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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08화 (108/268)

< 22. 물타기의 제왕 [1] > 끝< 22. 물타기의 제왕 [2] >

어린 왕자가 시엔을 진심으로 위하며 따랐다. 그 마음이 변함이 없는 한에야, 시엔 역시 왕자를 기꺼이 왕으로 섬길 생각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진실이 어떻다 한들 마음에 변화가 있을 것도 아니다. 그저 신뢰의 문제였을 뿐.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꽤 악질적인 헛소문이다 싶었지요.”

“악질적이지.”

“이번 일이 잘 해결되더라도 피해는 남겠군요. 책봉은 아직입니까?”

“마마께선 올해 말로 밀어붙이고 계셨네만, 이래서야 모르는 일이 되지 않았는가.”

“올해 말이라.”

“그래도 자네 덕을 좀 볼 수도 있겠지. 명예 성자는 내 살다살다 처음 듣는다만, 덕분에 천신의 명예를 빌려올 수가 있겠어.”

“결국 명예직에 불과하지요.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교단 차원에서 나서야 할 겁니다만.”

왕가가 빨리 후계를 정하는 이유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였다. 다른 세력의 개입없이 오로지 왕가의 행사로만 왕위 계승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세상 이치가 받으면 마땅히 줘야 하는 것이었다. 왕위 계승에 관여하여 도움을 준 이가 있으면 마땅히 그만큼 내어줘야 했으니.

교단의 권위를 이용한다면, 마땅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교단이 선량하다 한들 왕국이 아닌 외세.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은 언제나 최후의 최후에나 고려할 일이었다.

시엔의 말이 바로 이런 뜻이었다.

검위공이 쓰게 웃었다.

“왕위가 넘어가는 것보단, 교단을 끌어들이는 편이 낫지 않겠나.”

“하긴. 남 줄 바에야 반절이나마 차지하는 편이 낫긴 하죠.”

시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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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왕국을 가로질러 브뤼빌 구릉지를 통과했다. 그러자 마침내 눈에 보이는 그 끝이 아득한 저 멀리에 하나의 선으로 끝맺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 수평선이었다.

대륙 남서부 해안. 무지개 제도였다.

파도등대는 수계 마법사들의 마탑이었다.

마탑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 탑의 형태를 한 마탑은 하나뿐이었다. 그 외엔 전부 그 모양이 제각각이었으니.

그럼에도 마탑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저 탑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아래에서부터 쌓아 위로 솟아나는 것이니, 지식을 축적하고 쌓아 진리에 닿겠다는 마법사의 근본적인 탐구정신과 같지 않은가.

항구도시에 이르자, 물길잡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래도 대국으로 손꼽히는 페벨룬의 왕가가 직접 행차하였으니, 아무리 엉덩이가 무겁다 한들 가만히 오시라 뭉개기는 힘드리라.

“안녕하십니까, 전하. 저는 셀시 아스데니아라 하고, 차석 등대지기랍니다.”

마중 나온 인물은 시엔이 이미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음. 그런데.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셀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시엔 도련님. 던전에서 뵈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죠. 셀시. 그런데······ 다쳤나요?”

시엔이 셀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셀시는 이전에 없던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면상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안대였다.

“다쳐요? 저는 건강하답니다.”

“그. 눈이.”

“아. 이걸 아직 쓰고 있었네. 어쩐지.”

셀시가 안대를 벗었다. 드러난 눈은 멀쩡했다. 왜 멀쩡한 눈에 안대를 채웠담? 시엔이 의혹 가득한 눈빛을 던지자, 셀시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도련님, 해적의 멋은 안대에서 시작하는 것이랍니다.”

예로부터 산을 가까이하고 바다를 멀리하라 하는 조언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산이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정적인 멋으로 사람을 차분히 가라앉히곤 했다.

그러나 바다는 그 반대라. 점점 사람을 광기에 빠뜨리는 어떠한 마성이 있어, 바다를 가까이하여 정신 건강에 몹시 해롭다는 뜻이 아니던가.

매양 바다를 끼고 사는 이들이 물길잡이들이니, 그들의 기행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셀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파도등대로 모시겠습니다.”

파도등대는 멀리에 있지 않았다.

