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믿음에 대하여 [1] >
어느 자리건, 취임 후 첫 행보가 그 성향과 기호를 나타내는 법이었다.
시엔이 대공자가 되자마자, 새로운 사업안을 제시했다. 도로 공사에 전력을 쏟아붓는 내용이었다.
재무관인 로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정신이 아냐. 이걸 하겠다고?”
“그럼, 못할 것이 뭐가 있어?”
“하지만……”
로우드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영지 내 통행 환경 개선을 위한 사업안]
현행 빈민 구제책의 일환인 신도로 건설 사업을 영지의 총력을 기울인 목표로 한다.
하나.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각 거주구의 인구당 할당 인원을 차출한다. 다섯 개 대도시를 각 거주구로 삼아, 도시와 가까운 촌락을 합하여 각 400명을 목표로 한다.
건장한 성인 남성을 최우선으로 하며, 그 봉급은 최하위 상인 계급의 수입과 같이 계산한다.
둘. 생활권 밖에서의 행사라 이에 따른 경비가 필요하다. 각 대대는 공사 인부 열 명당 한 명의 베테랑 병사를 배치하여 경비 임무를 수행한다.
셋. 공사는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실시하며, 기한은 설정하지 않는다.
넷. 영지의 특성상 시야가 좁고 맹수 및 모스터의 출현이 예상되니, 모든 인부에게 경무장을 지급하며, 또한 배치된 병사로 하여금 기본적인 호신술을 습득하도록 한다.
로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이건 군대잖아. 군대를 대놓고 육성하겠다고? 그것도 다섯 개 대대를?”
너무 노골적인 말장난이 아닌가.
대도시와 그 생활권의 촌락을 합하여 징발하는 인구가 400명. 한 개 대대의 편제였다. 거기에 무장을 지급하고, 베테랑 병사들을 교관으로 붙여 군사 훈련을 실시한다는 내용이 아닌가.
영지의 다섯 개 대도시에서 각자 편성하면 다섯 개 대대가 생기니 그 숫자가 이천에 이르렀다.
왕국법에 영주가 소유할 수 있는 군대의 숫자가 제한되니, 명백히 왕실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군대? 이런.”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곤란하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어.”
“그렇게 보이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렇게 보이더라도 어째. 전부 영지의 발전을 위한 사업인데. 다소 오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해라고?”
시엔이 장난스레 미소를 머금었다.
“오해는 서로 잘 대화하면 풀리기 마련이지. 모든 책임은 내가 져. 이대로 해.”
“젠장. 나도 모르겠다.”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보자고. 재정은 어때? 지출을 버틸 수 있어?”
“이천 명을 먹이고 입히려면 명백히 적자야. 특히나 요즘같이 곡물값이 뛴 상황에서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요즘 사업이 좀 주춤한 걸로 아는데.”
“군량으로 햇곡을 들이고, 묵은 것들을 비싸게 팔려고 했지. 네 계획대로라면 묵은 곡식을 그냥 유지에 돌려야겠지만. 내년에 분병 기근이 찾아올 테지. 지금은 전부 황금으로 지출할 수밖에는 없어.”
“그러면?”
“얼마나 버티냐는 별 의미가 없어. 버티자 작정하면 얼마건 못 버틸까. 서서히 말라갈 뿐이지.”
결국 영민들을 부리는 것이니, 동원하여 임금을 주지 않더라도 제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이 순리였다.
지금이야 넉넉한 품을 쳐준다 해도, 적자가 계속되면 그러한 부분이 계속해서 나빠지리라.
“그럼 이대로 진행하고.”
“정말 괜찮겠어?”
“그럼. 뭐가 문제야? 영주가 영지를 위해 사업을 벌이겠다는데.”
“젠장. 이젠 나도 모르겠다.”
로우드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로우드뿐만 아니었다.
시엔이야 시키면 그만, 세세한 부분이야 전부 영지의 행정부가 처리하는 일이었으니.
갑자기 날아든 일거리에 모두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나 어쩌랴. 주인이 하라면 하인은 그저 따를 뿐이니.
* * *
“안녕하세요, 대공자님! 무르스 파람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물길잡이지요. 앞으로 삼 년간 티란디스의 마법사로. 오. 티란디스의 마법사라니. 어쩐지 어깨가 으쓱한데, 이래서 가문에 파견나가는 게 좋다 하나 봅니다.”
시엔이 파도등대와 계약할 때에 마법사 하나를 파견해 주면 좋겠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바다에서 사는 물길잡이답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무엇보다 수더분한 청년이었다.
시엔이 왕성에 머물고 있을 때 이미 후작저에 당도하였다 하나,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등대에만 있다 내륙에 들어오니 참 좋네요. 일단 땅이, 히야. 땅을 밟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실 겁니다. 물론 간혹 그게 안 되는 녀석도 있긴 하지만요.”
“안 된다구요? 내륙으로 들어오는 게?”
“뭐. 정신의 문제랄까요? 등대에선 막히는 곳 없이 사방이 트여있으니, 이런 내륙에 들어오면 거의 답답하게 느껴지곤 해요. 그게 심한 녀석은, 거의 밀실에 갇힌 기분이 든다던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정도라고 하던데.”
