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7] >
교단의 본신전은 신전이라기보단 요새에 가까운 형태였다. 절벽을 파내 만든 내부는 아홉 층에 이르고, 바깥으로 뚫린 창과 테라스가 무수히 뚫려있었다.
개중 바깥으로 톡 튀어나온 외부 테라스가 있어, 본신전 앞 대광장을 향해 뻗었다.
신전의 아침 기도회가 바로 여기서 열렸다.
무려 성황이 직접 주도하는 기도회였다. 성야를 맞아 성국까지 찾아온 독실한 신도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마침내 성황이 테라스 위로 몸을 내밀었을 때, 광장에 어색한 술렁임이 지났다.
복장이 여간 파격스러운 것이 아니었기에.
쇄골 중간에 이르기까지 파인 민소매 셔츠를 걸치고, 바지는 무릎을 드러내는 짧고 헐렁한 것을 꿰어입었다.
소년소녀가 아니라면 좀체 허용되지 않는 복장이었다.
게다가 그 인물이 성황이라면 더욱이.
“안녕하십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태양이 유난히 강한 이때라 아침부터 모여서 고생이 많으십니다들. 어째 이 더운 날에 바글바글 뭉쳐 번거롭게 땀을 흘리시는지?”
신성이 실린 목소리가 광장을 휘감았다.
커다란 목소리는 아니나, 신성의 효능으로 저마다 신도의 귓가에 뚜렷하게 파고드는 것이었다.
“어제 형제자매분들이 서른 두 분이나 쓰러진 걸 아시나들 모르시겠어요. 이리 더우니 기도 좀 빼먹고 그늘을 찾아 누워 빈둥거려도 천신께서 충분히 이해를 해 주실 겁니다만. 평상시에 신전엔 좀 다니십니까? 성야라고 유난들 떠시는 것 같은데.”
성황에 농에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유난도 유난 나름이니, 요 늙은이가 천신께 사랑합니다 유난을 떠는 분들을 어찌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다 쓰러지면 천신께서 또한 근심하실 일이니, 더운 날에 옷이라도 좀 틔워 건강하시라고, 이 늙은이가 이런 차림새를 해 보인 까닭입니다.”
성황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혼자 이 꼴이라면 창피하나, 모두가 함께라면 그렇지 않은 일이겠지요. 우리 형제 자매들 또한 함께하여 소매와 바지를 자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성황이 말을 이었다.
“또한 당부드리기를, 누구는 짧게 입고 누구는 그렇지 않으면 결국 서로 보이는 것이 다르고 차림이 다르니. 다른 것이 결국 부끄러움을 만드니, 성도 한 분 한 분 동참하여 하나 된 모습 하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성황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게 먹힐까요?”
“저기 안 보이십니까?”
테라스의 안쪽, 시엔이 창밖을 가리켰다.
성질 급한 몇 명이 아예 그 자리에서 소매를 쫙쫙 뜯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폭탄인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은 몸에 문신이 가득하잖아요? 그걸 함부로 드러내려고 할까요?”
“감추려고 할 겁니다만. 아마 긴소매로 밖에 나오기는 힘들 겁니다.”
“왜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다 신심이 보통이 아닌 분들이 아닙니까.”
시엔이 설명을 시작했다.
성야제를 앞둔 성국이라 다들 신심이 충만하니, 성황이 직접 부탁하는 데에 누가 하지 않고 뻗댈 수가 있을까.
또한 사람이란 절대 다수가 그러하면 소수가 눈치를 보아 삐대며 버티기는 힘든 생물이라.
“어차피 폭탄들 본인이 문신이 어떤 것이다 알지 못하니 그들 중 반절은 개의치 않고 돌아다닐 겁니다. 종아리 중간부터 어깨 반절에 이르는 문신이니, 쉽게 보아 수색이 가능할 겁니다.”
“그럼 나머지 반절은요?”
