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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99화 (99/268)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1] >

올해 봄이 일찍부터 포근하다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초여름부터 더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여,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다. 밤낮으로 날이 더우니, 사람들이 이렇게 더운 여름이 지금까지 없었다고 말을 모았다.

지독한 한천이었다.

날은 더우나 하늘에 물기가 없으니, 가뭄이 들어 왕국 전체의 강줄기가 말라갔다.

물론 티란디스 영지는 예외였다.

세계수는 영기를 품어 천지를 부리는 신물이라. 그 세계수가 보우하는 영지니, 비가 내리지 않아도 땅에 물기가 차올라 해를 입지 않았다.

대신, 이 한천에 땅이 촉촉하니, 그 증기가 올라 습하기가 보통이 아니라. 더운 날씨에 다습하니 지내기는 더욱 고역이었다.

물론 가뭄에 시름하는 다른 영지들보다야 훤씬 나은 꼴이었지만.

“······날도 더운데 왜 여기 모여있어?”

“네 방이 시원하단 말이다. 왜지?”

“응. 시원해.”

로우드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 옆에 비설이 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의 방이라 하여 다른 곳보다 더 온도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 이만큼 시원한 장소가 별로 없으리라. 음차원 에너지가 가득하고 망령과 악령이 풀렸으니, 산 영혼이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이란 기분에 따르는 것이라, 영혼이 연신 경고를 보내오니 신체가 느끼기엔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서늘하다 여길 수밖에.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원한 건 시원한 거고. 네 방 놔두고 왜 여기서 이래?”

로우드가 시엔의 책상을 차지했다. 서류를 넘기는 손이 바쁘니, 대꾸를 하면서도 눈동자가 글씨를 읽어 바삐 움직였다.

“난 괜찮은데. 비설 양이 힘들어해서.”

“응. 너무 더워.”

서리바람 숲은 이름 그대로 서리 낀 바람이 분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에도 서늘하니 드센 바람이 불었다.

더위와는 영 상관없는 곳이라, 난데없는 폭염에 비설이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

“흠.”

시엔이 딱 붙은 남녀를 바라보았다.

비설은 이상하지만 이상한 엘프는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문화에 무지할 뿐,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한 지성체였다. 멍청해 보이지만 멍청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계속되는 구애를 결국 알아들었다.

어느새인가 둘이 착 붙어다니니, 종족 간의 벽을 허문 한 쌍이 탄생하게 된 비화였다.

그 극성스런 부인과도 담판을 지었다고 하니, 로우드 녀석도 콩깍지가 아주 제대로 끼어 어미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지.

로우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올해는 한탕 벌겠어.”

“말 돌리지 말고.”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할 말 없으니 화제를 돌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로우드가 시엔의 말을 못 들은 척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왕국 뿐만 아니라 전 대륙이 난리야. 백 년 이내 최대의 가뭄이 예상된다더군. 벌써 곡식의 가격이 치솟는 중이고.”

“어차피 우리 생산량으론 그저 우리나 먹고 말 정도가 아니던가?”

“그럼 안 되지. 모처럼의 벌 땐데.”

“어떻게? 영민을 굶기겠다고?”

로우드가 펜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올해엔 제빵을 엄금할 거다. 대신 육류를 풀고. 올해엔 고기로 배를 채우게 될 거야.” “자체 소비를 줄이고 밖으로 내다 팔겠다?”

“그걸 팔기는 아깝고. 제일 오래된 저장곡을 내다 팔고, 올해 수확한 것들로 채워놓을 생각이다.”

“호오.”

시엔이 순순히 감탄했다.

어느 영지건 비상사태를 대비해 곡식을 비축해두었다. 그러다 이처럼 가뭄이 들거나 할 때 풀거나 했다.

본 목적은 전쟁물자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저장된 것들 중에서도 특히 오래 묵은 것들은, 상품으로는 가치가 없었다.

오래 묵힌 것들이라 스프를 끓이면 알갱이가 무르고, 빵을 만들면 식감이 거칠고 쉰 냄새가 났다.

그러나 세상이 온통 가뭄이라 먹을 게 없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맛이 없다고 해서 주린 배를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원래는 돈을 받고 넘기기도 힘든 것들을 비싸게 팔아치우고, 그 자리를 햇곡식으로 채워 넣겠다는 것이 아닌가.

