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결국 훔친 이가 져야 할 것이니 [1] >
왕자의 개선은 침묵 속에 이루어졌다.
왕자는 가뭄에 시름하는 왕국의 위기를 막아냈다. 마땅히 백성을 불러모으고 꽃을 뿌리며 환호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왕자가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하니, 개선 행렬엔 그저 타다 만 마차의 잔해만 남았다.
왕국의 백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추모했다.
국왕이 앞으로 나서, 멀지 않은 때에 왕자의 장례를 치를 것이라 공표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추후 사실 파악을 위한 증언이 있을 것이라 하니, 시엔이 왕성의 객실을 받아 몸을 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라 하자, 낯익은 녀석이 얼굴을 내밀었다.
“젠장. 지금 이 지경에 누울 정신이 있냐?”
영지의 재무관인 로우드였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이 왜 왕성에 와 있지? 그럼 영지의 재무는 누가 보고 있단 말인가.
시엔이 대답했다.
“첫 번째로, 지금 상황이 어떤 지경인지 모르겠고. 두 번째로, 최악의 때라도 휴식을 취해 전력을 온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
“······말이나 못하면.”
“그래서, 뭐야? 왜 여기 있어?”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전하께선?”
시엔이 검지로 귀를 톡톡 두드렸다. 뒤이어 검지를 입 앞에 세우니 로우드가 말귀를 알아들었다.
“이런 젠장!”
어쩐지 어색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머리는 비상한데, 연기는 좀 엉망이야. 시엔이 그리 생각했다.
잠시 후, 시엔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떠나자마자, 책봉 관련해서 폐하께서 자문을 구하셨어. 전하께서 구름을 끌고 난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하시면서.”
왕국의 전 귀족이 모여들었다.
국왕의 후계 문제였으니, 귀족 본인 아니면 그 후계쯤 되어 대리자의 자격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충격적인 선언이 이어졌다.
왕비가 제 친정과 내통한 첩자로 밝혀졌다. 그러니 그에 따라, 조사를 위해 왕국의 모든 귀족들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그런 이유로 귀족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증언이 모두 모이고, 제대로 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왕국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제대로 당했네.”
말이 협조 요청이지, 기한 없는 구금이었다.
특히나 귀족 본인 혹은 그 급의 대리인이 참석한 상황이 아닌가. 각 가문의 가장 중요한 이가 국왕에 손아귀에 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현 사태와 무관한 이들이 먼저 자유를 얻었고.”
“제일 먼저 무고가 밝혀진 가문이 흐레이그겠지?”
“말해 뭐하겠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세자 책봉이 이루어졌지.”
“호오.”
그야말로 감탄이 나오는 한 수였다.
가장 먼저 조사를 받은 귀족들이 하나같이 2왕자를 지지하는 이들이었으리라. 그리고 현 사태와 무관하다 빠르게 결론이 났을 테고.
그리고 나머지. 중립 혹은 1왕자파의 귀족들은 아직 제대로 증언조차 수집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협조를 빌미로 왕성에 갇혀 있는 꼴이었다.
“그나마 우리는 내가 와 있으니 상황이 좀 나은 편이긴 한데.”
로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지. 젠장. 내가 여기에, 네가 여기에, 카레네 누님도 없지.”
“후작님께선?”
“감기가 심해 몸져누우셨지. 거동이 불가하신 상태야.”
“이 더운 날에 감기라.”
시엔이 씩 웃었다.
후작은 제 삶이 하나도 없이 살았다. 업무와 운동을 빼면 하루에 남는 것이 없지 않은가.
무리하여 감기에 걸릴 일도 없거니와, 그리 정정한 사내가 앓아누웠다는 말을 어찌 믿겠는가.
무언가 수상하다 여겨 핑계를 대고 로우드를 보낸 모양.
시엔이 1왕자의 측근이 아니던가. 그러니 굳이 수상함을 감수하고 왕성에 올 생각이 없었겠지.
