으켰다.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니, 오랜만에 진득하게 명상에 들 수 있으리라.

볕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서.

* * *

다음날, 시엔이 자에바의 천막을 찾았다.

“현 지점으로부터 서북쪽에 위치한 도시와 촌락의 목록을 요청하겠습니다만.”

“요청은 기각하겠어요. 티란디스에서 제멋대로 감싸고도는 주요 용의자부터 인도하지 않으면, 랭무튼은 절대 협조할 의사가 없어요.”

“그러면 티란디스는 티란디스대로 알아서 조사하겠습니다. 봉쇄만 풀어주면 될 일입니다만.”

자에바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는 랭무튼의 땅이에요. 대공자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나요?”

“흠. 타협은 없단 말씀이시군요. 영애께선.”

시엔이 자에바에 곁에 선 바라마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꼿꼿하게 선 자세가 사람이 아니라 장식과 같은 꼴이었다.

시엔이 미소 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티란디스의 무고한 영민을 내놓지 않으면 제 신병을 구속하겠다 협박을 하시던데. 제가 내 영민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 나를 구속하셔야겠군요?”

“랭무튼이 못 할 것 같나요?”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계속 대치해야겠군요. 밖에는 대적이 숨을 쉬고, 안에는 무고한 이의 시체가 널렸으니 참으로 안락하겠습니다.”

자에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엔의 말대로 여기서 뭉개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백작저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하고, 새로 나타난 골칫거리의 해결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영애께선 참으로 운이 좋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대적 말입니다. 저러한 것이 나타났음에도 인명을 해하지 않으니, 영민이 죽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누구와는 달리 말입니다.”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당신은 너무 가시는 거고.”

시엔이 싱글벙글 미소를 띠었다.

“이미 한 번 물리친 적이니 두 번이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대적을 물려 본디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는 것이 제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허나, 아무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도 해 주고 싶지 않은 상대가 있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러니 지금은 온전히 구경이나 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 도움을 청하시려거든, 먼저 우리 사이에 낀 불화를 먼저 해결한 이후여야 할 겁니다. 그럼 이만.”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랭무튼 백작은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지 내에 강대한 괴물이 돌아다니나, 사람을 해하지는 않았다. 명예 성자가 그리 말하기도 했거니와, 실제로도 사람이 모인 곳을 피했다.

그저 낮에는 앉고 밤에는 누워 잠을 청할 뿐. 그러니 놔 두면 다른 영지로 흘러가겠거니 그러한 생각으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괴물이 다녀간 장소가 전부 끔찍한 모습으로 변했다. 땅은 질퍽하니 악취가 피어오르는 늪지가 되었다.

그뿐이랴. 거기에 들어간 이들이 어떤 꼴이 되었던가.

건강한 이가 몇 분 지나지 않아 문둥이가 되어 살점이 흘러내리고, 열이 불길처럼 끓어오르는 이가 그날 밤에 동사하여 얼어죽었다. 세상천지의 모든 질병이 제멋대로 침투하여 사람의 목숨이 가볍게 끊어졌다.

발을 들이면 성히 나오지 못하니, 죽음의 땅이라 불러 마땅한 곳이었다.

그러나 괴물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낮과 밤으로 머무르는 장소를 계속 바꿨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접한 영지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땅을 죽음으로 바꾸는 괴물인데, 성자가 설득하여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더라. 그러니 사람으로 벽을 세우자.

인근의 영주들이 경계에 군대를 배치했다. 사람의 벽을 세우니, 인간을 피하는 괴물이 영지 바깥으로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랭무튼 백작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지금 그 괴물은 어디에 있지?”

“아직 헤란트 플레인에 자리 잡고 있는 중입니다.”

헤란트 플레인. 영지 북부에 자리한 평야로 랭무튼의 최대 곡창이기도 했다. 벌써 사흘째 괴물이 자리를 잡으니, 땅이 오염되고 나면 근처로 움직이는 식이었다.

“빌어먹을, 피해는?”

“평야의 절반 정도가 오염되었습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귀족의 힘은 땅의 소유에서 나왔다.

사람은 땅에서 살며, 또한 땅에서 나는 것을 먹으니, 땅의 주인이 그들을 다스려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괴물이 그러한 땅을 죽이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랭무튼 백작이 책상을 연신 내려쳤다.

“신전은?”

“아직 본단의 기별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기다린다니! 우리 땅이 다 죽게 생겼는데! 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땅이! 지금 당장 토벌대를 조직해도 늦는 판이야!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부를 했건만……!”

