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30화 (130/268)

<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4] >

두 무리가 서로를 노려보니 타협할 기색이 없었다.

이제 어쩔 셈이려나.

시엔이 느긋히 서서 파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린이 항상 소매를 쥐고 허리춤에 달라붙어 있었다. 쓰다듬기 좋은 고만한 머리통이 쓰다듬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니 손이 비면 으레 그리로 가는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바라마엘이 혓바닥을 놀려 대치를 깼다.

“저희가 신병을 인수하여 조사를 진행하겠다 라는 뜻이며, 어떤 위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님과 그 일행분께 한 치의 불편함도 없는 안락한 환경을 약속드릴 것입니다.”

그저 조사의 일환이니 적대하여 피를 볼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굳이 티란디스의 대공자라 언급한 것은 신관들더러 들으라 하는 이야기리라.

시엔이 이죽거렸다.

“기사라더니 혓바닥 놀리는 솜씨가 대단한데. 결투도 입으로 하나?”

“······노여움을 푸시고 부디 조사에 협조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자 신관들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일단 성자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 달려들긴 했는데, 교단은 왕국의 내정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방침이 아니던가.

상대가 왕국의 일, 영지의 일이라 하여 비켜달라 한다. 또한, 성자의 편의를 최대한 돌보겠다 하니 물러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주교가 여기서 내리는 결정이 곧 교단의 답이었다.

대주교쯤 되는 인사라면 모를까, 한 명의 주교가 여기서 교단을 대표하여 의견을 낼 수 있겠는가.

불쌍한 주교만 머리를 부여잡았다.

“웃기는군. 내 영민이 습격받았으니, 용의점이 있다 하여도 티란디스가 조사할 일이지. 랭무튼이 나서 내놓아라 할 자격이 없어.”

“랭무튼의 땅에서 일어난 일이야!”

자에바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시엔이 자에바를 바라보았다.

거짓을 거짓을 낳는 법이었다.

제 딴엔 완벽하다 여겼을 터.

그러나 사람의 무지란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알지 못한다는 것.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바로 무지였다.

시엔이 흑마법사니 흑마법사의 방법으로 빈틈을 찾았다.

그러나 시엔이 아니더라도, 결국 음모를 꾸밈에 무지함에서 완벽하지 못하니 다른 방법으로도 결국 밝혀지고 말 일이 아니던가.

그걸 계속해서 거짓으로 모면한다 치더라도 또 다른 모순과 증거 속에 궁지에 몰리게 될 뿐임에도 불구하고.

“교섭은 없어. 티란디스는 랭무튼의 고의적인 조사 방해를 즉각 철회하고, 야만적인 무력 압박을 포기하기를 바란다.”

“우, 우리야말로. 랭무튼은 티란디스의 독단적 행동을 용납할 수 없으며, 사건 해결의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 교섭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현 위치에 무기한 대치할 것임을 선언하겠어.”

결국 평행선이었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티란디스의 기사들이며 성기사들이 다시 무기를 돌려놓고, 랭무튼의 군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창끝을 하늘로 돌렸다.

* * *

랭무튼이 지대를 봉쇄했다.

대척점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중이나, 실상은 시엔에게 무척 불리한 판이었다.

랭무튼의 수작이 전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습격자의 머리가 시엔에게 있었다. 시엔이 머리의 주인을 찾고, 또 그 치가 랭무튼의 군인임이 확인된다면 정말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말 테니까.

그러니 그러한 부분을 처리할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다. 처리가 끝나면, 랭무튼이야 먼저 사과를 표하며 다시 조사를 계속하자 손을 내밀면 되는 일이었다.

시엔의 천막 안, 누렁이가 더운 물로 시엔의 발을 씻겼다.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손길이었다.

시엔이 누렁이의 설긴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렁아.”

“예, 위대하신 분이시여.”

“뭔가. 달라졌네.”

“전부 당신께 비롯한 것입니다.”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분명 오늘 아침 수발을 들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누렁이가 가진 힘은 분명 신성이었다.

그 신성이 한나절만에 겅충 뛰었으니, 그 신앙의 대상인 시엔이야 당연히 한눈에 보이는 일이었다.

사람이 아침과 저녁에 그 태가 달라야 한다는 속담이 있긴 했다. 그러나 매 순간 노력하여 일신 또 일신에 정진하라는 뜻이지, 이렇게 갑자기 단계를 뛰어오르라는 말은 아니었다.

“당신께선 영혼을 부리시지 않습니까. 이 천한 눈으로 보아 생각하건대, 당신께 속한 영혼이 당신께 억울함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게 보인다고?”

