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정치와 말장난이 다른 것이 없음을 [2] >
“어쩔 셈이야? 왕실의 징발 요청을 거절했다간, 반역으로 몰릴 명분을 주는 셈이야. 군대 증편을 증거로 삼으면.”
“도로 건설 사업.”
로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빌어먹을 신사업을 증거로 삼으면 충분히 반역죄를 뒤집어쓰고도 남아.”
“그럼 안 되지. 요정목을 보내 주자고.”
시엔이 대답했다.
그러자 로우드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요정목 시세가 평소의 두 배가 넘어. 가시렌의 공급계약을 파기하면 위약금도 지불해야하고. 지금 왕실에 전량공급을 돌리게 되면 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가진 현금이 모두 사라지고 말 걸.”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니.”
“하여튼 인간이란.”
시엔이 품에 앉은 파린이 추임새를 넣었다.
로우드가 울컥하는 사이, 시엔이 미소를 지었다.
“요정목은 전부 보내주는 걸로 하자고.”
“위약금은 어쩌고?”
“가시렌에는 요정목 대신 다른 걸 보내주자고.”
“대역사를 진행하는데 요정목이 아닌 다른 걸 쓰려고 하겠어?”
가시렌 왕국은 때 아닌 대신전 건설을 진행 중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봉헌하겠다고. 이럴 때에는 건설이 아니라 대역사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니.
“음. 뭐가 좋을까? 세계수의 영력을 받은 나무들이니까, 영력목? 아니면 엘프목? 대신전 역사에 들어가는 거니까 좀 그럴듯하게. 신단목. 흠. 신단목이 어감이 좋은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가시렌엔 신단목을 보내도록 하자. 엘프들이 새로 신단목을 공급했는데, 그 성능과 특성, 겉모습도 같으나,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신전의 자재로는 최고를 보장하는 것이니 믿고 써달라 해.”
시엔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더는 가진 요정목이 없네? 왕실엔 죄송하지만, 엘프의 숲에 사정이 생겨서, 요정목이 생산이 되지 않으니 보내드리고 싶으나 능력이 되지 않는다 사죄를 드려야겠다.”
로우드가 입을 떡 벌렸다.
“제품 이름을 바꾸자고?”
“그렇지.”
왕실에서 요정목을 원했다.
가지고 있으면서 거절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없는 것을 주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면 없는 거로 치지 뭐.
“그건 사기야.”
“원래 장사가 그렇지 뭐.”
“왕실에서 믿어 주겠어? 이름만 바꾼다고 해서 요정목이 요정목이 아니게 되는 게 아닌데.”
“그래서 뭐 어쩌겠어? 서리바람에서 나오는 게 요정목이 아니라 다른 것인데. 티란디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지.”
“그리고 나면? 그럼 신단목? 신단목으로 이름을 바꾸면? 왕실에서 신단목을 내놓으라고 할 텐데.”
“그럼 신단목도 없어지겠지. 다음은 뭐로 할까? 엘프목?”
“……언제까지 이름을 바꿀 셈인데?”
시엔이 대답했다.
“내가 나뭇가지 하나조차 줄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 * *
쾅! 주먹이 테이블을 때려 큰 소리가 났다.
자그마치 요정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이었다. 단단하기가 바위보다 더하다는 엘프들의 신목이 아니던가.
주먹이 무언가를 쳐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으면? 그 충격이 고스란히 주먹으로 돌아왔다.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
페벨룬 왕국의 국왕이 제 손날을 연신 주물렀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나 아프다 소리 지를 수 없는 것이 왕의 체통이었다.
대신 분노만 더해, 안 그래도 후끈 달아오른 머리에 김이 솟을 지경이었다.
“이 반역자 새끼들! 왕비와 붙어먹을 때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고정하십시오, 폐하.”
레이알드의 건너편, 흐레이그 공작이 분노한 왕을 진정시켰다.