“어차피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면야, 신관님들이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이겠고. 성기사들이 바깥에서 찾고, 신관님들은 각 숙박소에 방문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합시다.”
“방문 기도······”
“그런데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는 척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등을 돌리고 앉았으니. 대답이야 넙죽넙죽 한다만은 애초에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뭡니까? 예하께서도 저러고 계신데 성녀가 부끄러워 못하겠다?”
“누가 못하겠데요? 그냥 조금.”
“조금?” “너무 살이 드러나는데······”
“저기 예하께서도 살을 드러내고 계시는군요. 부끄러움을 모르시는 건 아닐텐데.”
“에이, 씨.”
“그래도 뷔아가 부끄러워하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도 알거든요?”
발끈하면서도 이쪽을 돌아볼 기색이 없다.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뷔아야 그간 봐온대로, 원리원칙에 충실하며 보수적인 기질이 있으니 이러한 복식이 워낙에 파격적이라 느꼈을 수도 있으리라.
교단에 신관이 뷔아 하나뿐인것도 아니니, 정 안되겠다 싶으면 쉰다 해도 누가 뭐라할 이는 없으리라.
물론 그 성격상 저 창피하다 틀어박혀 임무를 피하지는 않을 터이니, 결국 때가 되면 알아서 나서 폭탄을 찾으러 돌아다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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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폭탄을 찾아 돌아다니고, 밤에는 명예 성자 수여식 연습이 이어졌다.
그러니 눈을 떠서부터 바삐 움직여 눈을 감기 전까지 그러하니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시엔의 경우는 정신적인 피로였다.
다른 휴식 없이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이, 신체와는 다르게 꽤 진저리가 나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강행군에도 몸은 멀쩡했다.
아침이 되면 절로 눈이 떠지고 때가 되면 밥을 찾았다.
날이 더워도 땀이 나지 않고, 팔다리를 드러내 볕에 타지 않으니 대체 몸뚱이가 어찌 된 노릇인지 점점 더 의구심만 들 뿐이었다.
그렇게 성야 당일.
그간 찾아 처리한 인간 폭탄의 숫자가 무려 마흔이라, 교단 지하 납골당에 그만큼의 시체가 죽 늘어섰다.
저마다 사연이 다르나, 교단의 적의를 가진 이는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 추모 성회가 열린 것도 그런 이유였다.
뷔아는 그간 바빴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추모 성회에선 성가대를 지휘하며 추모 성가를 불렀다.
시엔으로서는 꽤 고역이었는데, 신관들이 그간 억제해 온 신성을 여기에 와서 푸니 공간 자체가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문 밖으로 나가자, 먼저 나와 있던 이가 아는 척을 했다.
“형제님 나오셨군요.”
“라이벵 경.”
“못된 소리인건 압니다만, 폭탄의 숫자가 마흔이라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서른 아홉이나 마흔 하나쯤 되었다면 아마 지금도 온통 거리를 휘젓고 있었을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만, 추모 성회가 열리는 와중에 할 소리는 아니다.
시엔이 라이벵을 바라보았다.
그 낯빛이 어둡고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붙어있으니 농담 반 자조 반이 섞인 것이었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셨으면 합니다. 정말로 힘들 때일수록 웃어야 한다 하더군요.”
공간에 가득찬 신성이 거북하여 표정이 흐렸더니, 라이벵이 보기엔 죽은 자들에게, 죽인 자들에게 마음 쓰여 가슴아파 그러한 것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름 농담이라 낸 것이 그러하니.
시엔이 슬쩍 미소지으며 농담을 받았다.
“혹시 이 다음에 제가 비슷한 일을 벌이게 되면, 숫자를 딱 맞추진 말아야겠네요. 서른 아홉을 보내면 하나가 신경 쓰여 잠도 못 들게 만들 수가 있을 터이니.”
“못된 말씀이십니다.”
“그러게요.”