“호오.”
“그래서, 뭔가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사실 좋은 밥 먹고 좋은 방에서 좋은 침대에 누워 자고 일어나고. 편하긴 한데, 아무것도 안 하려니 영 심심해서.”
“흠. 사실 해주실 일이 있긴 한데.”
무르스가 눈을 반짝였다.
“기왕이면 크고 화려한 일이었으면 좋겠네요. 첫인상이 원래 중요하다고, 가문의 마법사로 들어가면 크게 한 방 보여줘야 얕보이지 않는다고 들었거든요.”
시엔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리 기대하는 표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지만은.
“파도등대에 서신을 좀 전해주셔야 하는데.”
무르스가 눈을 꿈뻑거렸다.
“어. 제가요?”
“중요한 서신이라 함부로 맡길 수가 없는 것이군요. 새어 나갔다간 정말로 큰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제가 직접 전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르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기껏 가문의 마법사로 파견을 나와, 처음으로 하는 일이 파도등대에 다녀오라는 것이었으니.
시엔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비는 넉넉히 챙겨드릴 테니, 그저 여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알겠습니다아…….”
그렇게 무르스가 퇴장했다.
그러나 어쩌랴. 중요한 서신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르스가 나가고 나자, 집무실에 딸린 쪽방에서 흰 머리칼의 소년이 모습을 내밀었다.
저번 페시번 구출 때 느낀 것이었지만, 사람의 인상이란 생각보다 쉽게 바뀌는 법이었다.
머리의 색과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니, 델피르가 탈색하여 흰 머리카락을 했다.
왕자는 내키지 않는 내색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리 내 입 밖으로 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서로 갖고자 하는 것이 충돌하여 양보할 수 없다면, 피가 흐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이런 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어할까.”
서신의 내용이 보통 것이 아니었다.
이후 어떤 막대한 재화를 약속받더라도, 페벨룬 왕국에 비를 내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으니.
시엔의 허락이 없으면 비구름 장사 자체가 불가능하니, 파도등대가 굳이 시엔의 부탁을 어길 이유는 없으리라.
물길잡이가 왕국을 순회하며 지역마다 사흘의 비를 내렸다 하나, 아직은 한참이나 모자란 양이었다.
추가로 구름을 끌지 못하면 이듬해엔 흉악한 기근이 찾아오리라.
그러나 그게 무어 대수랴.
어차피 티란디스 영지는 세계수의 비호 아래에 있었다. 왕국이 가뭄이라 해도 촉촉한 대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 영민도 아닌 이들이라, 딱하긴 해도 그것이 힘없는 주인을 만난 그네들의 업이었다.
그 구제는 저희네 영주에게 구해야 할 것이니, 시엔이 상관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시엔이 빙긋 웃어보였다.
“바른 생각이십니다. 전하께선 좋은 왕이 되시겠군요.”
“그러면 지금이라도.”
“하지만 아직은 그들이 전하의 백성이 아닙니다. 전하를 사랑하며 따르는 이들이 아니지요.”
델피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조만간 왕국에 소문이 돌 예정이었다.
비를 내린 것이 1왕자의 업적이고 또한 그러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그를 시샘한 2왕자가 자객을 보내 습격했으니, 수계 마법사들이 노하여 더는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니 첫 번째 잘못은 2왕자에게 있고, 두 번째 잘못은 부덕함을 알면서도 왕세자를 책봉한 국왕의 탓이라.
소문이 돌고 나면, 가뭄 탓에 굶고 병들면 그 원망이 누구에게 향하랴.
“하인이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명령하여 듣더라도 그저 그뿐. 성실하지 않는 법입니다. 왕세자가 민심을 잃으면, 그때엔 뜻하는 바가 전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겠지요.”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는 법이었다.
그저 태워 멸망시킬 작정이라면, 굳이 이러한 번거로운 수작을 부릴 이유가 무엇인가.
당장 바깥 것, 붉은 보석을 손에 쥐고, 대죄인을 풀어 앞세우면 왕국에 치명적인 재앙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왕을 세우는 일이었다.
왕이 제대로 서기 위해. 그저 힘으로 찍어눌러 왕좌를 쟁취한들 그 마음까지 잡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진정 왕국을 위해 필요한 왕, 그리고 그러한 능력이 있는 왕임을 증명해야 했다.
지금 가진 명분이란 왕좌를 빼앗긴 왕자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아직 민심이 이 편이 아니라 그리 효험이 있는 명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은 민심을 흐리고, 왕실에 대립하여 그 갈등을 점점 키워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계속해서 삐대며 약을 올릴 작정이었다.
현 왕가가 먼저 검을 빼들 때까지.
비로소 그때야말로 부덕한 왕가를 규탄하고, 도덕적 우위를 내세워 델피르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으리라.
강력한 명분이 서면 다른 귀족들도 선택을 하게 될 터. 그렇게 휘하에 세력을 두고 나서야 비로소 왕이 탄생하는 법이었다.
