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믿음에 대하여 [4] >
거대한 화염구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서서히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는 화염구. 사람들의 고개가 자연히 점점 위를 향해 치솟았다.
그리고 어느새 저 멀리, 까마득히 높은 곳에 이르러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불무리.
온갖 색의 화염이 꼬리를 달고 사방으로 펼쳐졌다. 마치 유성우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불길이 밤하늘에 녹아들었다.
검은 화폭이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물들었다. 수천 가지 색이 휘돌아 몰아친다. 색안개들이 나풀거리며 얽혀 나뒹굴었다.
“아…….”
옆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들려왔다. 트리예가 몽롱한 표정으로 그저 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확실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하늘이 한층 더 절정에 이르렀다.
무지갯빛 밤하늘에 빛줄기가 선을 그렸다.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원이 하나. 그 안쪽으로 수천 개의 동심원이 펼쳐졌다. 삼각 사각 복잡한 도형들이 이어져 자리를 잡아 복잡하게 교차했다.
마치 거대한 술식과 같은 조형에, 시엔이 트리예의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불꽃놀이가 원래 이런 건가?”
“그렇답니다. 소녀가 보았을 때는 이보다 훨씬 못한 것이긴 했지만요. 그간 연구하여 계속 개선한 것이 아니겠어요?”
“원래 이런 거라고? 저것도?”
시엔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어느새인가 확연히 그 몸집이 불어난 달이 시엔의 손가락 끝에 걸렸다. 위와 아래의 쌍극점에서부터 푸르고 붉은 빛이 비쳐 중앙에서 만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달이 눈을 떴다.
달의 표면이 눈꺼풀처럼 위아래로 열렸다.
일곱 개의 눈동자가 하나의 원 안에 들어찼다. 두서없이 날뛰며 바삐 움직이니 지상의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라.
“저건, 저건 아니에요. 뭔가 잘못된…….”
그제야 트리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달이 눈을 뜨는 때에 거사를 행하라.
처음 대사교의 지령을 들었을 때에, 에반 베이드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그러한 은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했다.
무두질이나 하는 어리석은 몸. 그러한 어려운 명을 알아듣지 못할까 두렵다 하니 대사교께서 뭐라고 하셨던가.
때가 되면 마땅히 깨닫게 된 거라고.
“……이제 깨달았습니다.”
말 그대로 달이 눈을 떴다.
대사교가 말한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에반이 끌어안고 있던 가죽 부대의 뚜껑을 땄다. 안에 든 것이 기름이었다.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에반이 가죽 부대를 들어 사방으로 쥐어짜며 흩뿌렸다.
“앗, 뭐야, 씨.”
“어우, 냄새. 뭐야? 기름?”
“어떤 놈이야! 가만 안 둬!”
엄한 기름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욕설과 불평을 터뜨렸다.
에반뿐만 아니었다.
광장의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에반과 같은 행동을 하니, 아름다운 불꽃에 취했던 광장이 깨어나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등불들이 하늘을 날았다.
광장이 온통 사람으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아무렇게나 날아간 등불들이 사람의 머리며 어깨에 맞아 깨어졌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개중에 기름이 튄 이가 있어, 곧바로 붙이 붙었다.
비명이 터졌다.
-꺄아악! 살려 줘! 도와줘!
인파가 몰려 어깨와 어깨 등과 등이 맞닿도록 사람이 빽빽한 곳이라. 불이 붙어 몸부림을 쳐도 그저 손과 발이 사람에 채일 뿐이었다.
그 서슬에 불꽃이 튀고, 또 옮겨 붙으니 순식간에 광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름이 튀었다 하나 흠뻑 젖을 정도가 아니고, 그리하여 몸에 불이 붙어도 침착히 대처하면 금세 진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 몸에 불이 붙어서 냉정할 이가 있으랴.
정신을 놓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팔다리를 휘저을 뿐이니, 서로 밀치고 밀며 잡아당기고 사이를 갈라 빠져나가고자 할 뿐이었다.
온갖 아우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 * *
불꽃놀이가 가시렌 왕국의 명물이 된 것은 꽤 오랜 전통이었다.
아예 왕궁 마법부에 불꽃놀이를 위한 연구실과 직속 마법사를 두고 있으니, 왕가 차원에서 밀어주어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왕가의 중요 행사에 보여주어 그 민심을 사로잡는 수단이었으니, 투자한 만큼 이익을 톡톡히 누리기는 했다.