그제야 라이벵의 얼굴도 조금 폈다.
성기사장이 품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담배를 물고 부싯돌을 튕겼다.
“연초도 하셨네요?”
“종종 합니다. 메이가 질색하니 오늘은 임무를 핑계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겠군요.”
“메이?”
“아. 집사람입니다. 성국에서 가장 좋은 여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만.”
“호오. 신혼인가요?”
“물론입니다. 식을 올린 지는 햇수로 15년 차이긴 합니다만.”
라이벵의 표정이 금새 기꺼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생각만 해도 좋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누구랑은 완전히 다른 반응이 아닌가. 누구는 전처 이야기만 나와도 질색을 하며 치를 떨던데.
라이벵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형제님께선 아직 미혼이셨지요. 페벨룬의 공주님과 교제하신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습니다. 식은 언제쯤 올리십니까?”
“식이라뇨.”
“헛된 소문이었습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요.”
“형제님은 또한 귀족가의 일원이기도 하시지요. 왕가라면 꽤 좋은 혼처가 아닙니까? 왕가와의 혼사라면 어느 왕국이든 귀족이 꺼릴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귀족가의 사정을 잘 아시네요?”
“성기사가 안 되었다면 저 역시 정략혼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귀족 출신이셨군요.”
시엔이 능숙히 말을 돌렸다.
남의 연애사는 재미있어도 본인에겐 왜 항상 오지랖 혹은 잔소리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사실은 말입니다. 열다섯에 간 신전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초장이의 딸로 곤궁하니 동전 조금이라도 보태겠다 신전에서 잡일을 하던 여인이였지요. 아내를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떤 순간이었나요?”
“시간이 멈추는 듯하고, 세상 천지에 선명한 꽃들이 피어올라 색이 따로 튀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느꼈지요. 이 여인이 내 운명이구나. 천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속에 차오르는 힘을 느꼈습니다.”
시엔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맞습니다. 그 순간 신성이 텄지요. 천신께서 내리신 은혜였습니다. 신성이 텄으니 신전에 투신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
원래 뛰어난 검재로 유명하던 이라. 신성이 텄으니 오러가 흩어졌다. 덕분에 신전에 투신하여 성기사가 되었다.
오러를 잃었으나 실력과 재능이 원체 뛰어나니 금방 요직에 오르고, 또한 신성이 강력해 성기사장에 이르렀다.
“덕분에 지금의 아내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전부 천신께서 주신 은혜이니, 이 한 목숨 그분을 위한 방벽이자 검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마법사의 견해로 신성은 천신이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믿음 그 자체가 이질적인 마력을 불러들여 결실을 이룬다는 것이 결정적인 가설이었다.
가설에 머무는 이유는, 이것으로는 성자 성녀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신은 모든 지성체를 똑같이 사랑했다. 누가 저를 섬긴다 하여 더 귀애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천신이 신성을 내려준다는 논리 자체는 성립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제 이야기가 길었군요. 형제님께선 어떠하십니까? 페벨룬의 사정은 모르나 그러한 정략혼이 그럴듯하다 보입니다만.”
말을 돌렸더니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시엔이 내키지 않아 반쯤 농담으로 받았다.
“여인이 상전인 경우는 개인적으로 저어하는지라.”
순간 라이벵 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선량하면서도 굳건한 눈동자 안에 이채가 서리니, 무언가 라이벵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원래 내자란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내 뿐만 아니라 여인 역시 마찬가지지요. 서로 상전을 모시듯 존중하니 계속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흠.”
“그나저나 형제님의 교제 이야기가 뜬소문에 불과했군요. 정략으로도 아닌 겁니까?”
“아니게 만들 겁니다.”
“과연. 현명하십니다. 평생 함께할 반려를 그러한 이득으로 재단해 고른다면. 음. 제 생각에는 꽤 끔찍한 일입니다.”
