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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02화 (102/268)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4] >

과거 흑마법사가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시절에도 성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였으니, 그로부터 또다시 천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하랴.

도시 전체에 역사의 흔적이 역력하니 그 자체로 귀중한 유적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순례자들이 성국에 오는 목적이란 눈으로 보고 경배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던가.

방화광의 기운을 따라가니, 뷔아가 꼬치를 우물거리며 아는 척을 했다.

“알한테의 천신상을 보러 가는 모양이네요.”

“알한테?”

“천 년 전의 조각가에요.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예술사에선 꽤 중요하게 꼽히는 인물이죠. 전체적 조형보단 세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후 선악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거든요.”

“몰라서 한 소리는 아닙니다만.”

“예술에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럼 알한테가 생전 상당히 부자였다는 건 알아요?”

“이상한데. 찢어지게 가난한 녀석이었는데.”

시엔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반쯤 걸인이었던 친구였다. 어디서 굶어죽겠거니 했더니, 성국에 도착해 천신상을 새겼던 모양이었다.

절벽 한 편을 깎아 만드는 일이니,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교단에서 입히고 재우고 먹여줬으리라.

죽을 때까지 굶을 걱정은 없겠다 싶어 나서지 않았을까. 충분히 그럴만한 녀석이었는데.

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진짜로 알고 있었어요? 안 속네.”

“떠보는 건 사절입니다.”

“귀족 자제란 생각보다 할 일이 없나 봐요? 별걸 다 배워 익힐 시간도 있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 그쪽이 아니에요. 천신상은 여기서 직진을······”

시엔이 방향을 틀자, 뷔아가 제지했다.

“방화광이 알한테의 천신상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었군요. 이쪽으로 가면 뭐가 나옵니까?”

“딱히 나오는 건 없는 길이네요.”

“순례가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방화광의 행보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사람이 걷는 대에는 전부 그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저 휘적휘적 움직여 걷기만 할 뿐이니.

“그냥 산책이라면요?”

“기왕 성국까지 왔으니 산책이라면 유명한 예술품이라도 보려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붐비는 곳이 싫은 걸수도 있고.”

“그게 싫은 이가 성야제에 성국까지 오겠습니까?”

“확실히 수상하네요.”

뷔아가 눈을 빛냈다.

미행이 꽤 재미있는 모양.

시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꼬치가 대체 몇 개 째입니까? 그게 다 들어갑니까?”

“성도분들이 주신 성의를 그냥 버릴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어떡해요. 먹어야지.”

“싸간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사제분들과 나눠 먹으면 될 것을. 그걸 혼자 다 먹을 셈입니까?”

“그, 그러려고 했거든요? 그냥 맛만 본 건데.”

시엔이 뷔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빈 꼬치가 이미 한 뭉텅이였다.

“혹시 미각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직도 맛을 몰라서 계속 드시는 중이었군요.”

“에이 씨. 진짜.”

“그것도 아니면 평소에 먹는 수준에 비교하면 맛을 보는 정도가 그 정도인, 웁.”

입안에 훅 들어오는 꼬치에 시엔의 말이 막혔다. 뷔아가 으르렁거렸다.

“이거라도 처먹고 제발 좀 닥쳐요.”

시엔이 꼬치에 꿰인 고기를 빼어 씹었다. 소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구워놓은 것으로, 몇 번 이빨이 박히자 사륵 흩어져 입만으로 녹아들었다.

소라는 짐승의 고기란 사실 질기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구워도 질기고 잘 구워도 질기며, 너무 구워놓으면 천조가리를 씹듯 입안에 남아 넘어가지 않는 법이 아니던가.

“꼬치가 제대로군요. 어디서 받은 겁니까?”

“그건 십오분 전에 갸사렐 거리 붉은모자의 노점이네요.”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대충은요.”

“과연. 어쨌든 나중에 다시 들러야겠군요. 이건 상당한데.”

“그렇게 맛있어요?”

“상당히 부드럽습니다. 소고기로 이런 식감을 낼 수 있는 줄은 몰랐군요.”

“어디, 나도 좀 줘 봐요.”

“먹던 것을 빼앗을 셈입니까? 세상에 제일 치사한 게······”

“내가 받은 거거든요?”

“그다음엔 제가 받았군요.”

“아, 진짜. 침이라도 발라놓은 거 아니면 좀 내놔 봐요.”

“침을 발라놓으면 되는 겁니까?”

“아, 씨. 됐거든요?”

뷔아가 흥 콧김을 내뿜었다.

시엔이 킬킬거리자, 돌연 눈을 빛내며 손을 뻗으니 그 속도가 벼락과 같았다.

성녀의 신체가 인간을 초월한 데에다, 스스로 체술의 달인이기도 하니 그 진심이 담긴 한 수가 얼마나 빠르랴.

눈 깜박이는 사이 손이 비어 꼬치가 사라졌다. 시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으. 맛있어. 세상에. 완전.”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그럼 이런 걸 혼자 다 먹으려고 했어요? 안 먹어봤으면 손해 볼 뻔했네.”

의외로 식탐이 상당한 편이었구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이 여관이로군요.”

“여관은 왜······”

“여기까지 뭐하러 왔는지 모르겠군요. 꼬치 먹으려는 핑계였습니까?”

“앗.”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는 뜻의 탄성이었다.

시엔이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뗐다.

성녀는 어디서든 인기가 높으니 여관 주인이 반기고, 홀에서 떠들던 이들이 일순 대화를 멈추고 간단히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평범한 여관이었다면 달려들어 축복을 달라 난리가 벌어졌을 테지만, 성도라 그 정도로 극성인 이는 없다는 것이 다행일까.