티란디스에서 징수한 세금은 요구량만큼 걷을 수 있었다.
다만 그 품질이 문제였다.
몇 년은 족히 묵은 곡식들이라 맛도 영양도 형편없는 비루한 하품이었다.
영지마다 비상책 혹은 군량으로 품은 비축 식량 중 가장 오래된 것을 추려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딱히 문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왕국 전체의 작황이 참담하기 이를 데 없으니, 오히려 다른 귀족들의 세금을 반절로 깎거나, 곡물을 대신한 다른 것으로 받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황에 홀로 추가분을 납부한 티란디스에게 곡식의 질을 따져 문책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당장 봄에 기근이 찾아올 것이 보이는 때였다. 이만큼만 해도 대단한 성의를 보인 것이 사실이었으니.
명분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 속이 빤히 보이는 우롱이어도, 실제로 성의를 보인 셈이라 그저 속앓이를 할 수밖엔 없는 그런.
레이알드가 그 부분에서 한번 분노했다.
그리고 납세 편에 동봉한 서신이란.
요정목은 엘프에게서 나는 것이라, 엘프에게 문제가 생겨 이미 가진 것이 없으니, 봉헌하고 싶은 마음은 하늘과 같으나 그러할 능력이 없어 죄송하다는 서신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여 알아보니, 티란디스가 수출하여 파는 목재가 신단목이라 하는 별개의 것이라더라.
그러나 조사관의 사견으로는 완벽히 일치한다 하니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오냐, 한 번 해보자 하니 요정목이 신단목이 되었고, 신단목이 엘프목이 되었으며, 엘프목이 서리목이 되었다.
절대 왕실에 보내는 일이 없을 것이란 의지의 표명이었다.
“공작. 나는 이미 기회를 줬어. 기회를 줬다고.”
“맞습니다. 폐하.”
후작이 와병을 핑계로 볼모로 잡힌 제 핏줄을 전부 빼가니 먼저 삐딱선을 탔다.
볼모로 잡혀있다고 해서 가문이 망하거나 할 일은 아니다. 그저 왕세자가 자리를 잡고, 왕가가 왕권을 굳건히 세울 때까지 순순히 따르라는 그런 뜻이 아니던가.
왕가가 가혹한 징발 요청을 한 것은, 그 괘씸함과 반항에 대한 본보기 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티란디스를 어찌 해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 뻗대고, 이걸로 눈 감아 줄 터이니 순순히 고개를 숙이라는 그러한 손짓이 아니었던가.
“빌어먹을, 반역자 놈들, 감히 은혜도 모르고…….”
레이알드가 벌건 눈으로 몸을 떨었다.
흐레이그 공작이 속으로 생각했다.
‘은혜를 아는 분께서 왕비님을 내치셨습니까?’
레이알드는 충분히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왕의 덕목은 두뇌가 아니다.
왕이라 하여도 손은 두 개, 눈으로는 하나를 바라볼 뿐이 아니던가. 훌륭한 이를 알아보아 곁에 두고 함께 국정을 도모하는 것이 왕이 가져야 할 능력이었다.
레이알드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왕재가 아니었다. 그걸 보완하여 여기까지 이끌어 준 이가 알린 왕비였다.
사람을 보아 그 진가를 꿰뚫고, 사람을 존중하여 대우할 줄 알아 제 편을 만들어 절대 놓치지 않았으니 예사 인물이 아니다.
레이알드가 영리하여 역시 이를 알았다. 왕비를 질투하여 이를 갈다 결국 내쳤다.
흐레이그 공작이 생각하기로, 세상 가장 귀하게 태어나 타인에게 열등감을 가진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결국, 제 자식마저 부정하며 이참에 이르지 않았던가.
델피르 왕자가 진실로 왕손인지 부정의 산물인지는, 유폐된 왕비, 아니면 부정의 대상자라 하는 검위공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은.
‘뭐. 모자란 자식은 그렇게 쓰기 위해 입히고 먹여 키우는 것이니.’
