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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03화 (103/268)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5] >

레은 백마흔은 세우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이였다. 그러나 날이 워낙에 가물어 다 자라지도 못한 곡식이 누렇게 뜨니, 한 해의 수확이란 보나마나였다.

그러니 근심 속에 그저 비가 언제나 오려나 목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한 상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금화 다섯 개를 내밀며 말하기를, 자기 대신 성국의 성야제에 참여해 축복을 빌어준다면 이 열 배를 댓가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농사는 이미 반쯤 망쳤다.

이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겨울의 굶주림을 걱정하던 참이니 어찌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있으랴.

축복을 대신 받는다는 기묘한 문신을 받고, 성야 당일 밤 가장 사람이 많은 곳에서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잠깐, 사람이 가장 많은 곳에서라구요?”

뷔아가 질색했다.

인간을 폭탄으로 쓰는 악독함이란 생각만 해도 여간이 아니건만, 심지어는 가장 사람이 많은 곳에서 터뜨리려는 수작이 아니던가.

“그런 것 치곤 꽤 헤메이던데. 왜 그랬지?”

“축복을 대신 받아주는 문신이라고 했지만, 뭔가 썩 좋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요. 속에 열이 오르고 땀도 막 흐르고 무엇보다 기분이 너무 나빠서.”

“그래서?”

레은이 고개를 떨궜다.

문신을 받자 뭔가 끔찍한 것이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붉은 선들이 몸통에 달라붙고, 농사는 망해 벌써부터 가족의 굶주림을 걱정하던 참이었으니.

결국, 순례를 핑계로 성국에 도착했으나 도저히 천신상을 뵐 염치가 없어 그저 맥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다는 것이었다.

“저, 나리.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은의 표정이 한층 불안함에 잠겨들었다.

“뷔아. 혹시 신전에 상주하는 최고위 방화광이 있습니까?”

“······없어요.”

“다른 방법이 없군요.”

“시엔?”

문득 시엔의 그림자가 창날이 되어 솟았다. 그 끝이 레은의 턱 아래로 파고들어, 정수리 부근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뷔아가 눈을 깜박였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미처 인지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내 쉐도우 스토커의 창날이 거두어지고, 꿰인 레은의 몸이 무너져 쓰러졌다. 허연 것들이 조금 튀고, 붉은 피가 나무 바닥을 적셨다.

뷔아가 급히 시신에게 달려들었다.

흰 빛이 어리니 신성이 뿜어지나, 이미 두뇌가 파괴되었으니 숨이 끊어진 이후였다.

뷔아가 시엔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고통은 없었을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뷔아.”

시엔이 뷔아의 손등 위로 손바닥을 가만히 가져다대며 시선을 마주쳤다. 의외로 서늘한 손길. 뷔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떨어지니, 분노한 기색은 여전하나 이전처럼 눈이 뒤집힌 꼴은 아니었다.

“내게 설명해 봐요.”

“인간 폭탄은 정상적인 마법이 아닙니다. 방화광이라 하더라도 엄격히 금지된 것이니, 아마 핵심 간부급 아니면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할 겁니다.”

“그래서요?”

“모르는 마법을 해제할 순 있습니다. 아마 한 달쯤 연구하면 가능하겠죠. 성야제는 닷새 남았군요. 저와 같은 치들의 생명 역시 그와 같을 겁니다.”

폭발은 여럿이 모일수록 강력한 법이었다.

게다가 먼저 폭발하면 경계하여 공격이 있다 알 것이니, 조금이라도 전략을 아는 이라면 한데 일시에 폭발하여 가장 큰 피해를 주고자 할 터였다.

예를 들자면, 폭발로 인해 절벽이 무너져 아예 성국 전체가 매몰되도록 만들 정도의 피해를. 아무런 상관없는 이를, 절박함을 이용해 매수하여 제 신원조차 감출 정도로 영리한 적이었다.

그러니 성야제 당일 일시에 폭발하도록 수작을 부렸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꼭 죽여야 했나요? 지금이라도 방화광을 요청해 자문을 구하면 성야제 전까지는······.”

“방화광들이 알게 되겠군요. 적이 섞여있을지도 모르는 그 집단이. 만약 적이 알게 되면 폭발을 앞당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뷔아의 표정이 기묘했다.

