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10화 (110/268)

< 22. 물타기의 제왕 [4] >

“말하는 애벌레라. 신기해서라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을까요?”

“벌레는 원래 말을 못 하잖아요? 우리는 원래 말을 하구요. 용이 그걸 모르겠어요?”

“어쨌든, 아직 대화를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는 뜻이네요.”

“어휴, 도련님.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으셨네요. 용이 멋진 친구로 나오는 이야기들이요. 실제로 용은 친절하지도, 관대하지도 않답니다.”

“셀시가 어떻게 알죠? 용을 만나봤나요?”

셀시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본 적은 없어요.”

“그러면 친절한 용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등대는 수많은 용과 전투를 치렀어요. 원양을 항해하던 선배님들이 고스란히 기록했지요.”

“기록이라.”

“사방이 오로지 바다이니 어떤 지표도 없는 와중에, 제 영역을 침범했다 공격을 해온 용들이랍니다. 대화가 가능하다구요? 애초에 용은 말로 하지 않아요. 브레스를 먼저 뿜을 뿐이죠. 그런 생물이에요. 용이란.”

이거 안 통하네.

시엔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제 방에 기어들어온 벌레를 보면 별 생각없이 때려잡듯이, 용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고한 종족이 인간을 보는 시선이란 그 정도에 머물러 있었으니.

물론 벌레라 하여 모두 연약한 것은 아닌 법이었다. 말벌집을 함부로 건드리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니, 하찮다 한들 인간이 용을 잡지 못할 것도 없는 법.

그러나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바깥 것, 용의 영혼을 봉인한 붉은 보석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새삼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대죄인에 닿기에는 요원한 일이었으니.

지금으로선 물길잡이들이 싸우도록 만들지 않으면 용 사냥은 무리였다.

물길잡이에게도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던가. 어떻게 잘 구워삶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시엔이 그렇게 생각하며 방책을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다른 생각이 스치니 시엔이 셀시를 바라보았다.

“아까 용들이 대화를 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런데 저기에 용이 자리를 잡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이미 공격받았나요?”

“그건 아니에요. 심해조류 탐사대가 용을 목격했거든요. 운이 좋아 용에게 들키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용이 정말 몰랐을까요?”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이 용을 보았다면, 용이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용의 능력이라면 사람이 눈치채기도 전에 미리 알아챌 수 있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셀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시엔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시엔 도련님의 말대로라면, 그럼 모르는 척을 했다는 뜻인데요. 일부러 모습을 보였던가. 내가 여기 있으니 함부로 얼신거리지 말라는 그런.”

“그럼 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겠네요. 공격적이지 않은 개체가 아니겠어요?”

“정말로, 어떤 우연이 겹쳐 진짜로 알아채지 못한 것이라면요? 용이 공격해오지 않는다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다에 사는 용이 바다에서 인간을 놓친다라. 그럼 아직 덜 자란 용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약한 용이요.”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만큼. 시엔이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흥미로운 추론이나, 안타깝게도 틀렸다.

문득 배 위로 음영이 졌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 용이 있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거대한 몸체가 그리는 선은 부드러우나, 가까이 보아 갑옷과 같은 비늘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비늘은 수정과 같아 반짝거리고, 날개는 펼쳤으나 펄럭거리지 않으니 우아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히익······!”

셀시가 경악했다. 움직이는 것엔 소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소리가 아니라도 그 낌새라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러나 용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원래 없던 거대한 몸체가 원래 거기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시엔의 표정이 굳었다.

용이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고 하나, 그 또한 마법의 응용이라. 마법사가 마력을 능히 감지할 수 있으니 그 전조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푸른 용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격이,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 강대한 힘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생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던전에서 본 어린 용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용이 인간을 해치는 것은, 공포로 성벽을 쌓기 위해서이다. 내 인간을 보아 놓아주니, 너희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가.

셀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다른 생각. 어쩌면 용을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와중에 장본인이 등장한 꼴이었으니.