특별한 순간들이 대개 그렇듯이, 가시렌 왕국의 불꽃놀이 역시 아무 근거 없는 미신이 존재했다.
남녀가 함께 보아 연인이 되면, 이후로 앞날이 행복해진다나 하는 그러한 미신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열 달이 지나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이 유난히 많기는 했다. 그러니 마냥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것은 아니었지만.
오슈는 평범한 청년으로 소꿉친구인 에스테와 함께 불꽃 구경에 나온 참이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인 사이라, 이 참에 확실히 승부수를 걸어보다는 속셈이었다.
물론 에스테 역시 그 속셈을 뻔히 알았다.
함께 불꽃을 보자는 말에, 네가 간절하니 마지못해 알겠다는 듯 따라 나왔으니 그녀 역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유난히 아름다웠던 올해의 불꽃놀이. 그리고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분위기가 무르익는 순간이었다.
비명과 고함 같은 것이 귓가에 스쳤을 때, 오슈가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바로 깨달았다.
오슈가 에스테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스테, 빨리 빠져나가자. 뭔가 좋지 않아.”
그러나 에스테는 가만히 서서 버틸 뿐이었다. 손을 잡아당겨도 그렇게 버티고 서서 하늘을 바라볼 뿐이니,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지금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아. 이러지 말고 일단은 피하는 게.”
“보고 있어.”
“응?”
“보고 있다구.”
에스테가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이 와중에 더욱 비명이 번지고 밀치며 치대는 인파가 몰아닥쳤다. 오슈가 에스테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지금 당장 빠져나가야 해.”
“봐봐. 날 보고 있어. 날 본다구.”
“에스테?”
“히힛. 히히히힛. 하하핫!”
에스테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귀청을 긁는 날카로운 웃음소리. 거기엔 무언가 등골을 서늘케 하는 어떤 광기가 서려, 오슈가 깜짝 놀라 주춤 물러났다.
“에스테? 대체 왜…….”
에스테는 그저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가. 오슈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달과 눈이 마주쳤다.
아득히 거대한, 아득하게 위대한, 감히 인간 따위의 한낱 먼지와 같은, 어떤 다른, 어떤 바깥의.
“히힛…….”
오슈의 입에서 광기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격이란 존재이며, 존재는 또한 다른 것을 보아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너무나 큰 격을 마주한 존재는, 스스로 비천함을 깨닫고 혼자 무너져 내렸다.
시엔이 달을 보았을 때, 달 역시 시엔을 보았다. 요동치는 눈동자가 지나는 길에 잠시 스쳐간 찰나의 순간, 그 짧디짧은 순간의 마주함이 커다란 충격이 되어 영혼을 때렸다.
저것은 신격. 천신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천신처럼 온유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증오하는 것도 아니니, 그저 상관없는 것을 보아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바깥 것. 직관적인 이해였다. 저러한 것을 표현하는 데에 그만한 단어가 또 있으랴.
바깥이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안은 또한 무엇인가. 이 세상을 안이라고 하면, 바깥은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 그러하다면 이런 하찮은 삶이 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그럴 바에야 스스로 소멸하여.
시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짭짤한 피맛이 마른입을 적시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절대 고개를 들지 마.”
“시엔 님?”
“내 말 들어. 절대 고개를 들지 마.”
달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깥과 잠시 통로가 열렸을 뿐이니, 그 틈새로 바깥 것의 시선이 그저 들락거릴 뿐.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나, 눈이 마주치면 세상의 지성이 버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것은 너무 거대하고, 또한 우리는 미물조차 되지 못한 것이니. 저것은 만 년을 만 번 반복하여도 여전히 어리고 젊은 것이니, 겨우 백년이란 일초와 같이 짧은 것.
그러하다면 백년을 사나 일 초를 사나 같은 것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시엔이 이를 으득 갈았다.
일순간의 마주침이 이렇게 지독한 후유증을 가져서야. 시엔의 정신세계가 허수 차원에 닿아 강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시엔 님?”
“절대 고개를 들지 마. 이대로 빠져나가서 세올과 합류해. 그대로 이 난장판을 벗어나 가문으로 복귀하도록.”
“시엔 님? 시엔 님은요?”
“먼저 가. 나는…….”
시엔이 한쪽을 바라보았다.
