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6] >
“이게 무슨 꼴인가! 사람을 우숩게 봐도 유분수지!”
살사스 후작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고위 귀족일수록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시뻘건 얼굴로 고함을 지르니 그 분노가 예사로운 것은 아니리라.
딸 사랑이 지극하다고 했던가.
야스텔테 백작이 다급히 달려들어 머리를 조아렸다.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그러나 야스텔테 백작의 일방적인 잘못이 맞고, 두 가문의 체급 차이를 생각하면 현명한 처신이었다. 수장이란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후작님, 제 당장 수습을······”
“수습? 지금 이게 수습이 될 일이야? 성사가 이 모양이 되었는데! 세상 하늘 아래 가장 좋은 날을 이렇게 망치는 법도가 어디에 있나!”
“하루만, 하루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 당장 모자란 아들놈을 끌어다 무릎 꿇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일 없네! 그딴 놈에게 어떻게 세이리를······”
“제가 단단히 잡아둘 터이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모자란 녀석이라 죄스러울 뿐입니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길길이 날뛰는 후작을 말린 것은 오히려 당사자인 세이리였다.
“진정?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전 괜찮아요.”
“괜찮다니!”
후작이 가슴을 쳤다.
“괜찮다 괜찮다 하지 말고! 대체! 네 식이고 네 배우자가 아니더냐!”
“아빠.”
“······크흠.”
“저는 괜찮아요.”
후작 역시 살 만큼 살았으니 사람의 감정을 대충은 안다 할 정도는 되었다.
사별 이후 텅 비어버린 딸내미. 그래도 요 근래 혼인하여 아이를 갖고자 한다며 조금은 사람 같은 낯빛을 하던 딸이었다. 그러니 새 남편의 됨됨이에 한해선 무심할 정도로 관대하겠지.
후작이 한발 물러났다.
머리가 식자 다른 계산이 들었다.
이 정도 소란이 있었으면, 자신의 면을 봐서라도 세이리에게 극진히 대할 수밖에 없으리라.
“백작님께서도 그만 고개를 드세요. 가족이 될 사이잖아요? 일단은 영식께서 무사하신지 아는 것이 우선이잖아요.”
참으로 예쁜 말이 아닌가. 속이나 썩이는 자식의 짝으로는 아까울 정도로. 야스텔테 백작이 고마움 반, 미안한 반으로 세이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고, 또 고맙구나. 네게 면목이 없구나.”
“저는 괜찮아요.”
“최대한 빨리 수습하도록 하마. 내 최선을, 아니 직접 나설 터이니.”
이내 백작이 부관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당장 비상을 걸도록. 기사단을 전원 소집하고, 직할대를 움직여 룬데엘 녀석을 찾아. 방해되는 것들은 얼마든지 치워도 좋다.”
----
백작저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식이 중단된 것에 불과하다고 하니 떠나기도 그렇고, 또 남아있자니 눈으로 지켜본 진귀한 구경을 이리저리 퍼뜨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까닭이었다.
그런 손님들을 하나하나 방문하며 사과와 양해를 구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하라엘 야스텔테, 백작가의 대공자였다.
룬데엘과는 형제라고 생각하기 힘든 냉막한 얼굴이었다. 백작을 똑 빼닮은 얼굴이라, 과연 그 아들이구나 할 정도였으니.
“미안하게 되었군. 외가라고는 없는 것처럼 굴다, 이제 와선 또 그 첫 방문이 이 꼴로 엉망이 되어버려서.”
“나름 재미있었으니 뭐, 괜찮아.” 시엔이 키득거렸다. 하라엘이 그런 시엔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변했다 하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군.”
“다들 그러더라고. 아. 그나저나. 수렁뱅이가 대체 뭐야? 처음 듣는 말인데.”
“영지의 오랜 골칫덩이지. 수렁에서 사는 것들. 다들 그렇게 부르다 보니 그렇게 붙어버렸어.”
“수렁에서 산다고? 빈민들인가?”
“아니 괴물들이야.”
하라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날 선 혐오가 선연한 표정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물, 몬스터인가?”
“흠. 설명이 어렵군. 기본적으로 무해한 것들이다만, 사람을 해치는 것들도 아니고.”
“음.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익사한 시체를 본 적이 있나? 그 비슷한, 피부는 진흙과 같아 연신 흘러내리고. 썩은 물에서 살며 그 속에서 숨을 쉬지. 흠.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군.”
시엔이 눈을 빛냈다.
그와 비슷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도를 벗어난 맹목적인 전쟁 기술이 만들어낸 불쌍한 삶들.
“혹시 사람의 말을 하나?”
“이미 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인가?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하지. 듣기도 하고. 그러니 나오지 말라 그저 막아두고 살라 자비를 베풀었건만.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야.”