시엔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꺼내들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른 채, 침착함을 겨우 가장하여 입을 열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감사? 뭐가 감사한데?

용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 목소리에도 슬그머니 장난기가 서리니, 전혀 용답지 않은 말이었다.

하기사 인간이 저마다 성격이 다를진데, 용이라도 하나같지는 않겠지.

“해하고자 마음을 정하셨다면 이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을 테니, 모습을 드러내어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까.”

-아. 이거 재미있네.

용이 말했다. 어쩐지 친근한 말투였다.

-인간의 계집아.

“아, 예, 네. 말씀하세요.”

-내 이 간교한 혓바닥을 가진 치와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만.

“어, 그러니까.”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알아서 비키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대화 나누세요!”

셀시가 즉각 쾌속선에서 뛰어내렸다.

잠수하여 그대로 검은 그림자가 수면 아래로 쭉 미끄러져 사라졌다. 셀시가 저 깊은 곳으로 곧장 도망쳐버리자, 쾌속선 위에 남은 이가 시엔 뿐이었다.

-넌 뭐야?

“예?”

-인간이 용이 된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뼈와 장기와 피가 모두 용의 것이야. 그러면 너를 용으로 봐야겠지.

시엔이 신음을 삼켰다.

뼈와 장기와 피가 모두 용의 것이라니. 빌어먹을 순진무구. 대체 몸뚱이를 어떻게 만들어놨단 말인가.

“저는······”

-설마 인간이라 주장할 셈이야?

용의 말투가 이상하게 친근하다 싶더니, 동족으로 여겨 그러한 모양이었다.

-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널 용으로 여긴다면, 내게 있어서 너는 용인 거지.

지극히 용다운 사고방식이었다.

영광을 베풀겠다며 수호자를 종용하던 어린 용과 같은 논리였다. 네 생각 따윈 하찮으며 틀린 것이고, 오로지 내가 옳은 것이라고.

-아, 이 용이 또 용처럼 구네. 이런 생각 하고 있지?

속이 들여다보인 기분이었다.

용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치면 너도 용처럼 굴고 있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전에 먼저. 네가 인간임을 내게 증명할 수 있나? 대체 어떤 것이 종을 결정하는데?

시엔이 턱을 매만졌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용의 질문은 마법사에게 있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고, 또 무엇이 종을 결정하냐니. 세상에 이런 질문을 듣고도 다른 생각을 할 마법사는 없으리라.

“일단은 태가 아니겠습니까? 당신과 저는 명백히 다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모습을 한 것이 인간의 증명이 아닙니까?”

-당신은 너무 갔고. 내가 왜 당신이야?

시엔의 표정이 멍하니 풀렸다.

“예?”

-내가 네 부인이 아닌데 당신이라 하면 이상하지.

“그럼 뭐라 불러드려야.”

-알아서 불러. 당신만 빼고. 네가 뭐라고 부른들 내 이름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시엔이 감탄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선언이란 말인가.

인간 따위가 부르는 호칭이 용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좋다는 그러한 뜻이 아니던가.

-됐고. 그럼 이제 내가 반박할 차례인가? 용이라 하여 모두 같은 생김새는 아냐. 날개가 넷 달린 용도 아예 없는 녀석도 있고, 머리가 둘 달린 녀석도 있지.

용이 말을 이었다.

-네가 유달리 인간과 닮은 용이라 한들 뭐가 이상하겠어? 그러니 형태는 문제가 되지 않지. 조금, 아니 꽤 꼴볼견이긴 하지만은.

시엔의 말문이 막혔다.

용의 의견이 의외로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뭐. 얼마든지.

시엔이 생각을 정리했다.

대체 무엇으로 스스로를 인간이라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리치가 떠올랐다.

세올은 어땠지?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었을 때에 세올은 인간이었나 혹은 오리였나.

그 전에, 리치였을 때는?

그저 봉인구와 강신체 뼈다귀 뿐으로 인간이라 할 수 있었을까?

