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믿음에 대하여 [6] >
사방이 막힌 장소에 사람이 많고, 또 저마다 발광하여 땀을 듬뿍 흘렸다. 게다가 바깥과 달리 아직 마경이 손을 뻗지 못한 공간이었다.
음차원 에너지가 가득한 상쾌한 장소에서, 난데없이 땀내 가득한 닫힌 곳에 불려왔으니 곧바로 불쾌감이 몰려들었다.
시엔이 굳이 참아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엔은 이럴 때에 참지 않았다.
당장 뒤엎고 멱살을 잡아 패대기쳐 무슨 짓이냐 추궁할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 바로 몸으로 스미는 익숙한 마력 때문이었다.
낯선 것이나 또한 익숙하니 곧 천 년 전의 흑마법사가 품고 있던 마력이었다. 영혼을 따라 새로운 신체에 스미니 마경을 여느라 지친 몸이 단숨에 회복되었다.
“성유해. 그리고 소환 술식.”
둘을 조합하면 결론이 나왔다.
성유해를 촉매로 소환 의식을 벌인 모양. 시엔이 가장 가까이 엎드린 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보다 옷차림이 화려하니 바로 이 이가 우두머리리라.
“왜 나를 불렀지?”
“지고한 분이시여. 당신께서 재림을 약속하셨으니, 따르는 저희가 때를 맞이하였을 뿐이옵나이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경애와 존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니 오히려 의아한 일이었다.
게다가 재림을 약속하다니? 흑마법사는 재림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선언을 했다. 다시 돌아와 너희 놈들 목을 뽑고 시체를 불태워 버리겠다는 그런 으름장이었다.
그걸 약속이라 부른다면 부를 수는 있겠지만. 돌아와 죽여 버리겠다는 약속.
그런데 어찌 기꺼이 맞이하여 어서 오시라 고개를 조아린단 말인가.
“······나를 아나?”
“저희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 중 가장 위대하신 분, 약하고 하찮은 이들의 복수자이시며, 인간 세상을 낙원으로 이끌 혁명가이십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는 맞는 말인데. 나머지는 뭐야?”
* * *
사내는 네 명의 흑마법사를 데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 강대한 마력을 가진 리치 하나와, 금지된 연구를 아무 가책 없이 자행하여 인간의 속을 떼었다 붙였다 태연히 주무르는 마녀.
그러나 이 둘이 난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살았다면 사내를 찾을 터이나 그렇지 않으니 아마 죽었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그 외의 흑마법사 여인이 둘이었다.
메이화와 이에인.
바깥에 마경이 열렸으니 흑마법사라면 능히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면, 조금만 생각이 있어도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경이 열릴 때가 아니고, 열릴 장소가 아니니 바깥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메이화는 현재 알아차리자 못했다.
외연 세계와의 교신으로 생명력을 급격히 소진한 통해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
다른 흑마법사, 이에인 메스타르트는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이에인? 왜 그러지?”
“아니, 아니에요, 자기.”
이에인은 그냥 알고만 있기로 했다.
외연과의 교신은 사내와 메이화의 공동 연구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에인의 연구는 아직 그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이번 거사 사내가 특별히 준비하여 온갖 공을 들인 것이니, 잘못되어 결과가 나쁘면 그 화가 누구에게 미치겠는가.
바로 저기 찬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져 있는 메이화의 것이었다.
게다가 기회는 이번 한 번뿐.
바깥의 것. 별의 조각은 소모품이었다. 외연 세계의 방문자를 맞이하는 데에 쓰이는 물품이며, 그리고 나면 곧장 그 효능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외연 세계의 방문자를 불러오는 데에 별의 조각을 지불하고, 돌려보내는 데에 영혼 이천 개를 지불하는 그런 거래였다.
그런 단 한번뿐인 중요한 일을 망쳤으니, 사내의 성격상 더는 참지 못하고 내칠 것이 뻔했다.
그러면 그이의 유일한 흑마법사가 되겠지.
사랑하는 연인이 실패를 겪는 건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그이의 곁에서 계집 하나라도 더 떼어낼 수 있다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여인들이 서로 눈빛을 맞췄다.
다른 여인들 역시 마도를 걷는 이들이라. 마경까지는 모르지만 이질적인 마력이 흐르니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흑마법사는 아니라도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눈빛을 마주하여 서로 수긍하니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모른 척 하는 것으로.
사내의 업보기도 했다.
사랑을 강제하고, 여인들이 서로 질투하여 성과를 다투어 잘 보이도록 술수를 걸었다.
그 부작용이 이렇게 돌아왔다.