“흠.”
“그간 그저 덮어두고 막아두니 문제가 생긴 거지. 진작에 청소했어야 했는데.”
“원래 청소는 귀찮은 법이니까.”
하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기사 한 명이 찾아와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하라엘이 곧 작별을 고했다.
“아. 벌써 시간인가. 어쨌거나 시엔, 편안히 있다 갔으면 좋겠군. 탁 까놓고 말해서, 유능한 사촌 덕 좀 봤으면 하거든. 그러니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자고.”
하라엘이 그렇게 말하곤 기사와 함께 나섰다.
신기한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가 어찌 가만히 있으랴. 하라엘이 떠나자마자, 세올이 바로 입을 열어 물었다.
“흠, 머드 슬라임 같은 걸까요?”
“바리밀쟁이의 인간형이 아닐까 싶은데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인간이야. 오염된 인간이지.”
“선배님, 오염 말씀이십니까?”
“인간이라니요?”
“과거, 제국이 제국으로 있기 위해 많은 연구를 남들 몰래 진행했지. 개중엔 대량 살상을 위한 독술 역시 연구 대상이었고.”
“마법사의 금기 중 하나잖아요?”
“제국에 충성하는 마법사에겐 아니었거든. 개중에 오염이란 지독한 것이 있었지.”
오염. 과거 제국이 만들어낸 끔찍한 전략무기였다. 역병과 비슷하나 전염성이 없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인간을 변화시켰다.
그렇게 오염이 되고 나면, 몸이 붓고 악취를 뿜으며 피부가 흘러내리니 그 질감이 썩은 진흙과 비슷하게 보였다.
물론, 제대로 실전에 투입되기 이전 제국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지하 수렁이라.”
“혹여 가 보실 생각이신지요?”
트리예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가 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트리예의 연구 분야가 그러하니,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지 않겠는가.
“당연히 가 봐야지.”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하 수렁과 오염된 인간들이라면 뇌리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생각이 맞다면, 퍽 유용한 것을 챙길 수가 있으리라.
----
수색에 참여하고 싶다 의사를 밝히자, 야스텔테 백작은 먼저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다. 손님인 시엔이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도록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혈육의 위험을 모른 척해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게다가 보아하니, 크게 위험한 곳은 아닌 모양입니다만.” 아무리 살사스 후작을 달래기 위한 제스쳐라지만, 백작 본인과 대공자가 함께 들어갈 정도면 사실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백작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다 해도 안전을 장담할 곳은 아니니, 후발대에 합류하도록 하게나. 내 호위를 붙여줄 테이니.”
안전을 확보한 뒤편에 있으라는 뜻이었다. 시엔이 그렇게 약속하고 나서야, 수렁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대한 뚜껑이 바닥에 놓였다. 거대한 강철 조형 위로 거의 마모되어 희미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거푸집에 부어 만든 주물이라 예전에 여럿 본 기억이 있는 것이었다.
단순한 선으로 표현한, 날개를 편 매의 문양. 천 년 전. 제국이 쓰던 문양이 아니던가.
뚜껑이 덮고 있던 구멍에선 악취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악취가 온 사방에 자욱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베른닐이 건네는 손수건을 들어 입과 코를 가리니 향수의 향과 악취가 섞여 더욱 엉망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손수건을 주머니에 챙겼다.
“냄새가 심하네.”
“지하 수렁이라더니. 딱 맞는 이름이 아닙니까”
긴 통로의 중앙이 패여, 그 안에 썩은 물이 고였다. 푹 썩고 불쾌한 형태를 한 건더기가 부유하고, 물은 탁해 횃불 아래 그 속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흠. 저쪽으로 가 보자.”
자박자박. 시엔이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몇 번인가 갈림길이 나오고, 시엔이 마치 아는 길처럼 척척 꺾어 걸어 나갔다.
백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코너를 돌자, 한곳에 모아놓은 오물더미가 눈에 띄었다.
머리가 하나. 몸통엔 사지가 달렸으니 인간과 같은 형상이라. 그러나 퉁퉁하니 불은 몸통에 질척한 피부는 진흙 인형과 닮았다.
앞서간 백작의 수색대가 처리해 한 곳에 모아둔 것이엇다.
“시엔 님, 이것 좀 보셔요.”
“호오. 이걸 수렁뱅이라고 하나 보네.”
“어디. 잠시 검 좀 빌려 주시겠어요?”
병사 하나의 검을 자연스럽게 받아든 트리예가 바닥에 놓인 수렁뱅이의 시체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배를 가르니, 지독한 악취 속에서도 더 지독한 냄새가 퍼졌다. 누렇게 덩어리진 체액으로 미끄덩거리는 장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트리예가 눈을 빛냈다.
