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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11화 (111/268)

< 22. 물타기의 제왕 [5] >

셀시가 돌아온 것은 그 후로 꽤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슬그머니 뱃머리로 올라와 주변을 살피다, 시엔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하하. 도련님 무사하셨네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하하······.”

“그런 것 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내리던데요.”

“그게 아니라. 다음을 기약했달까요.”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상황에서 셀시라 하여 어떤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 터. 그렇게 강대한 존재 앞에 마법사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대들어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아니면 얌전히 도망치던가.

시엔을 두고 간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누구나 제 목숨은 소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셀시의 사정이니, 시엔이 괘씸한 것을 보아 넘어가 줄 이유는 없었다.

“마침 잘 왔네요. 구름을 끌 수 있나요?”

“예? 하지만 용이······”

“용과는 이미 교섭을 마쳤거든요.”

“정말, 정말이세요?”

“제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셀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용과의 대화가 끝나고도 시엔이 온전히 남아있으니 잘 해결되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지금 구름을 끌자 하니, 기껏 산 목숨을 다시 버리려는 것이 아니면 용의 허락을 구했다는 뜻이라.

“저, 도련님? 용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구름을 끌어도 좋다 하신 건가요? 아니면 아예 거처를 옮기신 건지.”

“흠. 그건 등대지기님과 말씀을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요.”

“예?”

“앞으로 구름을 끌기 위해선 내 허락이 필요하거든요.”

용은 떠났다.

그러나 용이 제 스스로를 인간이 보기엔 프루드 다이아몬드의 해역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도록 장난을 쳐 놨다 했다.

시엔이 아닌 그 누구도 용의 부재를 알지 못했다.

용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야 모를 수가 없지.

“저,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용과 거래를 했어요. 내가 용에게 내어준 것이 무엇인지 셀시가 짐작이나 하겠어요?”

셀시가 멈칫했다.

“용에게 내 미래를 내어주기로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용이 이후 시엔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호의를 베풀고 떠났으니, 이어지는 미래에 보답하여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사는 동안의 얼마만큼의 시간을 쓰는 일이니 미래를 내어주겠다 거래를 한 것이 어찌 거짓이랴.

“아······.”

셀시의 표정이 굳었다.

미래라 하니 쓸데없이 거창한 표현이 아니던가. 특히 상대방이 마법사라면 그 해석에 있어서 훨씬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리라.

셀시가 본 용의 강대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격 높은 존재와의 거래가 어떠할까. 헛바람이 잔뜩 들어, 거창한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내 몫을 주장해도 되겠죠?”

시엔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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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몰이라 하더니, 딱 알맞은 표현이었다. 물길잡이 여럿이 지팡이를 들어 구름을 부렸다. 폭우보다는 폭포에 가까운 낙수가 돌연 멈추고, 프루드 다이아몬드 상공에 머물던 시커먼 먹구름이 쾌속선을 쫓았다.

비구름 중에서도 이렇게 지독한 것이 또 있으랴. 머리 위로 천장을 얹은 모양새로, 어둠이 뒤를 따르는 꼴이었다.

파도등대로 돌아가자 물길잡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참치를 잡으러 가겠다더니 용의 해역에서 구름을 끌어오지 않았던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델피르가 달려들어 시엔을 끌어안았다.

“시엔!”

“아. 왕자님.”

“해결했구나! 역시 시엔이야.”

“왕자님의 덕이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유능한 이를 부리는 것이 왕의 덕목이라고.”

“응, 응. 잘 해 주었어. 고마워.”

“크흠, 전하. 예법을 지키십시오.”

왕자의 예법 선생이 헛기침을 했다.

델피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잔소리. 크흠. 시엔 잘 해 주었노라. 내 어려울 때에 항상 그대가 빛이 되는구나.”

그래도 곧잘 따르는 것이, 잔소리니 뭐니 해도 결국 제 스승이라 여기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검위공이 클클 웃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좀 보겠다더니, 아예 끝장을 보고 왔구먼.”

“살펴보고 되겠다 싶으면 지체할 이유가 뭐가 있답니까?”

“덕분에 한숨 덜었네. 갑자기 용이 나타나 훼방이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아니었겠나. 그나저나, 어떻게 한 겐가?”

“뭘 했냐 하셔도. 흠.”

시엔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냥 용하고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요.”

“그 혓바닥이 용에게도 통했나? 아니지. 그럼 자네가 멀쩡히 살아 돌아올 리가 없지.”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자네가 사람 속을 은근히 뒤집는 재주가 있지 않나. 용이라고 안 그랬겠나? 어찌 혀를 놀렸기에 용을 내쫓았는지 모르겠어.”

“말로만 칭찬하셔도 별로 고맙진 않습니다만.”