납득할 수는 없으나 이해는 했다는 듯한. 이성과 감성의 충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런 얼굴이었다.

“나는, 나는 모르겠어요. 시엔. 어째서 그렇게 쉽게 하나의 삶을 끊어버릴 수가 있나요? 살려볼 다른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건가요?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잖아요.”

원래 성녀의 심성이 그러한 것이리라.

생명을 귀히 여기고 타인을 연민하여 불쌍히 여길 줄 알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신관들이란 대개 이렇게나 선량한 이들이 아니던가.

내 영민이 아니라도 살아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들이었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어쩌면 하는 가능성에 수만명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수만명의 목숨.

뷔아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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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황제의 칭호를 가진 이가 유일했다. 법황.

교단이 대륙을 어우르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바로 교단의 우두머리이니 황제라 칭하기에 모자람은 없으리라.

물론 법황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일은 없었다. 정복을 도모하지 않고, 제국을 꿈꾸지 않기에 그저 신관 중 가장 높은 자에 불과하다 할 뿐이었다.

황제라 불리나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당대의 법황은 그 자리가 어색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구부정한 허리며 움츠러든 어깨, 거북목을 한 중년이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비굴함이 섞여 눈치를 본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오, 어서 오시게나. 얼굴 한 번 보기가 너무 힘든 것이 아닌가요? 시엔 형제님.”

“예하께서 공사가 다망하신데 어찌 함부로 그 시간을 청하겠습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그저 기도하고 먹고 그렇게 시간이나 때우는 한량이지. 이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신전에서 쫓겨났을 거예요.”

법황이 제 이마를 가리켰다.

살과 뼈가 뒤집혀 밖으로 드러나 복잡한 문양을 그리니, 시엔의 손등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흔이라 불렸다.

천신과 대면한 증거였다.

“사실 내 그간 형제님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천신님을 뵙고 왔을 때, 사흘 밤낮을 울다 쓰러져 차라리 죽겠다 싶었지요. 고약한 형제자매들이 날 살려 여기에 올려 놓았지만 말이에요.”

법황이 말을 쏟아냈다.

“그분께서 사랑하심이 나와 살인자가 같다면, 세상에 선함이란 의미가 없다 생각했지요. 나아가 그분을 따르고 애정하는 의미조차 없으니 삶이 헛되었다 죽겠다 생각했어요. 형제는 어떻던가요. 그분의 사랑을 마주하고서 나처럼 아팠던가요? 지금은 극복했나요?”

문득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에게 신이란, 세계를 관측하여 모든 것이 정해진 형태로 온전히 살다 죽도록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살아 죽고 돌아 다시 사는 이 조화가 깨지지 않고 혼돈의 파멸을 막아 세상을 유지하는 존재라.

그리하여 모든 마법사들이 세상을 사는 것이 천신의 사랑 덕분임을 알았다.

그런데 신관은 어찌 생각할까.

그러나 그건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할 터였다. 더욱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말씀하심이 기꺼워 밤을 새워서라도 함께하고자 하나, 지금은 죄스럽게도 나쁜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예하.”

“나쁜 소식이라니요? 성야를 앞두고······”

“성국이 위험합니다. 교단의 적, 그렇군요. 적의 공격입니다. 예하.”

“자세히, 자세히 말해 보세요. 공격이라니?”

시엔이 사정을 설명했다.

잠시 후, 교단의 최고위 신관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 전쟁에서 정찰의 중요성은 수만번을 강조해도 모자란 것이 아니다. 적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 상황은 최악이었다.

적을 모른다는 것.

인간 폭탄이 얼마나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게다가 폭탄이 아닌 그 주체, 흉수가 성국에 들어와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성국에 들어와 있다면, 인간 폭탄을 눈치채고 제거하려 하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폭탄 수색은 은밀히 진행해야 했다.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문제는 은밀한 수색의 방법이었다.

그 기운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이가 고위 마법사 뿐이었다. 그러나 시엔 이외의 고위 마법사가 있지도 않고, 있다 해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니 성기사며 신관들이 총동원되어, 거리를 순찰하며 붉은 문신이 비치는 이를 찾아다닐 수밖에.