물론, 이 모든 흐름이 흐레이그 입장에서는 그저 잘 된 일이었지만.
아마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기엔 아직 먼 시간이 남았으리라. 이러한 왕이니 제 죽을 때까지 권력을 취하여 놓지 않겠지.
그러나 늙은이는 가고 젊은이는 살아가니, 나중에 때가 되어 흐레이그의 핏줄이 왕위에 오를 테니까.
“이 고약한, 불충한, 감히, 어찌 해야.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 군대를 소집하여. 공작, 어떻게 안 되겠소?”
“진심이십니까?”
“그럼 이 반역을 가만히 놔두겠나!”
흐레이그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반역이라니.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왕에 입에서 튀어나와 가장 나쁜 말이 반역이었다. 입에 담아 좋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현명한 왕은 일생 말하지 않는다 하던가.
“폐하. 황송하오나 티란디스의 행동이 방자하여 무례하나, 그들 역시 폐하의 백성, 그러한 마음은 꿈에도 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 이런 기만을 보인단 말인가?”
“얕은 수작입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버티어, 이후 귀족파의 중심을 획책하려는 것이지요.”
왕가가 공격적으로 귀족을 억압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왕권이 충분히 서고 나서 이 사태가 정상화 되고 나면, 이젠 귀족이 뭉쳐 다시 왕권을 줄이려 노력해야 했다.
그 때에 구심점은 누가 되겠는가.
흐레이그는 이미 왕세자의 배경이라 왕당파에 속했다.
애초에 앙숙이었던 티란디스가 지금의 위세를 유지하려면 그 방법이야 하나뿐이었다. 귀족파의 중심이 되어 이끄는 수밖에는.
그러니 지금의 반항이 차후를 위한 것이리라. 오히려 귀족파의 수장으로 지위를 다지면 지금의 위세보다 더 큰 권력을 쥐게 되는 셈이었다.
‘역시 티란디스. 곱게 당하지 않아.’
흐레이그 공작이 지금껏 보아 그 정치력이 탁월하다 감탄한 인물이 몇 없었다. 티란디스 후작이 개중 한 명이니, 와병을 핑계로 가문을 이끄는 설계가 앙숙이라도 대단하다 인정할 만하지 않은가.
“그게 반역 아닌가! 감히 제 권력을 취하여 왕가에, 그리고 나를 기만하는 것이 바로 반역이지!”
“고정하시오서, 폐하.”
“크흠.”
왕이 헛기침을 했다.
이쯤 열불을 냈으면 맞장구 한 번을 쳐줄 법도 한데 그럴 기색이 없었다.
“흠흠. 그래서, 그 고얀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요정목을 내놓지 않겠다 하니, 목재라도 징발해야겠지 않겠습니까.”
요정목은 티란디스의 특산품이었다. 그러니 봉헌을 핑계로 내놓으라 할 수 있었다.
목재는 티란디스가 아니라도 구매하여 들이는 것이니, 봉헌하여 내놓으라 요구하기는 상장히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먼저 억지를 쓴 것이 누구랴.
“억지에는 억지로 대처하는 것이 맞겠지요. 목재도 없다 하여 우길 수는 없을 터이니.”
* * *
왕궁 신축에 막대한 목재가 필요하니, 마침 많이 나는 티란디스가 좀 보태 달라.
터무니없는 요청이었다.
이런 논리라면 세상 부자는 모두 빈자를 위해 금화를 써야 할 터였다. 모든 강자는 약자를 위해 힘을 써야 하고.
이 얼마나 끔찍한 논리인지.
“억지를 쓰네.”
“이젠 어쩔 셈이야?”
“어쩔수 없지. 주자,”
“그냥 준다고?”
“그냥은 못 주지.”
역시. 로우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은 그렇지 않은, 그런 목재는 어디 따로 처리하는 부분이 있을까?”