“자네 귀를 좀 들여다봐야겠는걸. 이게 칭찬으로 들리나?”

“그럼 아닙니까?”

“아니긴. 칭찬 맞네. 말귀 하나는 아주 기막히게 알아듣는단 말이지.”

시엔과 엘딘이 서로를 보며 킬킬거렸다.

“이제 문제는 없는 건가?”

“비구름은 구했으니, 이제 비용 문제가 남았죠, 뭐.”

“왕국에 비가 급하니,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구만. 비용이 얼마가 들어가도 좋으니, 가서 달라는 대로 주고 마무리 짓고 오게나.”

이대로 구름을 끌어 내륙까지 가야 하니, 그간 마법사가 비구름을 꽁꽁 묶어 물기가 새지 않도록 계속해서 힘을 쓸 필요가 있었다.

파도등대가 강우 사업으로 거금을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으니.

안 그래도 등대지기와 할 말이 있었으니, 굳이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시엔이 중앙탑으로 향하자, 뒤에 따라붙은 흑마법사 둘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선배님? 용을 만나셨어요?”

“만났지.”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라니, 이 세올도 함께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세올 선배가 함께 있어봐야 뭐.”

“야, 너. 자꾸 삐딱선 탈래? 너 자꾸 기어오르는데. 이게 감히 하늘 같은 선배에게.”

“흥.”

“야, 너! 어디서 방자한 콧소리를 내고. 너.”

“세올 선배야 심연탑의 재적을 버리지 않았던가요. 물론 같은 심연의 구도자로서야 한참 선배이시긴 하시지만.”

“너야말로 사람 뜯어다 조립하던 애가 어떻게 심연탑을 들먹여? 선배님이 아니었으면 당장 박제해다 심연탑에 보내버렸을 건데.”

트리예가 움찔했다.

심연탑의 재적으로 이야기하자면야, 그저 버리고 뛰쳐나온 세올보다 금기를 어긴 자신이 훨씬 불리했다.

“아잉, 세올 선배. 지나간 일은 지나간 채로 두자구요. 네? 선배애.”

“어머머······, 이거 여우가 아주 따로 없네. 야, 어디서 앙탈이야? 이거 놔, 안 놔?” 트리예가 세올의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세올이 뿌리치려 하지만은, 사실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리치가 오래도록 혼자였던 탓에 이러한 공격에는 아무래도 무를 수밖에 없는 모양.

어쩐지 맨날 건방지다 어쩌다 난리를 치면서도 둘이 붙어 연구를 하더라니, 트리예의 처신이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전문용어로는 이미 반쯤 잡아먹혔다고 하는 상황이 아닌가.

”시엔 님. 어떤 용이었나요? 소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어요?”

“글쎄. 그게. 음. 수룡이었나?”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 년 전의 왕국이 내륙에 있고, 또한 흑마법사가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으니 수룡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수룡이라 하면 일단 푸른 빛을 한 용이요, 듣기로는 날개와 지느러미를 동시에 가져 물 아래와 위를 자유롭게 노닌다고 했던가.

수륙양용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헤엄치는 데 특화된 개체를 수룡, 나는 데에 특화된 개체를 빙룡이라 분류한다고 하지만.

사실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브레스였다. 용이 토해내는 공격적인 숨결. 고수압의 물을 방사하면 수룡, 지독한 냉기의 근원을 뿜어내면 빙룡이 되는 식으로.

하지만 브레스를 관찰하고 난 상황이라면, 이미 용을 적으로 돌렸다는 뜻이었다.

“대단히 강한 개체였다는 것 외엔 잘 모르겠다. 아름답기도 하고.”

“아름답다는 말씀이신가요?”

“말로 표현하긴 어려운 종류야. 직접 봐야 이해할 수 있겠지.”

의문들이 다시금 솟아올랐다.

시엔이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아직은 알 수 없다 하는 용의 말에는, 결국엔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포함된 것이었으니. 지금 굳이 고민하여 신경을 쏟을 이유가 없다.

물론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겠냐마는.

“오오. 어서 오시게.”

등대지기의 방에 들어서자, 르드벨이 활짝 웃으며 시엔의 두 손을 붙들었다.

“듣자하니 아주 큰일을 해줬구만. 자네는 파도등대의 귀빈일세. 암. 귀빈이고 말고.”

“귀빈이라. 뭐 특혜라도 있습니까?”

“그럼 이를 말인가. 이번 강우 사업엔 차석 등대지기가 직접 나서주기로 했거든.”

누가 구름을 끄느냐에 따라 그 효율이 천차만별이라고.

구름을 묶어 비가 새지 않도록 한다 하나, 빗방울로 뭉쳐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구름은 태양 아래 서서히 말라가는 것이었다.