랭무튼 백작이 분통을 터뜨렸다.

군대를 움직여 토벌하려 해도, 신전에서 신관을 파견할 수 없다 거절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경솔한 행동을 자제해 달라 요청하지 않았던가.

교단은 대륙 전체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현 상황에서 적대적이지 않은 대적을 상대로 섣불리 도발에 나설 수는 없다. 혹여 잘못 건드려 본성을 드러내 날뛴다면, 그때는 랭무튼 영지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재앙이 되지 않겠느냐.

랭무튼의 땅이 오염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교단이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러니 참고 기다려 달라고.

이 상황은 우리도 안타까운데, 대륙 전체를 위해 네가 좀 참으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륙 전체의 평화라는 명분 앞에서는, 아무리 분통을 터뜨려도 교단을 끌어들일 방법이 없었다.

“……그 티란디스의 애송이는 어쩌고 있지?”

“여전히 여우고개에 체류 중입니다만.”

백작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자에바의 서신으로는, 시엔 티란디스가 대적을 물리칠 능력이 있다 밝혔다던가. 당장 영지를 오염시키는 괴물을 처리할 방법은 그뿐이리라.

“자에바에게, 아니, 내가 직접 가도록 하겠다.”

“백작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래, 지금 바로 당장! 마차를 준비해.”

* * *

여우 고개에서의 숙식이 벌써 스무 날이 넘었다. 아무리 좋은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꾸며도 도시를 떠나 체류하니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겠는가.

봉쇄 초기에는 카레네가 반발하며 어떻게든 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 난리를 쳤다. 그러나 이제는 기사들을 이끌고 대련에 매진할 뿐이었다.

검위공 아래 훈련을 할 때엔 망토 한 장에 의지하여 야숙을 일상처럼 하곤 했으니, 이 정도면 산중 생활이라도 꽤 호화롭다 여기는 와중이었으니.

그러나 시엔 역시 편한 나날들이었다.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서도 노숙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호화로운 천막 안에서 누렁이의 진심 가득한 수발을 받으니 불편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영지에서 매일같이 날아들던 온갖 행정에서부터 휴가를 얻은 셈이 아닌가.

할 일이 없으니 두 후배에게 선배 노릇이나 하며 흑마법을 봐주거나, 낮에 자고 밤에 또 자거나 하는 매일이었다.

오늘도 그러했으나, 꿀처럼 단 낮잠을 깨우는 이가 있었다.

“도련님?”

“음. 베른닐?”

“뭐야? 인간 주제에 용의 잠을 깨우다니.”

사람이 가장 날카로울 때가 자던 잠에서 방해받았을 때가 아니던가. 용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시엔의 품에서 눈을 뜬 파린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베른닐이 뺨을 긁적거렸다.

“랭무튼 백작이 직접 행차한 모양입니다.”

“백작이?”

시엔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눈을 감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게 뭔 상관이야. 아쉬운 사람이 찾는 법이지. 혹시 날 부르면 나한테 오라 그래.”

“알아들었으면 썩 꺼져, 인간.”

파린이 추임새를 붙였다.

그러니 어쩌랴. 베른닐이 그저 물러날 수밖에는.

사실, 이러한 이유로 산중 생활이 불편한 것은 자에바와 그 병력들뿐이었다.

군대야 주둔하여 지대를 봉쇄하는 것이 작전이니 감수해야 할 일이라 치고.

자에바에겐 하루하루가 끔찍한 날의 연속이었다.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전부 불편하기 짝이 없고, 씻는 것 역시 더욱 고역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엔의 조사대가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더욱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백작가의 서신으로 영지의 피해 상황이 매일같이 갱신되는 와중이라면 더욱 그랬다.

대적이 땅을 오염시키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산자락에 누워 하룻밤 만에 그 절반이 넘게 고사하지 않았던가.

하루의 밤과 낮을 헤아리면, 그 오염 영역의 두 배씩 죽은 땅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나날이었다. 어느새 피부는 상하여 아침마다 잡티가 늘어나고, 눈 아래가 퀭하여 검은 기미가 번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아니던가.

백작이 그 꼴을 보니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버지. 영지는, 대적은 어떻게 되었나요? 신전은요? 토벌 계획은……”

“하아. 네가 정말로 고생이 많다.”

다른 딸들 같았으면 산중 생활이 하루에 지나지 않았더라도 당장 아비를 보고 불만을 터뜨리거나, 애원하며 집에 보내달라 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이 미련한 것이 아비를 보아 먼저 묻는 것이 영지의 안위였다. 백작의 첫째 딸 사랑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교단 본단에서 답신이 돌아왔다. 대적과 관련하여 교단에서도 아는 바가 없으며, 현 시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조언자가 현장에 있으니 그 도움을 청하라더군.”

