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믿음에 대하여 [2] >
“어. 그게, 그러니까. 제가 본 사람 중에서 딱히 그 여자만 한 미모가 떠오르질 않아서요. 헤헤······”
“마법사라는 녀석이 상상력이 그렇게 모자라서야. 눈코입이라도 좀 바꿔보면 될 것을.”
“어. 이 조형이 이미 최선인 것 같아서. 해봤는데 오히려 역효과만 나고. 이목구비란 거 하나하나 빼어난 것도 있지만 전제적인 조형이 아름다움을 이끄는 것인데······.”
“쯧.”
시엔이 혀를 찼다.
강신체라고는 하나 아는 얼굴이라.
굳이 보아 떠올리니 이제 와서 귀찮다 하여 괜찮겠지 하고 넘기기엔 시엔의 적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비록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시엔이 끼어들어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기에 만들어진 빈틈이 아니었던가.
성도가 폭발하고 나선 아무도 그러한 목소리에 웃지 못했을 터. 역병에서부터 이르기까지 적이 가진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수완까지 우습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적이 흐레이그와 붙어먹었다.
이 참에 할른폴드에서 녀석을 잡거나, 혹은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만 있다면? 왕세자 측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왕가에서도 겨울까지는 딱히 어떤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리라.
이미 한 번 서둘러 무리수를 두었으니, 당분간은 왕세자 역시 그 수습에 열을 올려야 할 테니까.
그러니 일신의 귀찮음을 극복하면, 할른폴드에 다녀오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됐고. 외출 준비나 해둬.”
“선배님?”
“모르는 얼굴도 아니고 당장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차피 한번 가볼 생각이었고.”
* * *
가시렌 왕국.
대륙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대국 중 제일로 꼽히는 대국이었다.
현 대륙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왕국이며, 중북부 곡창지대에 터를 잡고 가장 많은 왕국민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왕국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공식적인 방문은 어려웠다. 딱히 명분이 없었으니까.
국왕의 탄신연이 있다고 해도, 멀리 떨어진 왕국의 귀족 하나가 축하한다며 방문하기엔 영 모양이 안 살았다.
게다가 시엔의 적이 있으니, 그런 식으로 신원을 노출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랴.
비공식적인 방문이라면, 가장 큰 난관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어느 왕국이건 아무나 받아 들어오라 허락하지는 않았으니.
왕국과 왕국의 국경을 당당하게 드나드는 이가 있다면, 바로 상인들이라.
물론, 그럴 때마다 세금이 누적되니 황금으로 그 값을 치르는 셈이었다.
“제출된 인원과 다른 이가 있나?”
“그것이, 제 아들놈하고 새아가가 있습니다요.”
“아들이라고?”
“인마 뭐해, 인사드리지 않고.”
탑리프 상단의 책임자 엠파스툰이 제 아들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안녕하세요.”
“마! 왜 이리 맥아리가 없어? 내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몇 번을.”
“아, 거참. 또 잔소리를.”
“아니, 이놈이!”
“알겠어. 알겠다니까.”
기사가 아들이란 놈을 바라보았다.
대답에 성의가 없고, 귀찮다는 듯 상황을 모면하려 들 뿐이 아닌가.
“크흠.”
“아. 죄송합니다, 경. 이것이 워낙에 서류만 보고 살던 놈이라. 경험차 데려왔더니…… 에이.”
“원래 자식이 마음대로 되는 법이겠소. 고생이 많으시겠어.”
“그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혹시 경께서도.”
“그래도 내 아들은 이미 다 커서 제 갈 길 다네. 그래도 품에 있을 때가 좋은 법이야. 떠나고 나니 또 이게 안 보여서 걱정이오.”
“자제분께서 벌써 독립하셨습니까?”
“아직 말단이나 기사단에 들었지. 애비 후광 안 받겠다 수도로 가더니, 한참이나 무소식이더니 갑자기 기사가 되었고 결혼했다 편지를 보내는 거야.”
“자수성가라. 어휴. 부럽습니다.”
기사가 은근히 제 자식 자랑을 했다.
엠파스툰이 부러운 눈빛을 보내자, 기사의 어깨가 활짝 펴지고 콧대가 치솟았다.
“훈육에 어떤 비법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애가 좀 아둔해서 그렇지, 말 하나는 잘 들었지. 딱히 훈육이란 것까지는······”
“위법품목 없습니다!”
마침 병사가 짐 수색이 끝났다 소리치니,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본래는 하루 동안 구금해야 하나, 후계 교육을 하신다는데 매정하게 나올 필요는 없겠지. 바로 관무청에 가서 서류를 제출하시오. 추가세도 지불하도록 하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자. 통과!”
마차가 관문을 넘었다.
관문이 뒤로 멀어지자, 상단주가 넉살 좋게 제 아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무례는 용서하시겠지요?”
시엔이 피식 웃었다.
“상당히 능숙하네요?”
“사람 상대하는 일이야 본디 하는 일이 아닙니까. 홀란 경의 아들 사랑은 꽤 유명해서 굵은 상인이라 하면 전부 써먹는 일이죠.”
