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결국 훔친 이가 져야 할 것이니 [2] >
“공자의 무례는 용서해야겠어요. 이러한 방법을 써서라도 나를 보고자 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왕자님의 행방을 알고 계셔야 한다 생각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왕비가 코웃음을 쳤다.
“공자가 아직 나를 모르는 모양이야. 사람이 태어날 때에 이미 그 성격이 정해지지. 평생 그렇게 사는 천형이거든.”
“천형이라.”
“나는 이미 한 번 패배했단다. 왕위를 손에 넣지 못하고 페벨룬으로 쫓겨난 몸이지. 그래, 그러면 어때. 나라는 바뀌었지만, 갖고자 했던 것은 여기에도 있으니까. 그런데 또 지고 말았네? 여기 화려한 감옥에 갇혀서.”
왕비의 흰자가 번들거렸다.
입으로 하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패배자의 표정은 그 미래와 같은 법이었다.
허탈하여 눈빛은 꺼지고 절망이 내려앉으면 그 미래 역시 마찬가지도 어둠 속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갈며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계속 패배자로 남아 있지는 않으리라.
“그이는 참으로 멍청하기도 하지. 수십 년을 아군으로 곁에 두고서도, 내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거야. 가두려면 궁이 아니라 감옥이어야 했고, 그게 아니면 목을 베거나 매달았어야지.”
“그 말씀은.”
“나는 기다릴 참이었단다. 얌전히 없는 사람처럼 지내면서. 사람의 마음이 그래. 별 일 없으면 점점 풀어지기 마련. 방심한 사자는 사슴에게도 치여 죽기 십상이지. 내가 빠져나가면, 어디로 갈 것 같니?”
“타스테스테입니까.”
“맞아. 외세의 침략에 불타 한낱 공국으로 전락하더라도, 나는 그걸 손에 쥐기를 바라. 그러니 공자가 날 염려하여 찾아준 것은 고마운 일이야. 그러나 과한 기우에 불과하단다.”
왕비의 얼굴이 도저히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 몰골에 더욱 어울리는 말이었다.
“오 년. 내 오 년을 허락해 주겠어요.”
“오 년이라 하시면.”
“공자가 그때까지 내게 확신을 주지 못하면, 그때는 내가 직접 움직일 생각이랍니다.”
왕국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꼴이었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외세를 끌어들여 대전을 벌이겠다는 그런 협박.
게다가 그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왕성의 경비란 비단 수월궁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비가 탈출하여 왕국을 가로질러 국경을 넘는 일이란, 그 어려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걸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란 전혀 없으니, 누가 들으면 집을 나와 이웃집에 가 버리겠다는 아이의 선언과 비슷한 꼴이 아니던가.
그러니 절로 쓴웃음을 지어질 수밖에.
“그러나 내 공자의 마음을 잘 알겠어요. 내 가장 어려운 때에 염려하여 이리 와 주었으니 참으로 기꺼운 일이로군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만.”
“내 따분한 생활이 이어질 것이 아찔하다 여겼는데. 간혹 와서 말벗이라도 해줄 수 있겠어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마마께 전해드린 것이 흉악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라. 건장한 사내라도 한 달이면 말려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룻밤 꿈을 일 년의 악몽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하면?”
“가까운 성물 아래에 두시면 곧장 힘을 잃고, 이틀이 못 가 효능이 사라지니 그리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알린 왕비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왕비 같은 유형의 인물은 무료함을 가장 두려워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모든 시간을 저를 위해 쓰는지라, 그것이 비는 것을 참아내기 힘들어하기에.
“또 할 일이 없어 무료해지고 말겠네요. 좋아요, 공자.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 * *
꿈에서 나온 시엔이 생각했다.
물러가도 좋다니.
때와 장소를 잘 맞추어 태어났다면, 역사에 남을 대왕이 되고도 남았을 인물이리라. 그러나 삶이 꼭 맞는 장소에 나지는 않는 법이니.
왕비와는 별개로, 현 상황은 완벽하게 패배하고 만 꼴이기는 했다.
1왕자파는 가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혈족을 볼모로 잡혔고, 왕비는 유폐되었으며, 왕가친위대는 각 변경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시엔이 왕도에 남아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영지로 돌아가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시엔 역시 볼모로 잡힌 몸이었다.
영지로 돌아가겠다 해봐야 갖은 핑계를 다 대며 막아낼 것이고, 말싸움을 벌여 봐야 왕명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날아들 것이 뻔했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야 교단이 있었다.
뷔아에게 편지를 써, 불러내 여기서 좀 빼내달라 부탁하면 당장에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왕성에도 신관이 있으니, 샤인의 이름을 가진 시엔이 만나겠다 하면 저들이 어쩌겠는가. 그렇게 신관에게 편지를 전해달라 하면, 막을 방도가 없으리라.