“하긴 이런 때에 걸리는 감기가 더 독한 법이니까.”
“웃을 때가 아니야. 벌써 꽤 많은 귀족이 조사를 받고 풀려났어. 대개는 동부에 적을 둔 이들이고.”
“흠.”
동부 귀족들은 대개 중립을 지키지 않았던가. 조사를 받아 풀려났다 함은, 이제는 2왕자파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봐야겠지.
이제와서 2왕자를 지지해봐야 항복 선언에 불과했다. 이미 책봉이 이루어졌으니, 야심을 버리고 순순히 왕가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겠다고.
“그러고 보니 카레네는 왜?”
“동부 국경지대에.”
“동부 국경지대?”
“검위공께서 동부 국경부대 사령이 되셨거든.”
“동부 국경부대 사령?”
국경부대라 한들 변경백으로 불리는 국경지역 영주의 관할이 아니던가. 왕이 임명하여 사령관이라 보낸들 병을 통솔할 자격이 있지 않았다.
“왕가친위대는 해산인가?”
“왕가친위대는 각 변경백의 지원병력으로 뿔뿔이 흩어졌지.”
아군은 뭉치고 적은 흩어라.
가장 기본적인 병법이었다.
검위공을 이름뿐인 사령관으로 멀리 떠나보내고, 그 휘하의 기사들 역시 따로따로 쪼개 쫓아버렸다는 뜻이었다.
“쯧. 폐하께서 제대로 칼을 가셨네.”
2왕비와 흐레이그가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한들, 국왕의 재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국왕의 의지가 2왕자에게 있다는 뜻.
로우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어쩔 거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어쩌긴. 망한 거지. 폭풍이 몰아치면 문을 걸어 잠그고 숨는 수밖에 더 있어?”
적어도 폭풍이 물러날 때까지는 그러하리라.
* * *
체크메이트.
상대방이 이미 승리를 선언하였으니, 남은 것은 승복하여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라.
그렇지 않다면 판을 엎어야 하겠지만. 글쎄.
“면회는 금지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월궁 앞을 지키는 기사가 말했다.
점심을 먹고 곧장 와서 왕비의 면회를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불가하다는 대답뿐이었다.
“벤툼 경. 부디 한 번만 재고해 주시지요.”
“제게 말씀하셔도, 제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벤툼 경, 혹시 자제분이 계십니까?”
기사가 움찔했다.
“저 안에 있는 이는 죄인이나, 또한 한 아이의 어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돌아가신 델피르 전하의 최후를 전해드리고자 할 따름이니,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제 자식의 최후조차 알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허나 제 소관이 아니라······.”
“하면 그 소관이신 분께 제 요청을 전해드릴 수는 없겠습니까?”
기사가 한참이나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기사가 사람을 불러 말을 전하니, 시엔이 기사가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기다렸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다.
슬슬 배가 고파지니 저녁 시간이 가까워진 때라. 그제야 말을 전하러 간 하인이 돌아와 기사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기사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경께서 죄송하실 일은 아닙니다. 경께서도 명령을 수행하실 뿐이지 않습니까.”
기사가 시선을 돌렸다.
시엔이 한나절이나 가만히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엔이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럼, 혹시 이것을 죄인께 전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이건······”
“유품입니다. 사고 전에 제가 받은 것이나, 이렇게 되고 나니 남은 것이 이것뿐이네요. 자식 잃은 어미를 조금이라도 위로할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죄인에게 전해지는 것이라, 엄중히 검사하여 몇 날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으니 전해지기만 한다면 감사한 일입니다만.”
이미 기사의 눈앞에서 종일을 기다린 모습을 보여준 이후였다.
게다가 엄중히 검사하여도 좋다고 말하니, 오히려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랴.
성흔의 주인. 명예 성자로 유명한 이라. 그러한 이가 사람의 도리로 부탁하니, 명령으로 거절함에도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참이었다.