* * *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 중 하나.
유리한 때에 유리한 장소에서 싸울 것.
그러니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도로 사업의 인부들이 전투 훈련에 충분히 적응을 해야 했다.
그리고 가뭄에 수확을 망쳐 겨울과 봄을 굶주리도록 놔둘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티란디스는 굶지 않으니까.
거기에 왕실과의 갈등을 꾸준히 키워나가야 하니 당장에 더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 교단에서 편지를 전해왔다.
성녀에게 온 것이라, 시엔이 편지를 뜯었다.
「시엔에게.
토메쏘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에 대해 각 마탑에 수배를 문의했어요.
화염탑에서 전언이 돌아왔고, 가시렌 국으로 향한 것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해요. 실종자라는 거죠.
마침 가시렌 국왕의 탄신연이 멀지 않았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성전기사단과 함께 가시렌 왕국에 방문할 예정이에요.
뭔가 더 알아낸 것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할게요.
마탑에서 보내온 토메쏘의 초상을 첨부하도록 할게요.
-뷔아 샤인 세러헤드」
담백하게 용건만 담긴 편지였다.
그리고 여인의 초상이 한 장.
또 여인이라. 시엔의 적이 매혹으로 여인을 부리는 모양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좋지 않은데.”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각 마탑에 녀석의 첩자가 숨어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 각 마탑에 문의했다는 말은, 시엔의 적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때에 방문이라면 적이 미리 함정을 준비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리라.
물론 제 앞마당이라 함부로 수작을 부렸다간 교단과 척을 지게 되겠지만. 아마 교단의 행사가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겠지.
하지만 적의 수작이 워낙에 과감한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교단과 척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새였으니.
물론 교단의 인사도 멍청이들은 아니라, 성녀와 성전기사단의 무력을 믿어 추진한 일이리라.
“흠.”
잠깐 다녀와야 하려나. 시엔이 고민했다.
교단이 위험에 처했고, 그게 당장 눈앞에 있다면야 무고한 이들을 돕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먼 걸음을 하여 나서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교단의 행사를 도와야 할 의리가 있던가? 물론 명예 성자라며 이상한 이름을 받기는 했다만.
시엔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됐다! 됐다고! 드리어 이 세올, 평생의 연구가 여기서 빛을 발하는구나! 꺄하하하!”
-아, 선배. 좀 놓고 이야기를.
-드디어 됐다고! 됐어!
-아니, 좀 놔! 놓으라고.
귀족의 방엔 하인을 위한 작은 쪽방이 딸렸다. 시엔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의 연구실이 보통 사람이 보기에 영 좋지 못한 몰골이라, 쪽방에 연구실 겸 두 여인의 거취로 쓰던 참이었다.
난데없이 소란스러우니 시엔이 인상을 찌푸리며 쪽방의 문을 열었다.
한 몸처럼 얼싸안은 여인 둘이 그 서슬에 놀란 눈으로 되돌아보았다.
트리예가 급히 몸을 비틀며 세올을 밀쳤다.
“뭐야?”
“아. 선배님, 드디어 강신체 구현에 성공했지 않습니까? 이 세올, 기나긴 시간 열중한 노력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겁니다!”
인간의 구성과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 강신체의 구현이 바로 세올의 연구였다.
제대로 된,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신체를 얻겠다는 오래 묵은 리치의 집념이기도 했다.
“오. 축하해.”
“헤헤 별말씀을요. 선배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건데요.”
세올이 선심이라도 쓰듯 덧붙였다.
“아. 트리예도 뭐. 쪼오금 돕긴 했지만요.”
트리예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하. 기가 막혀서. 선배. 수식 반절은 누가 만들었는데 지금 뭐라구요?”
“이백년 연구에 숟가락만 얹은 것뿐이거든? 연구에 네 이름 끼워주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할 판이지. 그럼.”
“하, 하!”
세올의 당당함에 제대로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트리예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당찬 숨소리만 높였다.
시엔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디 한 번 보지.”
“아. 잠시만요. 라-하트라 이브뉴 세올……”
세올의 입에서 사악한 진언이 새어 나왔다.
리치의 등판에서 해골의 상반신이 솟았다.
보통의 강신체라면 여기서 끝이리라.
그러나 세올의 주문이 이어지고, 앙상한 갈빗대 안쪽으로 장기가 샘솟고 핏줄과 근육이 점차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문이 완성되었다.
여인의 상반신이 리치의 세올의 배후에 부유하여 떠올랐다. 감은 눈을 뜨니, 이전처럼 텅 빈 눈구멍이 아니라 제대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성공하긴 했네. 그런데.”
리치가 가진 욕망의 결정체였다.
그냥 육신이 아니라, 아름다운 육신을 얻겠다는 사심 가득한 욕망이었다.
그러니 그 외양이 어떠하랴.
입으로 소리를 내어 표현하기엔, 그 어휘가 오히려 무색해지고 말 정도였으니.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시엔이 인상을 팍 구겼다.
“왜 하필 성녀야?”
< 25. 믿음에 대하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