“나무에 병이 들면, 바로 밀어놔야 퍼지는 걸 막아. 대개는 그대로 쌓아 말리고 겨울이 되면 썰어 땔감이나 쓰라 푸는데. 그걸 보내자고?”
“이제부턴 감정싸움이거든. 이제는 달라는 대로 다 줘도 좋은 꼴은 못 봐. 게다가 뭐. 공짜로 달라면 그런 것밖에는 못 주잖아?”
“공사 자재로 속이 썩은 것들을 보내면, 분명이 말이 나올 텐데…….”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멀쩡한 것들로 준비한 거지.”
“뭐?”
“운송 과정에서 상했거나, 아니면 왕가의 운반원들이 중간에 빼돌려 싸구려로 채웠거나. 우리는 특별히 상등품들로 엄선해 보냈으니, 뭐. 도착해서 상품이 엉망이어도.”
“우리 책임이 아닌 거네.”
로우드가 미소를 지었다.
시엔과 닮은 얄미운 표정이었다.
* * *
‘안 터지는 게 용할 정도로군.’
흐레이그 공작이 그리 생각했다.
그 정도로 왕의 표정이 가관이었던 탓이다.
“이 반역자 놈들을……”
흐레이그 공작이 침묵했다.
공작의 생각에도 이번 처사는 도를 넘었다 싶었으니까.
속병이 들어 땔감 말고는 도저히 쓸 데가 없는 폐품을 진상이라 내놓았으니 국왕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티란디스 후작이 이렇게 과감하고 또 치졸한 인물이었던가. 아무리 왕가와 대립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줄 심산이라고 해도,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이 아닌가.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특히 후작 같은 인물에게는 더욱 더.
아마 귀족파의 수장이 된 이후의 행보를 지금 과시하려는 측면이 크겠지. 왕가와 정면으로 대립하니, 이후로도 왕권의 축소를 위해 어떤 방법도 불사하지 않겠다는 그런.
게다가 왕국에 가뭄이 들자, 티란디스의 재력은 오히려 더욱 튼튼해졌다. 원래 그러한 자연 재해의 영향을 받지 않는 땅이었으니.
게다가 가시렌 왕국에서 뜬금없는 대신전을 짓는다며 요정목의 가격이 금값을 넘었다던가.
원래 부유하기로 왕국 제일이었지만, 이대로면 부와 권력 모두를 손에 넣는 셈이었다.
‘후작의 속셈대로면 안 되지.’
언제까지 귀족들을 왕성에 볼모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풀어주고 나면?
티란디스의 이름 아래 모여 세력을 형성하고 나면, 현 국왕은 몰라도 차기 왕권에선 꽤 많은 부분을 내어줘야 하리라.
‘이제는 선을 넘었다.’
흐레이그 공작이 결정을 내렸다.
먼저 선을 넘은 것은 티란디스이니, 이제는 완전한 개싸움의 시작이 되리라.
“폐하. 티란디스를 징치하기를 원하십니까?”
“오오, 역시 진정한 충신이란 그대뿐이지. 왕가와 흐레이그가 이미 한 가족이니 새삼 충신이라 할 것도 없어.”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서 말해 보게나.”
“티란디스가 가시렌과 계약을 맺어 요정, 아니 서리목을 공급하고 있으니, 이것이 불가하다면 오히려 큰 위약금을 물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리하여?”
“만약에, 아주 만약에, 요즘 흉흉하여 도적떼가 일어나 목재 행렬을 습격하면 아주 큰일이겠지요.”
레이알드가 눈을 빛냈다.
“안타까운 일이 되겠구려.”
“그 도적 떼가 워낙에 신출귀몰하여, 그 꼬리조차 찾지 못하도록 자취를 감추면. 그리하면 더욱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딱한 일이 되겠어.”
그러나 레이알드의 표정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흐레이그 공작이 그저 허리를 깊숙이 숙일 뿐이었다.
< 26. 정치와 말장난이 다른 것이 없음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