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4] >
시엔이 눈을 꿈벅거렸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시엔이 재차 확인했다.
“내가 제대로 들었나?”
“혼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작 일주일 앞두고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룬데엘의 표정이 흐렸다.
말이란 사람의 낯빛에 따라서 또한 그 의미가 달리 들리는 것이었다.
확신 없는 얼굴과 힘 없는 목소리.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싫은 것을 참아 넘긴다는 듯한 체념이 짙게 깔렸다.
“혼인은 중대사야. 두 가문의 결합이지. 피로 엮인 동맹보다 굳건한 건 없으니까. 내가 여기 와 있는 이유기도 하고.”
“하지만 저는.”
“가문을 떠나 네게도 중요한 일이지. 항상 곁에 두고 정을 붙여 살아갈 상대니까. 그런 식으로 신부를 맞이하면, 앞으로 함께 살아날 남들이 너무 불행하지 않을까?”
“제게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요.”
“귀족의 혼사라는 게 매양 좋을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만. 후처로 들이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것도 안 됩니다.”
룬데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략혼은 정략혼일 뿐이라. 이 또한 귀족의 업이라며 정붙이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드물지는 않았다.
결혼 후에 각자 애인을 두는 일쯤이야 서로 눈감아 주는 공공연한 비밀으로 넘어가거나, 한발 더 나아가서는 아예 서로의 애인을 인정하고 허울뿐인 부부가 두 가정으로 사는 일도 있다고 하니.
“대체 뭐가 문제야?”
“제 연인, 아라니는 평민입니다.”
“그럼 첩으로 들이는 방법도 있지 않나?”
“첩이라니요. 그건 안 됩니다.”
“왜?”
룬데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인가? 시엔이 잠자코 룬데엘을 기다려주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청년이 한숨을 토해냈다. 폐부 아주 깊숙한 곳에서 쥐어짜 올라오는 그런 무거운 숨이었다.
“제 아이가, 제 아이를 서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쯧.”
시엔이 혀를 찼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곱지 않았다.
“그러면 진작에 막았어야지. 식이 코앞인데 손님 앞에서 이러고 있나? 백작께선 뭐라고 하시고?”
“아버지는 모르십니다.”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이제는 무슨 일인지 확실히 알았다.
귀족가의 청년 하나가 평민 여성과 눈이 맞았고 배꼽을 붙여 사고를 쳤다.
“말씀을 안 드렸나? 제 자식을 그리 생각하는 것치고는 백작이 퍽 무서웠던 모양이지?”
“아버지는 무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말도 못 꺼내고 이렇게 죽상만 쓰고 있었다고?”
“아버지께서 아시면, 그녀는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조용히 제거하려 하시겠죠.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을 테니까.”
시엔이 백작가의 영민들을 떠올렸다.
곤궁하기 그지없는 꼴이었으니 백작이 어찌 여겨 부리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아들이 하는 말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인 모양이지.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그건.”
넙죽넙죽 잘 대답하던 룬데엘이 말문이 막혀 눈동자만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다는 뜻이었다.
“일단 혼인은 혼인대로 하고, 눈치를 봐서 그 여인을 데려올 생각이었나 보군?”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이가 서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하긴 첩으로 들이면 지금이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긴 하지. 단지 그게 지금일 뿐인 거고.”
“귀족가에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표정은 왜 그 모양이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혼인식이 아주 화기애애하게 잘 돌아가겠네. 보아하니 백작께서 보통 공을 들인 것이 아니던데. 무서워서 말은 못 하겠고, 불만은 있으니 그런 식으로 뻗대겠다고? 식을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그게 네 복수 방법이야?”
“당신이 뭘 안다고······.”
“나중에 네 여인을 데려올 생각이라면, 적어도 지금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을 때는 아니지. 백작에게 인정받고 네 세력을 키운 후에 당당히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니고?”
룬데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작에 백작과 담판을 짓고 식을 막아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 여인과 야반도주를 한 것도 아냐. 그렇다고 뒤를 기약하며 지금 웃으려 노력하는 것도 아니네? 겨우 하는 일이라곤 그냥 나 힘듭니다 인상이나 쓰고 있는 게 다야? 쯧.”
룬데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쏘아붙이던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룬데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니, 놀란 표정이 올려다보았다.