항구도시를 빠져나와 해안에 위치한 산을 타고 오르자, 마침내 그 끝에 해안 절벽이 나타났다.

“와아.”

델피르가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대단하지요?”

자부심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

셀시가 가리키는 손 끝에, 거대한 구조물이 펼쳐졌다.

파도등대는 한 척의 배였다.

이만한 구조물을 그저 배라 하기에는 그 규모가 대단하기는 했다. 그러나 물길잡이 스스로는 배라 칭하니, 그 주인이 그렇다는데야.

수백 마법사가 살아가는 거대한 해상요새.

대국의 왕성과 맞먹는 규모의 거대한 섬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으니 인공섬이라 해야할까.

그러한 거대한 배가 절벽 아래 그 몸뚱이를 붙인 채였으니.

파도등대가 천천히 회전하자, 선미인지 뱃머리인지 언저리에 위치한 탑이 점차 절벽에 가까워졌다.

이내 절벽 앞에 탑이 서자, 문이 열려 절벽에 끝에 닿았다.

“파도등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셀시가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마치 연극 배우와 같은 몸짓이었다.

다만 예법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던 것이기에, 왕자의 예법 선생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꿈틀거리긴 했지만.

인공섬의 중앙에는 거대한 탑이 솟았다. 그 형상이 거대한 등대와 닮았다.

다만 기이하게도 원통형의 관이 그 꼭대기로부터 솟아 등대를 휘감아 내려오다, 이내 드넓은 인공섬의 위를 가로질러 바깥, 수면을 향해 뻗었다.

문득 끄아아 하는 비명이 아스라히 울렸다. 어쩐지 즐거운 감정이 담긴 것이었다. 비명이 미묘하게 멀어져간다. 그리곤 관의 끝부분에서 사람의 몸뚱아리 같은 것이 발사되어, 바다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델피르가 놀라 물었다.

“저게, 저게 대체 무엇이냐?”

“아. 저건 아마 체롤드일겁니다. 조금 덜떨어진 녀석이긴 해도, 등대의 일등 항해사랍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찌 저런.”

“아. 저건 그거인데요.”

“그거라니?”

“그겁니다. 그거. 저거 이름이 그거인데. 음. 전하께서 심려하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시엔이 관의 구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 그런 설명을 들었던 것도 같고. 등대지기의 악취미와, 몰래 즐기며 실수를 남발하는 물길잡이들이라 했던가.

델피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셀시가 솜씨 좋게 화제를 돌렸다.

“본등대로 모실께요. 등대지기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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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드벨 아스데니아는 빛이 나는 사내였다.

하필이면 달아 놓은 마법 조명이 르드벨의 머리 위라, 내리쬐는 빛이 머리에 닿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만, 숱이 하나도 없는 머리와는 달리 귀 아래로부터 수북한 수염은 풍성하기 그지없었다.

“델피르 프린 페벨룬 전하와 그 일행분이십니다. 이분이 검위공 엘딘 허슨드 님, 그리고 시엔 샤인 티란디스 명예 성자님 되시네요.”

셀시가 이번엔 일행을 돌아보았다. “여기 계신 분이 르드벨 아스데니아 등대지기님이세요.”

셀시의 성과 같으니 부녀지간이라. 마탑주가 제 딸을 부탑주로 둔 셈이니 상당히 모양새가 나쁘다 할 일이었다.

마법사는 오로지 그 실력과 탑구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저번 던전에서 다른 물길잡이들이 태도를 보아하니 셀시가 상당히 존경받기는 한 모양인데. 혈연과는 상관없이 실력으로 꿰찼을 가능성이 더 높으리라.

문득 셀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파도등대의 현 함장님이시자 제 빛나는 아버지이신데. 아. 빛나다는 표현은, 다른 관용구가 아니라 실제로 위쪽이 빛나고 계신다는 뜻인, 꺄아아!”

르드벨의 손짓에, 셀시 아래의 바닥이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셀시가 아래로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달칵. 바닥이 다시 원상대로 돌아오자, 어쩐지 흥겨운 듯한 비명이 뚝 끊겼다.

아마 지금쯤 관을 따라 쭉 미끄러져 내려가, 종국엔 바다를 향해 발사되고 말리라.

문득 던전에서의 내리막수로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거 꽤 재미있었는데.