“재림교 놈들이 늦어. 이 빌어먹을 것들. 병신 같은 것들. 떠먹여 줘도 삼키질 못하는 저능아 새끼들 같으니.”
사내가 분통을 터뜨렸다.
“발륜,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성유해를 전달하라 하지 않았나? 문제가 있었나?”
“그렇게 했어요. 그럼 제가 감추기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럼 진작 당신께서 알았겠죠!”
“그런데 왜 이리 의식이 늦어지지? 벌써 소환되어 신격을 얻었어야 할 때인데.”
“저는 몰라요. 재림교도에게 소환식을 가르친 건 메이화 언니잖아요? 뭔가 잘못 가르쳤나 보죠.”
발륜이라 불린 소녀가 은근슬쩍 과를 돌렸다. 사내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젠장. 메이화! 빌어먹을, 언제까지 처자고 있을 셈이야! 저것 좀 깨워 봐.”
“메이화 언니는 지금 가사 상태에요. 생명력이 한 번에 나갔으니 깨울 방법이 없어요.”
“그럼 페제. 네가 생명력을 채워.”
페제라 불린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쟨 흑마법사야. 흑마법사한테 신성을 끼얹으라고? 죽일 셈이야?”
“젠장!”
사내가 초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시간이 촉박해지는 참이었다.
재림교도들에게 소환되어 인간의 신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와, 만인의 앞에서 외연 세계의 방문자를 맞아 이 사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면 인간의 신이자 왕국을 구한 영웅이 되리라. 민심과 마법으로 단숨에 왕국을 장악하고, 나아가 대륙을 도모하는 그 시작점이건만.
그때였다.
메이화의 발치에 떨어져 있던 별의 조각이 빛나기 시작했다.
요요한 보랏빛.
보라야말로 가장 혼돈과 가까운 색상이었다. 붉고 푸른 정반대의 색상이 한데 섞인 것이니. 외연의 혼돈이 바로 이러한 색이었다.
외연의 방문자가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안 돼! 그게 오잖아!”
사내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젠장, 이렇게 된 거 재림교도는 포기한다.”
손해를 보았다면 지체하지 말고 잘라야 한다. 손절이라 하는 개념이었다. 이해는 쉬우나 인간의 본성이 따르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로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자의 미덕.
사내가 다시 말했다.
“봉인된 성유해를 가져와. 신격은 포기라더라도, 왕국을 구하는 건 내가 해야 하니까.”
* * *
“달이······! 바로 지금이에요.”
달이 회색에 삼켜질 때에 최대한의 신성을 내뿜으라 했던가. 그게 시엔이었는지 그저 경황 중에 본 헛것이었는지, 아니면 천신께서 내리신 계시 비슷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으리라. 뷔아가 손을 모았다.
빛이 터져 나왔다.
온통 잿빛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찬란한 빛의 날개가 하늘 높이 솟았다.
흰 고리가 뷔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뒤이어 광휘의 폭풍이 사방으로 방사되었다.
-키아아악!
-뀨! 뀨우!
-그워어어어!
부정 세계의 마물들이 공포에 질려 등을 돌렸다. 먹던 인간의 살과 피를 포기한 채, 그저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줄행랑을 놓았다.
“아앗, 아아아······.”
광인들의 입에서 광소 대신 연약한 신음만이 터져 나왔다.
부정한 것을 바로잡는 강력한 힘. 강력한 신성에 뒤틀리고 변질된 영혼이 서서히 본모습을 되찾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광인들이 멍하니 설 뿐이니 공격성을 잃었다.
마물은 물러가고, 미친 이는 멈추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인간들,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휘두르던 기사며 병사들, 마차 속에서 그저 덜덜 떨던 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천신이시여.”
인간이 가장 절박할 때에 찾는 것이 바로 신이라. 또한, 절박할 때에 구원받음이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 모든 이들이 진실한 신자였다.
진실한 마음이 한데 모여 천신을 우러르니, 성녀뿐만 아니라 순간 모든 지성이 신성을 뿜어 광휘를 더했다.
그림자는 빛 앞에 물러나고 마는 것이라.
세상에 색이 돌아오고, 노오란 달이 다시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 * *
부정 세계에 시선이 닿았다.
부정한 대기 위로 거대한 눈동자 속, 수천수만의 동공들이 거칠고 척박한 땅을 훑었다.
부정 세계의 마수들이 이변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대가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미 검은 것이 다른 색으로 변할 수 없고, 또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허수의 존재라 격의 차이가 충격이 되지 않았기에.
부정 세계의 마수들이 이내 관심을 잃었다.
그리고 눈동자의 아래, 그것이 있었다.
처음엔 손가락이 하나, 그리고 그 아래 위아래 없는 발목이 하나 나타났다.