“본래는 죄인께 전하는 물건을 엄중히 따져 선별하여야 합니다만, 도련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 물건은 제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세요. 임무가 있으시니, 절차에 맞게 진행하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오히려 믿음이 가는군요. 명령이 있어 말씀은 전해드릴 수 없으니, 시엔 공자님께서 유품이라 건넸다 설명하는 것이 최선입니다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시엔이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시엔이 전해달라 건넨 반지가 다름 아닌 사령석이었다.
그것도 사악하기 짝이 없는 악령이 깃든 것이라. 거기에 더해 저주까지 걸어놓은 악독한 물건이었다.
저주는 시엔이 즐겨 쓰던 것이 아니었다.
시엔 뿐만 아니라, 원래 심연탑에서도 워낙에 효율이 나쁘다 하여 비주류인 갈래이기도 했다.
일단은 공들인 것에 비해 효과가 나빴다.
같은 마력으로 저주를 제작하여도, 악령을 직접 부리거나 흑마법을 쓰는 편이 열 배는 효과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재료도 그랬다.
사령석이 필요하니, 일단은 악령이 필요하고 또한 악령이 담길 보석 소요도 있었다.
게다가 작은 보석에 수식을 짜맞추니 그 과정도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주는 파훼가 쉬웠다.
저주를 새긴 물품을 그저 신성이 깃든 성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 효과가 간단히 박살이 났다.
게다가 저주가 실패하면 그것이 제작자에게 돌아오기까지 했다.
제작 비용은 비싸, 효과도 별로 좋지 않고, 만들기도 어렵다. 게다가 상대가 저주받은 물건임을 눈치채기만 해도 간단히 무력화가 가능하며, 그 이후엔 제작자에게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그러니 자연히 비주류로 돌아갈 수밖에.
저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룽피아조차, 저주로 유명하지 않았다. 그저 악령을 매개로 한 반영구 술식을 체계화하여 흑마법 고급 응용의 수많은 연구 기반을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받을 뿐이었으니.
시엔은 해피 드리머가 깃든 사령석에 일 년의 악몽을 새겼다. 몸에 지녀 잠에 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하룻밤 꿈이 일 년 동안 이어지는 악몽이 되어 소유자를 덮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도구라는 것이 꼭 제 목적대로만 쓰일까.
검을 쥐고 있으면 가지를 쳐낼 수도 있다. 저주를 꼭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 사용하라는 법은 없었다.
해피 드리머가 만들어내는 악몽. 최고위 흑마법사는 그를 매개로 꿈에 침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구, 누구냐?”
“일단 정신을 좀 차리셔야겠습니다만.”
알린 왕비의 꼴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나 쥐어뜯었는지 산발이 된 머리, 흐른 눈물에 화장이 번지고, 분칠한 뺨은 손톱으로 할퀴어 핏방울이 맺혔다.
기억 속의 왕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당당하고 꼿꼿하던 여걸조차 악몽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법인가.
“시엔? 시엔인가.”
“예. 왕비님. 다른 방법이 없어 이러한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례라니?”
“이 악몽이 제게 비롯한 것이지요.”
알린 왕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나······ 기분이 이상하지. 방금 전까진 악몽 속에 있다 알겠으나 지금은.”
꿈은 철저한 개인의 것이다. 타인이 침입하는 순간, 꿈은 깨어지고 의식으로 이어진 허수 세계의 자각이 이루어졌다.
알린 왕비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엉망인 꼴이나 어깨를 펴고 턱을 들어 시엔을 바라보니, 어느새 왕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공자가 이리한 것이라니 이유가 있겠지요. 상당히 끔찍한 시간이었으니,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수작이었기를 바래요.”
“전하께서 무사하십니다. 지금쯤이면 티란디스에 닿아 후작의 보호 아래 있을 겁니다.”
왕비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내 은은한 미소가 그 얼굴에 번졌다.
화장은 흘러내리고 입술의 칠이 좌우로 거칠게 번졌으니, 미소라 해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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