덕분에 별 제지 없이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복도 중간의 객실 너머에서 방화광의 기운이 느껴지니 바로 안에 있는 모양.

시엔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손님, 음식을 좀 가져왔는데요.”

-그런 거 시킨 적 없어!

“좋은 때라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시엔이 잠시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철컥 빗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 뭐야, 당신들!”

급하게 닫히는 문. 시엔이 손을 뻗어 활짝 열어붙였다.

“저는 시엔 티란디스라고 하고, 모자라지만 명예 추기경이라는 과분한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이쪽은 뷔아 샤인 세러헤드 성녀님이십니다.”

이럴 때는 권위를 파는 것이 제일이리라.

시엔에 말에, 사내가 멀건히 서서 얼어붙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어쩔 줄을 모르니 시엔이 한 마디 덧붙였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어, 그. 예. 예에. 들어오시죠.”

시엔과 뷔아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순순히 들어오라 할 줄은 몰랐으니.

하기사 성국에서 성녀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수상한 일이겠냐만은.

“헌데, 두분께선 어쩐 일로.” “교단에서 화염 마법사의 조언을 청할 일이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찾아뵈었습니다만.”

“화염 마법사요? 그런데 그걸 왜 제게······.”

“본인께서 화염탑의 구도자가 아니십니까.”

“그,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사내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아케인 에너지, 그중에서도 선명한 화염이 느껴지는데 방화광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전혀 마력을 숨길 생각이 없이 그대로 드러낸 꼴이었다. 거짓을 말하려거든 마력부터 감추는 것이 기본이 아니겠나.

“이상하군요. 기운이 선명히 느껴지는데.”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시엔이 손을 뻗어 사내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사내가 기겁해 몸을 빼다, 시엔이 괜찮다 하니 그제야 얌전히 가슴을 내밀었다.

마법사에게 심장은 마력의 원천이자 영혼이 담기는 그릇. 가장 중요한 장기이자 급소이니, 어지간해서 타인의 손길을 허락하는 법이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이와 같은 행동이 마법사라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사내의 몸 안에서 강력한 화염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장기와 핏줄과 뼈를 오가는 급류가 거치니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이라면.

“시엔? 꺅, 뭐, 뭐 하는 거에요?”

시엔이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사내가 억센 힘에 들려 바동거리니, 뷔아가 급히 끼어들어 팔목을 붙들고 만류했다.

뷔아의 신체 능력이 인간을 초과했듯이, 시엔 역시 순진무구의 호의 아닌 호의로 인해 초월적인 육체를 가졌다.

진심으로 힘을 주어 사내를 붙드니 뷔아가 떼어내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시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봐. 너. 여기엔 뭐하러 왔어?”

“저, 저는 그냥 성야제를 맞아······”

퍽.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사내의 주둥이에서 흰 것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턱을 제대로 맞은 사내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제야 시엔이 손을 놓아 바닥에 내던졌다.

“시엔!”

“소리 좀 그만 지르십시오. 귀청 떨어지겠네. 귀 안 먹었습니다.”

“하. 이게 무슨 짓이죠?”

“그냥 살짝 겁만 준 겁니다.”

“야! 대화를 해 보겠다며!”

“대화는 사람하고나 하는 거고.”

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재앙이 제 꼴도 모르고 돌아다니는군요. 놔두면 사람 한 둘 죽는 걸로 안 끝날 겁니다.”

“잠깐. 설명. 설명을 좀 해 줘요.”

“흠. 직접 보는 것이 빠를 겁니다만.”

시엔이 바닥을 기는 사내에게 다가가, 옷을 잡고 북 찢었다.

“꺅!”

뷔아가 급히 눈을 가렸다.

사내의 맨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갗 위로 붉은 문신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뷔아가 슬그머니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니, 그제야 심상지 않은 문신을 보고 물었다.

“이건 뭐죠?”

“방화광의 솜씨입니다. 아주 고약한 건데.”

“고약하다니요?”

“쉽게 말하면 폭발 마법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폭발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골렘까지 생성하는 술식이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걸어 다니는 폭탄이라는 뜻입니다.”

제국이 궁지에 몰리자. 끔찍한 전략들이 쏟아져나왔다. 자국의 영토를 불태우고 황폐화시키는 청야 전술도 그러한 것 중 하나였다.

인간 폭탄 역시 비정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강대한 흑마법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전략이기도 했다. 애초에 제국의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백성이라면 병사거나 아니거나 모두 지워야 할 적이었다.

제국의 치세 아래, 그 백성은 단 한 명도 무고한 이가 없다. 그들이 누리는 평화, 풍족한 삶, 태어남과 자람이 모두 제국의 비호 아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던가.

왕국이 불타 사라지며 제국이 위세를 떨쳤다. 그로 인해 제국인이 행복하여 혜택을 나누어 가졌으니 모두가 공범이오, 불구대천의 원수인 셈이었다.

그리하여 흑마법사가 결코 자비를 베푼 적이 없어, 인간 폭탄 역시 가까이에 오지 못했다.

“잠깐, 시엔. 분명 이전에 말하길 방화광이 유난히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치를 뒤쫓는 동안에도 몇이나 더 감각에 잡히더군요. 느껴진 것만 벌써 열 명이 넘을 겁니다.”

“확실해요? 그들이 모두 이런 거라면······.”

“폭발이란 것이 두 개가 뭉쳐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 배 네 배로 커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만한 숫자라면.”

“숫자라면요?”

“폭발 자체도 위험합니다만, 워낙 사람이 많으니.”

시엔이 객실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회색으로 솟은 것이 바로 절벽이었다. 성국을 둘러싼 드높은 절벽.

뷔아가 시엔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 아름다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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