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6] >
시엔이 온종일 성국을 돌아다녀 찾은 인간 폭탄의 숫자가 열을 넘었다.
라이벵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꽤 지친 기색이었다. 해가 지고 밤이 드리워 깊을 때까지 계속해서 날이 더우니, 그때까지 거리를 헤집고 돌아다녀 지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리라.
땀을 닦던 라이벵이 멀뚱히 바라보는 시엔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땀 한 방울 안 흘리시는군요?”
“더위를 안 타는 체질인 것 같습니다.”
“땀과는 상관없이 날이 더우면 몸이 늘어지기 마련인데,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가요?”
그 모습에,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몸이 피곤한 기색이 없으니 이태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마 순진무구가 신체에 어떤 수작을 부린 덕택이리라. 대체 몸뚱아리에 무슨 짓을 해 놓았단 말인가.
물론, 지금까지 손해를 본 것은 없긴 하지만. 타인도 아닌 제 신체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을 털어낸 시엔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수색을 종료하는 편이 좋겠네요.”
“성야제까지 이제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닙니다. 나흘뿐이니 밤을 새워서라도 그 악의 뿌리를 뽑아야······”
“사람의 집중이란 한계가 있으니, 촉박하다 서두르기보단 휴식을 취해야 해요. 오히려 지쳐 보고 놓치는 것보다 나을 거에요.”
시엔이 단호히 말했다.
급하다 하여 밤을 새며 찾아봐야 사람의 집중이 그에 따라가지 못하니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형제님의 말이 맞습니다.”
라이벵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에서 오늘은 이만 쉬자 하는 것이 더 나은 판단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인간 폭탄들이 아직도 성국에 있고, 그 시한이 이제는 나흘 앞으로 다가온 성야제가 아니던가.
그러니 내일을 기약하며 휴식을 취하겠다는 결단이 옳으나 쉽게 실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른 판단이나 사람이 급하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가 않은 일이라.
“그렇다 해도 오늘 밤엔 잠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셔야죠. 휴식 또한 임무의 일환이라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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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의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결국 그 시설은 호화롭지 않았다. 넓지 않은 방 안에 별다른 장식 없이 정갈한 객실이었다.
시엔이 누워 생각에 잠겼다.
지난 역병 때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교단을 노린 공격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와 같이 시엔의 적이 벌인 일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왜?
적의 정체는 가시렌 왕국의 고위 귀족 혹은 왕족 중 하나였으니, 결국 세력을 모아 무언가 도모하려는 속셈이리라.
그런 이가 교단을 적대시할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민심도 그러하거니와, 신전의 전력 역시 예사 것은 아니었다. 전 대륙에 그 교세가 퍼졌으니, 적으로 돌려서야 그저 손해밖에 없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신관의 신성이 외면하게 될 터이니, 군세와 제 수족의 부상을 어떻게 감당할 셈이란 말인가.
“점점 더 알 수가 없어.”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일시에 폭발이 일어 절벽이 무너지고 성국이 매몰된다 한들, 그것이 곧 교단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황과 고위 신관, 그리고 성자성녀 몇이 사라질 뿐. 교단이 대륙에 내린 뿌리란 성국이 사라진다 해서 뽑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극히 분노해 한데 뭉쳐 적을 찾으리라. 그때 온 대륙이 함께할 터이니,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텐데.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하자, 낮익은 얼굴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수히 주교님이었던가요?”
“네, 형제님. 뭘 하고 계세요?”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단 참입니다만.”
“혹여 바쁘신 건 아니시죠?”
“그렇습니다만. 어떤 일이신지.”
“그렇군요. 히힛.”
수히가 대주교답지 않은 경박한 웃음을 흘리곤 다시 문 바깥으로 사라졌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빨리빨리, 아, 밀지 말라니까, 하고 티격태격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수히의 것이고, 하나는 뷔아인가?
문이 활짝 열리고, 빈 공간 너머에서 목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아, 정말! 왜 이래!”
“왜? 성녀님. 선물을 받았으면 감사를 드려야지.”
“이거 실패작이라고 했단 말야!”
“실패작이고 뭐고 다 챙겼잖아요. 자, 어서.”
“아니, 밀지 말고. 야!”
이내 뷔아가 등을 떠밀려 억지로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수히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그리고는 밖에서 문을 탁 닫으니, 방 안에 시엔과 뷔아 둘 뿐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밤이라 하여 더위가 식지 않았다.
지금이 밤이 아니라도 덥다 할 날씨였으니, 이 폭염에 담요를 둘러 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마에 번들거리는 것이 옅게 배어 나온 땀이었다.
시엔이 물었다.
“안 덥습니까? 담요를 두르기엔 한참 이른 날씨인 것 같습니다만.”
“내, 내 맘이에요.”
“뭐, 그러시다면야.”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수히 그게 억지로 미는 바람에······”
“아무 일도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성녀의 신체 능력이 이미 인간을 초월했으니, 수히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성녀를 억지로 밀어 넣을 재주가 있을 리가.
그러니 본인도 못 이긴 척 밀려왔다는 뜻이 아닌가.