혹여 국왕 측에서 편지를 가로채거나 하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성자의 편지를 가로챘다간, 왕국 전체에 신전이 문을 닫고 철수하는 수가 있을 터이니.
왕의 부덕으로 신전이 철수했다? 왕가의 힘이 뿌리째 뽑혀 박살나는 순간이리라.
교단의 무서움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그저 신전을 걸어잠그고 철수하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
“교단은 좀 그렇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나,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혼자라는 것이 단점이었다.
로우드 녀석이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가문의 혈족을 적지에 놔두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이랴.
시엔이 굳이 수고를 들여 페시번을 빼돌린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뭐. 아직은 기다려 보면 알겠지.”
귀족이란 기본적으로 영리한 이들이었다.
이번만 해도 보라. 미처 어떤 수를 쓸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으니.
특히나 작위가 높고 가문이 가진 세가 강할수록, 그 수장이 영리함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흐레이그 공작이 그 녀석과 손잡고 벌인 여러 사건들만 봐도 그랬다. 시엔이 흑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누가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티란디스 후작 역시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왕국의 대귀족으로 손꼽히는 후작이니 그게 보통 인물이랴.
당장 지금에 와서도 감기가 심하다며 로우드를 대신 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쯤이면 상황을 파악했을 테니, 후작 역시 제 핏줄을 빼내려고 하리라.
그리고 앓아누웠다 했으니 조만간 소식이 들리리라. 후작이란 인물이 그 정도는 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닷새 후, 왕성에 전령이 도착했다.
-티란디스 후작이 현재 쓰러져 매우 위중한 상태. 주치의의 소견으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니, 그 자식들이 전부 복귀하여 차후 수순을 준비할 것.
참으로 절묘한 한 수였다.
감기로 쓰러진 사람이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농담이라면 피식 웃음을 거둘 수 있는 것이리라.
애초에 감기라는 병이 못 먹고 몸이 부실하여 생겨나는 것이니, 후작이 그에 걸렸다며 왕성에 오지 않을 것 자체가 반쯤은 조롱에 가까운 일이었다.
왕성으로 오라고? 수상하니까 못 가겠다. 이러한 뜻이 담긴 노골적인 거절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제 와선 생명이 꺼져가니 자식들을 돌려달라 편지를 보낸 것이다.
대충 해석하면 이런 뜻이리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보내주면 분명 문제가 생기고 말 것이니, 이번엔 한 대 맞았다 교훈 삼아 순순히 자식들을 내놓도록 해 달라.
아비가 죽어간다는데 자식을 붙잡고 있을 명분이 없었다. 왕명으로 막을 수는 있겠으나 그 감당은 어찌할까.
볼모로 잡은 목적이 무엇이던가.
국왕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회유가 되지 않더라도 귀족 본인이나 후계자의 빈자리를 오래 지켜 세를 약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억지로 막아서는 오히려 구금된 1왕자파가 더욱 뭉쳐 독이 오르고 말리라.
곧이어 시엔과 로우드가 왕성을 빠져나왔다.
* * *
시엔이야 후작이 진짜 아프건 말건 별 상관하지 않았지만, 로우드는 상당히 마음을 졸이는 기색이었다.
복귀 내내 빨리 가자 재우치며 난리였으니.
마침내 돌아와, 로우드가 헐레벌떡 뛰어 후작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후작이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위중하시다 들었는데.”
“병은 낫는 법이다.”
후작이 간단히 대답했다.
로우드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병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낯이 아닌가.
로우드라고 해서 그러한 소식을 철석같이 믿었겠느냐 만은, 그래도 혹시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던 탓이었다.
느긋하게 발을 들인 시엔이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자, 후작이 고개를 돌렸다.
“우습나?”
“거야 뭐. 감기로 쓰러지셨다 들었을 때부터 웃기긴 했습니다만.”
“그래서. 어쩔 셈이냐.”
이제 막 도착한 참이라, 아직 자신의 방에 발조차 들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본론이 날아들었다.
“전하께서 여기에 계시고. 흐레이그의 적통도 우리 손에 있지 않나요?”
“현재 상황으론 매우 어렵기도 하지.”
명분은 충분하나, 세력이 부족했다.
시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도박을 좀 해보니 알겠더라구요. 판돈이 커야 대박이 터지는 법이던데요.”
“큰 돈이 걸린 판에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기는 판에 큰돈을 걸지.”