꽤 탁월한 수완이었다.

물론 올겨울에는 영민들이 빵 없이 고기만 씹어야 하겠지만.

괜찮지 않나? 고기 맛있으니.

그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며, 집사가 직접 손님이 찾아왔다 기별을 젼했다.

“시엔 님, 파르멧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또?”

“예복을 갖추셔야죠. 성야가 다음달이지 않습니까.”

“그 양반은 너무 유별나. 벌써 몇 벌 째야?”

“그만한 자리니까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적당히 하면 될 것을.”

시엔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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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멧 안스테르는 고명한 제단사였다.

본인 입으로 스스로 대륙 제일이라 칭하곤 했는데, 그 오만함을 제하고서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었다.

이 재단사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특이하게도, 예복을 아무에게나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아무 자리에나 입고갈 예복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왕가의 예식이나 국가적 행사의 주인공이 입을 예복만을 만들며, 특이하게도 보수는 또 주는 대로 받는 이였다.

예복을 만들게만 해 주면 돈을 안 줘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어느 귀족이 예복 값을 깎으랴.

게다가 파르멧이 예복을 만들겠다 달려들 행사의 주인공이라면, 그 값을 정중히 치뤄 주는 것이 당연했다.

어떻게 보면 장사수완이라 볼 수도 있겠고.

“명예 성자님!”

파르멧이 시엔을 반겼다.

사내 주제에 얼굴을 새하얗게 분칠해 덮고, 입술은 새빨갛게 칠한 놈이었다. 원래 예술이니 하는 것들의 행색이 괴상한 법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응접실은 이미 파르멧의 도제들이 점령한 모양새라, 어느새 들어찬 옷걸이들에 예복이 한가득이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다 입어 보라고?”

“에이, 보통 자리입니까? 교단 본산의 성야제의 주인공께서 옷도 못 된 천떼기를 두르시면 안 될 일이지용.”

“유난이야, 유난.”

“자. 자. 그러지 마시고. 삼그레야. 컬렉션 72번부터.”

“예, 선생님.”

시엔이 보기엔 전부 비슷비슷한 것들이었다.

장식이 조금 다르거나 소매의 주름이 조금 다르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같아보이는 것도 있어 입어보면서도 대체 다른 점이 어디인가 알 수 없는 예복도 있었다.

“자, 96번.”

“예, 선생님.”

옷을 계속해서 벗고 입는 것도 고역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다.

파르메가 보고 완벽하다 한 예복이 있었으나, 하필이면 그것이 온통 새하얀 것이었다.

‘흰 옷은 싫은데.’

‘그냥 흰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의 흰 톤이 섞여, 멀리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은은함이 배합되어, 우아함을 살려주는······’

‘검은색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성야제가 아닙니까. 흰 색은 천신님의 광휘를 뜻하는 색이니 완벽한 코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흑마법사의 검은 로브 사랑은 원래 유별난 것이라. 시엔이 말재간을 부렸다.

‘온통 흰 것들 사이에 흰 것이 있으면 결국 색이 바라는 게 아닌가? 어둠이 있어야 빛이 밝은 법이지.’

‘어둠이 있어야 빛이 밝다? 오! 천신이시여! 맞습니다! 세상에, 어쩜 그런 세련된 발상을! 검은 바탕에 흰색의 절제된 포인트. 말하자면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 속의 한 줄기 빛! 고고한 희망! 온다, 영감이 온다!’

그리고 뛰쳐나가더니, 일주일에 한 번씩 옷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타났다.

그중에 고르라는 것이 아니었다.

모조리 입혀보고,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어줄수 없다 다시 가져가길 수 차례.

그리고 이제야 마침내.

“오오. 이겁니다! 완벽 그 자체야! 와안벽해! 어떻습니까?”

“호오.”

시엔이 감탄을 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고생을 한 보람이 있다 싶었다.

검은 색이 다 같은 것이 아니니, 셔츠는 광택이 산 검정이며 조끼는 완전한 검정, 자켓에는 밤하늘 색으로 묘한 푸른 끼가 섞였다.

흰 행거칩은 수수한 것이나 배색이 되어 돋보이고, 핀을 백진주로 마감하여 가장 밝은 별처럼 돋았다.

“마음에 드는걸.”