“써먹는다구요?”
“원래는 깐깐하기 짝이 없는 이인데, 아들 자랑을 좀 들어주면 관대해지지 않습니까.”
“흠. 그렇다 쳐도 생각보다 밀입국이 너무 쉬운데.”
“하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상인을 통해 밀입국을 시도하는 이가 거의 없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엄벌에다가, 이후 유통이 막혀버리면 상단 하나 박살나는 것이 일도 아닙니다.”
애초에 밀입국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왕국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들어와 사고를 치면 이후 입국을 거절하면 그만.
상인이 유통을 잃으면 상인이랴.
그러니 상단 입장에서도 타국에선 몸을 사리고 얌전히 움직였다. 상인에게 부탁하여도 밀입국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없는 편이라고.
하지만 그 주인이 그리하겠다면 어쩌겠는가.
티란디스가 목재 취급을 위해 상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아예 없지는 않다는 거네요.”
“이름난 상단이야 금화를 아무리 준다 해도 푼돈에 불과하니 받겠습니까? 탑리프의 이름을 알 이는 다 아니 별문제 없이 이리 통과입니다만. 영세한 상단이었다면 이리 넘어가진 않았을 겁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밀입국이 이루어지기는 한다는 소리라. 페벨룬 왕국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법이 없으니.
“그나저나,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상행 마차란 본디 호신이 우선이라 그리 편리한 것이 못 됩니다만.”
“편하다고는 못 하겠네요. 어쩔 수 없죠.”
천 년 전 흑마법사에겐 이보다 더 궂은 여정도 익숙한 것이었으니. 겨우 불편한 마차 따위야 뭐.
* * *
이후 몇 개의 국경을 넘어, 마침내 가시렌 왕국에. 그리고 그 중심인 할른폴드에 이르렀다.
“이게 할른폴드인가.”
“어머, 할른폴드는 처음이신가요?”
“알 바 아니었으니까.”
국왕이 거하는 도시란, 기술이 왕국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다. 그러니 번화하고 발전한 것이야 어느 왕국이건 왕도가 최고임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전경이 어떠한가.
까마득히 높은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요새와 같은 꼴이었다.
해자 위로 드리워진 현수교를 건너, 성문을 통과하니 그 깊이가 바로 성벽의 두께라. 어지간한 최전선의 중요 거점보다도 더 두꺼운 성벽은 왕도로선 꽤 이례적인 설계가 아닌가.
“거기에 대마법 방어까지 갖추고.”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성벽 자체가 하나의 술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술식 내부의 마력 흐름을 방해해 마법사의 마법 사용을 몇 배나 어렵게 만드는 종류였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마법 방어가 도시 내부로 향하네?”
“할른폴드엔 소드마스터가 셋이나 상주하고 있답니다. 원래부터 마법사를 높이 쳐주지 않는 곳이라, 기사의 세가 높기 때문이여요.”
트리예가 공손히 설명했다.
왕도 방어의 대부분이 무력에 의존하니, 아예 마법 방해를 펼쳐놓았다.
“그럼 이제 어찌할까요? 시엔 님?”
“일단은 좀 둘러보자고.”
“그럼, 실례하겠어요.”
트리예가 시엔의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시엔이 상단주의 아들 역할이며 트리예가 그 아내로 입을 맞추어 들어오지 않았던가.
이미 도시에 들어와 남의 눈치를 살펴 연기를 계속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조심하겠다면 하지 말라 할 일도 아니다.
도시는 온통 들뜬 분위기였다.
대로엔 사람이 넘치고, 그 사이로 꼬맹이들이 뛰고 달리며 꺄르륵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머리 위로 줄을 이어 색색의 천을 매달았다.
원래는 넓었을 길이나, 양옆으로 줄을 이어 마련된 좌판에 그 폭이 이미 절반이었다. 좌판의 잡상인들이 한 번 와 보시라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으레 축제라면 넘쳐나는 꼬치 좌판. 무언가 푹 끓여 고은 스프와 맥주 따위를 파는 곳. 어설프게 만든 장식물로부터 제법 그럴듯한 가짜 귀금속까지. 온갖 종류의 좌판들이 규칙 없이 늘어서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다.
그런가 하면 인형사들이 인형극을 펼치고, 유랑 음악가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하프를 켜고 피리를 불었다.
국왕의 탄신제였다.
개중 시엔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시엔이 눈을 빛내며 다가가니, 상인이 손님을 반겼다.
“생긴 건 이래도 맛은 끝내준다니까. 어째, 하나 드릴까?”
“시엔 님?”
“트리예도 먹을래?”
“어. 소녀는 괜찮답니다.”
“그럼 하나만.”
“하핫, 잠시만 기다리쇼. 내 실한 걸로 궈 드릴테니.”
시엔이 꼬치를 손에 쥐었다.
동전 몇 개 치고는 상당히 실한 양이었다. 유난히 긴 꼬챙이에 길쭉한 것이 여덟 개나 꿰였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뚜라미였다.
시엔이 하나 통째로 씹어 우물거리며 물었다.