라이벵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아니게 만든다 하시니. 혹여 마음에 두신 여인이라도 계십니까?”
“그런 건 아닌데요.”
“호오. 그럼 이러한 여인이 좋다 생각하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시엔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별생각이 없었다.
왕자인 시절에는 각종 공부들에 어둠의 씨앗을 다스리기 바빴고, 흑마법사였을때야 그저 복수만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시엔이 되고 나선, 글쎄. 결혼이라고 해봐야 베른닐과 그 두건에 얽힌 딱한 사정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니.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네요.”
“제 생각에 여인의 가장 훌륭한 덕목은 바로 마음씨가 아니겠습니까. 선량하여 타인의 아픔에 눈물 흘릴 줄 알고, 기쁨에 함께 기뻐하는 그런 성품이 제일입니다.”
시엔이 눈썹을 모았다.
“아까는 아내분께 첫눈에 반했다 하시지 않았나요?”
“흠, 흠. 외양이야 개인의 취향이니 제 눈에 아름다운 것이, 음. 음······.” 라이벵이 생각하는 척을 하다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외양 역시 중요한 것이지요. 물론 내면보다는 아니겠지만, 둘 다 갖춘 여인이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가 흔해야죠.”
“적어도 신적에 이름을 올린 자매님들은 그 성품이 고결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개중 아름다우신 분을 찾아보시지요.”
“아직 혼인에 대해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라이벵의 표정에서 측은함이 묻어났다.
본인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좋은 것을 어찌 아직도 안 하느냐는 듯한 딱함이 눈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꼴이었다.
라이벵이 이내 진심어린 조언을 토해냈다.
“거창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사소하게 기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까운 이부터 좀 돌아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가까운 이라.
시엔이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니 그나마 가까운 여인들 중, 어쩜 이렇게 정상적인 녀석이 하나도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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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한가운데라, 아주 늦게서야 해가 넘어갔다. 그리고 이내 사위가 조금 어둑해지나 싶더니, 이내 세상이 다시 밝아왔다.
하늘의 한편, 거대한 별이 떠올라 푸른 광휘를 내뿜으니 달이 그에 미치지 못해 모습을 감추었다. 이내 신비로운 푸른 빛이 세상을 감싸니, 세상에 색이 일시에 뒤바뀐 것만 같았다.
성야. 일년 중 가장 성스러운 밤이었다.
본단으로부터 성야제의 시작을 알리는 가두 행렬이 시작되었다. 성황이 가장 앞장을 서고, 성자 성녀들과 대주교들, 신관들이 뒤를 따랐다.
원래는 성기사단이 한 사람처럼 발을 맞추어 나아가는 행진이 뒤따라야 했다. 올해엔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 폭탄에 대비하여 인파 속에 섞였기에 취소되었지만.
혹시 폭발의 전조로 붉은빛을 뿌리며 달아오르는 이가 있다면 즉시 처치하여 폭발을 저지해야 했으니까.
순례자들이 휘파람을 불고 성자 성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일부는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몇몇은 화관 따위를 들고 다가와 걸어주기도 했다.
행렬은 중앙 대광장으로 이어진다.
대광장에서 이 모든 인파가 함께 세상의 평온을 을 알리는 기도를 올리고, 이후 성황이 덕담과 함께 성야제의 시작을 알릴 터였다.
시엔의 명예 성자 수여도 이때, 성야제가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예정되어 있었다.
명예 성자라는 칭호 자체가 지금껏 없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리에서 공표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교단 수뇌부의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순례자가 직접 보고 듣는 역사가 되니 곧이어 전 대륙으로 퍼져나가리라.
마침내 행렬이 대광장에 이르렀다.
성야제야 대륙 어디서나 열리는 공통의 축제지만, 성국에서의 성야제는 다른 곳과는 조금 달랐다.