“그저 희미한 형체에 불과하나, 당신의 것이라 제게도 보인 모양입니다.”

“흠.”

개인이 개인을 신앙으로 섬겨 신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아마 대륙 역사에 있어 초유의 일이리라. 그러니 보인다 해서 이상하다 할 것은 없었다. 시엔 역시 모르는 영역이었으니.

“그러하니 저 역시 죽어 제 영혼이 당신께 속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고된 삶에 제 광명이시고, 미래에 죽어서도 당신께서 살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층 신앙이 깊어졌다는 뜻이었다. 파린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영혼은 시엔 아니라도 흑마법사가 다룰 수 있는 건데. 그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흑마법사가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련님. 제게 은혜를 베풀고 또한 제 삶과 죽음을 거두어 주시는 분은 단 한 분이시니까요.”

“시엔은 신이 아니야. 미친 것아.”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관들이 기도함을 보셨지요? 저들이 기도하여 신이 그렇게 가호하기를 바라니, 천신께서 사실 그렇지 아니하지 않습니까. 신관 저마다 제가 믿는 신의 형상으로 천신을 바라보는 것이니, 제가 인간의 신으로 위대한 분을 모시는 것이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같지 않지! 멍청아!”

“같은 것입니다. 제가 바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제게 신성이 깃드니 색이 다르나 신관과 같은 것이니. 하늘의 신이 계시고, 인간 중 단 한 분 이 늙은이의 신이 계심이 같은 이치와 같습니다.”

“아, 답답해! 말이 안 통해! 미친 것, 미친 인간!”

파린이 빼액 소리질렀다.

그럼에도 누렁이는 그저 어여쁜 손자를 보듯, 인자한 표정을 띄우고 따뜻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물을 갈고 오겠습니다. 도련님께선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요.”

“흥.”

누렁이가 물을 갈겠다며 물러났다.

시엔의 수발을 들었으니 다음은 파린의 차례였던 탓이었다.

어린 용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왜 안 싸워?”

“응?”

“싸우면 시엔이 이기잖아. 그러면 싸우면 되지.”

“흠. 뭐. 이기기야 하겠지만.”

“그런데 왜? 답답해. 미친 것도 그렇고 시엔도 답답해. 왜 말로만 싸우는데?”

“모든 일이 무력으로 해결되지는 않으니까.”

“그냥 불을 뿜는 게 나아. 일단 불타고 나면 잘못했습니다 싹싹 손을 비빌걸?”

“너, 불도 뿜냐?”

“······아직은 못 해.”

“용인데?”

“그러니까 시엔이 날 지켜야지. 시엔은 내 보호자. 나는 시엔의 피보호자.”

파린이 당당하게 말했다. 무슨 당연한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느냐는 투였다.

“그래서, 왜 안 싸워?”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럼 왜 왔는데?”

“죄인을 벌해야지.”

“죄인은 벌써 찾았잖아.”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죄인을 찾아 벌한다는 건, 그저 칼로 찔러 목이나 떨구는 게 전부가 아냐. 온 세상이 그 죄악을 알고, 그 이름에 죄악이 붙어 산 이들의 기억에 남아야 하는 일이지.”

그저 내 영민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탓이었다.

“복잡해.”

“딱히 복잡할 건 없지. 살인자를 찾고, 세상에 널리 알리고, 정의대로 집행하면 되는 일이니까.”

“지금 그게 안 되잖아.”

“앞으로는 될걸.”

시엔이 씩 웃으며 손에 쥔 물건을 들어올렸다.

바깥 것, 외연의 누군가 말하기를 심장 조각이라 하던 붉은 보석이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구나.」

역죄, 부패한 환희가 기지개를 폈다.

썩은 살점과 싯누런 고름이 비처럼 내리고, 살을 파먹던 수많은 종류의 벌레들이 그 사이 함께 떨어져내렸다.

흑마법사라 해도 영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 시엔이 손을 젓자 땅이 움직여 그 위에 더러운 것들을 삼켰다.

여기가 바로 시엔의 정신세계 속이라, 이 정도야 간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대는, 무언가 섞였어. 만상과 순연을 모조리 무시한 것이니, 순진무구 그 끔찍한 것의 끔찍한 짓이로구나.」

“한눈에 아십니까?”

「그뿐만 아니야. 신격을 품었구나. 누군가 너를 신앙하느냐? 또한 표식이 남았구나. 외연의 존재가 너를 통해 그 좌표에 서 세계를 인식하는구나. 그러하니 이제는 너를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지경이다.」

부패한 환희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전했다.