도박으로 따는 이와 잃는 이의 차이점이었다. 승리하는 판에 돈을 걸어야 금화를 얻는 법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뛰어난 도박사는 승리하는 판을 볼 줄을 알았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국왕은 2왕자를 지지하고, 2왕자는 흐레이그의 핏줄이죠. 지는 판이라고 발을 빼면, 세간 살림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게 없을걸요?”
“국왕도 흐레이그의 독주를 바라진 않겠지.”
흐레이그가 왕자에 붙어 그 세를 불릴수록, 왕권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국왕은 적당한 제후급 귀족 하나에게 힘을 실어 견제하게 할 수밖에 없으리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견제할 귀족은 많잖아요? 게다가 후작님께서 이미 삐딱선을 타셨으니, 미운털이 꽤나 박히셨을 텐데요.”
그게 꼭 티란디스라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 복귀에 감기라는 핑계를 댔으니, 국왕이 보기에 괘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뭐. 가문의 중대사이니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네요. 후작님께서 결정하셔야죠.”
시엔이 한발 물러섰다.
“알린 폐왕비와의 연결이 네 작품이었지. 어찌 보면 이 사태가 그 연장선이 셈이다.”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상대는 흐레이그였으니까요. 제가 왕비마마와 친해지지 않았더라도, 2왕자는 흐레이그의 핏줄인 건 변하지 않았을 텐데요.”
“인제 와서 책임을 미룰 셈이냐?”
“가문의 주인은 후작님이시죠. 따라서 책임 역시 그 주인에게 있는 법이구요. 그러한 자리가 아니었나요?”
후작이 대답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책임을 지도록. 대공자에게는 책임이 따른다.”
“아버지?”
로우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후작이 무심한 눈길로 로우드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나?”
로우드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니요. 이렇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애초에 누님은 집을 나갔고, 저는 비설 양을 선택했을 때부터 사실 작위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귀족의 반려란 가장 큰 정치적 동맹군이기도 했다. 로우드가 유력한 가문과의 혼인을 포기하고 비설을 따라다녔으니, 그때 이미 승계에 있어 가장 큰 무기를 스스로 놓아버린 셈이었다.
“시엔이 작위를 승계하더라도 뭐 바뀌는 것도 없을 테고.”
승계 경쟁이 심해질수록, 후계 후보들끼리의 갈등 또한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앙숙이 될 지경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비단 가문 승계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형제 자매이기에 오히려 냉혹해지는 것이 귀족가의 승계 경쟁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로우드야 전혀 부담이 없는 편이었다.
“다만 대공자 임명이 뭔가 상당히. 흠. 단출하네요. 제 생각과는 다르게.”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엔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거야 병중이시니까.”
“응?”
“아무리 삐딱선을 탔더라도, 생사에 기로에 섰다 한 이가 멀쩡히 돌아다녀선 안 되는 일이니까. 더불어 후작님께서 병중이라 급히 후계를 정한 셈이니, 예식은 생략하는 것이 앞뒤에 맞기도 하고.”
“아.”
후작이 덧붙였다.
“그러니 한동안 가문의 모든 결정은 시엔이 진행하도록. 대공자의 지위를 가졌으니, 내게 보고하여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
* * *
집사장이 집무실 열쇠를 건넸다.
가문의 주인이 업무를 보는 장소이니, 시엔은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되었다는 증명과 같았다.
바쁜 하루였다.
각 길드의 수장이며 도시의 유지들을 불러 인사를 나눴다. 다른 도시에서도 대공자를 뵙기 위해 찾아올 터이니 당분간은 사람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을 예정이었다.
원래는 가신들과 함께 업무 파악 밑 인계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나, 원래 하던 일이 부행정관이라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우드가 찾아왔다.
“흠.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당연한 일이 일어났다 해서 축하를 전하진 않는 법이지.”
“재수없긴,”
“아칙 축하는 이르기도 하고.”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당분간 내가 후작 대리로 티란디스를 이끌겠지. 후작님이 병환을 털고 일어날 때까지 말야.”
“그게 왜?”
“혹여 우리가 궁지에 몰리는 때가 온다면. 내 머리를 베어 국왕에게 보내면 되겠지.”
“그게 무슨 뜻이야?”
로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안 뵈었던가? 델피르 전하께서 후작저에 계셔.”
“뭐? 잠깐, 그게 무슨······”
“후작님은 만일을 대비하시는 거지. 일이 잘못되면, 모두 내 탓이니 나 하나로 책임을 지워 가문을 빼내겠다는 거고.”
후작이 책임이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박에 모든 돈을 걸지는 않겠다는 것이니.
그러나 책임에는 권리가 따르는 법.
도박이 성공한다면, 그때의 티란디스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성세를 이루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때에는, 그 강력한 가문이 온전히 손에 들어오게 될 테니까.
< 24. 결국 훔친 이가 져야 할 것이니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