“쯧쯧. 저게 덩치만 컸지 속은 꼬맹이나 다름이 없어서. 말 만한 녀석이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는 저렇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 괜찮소. 아. 이거 아냐? 괜찮습니다. 괜찮은게 아니라,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왕자가 평대하다 예법 선생의 얼굴을 보곤 급히 말을 바꾸었다. 마탑주 쯤 되면 일국의 왕이라도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르드벨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왕자님께서 아직 예법이 익지 않은 모양이십니다.”

“어, 음.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먼 걸음 하시게 되어 오히려 이 늙은이가 죄송한 일이지요.”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이 물을 찾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아. 이거 아니야? 아. 목마른 사람이. 그렇대요.”

델피르가 버벅거렸다.

그런 왕자가 귀여운 모양인지, 르드벨은 손주를 본 할아버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르드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만, 인공 강우는 현재로서는 좀 어렵습니다.”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만.”

“저희도 사정이 있는지라 찾아오지 마시라 전해드렸습니다만. 죄송합니다.”

델피르가 어쩔 줄 몰랐다. 하기사 왕자가 무얼 알고 왔겠는가. 그저 가서 비를 좀 내려달라 하면 그럽시다 하고 따라나설 줄 알았을 터다.

시엔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죄송하지만, 혹시 그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유래없이 온 대륙이 말라 허덕이니, 과거에도 찾기 힘든 가뭄입니다. 이대로면 해가 지나 유래 없는 기근에 참화가 일어날 것이니, 오로지 심천해의 구도자 분들께서 막아낼 수 있는 일입니다.”

관념 세계의 물은 하늘 위에 있어, 넓은 천구가 바다 속에 잠겼다. 그를 천해라 하고, 개중 가장 깊은 곳이 심천해였다.

그러한 이유로 심천해의 구도자란 물길잡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르드벨이 눈섭을 까닥거렸다.

“호오. 그러한 명칭을 얼마만에 들어보았는지. 시엔 샤인 티란디스 군이라 했던가. 명예 성자이니 교단의 인물도 아닐 테고. 티란디스, 아아. 티란디스 가문인가?”

“아십니까?”

“다른 데는 몰라도 좋은 목재가 나는 곳은 알지. 이만한 배를 몰다보면 여기저기 계속 기워붙여야 하거든. 요즘 가격이 부쩍 올랐던데.”

“큰 생산지에 병이 돌아 그리 되었습니다.”

“쯧. 덕분에 특식이 반토막이 났어.”

특식?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에서도 그렇고, 대체 특식이 무엇이길래 아래위로 이리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혹여 결정을 재고하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왕국의 무고한 백성들이 비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시엔의 말에, 르드벨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라고 가만히 있고 싶겠는가. 사실 이런 때에야 등대가 가장 바삐 움직여야 할 때인데. 허나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

“못 한단 말씀은······.”

르드벨이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는 물을 다루는 이들이지, 물을 만들어내진 못한다네. 천해의 물은 위로 오르는 것이라 땅에 머무르지 않으니 현상 세계에 도움이 될 것도 아니니.” “뭔가 문제가 있으시군요.”

“인공 강우라고도 하지만, 우리는 구름 몰이라고 한다네.”

“구름 몰이 말입니까?”

“비야 내릴 수 있겠지만, 그 물이 어디서 오겠는가? 결국, 그 주변에서 끌어오는 것이라 인근 지방은 더 가물 수밖에 없네.”

“하지만 인공 강우는 등대의 사업 아니었습니까? 지금까지 계속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바다에서 구름을 끌어 쓴다네. 모든 물은 종국엔 바다로 돌아오는 것이라 아무리 퍼 써도 문제가 없으니까. 바다에서 비구름을 몰고 가서 비를 내리는 거지.”

“과연. 그래서 구름 몰이로군요.”

“프루드 다이아몬드. 여기서 이틀을 항해하면 일년내내 거친 폭우가 쏟아 붙는 해역이 있다네. 실제로는 폭우보단 폭포에 가까울 정도라 한 번 구름을 끌면 한 개 왕국에 사흘은 비를 내릴 수 있지.”

“거기에 문제가 생겼군요.”

르드벨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거기에 용이 자리를 잡았거든.”

< 22. 물타기의 제왕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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