이내 손가락과 발목이 팟 자취를 감추고, 대신 그 위로 머리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오란 세 개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머리통이 다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곤 계속해서 신체 일부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퍼즐을 맞추듯 계속해서 신체 일부며 내장과 뼈와 핏줄 따위가 허공에 나타나고 사라졌다.
이내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나서야, 그것이 만족한 듯, 세 개의 눈이 동시에 아치를 그렸다.
그것이 말했다.
『지성. 없다.』
기괴한 언어였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발음.
쇠 긁는 소리와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 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광풍이 몰아치는 소리를 한데 뭉쳐놓은 듯한 그런 언어였다.
『거래자. 없다. 찾는다.』
그것의 눈동자가 사방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다시 말했다.
『일원우주의 심장 조각. 가장 큰 것. 탐색.』
그리고는 그것이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부정한 대기에 떠오른 거대한 눈이, 위아래로 밤의 장막에 먹히며 스르륵 닫혀 함께 사라졌다.
마수들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만.
* * *
과거, 진정으로 인류를 사랑하던 위대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를, 인간이란 일국의 왕으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중하여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인간이 태어난 것이 제 의지가 아니니, 부모에 따라 높고 낮음이 결정되는 것이 부당하다 여겼다.
그러한 뜻으로 사람을 모으니 그러한 뜻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 어느새 국가를 이루었다.
오로지 위대한 마법사 한 명 아래, 지상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낙원 국가였다.
사람이 사람을 부리지 않으니 서로 존중하여 아끼는 마음이 높고, 그러하니 죄인이 없고 모두 당당하여 하루하루가 행복한 그런 낙원과 같은 나라였다.
그러나 이에 위기를 느낀 위정자들이 합심하여 이 나라를 공격하니, 마침 하필이면 마법사께서 자리를 비우셨던 때였다.
마법사가 돌아와 나라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잿더미요 참혹한 죽음뿐이라. 이에 제게 속한 모두를 대신하여 천벌을 내렸다.
신에 영역에 도달했으나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태를 한 마법사였다. 그분께선 대륙 전체를 상대하기에 충분했으나, 인간의 악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적들이 감화한 척 군세를 자처하여 방심케 하고, 중요한 때에 이르러 배신하니 간악한 술수에 결국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최후, 육신이 죽었으나 그 위대한 영혼이 살아 말하기를, 내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못 다한 낙원을 다시 건설하겠다.
그 때에 남을 부려 착취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 자, 부질없는 출생으로 남을 핍박하여 귀한 생명을 해한 자, 그러한 귀한 생명을 마음대로 재단한 악을 모두 뿌리 뽑을 것이다······
“잠깐. 그게 누구 이야기인데?”
“그야 위대하신 당신께서 하신 일입니다.”
“내가?”
“예. 당신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럴 수가, 아니란 말입니까?”
“누군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이야기는 아니야.”
대사교가 눈을 부릅떴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에 이럴 수는 없다는 강력한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사교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제가, 이 미천한 것이, 이 어리석은 것이 당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시어 이끌어 주십시오!”
“사람 잘못 찾았어.”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 뭘 보고 그리 확신하지?”
“당신께서 내리신 이 힘이 당신을 증명합니다. 꿈에도 그리던 당신이심을 어찌 앞에 두고 모르겠습니까!”
대사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에 흑광이 일었다.
신성이되 신성이 아닌 것. 음차원 에너지와 상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비슷한, 그러나 분명한 생명력을 품은 신성이었다.
“신성이라.”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성이 사람의 믿음으로 비롯한다는 가설은, 성자성녀의 존재를 제외하면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거짓된 것을 진실로 그러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가설상으로는 신성을 피워올릴 수 있을 터.
광신.
어떤 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미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검은 신성을 마주하여 시엔 역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낮선 것이나 마치 내 것인 양 익숙했다. 보아 느껴서 바로 아는 직관이었다.
저것이 내게서 비롯한 것이구나.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 이름이 뭐지?”
“미천한 당신의 종, 갈가스 엠하트입니다. 그러나 삿된 이름이니, 당신께서 부르시는 대로 온전히 따르겠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굴종이었다.
시엔이 민망하여 반쯤 장난으로 물었다.
“내가 누렁이라 부르면?”
“오오. 당신께서 그리 불러주십니까! 저는 누렁이입니다. 당신의 누렁이입니다!”
누렁이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대개 누런 털을 가진 개에게 붙여주는 것이었다.
대사교가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는 누렁이다 크게 외쳐대니, 오히려 농을 건넨 시엔이 당황할 수밖에.
< 25. 믿음에 대하여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