시엔이 멀뚱히 바라보자, 뷔아가 낯을 붉혔다.
“손님이 왔는데 자리도 안 권할 셈이에요?”
“일단 뭐. 손님은 접니다만.”
신전의 본단이니 성녀인 뷔아가 주인이고, 시엔이 방문한 손님이 아니던가.
“윽. 사내가 돼서 쪼잔하게 그런 거로 말꼬리 잡지 말고.”
“흠. 사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네.”
“됐거든요?”
뭐가 됐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엔이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뷔아가 앉아 손에 쥔 담요만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 시엔이 가만히 기다리자, 뷔아가 미적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깐 미안했어요.”
“미안할 일이 있었습니까?”
“시엔을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난 또 뭐라고.”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둘이 붙어 서로 의견이 다르면, 자연히 벌어지는 것이 논쟁이 아니던가.
특히나 어떤 문제들, 가치와 도덕처럼 뚜렸한 정답이 없는 것이라면 더욱이 그러한 일이고.
“애초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러자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진지하게 하는 말이거든요?”
이크. 누군가 왕자에게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여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정말로 별 신경 안 써서 안 썼다 했더니, 그냥 뭉개 넘기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까이 있어 신체적으로 심적으로 여러모로 해로운 데에다, 털털하니 친구처럼 여겼다.
이럴 때에만 여인처럼 굴다니. 이건 조금 치사하지 않나?
시엔이 급히 정색했다.
“뷔아의 말이 틀렸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이미 폭탄이 되어 교단을 겨눈 셈이 되었지만, 그 개개인이 그저 속아넘어갔을 뿐이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았나요?”
“무지는 선량할지는 몰라도 무고하진 않습니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모를까, 저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잠깐. 뷔아.”
시엔이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이래서야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 아닙니까.”
시엔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과거 왕자의 스승이었던 현자는, 여인에게도 현명할 수 있는 영감이었다. 영감이 말하길 합리와 이성에 호소하지 말라고 했었던가?
“뷔아가 충분히, 아니 뷔아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연민하고 가슴아픈 일이 맞습니다. 그들이 교단을 적대한 것도 아니며, 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저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었다기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아니, 됐어요.”
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좀 화가 났었나봐요. 맞아요. 시엔이라고 마음이 편하진 않았겠죠. 시엔이 별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보여서 더 화가 났었던 것도 같고.”
“이해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넘지 말하야 한 선이 있는데. 산 사람을 속여 무기로 만든다는 건 정말이지. 빌어먹을 개자식 같으니.”
“맞습니다. 개자식이죠.”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거죠? 우리가 그렇게 잘못한 것이 있던가요?”
“개자식이 상대를 보고 개짓거리를 하진 않을 겁니다.”
뷔아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래도 이제 얼추 진정이 된 모양새였다.
시엔이 안도하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안 덥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으니 더 놔뒀다간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창을 열어도 바람 한 점 없는 더위에 담요를 야무지게 둘렀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여름에 감기를 걸리지는 않았을 터인데.”
“남, 남이사.”
“보는 내가 더워지는 듯한 기분입니다만.”
“윽. 그게 아니라.”
뷔아가 시엔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슬그머니 담요를 끌러내렸다.
“새 성복입니까? 시원해 보이는군요.”
“시원해 보인다니.”
항상 입던 치렁치렁하니 나풀거리는 성복이 아니었다. 소매가 없이 어깨가 전부 드러나면서도 통이 넓어 품이 넉넉하니 바람이 잘 들을 법한 의복이었다.
뷔아가 다시 담요를 뒤집어썼다. 땀이 맺힌 얼굴이 유난히 붉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담요입니까?”
“그, 그럼 이런 걸 어떻게 입고 다녀요? 살이 다 드러나는데.”
“겨우 그걸로 살이 다 드러난다고 하면, 귀족가의 여식들은 아예 헐벗고 다니는 셈이겠군요.”
여름 연회에서 귀족 여인들의 옷차림이란.
사내의 시선을 모으는 것이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라 여기는 여귀족들이, 여름 연회만 열리면 앞다투어 파격적인 드레스로 경쟁을 벌이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건 성복이 아니잖아요.”
“성복 같은 끼가 있긴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런 건.”
“파르멧이 꽤 실력을 부린 모양입니다만. 왜, 민소매도 시원하니 더울 때는 괜찮은 것이 아닙니까?”
“성복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괜찮지 않습니까? 교단이라 하여 매양 손등을 덮는 긴 소매를 고집하는 법이 있겠습니까. 더운 것이야 신관이라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하지만 이렇게 어깨를 훤히 드러내는 건 조금.”
“사내들은 아예 웃통을 벗고다니기도 합니다만. 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인간 폭탄이야 시엔이 마력을 느껴 찾아내는 것이지만, 다른 사제들이며 성기사들은 그저 이리저리 살펴 드러난 살에 붉은 문신을 찾을 뿐이었다.
가서 살을 좀 봅시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오고가는 사람을 살피며 드러난 곳을 찾을 수밖에는.
그 말인즉슨, 그 몸통이 드러나기만 하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시엔이 눈을 빛냈다.
“예하를 뵈어야겠군요.”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