교단 입장에선 당연한 말이었다. 이미 대적을 상대하여 물리친 이가 시엔이 아니던가.

자에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티란디스 놈 말인가요? 겨우 그것뿐이에요? 지금 그 부정한 것이 영지를 어떤 꼴으로 만들고 있는데. 게다가 우리가 신전에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이 있잖아요.”

“최대한 빠르게 성자와 성녀, 그리고 성전 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하더구나. 허나.”

백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병력으로 파견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티란디스의 대공자의 조력을 맡는다는구나.”

교단에서도 시엔의 조언을 구해야 할 참이었다.

대적을 섣불리 건드려 자극하지 않기로 한 참이었다. 백작의 군대에 합류하여 토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시엔을 도와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겠다며.

“티란디스 놈은 돕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직접 오지 않았느냐.”

“아주 독한 놈이라구요. 그런 놈이 명예 성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세상에, 어떻게.”

“일단 대화를 해봐야겠지.”

티란디스에서 조사대를 파견하겠다 할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조사대가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여기가 랭무튼의 땅이라 작정하여 감추고자 하면 절대 들키지 않을 일이기도 했고.

허나, 지금은 어떠하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영지가 점점 상하는 와중이라, 불리하여 백작이 직접 행차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전부 그 빌어먹을 괴물 때문이었다.

“아버지. 대적이 나타난 것이 정말로 우연에 불과할까요?”

“그게 무슨 뜻이냐.”

“티란디스 놈이 명예 성자로 인정받은 것도 전부 그 대적 때문이 아니었나요? 그때도 1왕자의 토벌이 불리한 때에 이르자 나타나 오히려 성과를 뒤집었어요.”

“그건.”

“지금은 어때요? 만약 티란디스 놈이 저 대적을 부리거나 불러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자에바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가장 불리할 때에 공교롭게도 나타나니, 그때 가장 활약하여 이득을 거두는 이가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다 치더라도, 증거가 없구나. 그러한 발언은 감추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성흔이 있지 않느냐. 교단의 위아래가 성흔을 맞이하여 입을 맞추었다 들었다. 심지어 예하께서도. 가짜가 그 모두를 속일 수 있겠느냐. 교단이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명예 성자라도 샤인이라 민심의 지지를 받는 이다. 공연한 말로 오히려 욕을 볼 발언이니 속으로 감추거라.”

말을 내뱉고 나니 오히려 백작의 속이 서늘했다.

시엔 샤인 티란디스. 명예 성자로 이름이 높으니, 판단하기로 신관과 같은 선량하고 깨끗한 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왕국은 시엔의 과거를 알았다.

이제는 왕국의 귀족들 모두 사람이 바뀐 이유를 납득했고 이해했다. 천신의 어떤 계시를 받은 까닭이라고. 사람이 바뀌었고 뒤이어 행보가 그리하니 꽤 타당한 속설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그저 착해빠진, 한 인격으로는 훌륭하나 과거 얼간이었던 때를 보아 귀족으로는 영 모자란 녀석이라 판단했다.

이번 행보만 해도 그러했다.

아무리 제 영민이 사라졌다 한들, 적대적 관계인 흐레이그 파벌의 랭무트 영지까지 직접 행차하다니. 아무리 분개했거나, 혹은 영민을 아낀다 하더라도 대공자가 보일 태도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얕봤고, 자에바에게 방해하여 빈손으로 돌려보내라 일을 맡겼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면?

랭무트 백작이 밀려오는 불안감을 꾹 억눌렀다.

“그나저나 늦는군. 내가 도착한 것을 아직 모르는가?”

아무리 후작가의 대공자라 하여도, 타 영지에 와서 그 주인이 직접 행차한 상황이 아니던가. 먼저 다가와 방문을 청하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다.

영주의 행차가 보통 의례를 갖추는 것이 아니니 분명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쯤이면 얼굴을 보여야 정상이 아니던가.

“분명 모르는 척을 하는 거예요.”

“허허.”

그러나 아쉬운 쪽이 누구랴.

백작이 도착하였음을 알리라고 하인을 시켜 보냈다.

그리고 이내 되돌아온 하인이 소식을 전했다.

“저기, 그 주인님.”

“왜 그러느냐?”

“그것이, 주인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으시다면 직접 찾아오시라고……”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자에바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독한 놈이라고 했잖아요.”

<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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