“악식엔 소질이 없나?”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좀.”
“왜. 의외로 괜찮다니까. 이것도.”
흑마법사는 독이 몸 안에 들어와 스미지 않았다. 독을 제어하여 몸속에 둘 줄 아니, 기실 다리 달린 것이라면 뭐든 먹어도 탈이 나는 법이 없다.
악식이라 하는 흑마법사의 기술이었다.
천 년 전의 가장 멀리에 있던 흑마법사가 어떻게 제국과 맞설 수 있었겠는가.
제국이 청야 전술로 흑마법사가 당도하는 모든 곳을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으니, 그 와중에 살아 계속 전쟁을 벌인 것이 전부 뛰어난 악식 덕분이었다.
맛이 써 도저히 먹지 못할 해충으로부터 독버섯에 이르기까지. 그저 살기 위해 먹었다.
개중 해롭지 않다 하는 것들은 오히려 맛이 좋다 여기지 않았던가.
쌍겸 귀뚜라미 역시 개중 하나였다.
“음. 별로 맛이 없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생각이 나 산 것인데, 지금 먹으니 의외로 맛이 없었다.
하기사. 그 절박한 때에 먹어 맛이 있던 것이 아니던가. 대귀족의 공자님으로 잘 먹는 지금에야 당연히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시엔이 트리예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트리예도 하나 먹어 봐.”
“방금 맛이 없다 하시지 않으시었나요?”
“다 경험이지. 경험.”
“하지만 시엔 님.”
“어떤 맛인지를 알아야, 나중에 먹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각오를 다지지 않겠어?”
꼬치를 보는 트리예의 표정이 비장함으로 물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 마리 물어 입 안에 가져가니, 차마 씹지는 못하고 어설프게 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 으어어.”
“통채로 삼키려고? 다리가 목에 걸리면 한동안 좀 괴로울 텐데.”
“암시한, 시한으 옴 힐호······.”
잠시만 시간을 달라는 말이리라.
시엔이 미소를 머금었다.
한 마리 먹어 보니, 워낙에 실해서 그런지 속까지 제대로 안 익었더라. 내장이 거의 날것이라 비리고 쓰니 얼마나 고역이던지.
“욱. 으에.”
트리예의 입에서 귀뚜라미의 잔해가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새 낯빛이 시퍼렇게 질린 꼴으로, 시엔을 바라보는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시엔이 트리예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나머지는 챙겨 둬. 세올한테도 줘야지.”
“아. 맞아요, 그래야지요.”
죽상이던 트리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트리예의 말에 따르면, 탄신제의 절정은 심야에 열리는 불꽃놀이라고.
탄신연이 끝나면 왕가의 행차가 중앙 광장에 이른다. 그리고 나면 방화광들이 하늘을 향해 불꽃을 쏘는 순서가 이어진다.
그 아름다움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마치 현상 세계의 풍경이 아니라 느껴질 정도라고 하니 할른폴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절경이라는 것이다.
“불꽃놀이? 불꽃을 쏘아올린다고?”
“예. 정말로 아름답답니다. 시엔 님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소녀가 정말 행복할 것이에요.”
트리예의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기대하는 마음에 상기된 표정이었으니.
“별로 상상은 안 되는데.”
어두우니 불꽃이 잘 보이기는 하겠지만.
하늘에 불을 피워봐야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광경이라고.
“그나저나, 딱히 잡히는 게 없어. 내일은 교단과 접촉하기로 하고. 그 불꽃놀이인지 뭔지나 보고 돌아가면 되겠다.”
적들의 수작 뒤에 항상 성유해가 있었다.
영적인 영역에서 내 소유인 것이라, 시엔이 느끼고자 마음을 먹고 집중하면, 어지간한 거리 안에선 감지해 낼 수 있었다.
할른폴드가 바로 적들의 본거지이니, 여기를 돌아다니면 감각에 잡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니 내일은 교단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왕성과 원로원이라 불리는 수도 귀족의 저택에 방문하면, 개중 성유해를 가진 놈이 있으리라.
적을 특정하고 나면, 다음엔 응징만이 있을 뿐이었다.
원래는 최상위 마법으로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만, 마법 방해 때문에 좋은 생각은 아니리라.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대죄인을 풀어야겠지.
저번 파도등대행에서, 붉은 보석을 불길하고 정신세계에 간섭하니 좋지 않다 하여 두고 나오지 않았던가.
덕분에 용을 마주하고 대적할 방법이 없었으니. 용이 호의적이었기에 망정이니, 아니었다면?
그러니 그때부터는 항상 가지고 다니기로 결심을 했으니. 마음을 먹었다.
적을 특정하고 나면,
영원한 밤의 창날 한 방이면 저택 한 채는 간단히 지워버릴 수 있으니.
그러나 마법 방해 때문에 여의치 않으니, 이때야 말로 대죄인을 풀어놓을 기회였다.
순진무구는 안 되겠고.
부패한 환희가 나름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 참에 현상 세계에 한번 마실을 나오면 되지 않을까 하고.
< 25. 믿음에 대하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