“이건. 시엔 님. 장기의 여러 부분이 통합되어 있네요. 여기 심장과 간이 연결된 부분이 보이세요? 조류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심본의 형태랍니다.”
“어떤 식으로 처리한 건지 알겠어?”
“그건 소녀도 연구를 해 봐야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여길 보시겠어요? 폐조직이 여섯, 일곱 군데에 있고. 호흡기가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전혀 모르겠다는 뜻 아닌가.”
“크흠. 하지만 몇 개 챙겨다 연구를 해 보면 금방 그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랍니다.”
“그건 안 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보고 알겠으면 모를까. 모르겠으면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지.”
“예, 시엔 님.”
트리예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나 얼굴엔 못내 지운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니까.
인간은 적어도 인간으로 죽어야 하는 법.
시엔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좌로 우로, 서너개의 통로가 교차하는 복잡한 교차로에서도 척척 막힘 없이 쭉쭉 나아갔다.
도중 백작의 다른 수색팀과 마주치기도 하고, 또 다른 수렁뱅이의 시체 더미를 발견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시엔이 멈춰서서 손짓했다.
“베른닐, 이쪽으로 와 봐. 너희도.”
시엔의 손짓에, 기사와 시녀 둘이 얌전히 곁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눈앞에 번쩍 불이 튀며 백광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공간 전체가 뒤바뀌었다.
“도련님!”
“나 여기 있어.”
베른닐이 급히 시엔을 찾았다. 시엔의 모습을 확인하곤 그제야 얼빠진 표정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간 자체는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취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더러운 벽이며 천장 따위가 깨끗하니 새것처럼 뒤바뀌었다.
시엔이 통로 중앙으로 흐르는 수로를 바라보았다. 맑은 물이 투명해 바닥이 그대로 비쳤다.
역시. 제국수도잖아.
도시 아래에 수로를 파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더러운 물을 빼내는 제국의 기반 시설이었다. 아마 야스텔테 백작저가 있던 자리에 제국의 대도시가 하나 있었던 모양.
천년 전, 제국은 대륙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영토만큼이나 그 백성도 많았다.
사람이 많으니 인재가 많고, 인재가 많으니 기술이 발전했다.
공학에서부터 마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한 세력 휘하에 모였으니, 서로 융합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훌쩍 뛰었다.
제국수도 역시 이와 같은 제국의 최신 기술이었다. 지하를 파 물을 끌어내고 또한 교차한 수로로 오수를 배출했다. 마법적 처리를 통해 공간을 왜곡하여 이어내니, 공학과 마법이 복잡하게 얽혀 풀어내기 힘들었다.
지금은 실전되어 사라진 기술이었다.
기술에 참여한 전문가가, 제가 맡은 분야가 아니면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기술이 아닌가. 제국이 사라지고 나서 그 전체적 설계를 기억하는 이가 누가 있었으랴.
“이건 대체······”
“제국수도. 그러니까, 하수도야.”
“하수도 말씀이십니까? 이게?”
베른닐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대가 낮은 곳으로부터 더 낮은 곳의 하천으로 향하는 굴을 파고, 도시 곳곳에 처리소를 이어놓은 것이 지금의 하수도가 아니던가.
“세상에, 이게 제국수도란 말씀이세요?”
“호오. 알아?”
“문헌에서만 읽었답니다. 제국의 대도시에는 그 네 배에 달하는 지하가 있었다. 식수를 끌고 오수를 빼며, 유사시 통로와 미궁을 겸해 도시 방어의 한 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맞나요?”
“맞아. 따로따로 판 통로를 공간 왜곡으로 이어붙였지.”
“그럼, 여기가······.”
트리예가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른닐은 체념한 표정이었고, 세올은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시엔이 바라보자, 이때다 하고 질문을 붙여왔다.
“그, 선, 도련님 말씀대로라면 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가 있었을까요?”
“천 년을 버티는 공사를 해야 한다는 게 제국 기술자들의 신조이자 자부심이었거든. 이제보니 헛된 소망은 아니었나보지.”
“하지만 마력은 어떻게 충당했을까요? 마법 처리가 천 년을 버틸 수는 없지 말입니다.”
이론은 이론일 뿐, 결국 눈에 보이는 결과를 믿어야 하는 법이었다. 천 년을 버티리라 누가 생각했겠냐만은, 실제로 아직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마법 처리가 천 년을 버티도록 하는 매개체. 제국식 마력 유지 핵이 아직까지 살아 작동중이었다.
시엔은 이미 본 적이 있고, 개중 여럿을 빼앗아 사용하기도 했다. 흑마법사가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시엔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이유를 찾으러 가자고.”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