「네가 이미 초월이 가까우나, 그 방법이 바른 것이 아니구나. 네 근원의 의문으로 세상을 알지 않는다면, 결코 초월에 이를 수 없으리라.」

지엄한 훈계였다.

마법사가 마법에 정진하여 진리를 찾지 않고 딴짓이나 하며, 이상한 방법으로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뺨을 긁적거렸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나 변명하자면, 말씀하신 부분들이 제 의지가 아니었으니, 아직 편법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럼 되었다. 그러하다면 내 희망을 다시 품어도 되겠구나. 그래서 무슨 일이느냐. 긴 시간은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가도록 하자꾸나.」

“시간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부패한 환희가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정신세계 속 스르륵 통로가 열렸다. 주먹만 한 작은 통로이나, 그 너머의 소리가 들려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나도 갈 거야! 시란 보러 갈 거야!”

-참아라.

“놔! 놓으라고! 야이 미친 절제야!”

-참아라.

“아이 씨, 놓으라니까!”

통로가 다시 닫혔다.

「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나오겠다 아우성이지 않느냐. 절제가 무분별하게 막아서나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니.」

죄인들 사이에서도 끔찍하다 여겨지는 부류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환희께 도움을 청하려 합니다만.”

「세상에 나가는 일이느냐? 내 그것은 기꺼운 일이나, 하나 묻지 않을 수가 없구나.」

“무엇입니까?”

「나는 불경하여 대죄인의 몸이나, 산 것의 목숨을 함부로 해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다. 하여 인간의 전쟁에 나아가 삶을 해하려 하는 것이 너의 뜻이라면, 다른 대죄인을 청하는 것이 좋겠구나.」

인자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기도 했다.

부패한 환희는 인간 세상 모든 병의 근원이 아니던가. 병은 사람에게만 드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사람을 해하지 않더라도 그저 인간 세상에 현신하여 존재하면 작물과 나무에 병이 번졌다. 게다가 땅이 썩어 오염되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범접하지 못할 금지를 만들어내지 않던가.

그러나 대죄인의 입장에선 어찌하랴.

심층 심연의 악의 어린 대기가 전신의 상처를 헤집고, 숨 한 모금 쉬는 그 행위며 짧은 시간마저 고통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직접 사람을 해하고 싶지 않다 말하는 것이 보통 인자한 존재는 아니었다.

지난 야만족 토벌 때에도 야만족의 한가운데 소환되었을 뿐이 아니던가. 그저 주변에 있는 것으로 야만족이 죽어나가니 대죄인이 어떤 행동으로 직접 삶을 끊지는 않았더란다.

죄가 그 품성으로 정해지지 않는 것이 비극이었다.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삶을 직접 해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저 나오셔서 바람이나 쐬며 쉬다 돌아가시지요.”

* * *

“----!”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끔찍한 소리가 밤을 깨웠다. 귀로 파고들어 인내할 수 없는 끔찍한 울음소리. 쇠가 부대끼고 유리를 긁는 편이 듣기에 수천 배는 더 나은 편이리라.

군인이며 신관이며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단숨에 뛰쳐나오니, 달빛이 그네들의 창백한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그것이 있었다.

달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몸체.

전신의 살점이 연신 흘러내리고 전신에선 녹색 안개가 흘러나왔다. 탑과 같은 팔다리에서 툭툭 튀는 것들이 연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다시 한번 괴성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누구라도 한 번 듣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리가 무엇이다 알리라.

오로지 시엔만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참으로 시원하구나. 세상의 공기가 이토록 청명하니 도원과 극락이 부럽지 않도다. 현상이 즉 정토임을 내 아귀가 되어 알았도다. 아아, 고통이 가신다.」

현상 세계에 나서 참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부패한 환희가 그대로 엉덩이를 뭉개고 앉았다. 그 몸집이 몸집이라, 숲의 나무들이 맥없이 부러져 아래 깔렸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당연한 지성의 결과가 아니던가.

부패한 환희가 아예 상체를 떨궈 드러누웠다.

그 충격에 땅이 울리고 나무가 푸스스스 떨리며 솔방울 따위가 떨어지는 소리가 다닥다닥 요란했다.

“천신이시여.”

“어찌 저런 부정한.”

대죄인이 부정한 것임은, 신관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보아 본능으로 아는 것이다.

역죄, 세상에 모든 질병이 그에게서 비롯했으니 가장 끔찍한 죄악이라던가.

맑은 밤 아래, 대죄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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