“저 역시 그러합니다. 일생일대의 걸작이라 칭해도 되겠군용. 내년엔 절대로 블랙이 유행할 겁니다. 세상이 또 한 번 파르멧의 뒤를 쫒아 움직이게 되는 거지용.”

“또 한 번?”

“가장 천재적인 이가 앞장서니 몽매한 제단사들이 그 뒤를 따르지요. 작년의 광폭 타이와 제작년의 이중슬릿, 제제작년의······”

“대단하네. 대단해.”

말이 한없이 길어질것 같아 시엔이 급히 틀어막았다. 파르멧은 다소 불만스런 표정이었으나, 알아들었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대금이 말입니다.”

“대금은 따로 청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물론 섭섭하지 않게 치러 주겠지만.”

“그야 지당한 말씀이시지용. 허나 이번엔 대금 대신 청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들어보지.”

티란디스야 거부로도 유명하니, 어중간한 금액이라면 오히려 속이 좁다 욕을 먹을 것이었다.

체면을 위해서도 거금을 들여야 하니, 대신 다른 것으로 퉁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리라.

“뷔아 샤인 세러하드 성녀님 말이지용. 이전에 그분을 뵙고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을 느꼈답니다. 어쩜 세상에 그리도 아름다우신 분이 계실 수가 있는지용.”

파르멧이 특유의 부담스러운 콧소리를 남발하며 말했다. 저 꼴에 저 말투라도 사내는 사내인지라, 뷔아를 보고 아름답다 여긴 모양이었다.

시엔이 쓰게 웃으며 물었다.

“반하기라도 했나?”

“누가 반하지 않겠습니까! 아, 오해는 마세용.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육체에 반했다는 뜻입니다.”

“육체?”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파르멧이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옷이 어울리는 이와 어울리지 않는 이가 있답니당. 그리고 그 시대의 한 두명, 극히 드문 사람만이 예복의 아름다움조차 압살하여 그 색을 바래도록 만드는 이가 있지용. 성녀님 같은 분 말이죠.”

“그래서?”

“그러니 어찌 천재 재단사이자 대륙 일인자인 제가 도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께 드려 색이 바래지 않을 만큼의 걸작을 만들고자 할 뿐이랍니다.”

“옷을 선물하고 싶다고? 그럼 굳이 내 소개가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나?”

파르멧의 어깨가 축 쳐졌다.

“이미 그분께 여러번 기별을 보냈습니다만, 사치는 즐기지 않으니 차라리 어려운 이의 옷을 지어 돌봐주는 것이 어떠느냐 답장을 받았습니다용.”

“흠.”

“그러나 공자님의 선물이라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공자님께서 선물이라 하시어 소개시켜주셔서, 제가 재단하여 궁극의 명작, 불후의 역작에 도전할 수 있게 해주십사 이 말이지용.”

시엔이 잠시 생각했다.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티란디스는 금화를 내지 않아도 좋고, 성녀는 새 옷을 얻을 테고, 파르멧은 제 뜻을 이룰 수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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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야란 여름의 마지막 달, 첫 주의 가운뎃밤을 이르는 말이었다.

천체의 움직임이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항상 제 갈길을 갈 뿐이었다. 그중 하루, 일년에 딱 하룻밤동안 가장 밝은 별이 뜨니 밤이 낮처럼 밝았다.

그래서 성야. 밤조차 밝히는 성스러운 빛이 지상에 이르기 때문에 그리 불리는 이름이었다.

대륙의 거의 모든 왕국에서 한데 축제를 여니 바로 성야제였다.

티란디스 영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야제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시엔은 아쉽게도 타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성국.

물론 말이 성국이지 국가는 아니다.

신전의 본단으로, 어느 왕국도 감히 여신의 본산을 발아래 두고 통치한다고 할 수 없으니 왕 없이 놓인 도시일 뿐.

명예 성자의 추대를 위한 방문이었다.

시엔에게야 사실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거절해 손해만 잔뜩이니 굳이 피할 것까지도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교단의 본산에 흑마법사를 이끌기엔 너무 가혹한 일이라, 두 시녀가 영지에 남았다.

베른닐을 대동하고, 옷감을 잔뜩 챙긴 파르멧이 동행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동행이 또 한 명.

“그러니까, 톙세듸······”

시엔이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했더라? 기묘한 이름이라는 것 의외엔 생각이 안 났다.

어린 성자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테이로 좋다니까요, 형님.”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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