물길잡이의 실력이 떨어지면 이러한 부분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으니, 같은 구름을 끌어도 비의 수량이 천차만별이었다.

“그거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세요.”

“그뿐인가. 이번 사업에 대해서는 금화를 청구하지 않을 것이네. 무료 봉사. 그래. 명예 성자의 뜻이 가뭄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것이니, 어찌 우리가 금전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시엔이 생각했다.

늙은 마법사가 날로 먹으려 드는구만.

“그 또한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모든 것에는 정당한 대가가 있기 마련이 아닙니까. 왕실은 대금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으니, 결제는 순리대로 집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허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대두.”

“어차피 왕실의 재화라. 저와는 별반 상관없는 지출이 줄어든 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르드벨의 웃는 낯이 어색해졌다.

“사정은 이미 들으셨겠네요? 저는 제 미래를 걸고 용과 교섭을 이뤘습니다. 그러니 프루드 다이아몬드의 비구름 채취에 대해 제 지분을 요구하겠습니다.”

용이 말한 것이 이것이었다.

용이 떠났으나 그것을 아는 이가 시엔뿐이니, 알아서 요긴하게 써먹으라 옆구리를 찔러주지 않았는가.

“커흠. 지분이라니.”

“용은 제게 비구름을 가져가도록 했지요. 앞으로도 제 이름을 빌지 않으면 용의 분노를 살 겁니다. 그러니 이름을 빌려드리는 값은 받아야겠죠.”

르드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한 건 무료로 돌려 퉁치려는 수작이었겠지. 물론, 애초에 통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용과 거래한 인간이 만만하진 않을 테니, 통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찔러보지 않았겠는가.

등대지기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말이 이를 증명했다.

“그래서, 얼마나 원하는가?” “글세요. 반절이면 되지 않을까요?”

“반절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럼 강우 사업을 접으시면 되겠네요. 아니면 용과 싸워 쫒아내시던가.”

“이미 심천해의 선배님들이 몇 번이고 용을 격퇴한 역사가 있다네. 우리가 못 할 것 같은가?”

시엔이 미소지었다.

“사업 전체를 포기하면서까지 용과의 일전을 피하시지 않았던가요?”

그게 등대지기의 성품이 아니겠는가. 굳이 재화를 위해 제 식구의 피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였으니.

“본디 없게 되었을 수익이니 제게 반절을 주시더라도, 그건 반절의 이득인 셈입니다만.”

르드벨이 또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엔 표정이 바뀌니, 수염 빽빽한 얼굴에 처연함이 깃들었다.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네. 마법사의 노역이 어디 보통 값이던가? 구름을 끌어 비를 내리는 동안 마법사 서넛이 빠지니, 사실 그 때에 다른 일을 하면 금화가 들어올 것이 아닌가.”

“흠.”

“그리고 이렇게 가문 해가 아니라면, 그리 수요가 많은 사업도 아니라네. 당장 올해야 벌 기회다만은, 내년이나 내후년은 그렇지 않을 것이 아닌가. 평상시 같으면 절반을 떼어주느니 그냥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수준이라네.”

“그도 그렇군요.”

“오오. 이해해 주는가?”

“그럼 제 지분은 얼마 정도를 보십니까?”

“10% 정도라면.”

시엔이 손벽을 짝 쳤다.

“20%로 하겠습니다.”

“으잉?”

“그 정도 주실 생각을 하고 계셨겠지요?”

처음에 반을 부르고, 그걸 10%로 하자 돌아왔으니 절충하면 30%를 부를 차례였다.

그러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첫 제안과의 중간값인 20%정도를 맞출 터이니, 속으로 그 정도 주어도 괜찮다 셈을 마쳤다는 뜻이었다.

“허허, 못 당하겠구만. 젊은 친구가.”

“너무 야속하다 생각하진 마십시오. 제가 용과의 거래로 무얼 건넸는지 이미 듣지 않으셨습니까?”

“흠. 흠. 뭐, 그렇지.”

르드벨이 시선을 피했다.

미래를 저당잡혔다 제 딸에게 이미 들었으니, 르드벨의 생각으로는 제 인생과 뒤바꾼 거래일 것이라 이해했다.

그걸 모른 척 이번 일은 공짜로 하겠다 퉁치려 하였으니 새삼 창피하고 부끄러워진 탓이었다.

“제 몫의 수익은 티란디스의 상단 편에 맡겨 주시면 되겠네요.”

“그렇게 함세. 어차피 그쪽의 목재만한 것이 없어 주기적으로 거래하기도 하고.”

“좋습니다.”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겠다느니 혹은 수익을 속일 생각 말라는 등의 첨언은 필요하지 않았다. 용이 끼인 거래에 그 무서움을 아는 마법사가 금화를 빼돌릴 리는 없을 테니까.

< 22. 물타기의 제왕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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