세올의 연구가 진작에 완료되었다면?

강신체에 살을 붙여 해골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갖출 수 있었다면, 그렇다고 리치가 아닌 인간이라 불러야 할 것이었을까.

시엔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외형에 상관없이, 그 본질이 궁상맞은 노처녀의 영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리라.

그러면 본질은 영혼인가?

영혼이 있기에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가?

시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증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왜?

“세상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의 지성으로 자신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기에, 저는 인간입니다.”

-내가 널 용으로 여기더라도?

“그렇습니다.”

시엔은 정신 세계의 확장을 느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면, 더는 타인의 시선에 자아가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정신 세계였다.

개인의 자아가 세상을 판단하여 받아들이니, 같은 것을 두고 누구는 아름답다 누구는 추하다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마법사는 현상 세계의 법칙, 천신이 관측한 결과물 위에 마력을 덧씌워 정신 세계를 구현하지 않던가.

주문이란 세계가 편애하는 언어가 아니라, 마법사의 모자란 믿음을 세계의 탓으로 돌려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시엔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검은 기운이 모여 화살의 형상을 이루었다. 기본적인 흑마법 중 하나인 어둠의 화살이었다.

주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용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걸 소리라 부를 수 있을까. 영혼으로 전해지는 어떤 떨림에 가까운.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용의 웃음소리.

-자. 이제 너도 용처럼 굴잖아?

“그렇게 되었군요.”

용과 인간의 사고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타인의 생각이란 결국 타인의 것에 불과한 것. 오로지 용만이 오만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지성체가 결국 제 본위로 세상을 보며 판단하는 것을.

-이것도 나름 신선하네. 재미있어.

“예?”

-아직은 알 수가 없을 거야. 밖에선 온전히 안을 들여다보아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프루드 다이아몬드라 부르나? 저 안은 참 지내기가 고약하단 말야. 사시사철 비가 내린다고? 웃기지. 쏟아지는 물을 비라고 하기는 그렇잖아? 온종일 물을 뒤집어쓰지.

용의 등 뒤로 한 쌍의 날개가 더 펼쳐졌다. 그리고 한 쌍 더. 그리고 또 한 쌍이 더······.

마침내 열두 쌍의 날개가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나는 떠나. 하지만 저 안에 장난을 좀 쳐 놨으니, 인간이 보기에 내가 머무는 것처럼 보이겠지. 간단한 환상이라 해롭진 않겠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지?

“당신은······”

-당신은 너무 간다니까.

용의 웃음이 세상에 가득 차올랐다.

-호의란 참으로 아름답지. 시작은 무언가 바라는 게 있었을 뿐일지도 몰라, 받은 것을 돌려주고, 또 돌려받고. 종국엔 어디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

용의 몸이 서서히 색을 잃었다.

-머지않아 네 도움이 필요한 때가 와. 그때엔 네가 나를 돕겠지. 아쉽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 안녕. 시엔.

용은 세상에서 사라지듯 투명하게 녹아들며, 한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아. 크플란드를 꼭 먹도록 해. 인간의 음식 중엔 그게 제일 맛있었거든.

이내 용이 자취를 감추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용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었던가? 뭐. 셀시와의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크플란드는 또 뭐야. 인간의 음식이라 했으니 음식의 이름인 것 같기는 한데.

적어도 용이 시엔에게 호의를 가진 것은 분명했다.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기도 했으니.

주문의 영창이 사실 필요 없는 것임을 알았다. 용 말고는 어떤 지성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유 없는 호의가 어디 있으랴,

용이 직접 그 이유를 밝혔으니.

“도움이 필요한 때라.”

하지만 그 강대한 용이 도움을 요청한다 해서, 시엔이 어찌 도울 수가 있을까. 그러한 존재가 곤란할 일에 과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은 알 수 없다 했던가.

나중에는 알 수 있다는 뜻이리라.

그 말인즉슨, 지금은 고민해봐야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 22. 물타기의 제왕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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