모두가 순례자요 신실한 교인들이라, 다른 축제만큼 떠들석하고 기뻐 요란하나 묘한 질서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이윽고 광장 중앙에 이르러 성황이 무릎을 꿇고, 뒤를 따르는 무리가 미리 연습하여 맞춘 움직임으로 제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동선으로 그저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러나 일순간 모두가 무릎을 꿇어, 성황을 중심으로 정연한 원형의 태가 갖춰지니 매년 보아도 감탄이 나온다 하던가.
시엔 역시 연습한 대로 성황의 정면에서 무릎을 꿇었다. 기도가 끝나면 곧장 수여가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자. 기도하겠습니다.”
성황의 말에, 세상이 일시에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수많은 순례자가 전부 한데 기도하니 조금 전까지 박수며 휘파람 따위의 소음은 온데간데없는 꼴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다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아무리 기도한들 무용일 뿐. 천신은 그저 지켜볼 뿐이니 기원을 들어 하는 일이 없다.
아직 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마법적인 처리로 사방에서 울리니 순간 모두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두변을 둘러보았다.
-불행은 인간의 탓이요 행복은 천신의 덕이라니. 그 추악한 위선이 쌓여 만든 탑이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하여 나는 탑을 무너뜨린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이성을 위하여. 지금 그대들이 흘릴 피가 바로 그러한 토대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나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목소리가 천중처럼 고막을 두드리니, 모두 두려워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너희 모두 죽어 거짓된 신과 하나로 사라지리라! 이제 모든 것이 파괴되리라!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서 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으니, 성황이 다시 신성을 돋궈 군중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사람들이 진정하지 못하자, 성자 성녀들이 일시에 신성을 내어 빛의 날개를 펼쳤다.
“천신이시여······.”
그 광휘에 군중들이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소란이 진정되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조금 늦었지만, 함께 기도드립니다. 나와 너가 아닌, 내가 모르는 세상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 산 자가 있다면, 너희를 벌한 화염을 기억하라. 폭발을 기억하여 뼈에 새기고, 그에 무너지던 모든 바위를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모든 밤에 악몽으로 떠올려라.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산 자가 있다면? 누가 죽었나? 나도 몰라. 누가 죽었나 보지. 누가 죽어? 그런데 화염은 뭐고. 폭발? 뭐가 터졌나?
-그러니 전 대륙에 알려라. 천신이 교단을 수호하지 않고 이 참화를 그저 기켜보았음을 알려라. 여기에 죽은 수만의 생명이 천신에게 어떠한 가치가 없음을 널리 퍼뜨려라!
인간 폭탄을 성도로 들여보낸 장본인이리라. 폭탄 말고도 메세지 마법을 새긴 누구인지 무엇인가인지, 혹은 다른 수단으로 목소리를 전달한 모양이었다.
녀석이 지금 성도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참사가 일어났다 믿고 떠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모든 인간 폭탄이 처리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목소리는 신이 나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천신이 무용하며 사람을 지키지 않으니 거짓된 신앙에서 벗어나 이성으로 새 시대를 열라는 등의 내용이 절반, 호탕한 웃음소리가 절반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크하하하, 응? 뭐라고? 실패? 그게 무슨 소리냐! 실패라니!
-주, 주인님! 그게 어떤 폭발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크아아악! 다시 나불대 봐! 이 빌어먹을 년이, 실패라니! 으아아아!
기고만장하던 목소리가 급히 분노를 토했다. 이어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며 꺄악 하는 여인의 비명소리, 짝짝 무언가 때리는 소리와 분노에 가득한 괴성 등등이 울려퍼졌다.
-토메쏘, 토메쏘 그 개년을 당장 데려와! 일처리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저, 주인님.
-왜 미적거리고 있지? 내 말 안 들리나?
-저 혹시, 혹시 말인데요, 창공의 목소리를 거두셨나요? 오브가 아직 빛나는 것 같.
그리고 목소리가 급히 끊어졌다.
“저딴 멍청한 게 내 적이라고······.”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