광장의 중앙, 코끼리가 소란에 이성을 잃고 날뛰는 중이었다.
육중한 짐승이 발을 놀리면 그 아래 인간들이 곤죽이 되어 남을 뿐이었다. 짐승이 날뛰니 탑과 같은 행렬 마차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뒤를 따랐다.
개중 성녀가 있었다.
트리예가 표독스레 외쳤다.
“저 계집! 하지만 시엔 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려구요!”
“독은 독으로 제압해야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엔이 대답했다.
“마경을 열 거야.”
* * *
“꺄악!”
“정신 차려! 왜 이래!”
“살려줘!”
바깥 것을 마주하여 미쳐버린 이들, 무너진 정신들이 인간의 본성을 따랐다. 그저 앞에 보이는 것을 치고 찢고 부수어 그 살과 피를 게걸스레 탐하니, 지성 아래 감추어진 인간의 성질이었다.
어미가 자식의 머리를 쥐어 몸통에서 뜯어내고, 친우가 친우의 멱을 물고 피를 마셨다.
미치지 않은 이는 공포에 질려 그저 피하고자 할 따름이니, 우르르 몰려 그저 막아선 것을 밀치며 헤쳐나갈 뿐이라.
발에 걸려 넘어지면, 일어날 새도 없이 겁먹은 발자국이 그 위에 쌓였다.
겁먹은 군중 아래, 넘어진 이의 몸통이 밟히고 갈빗대가 부러져 폐를 찌르니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숨이 끊어진 시체의 팔다리가 다른 이의 발을 걸고, 그렇게 넘어지면 또다시 밟혀 다져져 살점이 흩어졌다.
행렬 마차의 꼭대기. 뷔아가 몸을 떨었다.
뷔아가 달을 보았고, 달이 뷔아를 보았다. 거대한 충격이 성녀의 영혼을 덮쳤다.
“아, 아아…….”
“성녀님?”
영혼이 비틀려 변질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뷔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느꼈다. 오롯한 애정만이 담긴 자애로운 시선.
성녀가 기도하여 항상 느끼던 것이니, 바로 천신이 보아 존재를 보증하는 관찰이었다.
“큭. 웨엑.”
뷔아가 피를 한 줌 토해냈다.
소매로 입가를 훔친 뷔아가 다급히 말했다.
“위를 보지 마세요!”
“성녀님?”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아아. 천신이시여. 어찌 이러한 시련을 주십니까.”
뷔아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천신의 보우하심으로 영혼을 지켰으나, 또한 그로 인해 알았다.
천신께서도 그저 하찮은 영혼 하나를 지켜주셨을 따름이니, 그보다 더 연약한 이들에게 그분께서 하여 주실 은혜가 없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뷔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온전히 신과 그 비슷한 무언가. 이미 이 장소, 이 사건이 인간 세계의 행사가 아니기에.
“성녀님?”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요.”
뷔아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찮은 우리가.”
“성녀님!”
라이벵이 뷔아를 붙잡고 흔들었다.
“당장 빠져나가야 합니다. 일단 후퇴하여 이 상황을…….”
“어?”
뷔아의 눈동자에 빛이 되돌아왔다.
돌연 광장 저편에서 끔찍한 기운이 터져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정한, 끔찍하고 사악한, 가슴 속 어딘가 선득하니 파고드는 그러한 언짢음.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간 미약하나마 이미 겪어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뷔아가 광장 저편을 바라보았다.
“시엔?”
* * *
적은 어떠한 방법으로 세계의 경계를 비틀어 바깥과 통로를 냈다 가설을 세울 수 있으리라. 덕분에 바깥의 것의 시선이 현상 세계에 닿고 있겠지.
그러니 이 공간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꿔버릴 생각이었다.
마경.
현상 세계와 부정 세계가 사람의 정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통하는 장소를 말함이었다.
허수 차원이란 관념 세계에 속해 실재하나 실재하지 않는 곳이니, 마경을 열어 바깥 것과의 통로를 부정 세계에 이어붙이고, 다음에 마경을 닫아버리면 되지 않을까.
뭐.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어차피 이 자리에서 굳이 구해야 할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미안한 생각이지만, 친구가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은 아니잖은가.
그러니 시도나 한번 해보고. 안 먹히면 그때는 알아서 살아남길 빌어줄 수밖에는.
< 25. 믿음에 대하여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