그나마 시엔이 그 기운을 읽어 알아차릴 수 있으니 발로 뛰어 바쁠 수밖에 없었다.

“자매님, 죄송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머, 무슨 일이세요?”

“여기 성기사 분들께서 모실 겁니다.”

시엔의 눈짓에, 성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여인은 잠시 눈을 굴리다, 이내 알겠다며 순순히 성기사의 인도를 받아 사라졌다.

장소가 성국이며 권하는 이가 성기사라. 해를 끼칠 것이 아니라 순순히 믿고 따르는 것이었다.

시엔의 곁에 선 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라이벵 경?”

“큰 죄를 범하고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군요. 결국 간교한 꾀에 속았을 뿐이니······.”

성기사장 라이벵이었다.

교단의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이니, 적의 공격을 맞아 시엔과 함께하겠다며 나섰다.

“그나저나, 천신께선 역시 성흔을 아무에게나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군요.”

“그 말씀은.”

“저번에도 교단을 위기에서 구하셨지요. 이번에도 형제님이 아니었다면 이 끔찍한 음모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라이벵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제님께는 뭔가 꺼림직한 것이 느껴졌었습니다. 저뿐만 아닙니다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 느낌도 옅어져 거의 사라졌습니다.”

음차원 에너지와 신성의 반발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느낌이 거의 사라졌다는 말은, 신체가 변화하여 품은 마력이 거의 새어나가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그를 모르는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라이벵이 말을 이었다.

“천신께서도 이를 미리 아시니, 형제님께 성흔을 주어 저희 어리석은 이들이 그저 몽매한 느낌에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뒤를 쫒아 따르도록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성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신을 보고 가져오지 않았던가.

교단과 틀어져 귀찮아질까 염려해 한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뷔아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성기사가 원래 교단의 적을 베어 지키는 이들이었다. 그 적의 공격을 미리 알아챈 시엔에게 신뢰와 감사를 표하는 중이었다.

무고한 이가 속아 폭탄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목을 베어 그 공격을 저지하는 데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방금 인도받은 여인 역시, 문신이 확인되는 순간 곧장 목이 떨어질 터다.

“이 모두 천신께서 인도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바라보는 시선에 흠모가 듬뿍 담기니, 시엔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예하께서도 성흔이 있으시던데요.”

시엔이 말을 돌렸다.

“예하께서는 조금 특이한 분이십니다. 워낙에 귀가 얇으신 분이라, 사소한 직언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으시지요.” “귀가 얇다고 표현하던가요?”

“적어도 그분께는 장점입니다. 교단 최고회의에 들어가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만.”

“그건 또 무슨 뜻인가요?”

“워낙에 귀가 얇으시니, 대주교분들이나 저와 같은 성기사장의 주장에 금방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러니 가만히 입을 다물면 어떤 안건이라도 통과가 되어 버리니 큰일이 되어 버립니다.”

덕분에 법황은 조용히 듣고, 휘하 대주교며 성기사장, 성가대장 등등의 최고의 사제들만 목에 핏줄이 터져라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조율된 최종 안건에 법황이 그저 그럽시다 할 뿐이니, 모두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니 교단이 아주 평안하게 잘 돌아가는 중이라고.

“또 느껴지네요. 저기 적금발을 한.”

“일단 포위하겠습니다.”

라이벵이 신호를 보내자, 평복을 한 성기사들이 은근슬쩍 자리를 잡았다. 혹여 도망갈까 대비하여 길목을 차지하고, 말을 걸어 신전으로 인도했다.

라이벵의 표정이 밝았다.

“벌써 다섯입니다. 반나절만에 이 정도라면. 성야제까지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적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인간 폭탄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엔이 돌아다닌다 한들, 그 탐지 범위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의 동선이란 이 넓은 도시 안에서 한계가 있었으니.

한둘이라도 놓쳐 폭발하면 그 피해는 보통이 아니니라. 완벽히 막아내지 못하면 지는 그런 싸움이었으니.

그러니 뭔가 다른 비책이 필요했다.

시엔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폭탄을 찾아낼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그것이 적이 알아채지 못해야 하는 그런 방법이.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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