“네가 얼마나 한심한 꼴이건 간에, 네가 힘들다는 건 부정하지 않으마. 타인의 아픔이란 결국 그 누구라도 재단할 수 없는 것일 테니까.”
가장 비통한 죽음 위에 재림하겠다던 흑마법사를 불러들인 것이 누구였던가. 언령과 역사로 보증한 가장 아픈 죽음이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었다. 천 년 전, 모든 것을 잃은 왕자가 좌절하는 대신 복수를 선택했듯이.
가만히 앉아 슬퍼하고 괴로워해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법이기에.
“여기 있으니 나까지 우울함에 옮겠네. 그럼 식에서 보자고.”
그것과는 별개로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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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텔테 백작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백작저는 아름답고, 요리사가 혼신을 다해 내놓은 식사는 훌륭했다. 게다가 속속들이 도착하는 마차들 사이에 내로라하는 대귀족들의 것이 끼어있었으니.
백작위에 있는 이가 저보다 상위의 귀족을 초대하는 일은 어지간히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개중에 흰 마차가 있었다.
별 장식 없이 수수한 모양새에 그저 희게 칠한 마차는 대륙에서 단 하나의 세력이 사용했다.
교단의 마차였다.
“시엔 형제님! 드디어 뵙네요! 성흔, 성흔을 볼 수 있나요?”
“아. 물론입니다.”
“오오, 성흔이야, 진짜 성흔이네!”
소년이 호들갑을 떨며 시엔의 왼손을 살폈다. 매양 신기한 듯 주물거리고 쓰다듬으니 대체 손을 놓을 기색이 없다.
시엔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제 입술을 갖다대곤 쭈웁 소리가 나도록 격렬히 입을 맞췄다.
“톙셰듸아넷즈 샤인 라뎨잇입니다! 어려운 이름이죠? 제가 좀 촌구석 출신이라서요! 테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형제님!”
샤인이라는 미들네임을 쓸 수 있는 이는 오직 성자 성녀들 뿐이라.
“좋습니다, 테이.”
“말도 편하게 하세요. 같은 샤인끼리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시엔은 다가오는 여름, 성야에 명예 성자 칭호를 받기로 결정이 된 상태였다. 그 후엔 시엔 샤인 티란디스라 스스로를 소개할 자격을 얻으니, 같은 샤인끼리라는 말이 그 뜻이었다.
흑마법사가 성자라니. 그렇게 입 밖에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렇죠? 형님?”
새하얀 이를 그대로 드러내니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렇게 해맑게 웃는 이는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왜 이리 달라붙어 치근거리는지.
신성을 뿜어내는 성자가 달라붙으니 그새 속이 답답한 것이 먹은 것이 체할 상이었다.
“신성을 좀 줄여 주면 좋겠는데.”
“아. 맞다. 그렇댔지.” 테이가 신성을 조절했다.
성자가 신성을 줄일 일이 언제 있었겠는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끙끙거리더니 얼추 신성을 거두는 데에 성공하고선 환히 웃어 보였다.
“아. 꽃밭에 뭘 떨군 것 같다. 뭔가 중요한 뭔가니까 찾으러 가야지.”
“저도 도와드리겠어요.”
“트리예는 선, 아니 도련님을 모셔야지. 나는 어, 음 중요한 걸 찾을 테니까.”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겠지요. 제가 꼭 도와드리고 싶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꼭 도와드리고 싶답니다.”
“둘이 다녀와. 난 됐으니까.”
그렇게 세올과 트리예가 성자에게서 도망쳤다. 그러고 나니 방 안에 둘 뿐이었다. 눈빛을 빛내는 테이를 보며 시엔이 난감해졌다.
얘는 왜 친한 척 달라붙지?
“그나저나 누님께서 많이 서운해하세요.”
“누님?”
“뷔아 누님 말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편지 한 장이 없냐고 많이 서운해 하시던데.”
“편지?”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시엔이 되물었다.
“서운하다고? 그럴 리가.”
“음, 사실 지금 교단 수련장이 계속 박살이 나고 있거든요. 누님이 조금 과격하신 부분이 있잖아요?”
“조금?”
“아하하······ 어쨌든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그런 식으로 푸시는데, 제가 보기엔 형님이 편지를 안 보내서 그러는 것 같아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요? 다른 이유가 있으셨나?”
“그럴 거야.”
“그, 들은 사람이 있어서요. 이 새ㄲ······ 아니, 어떻게 잘 지내냐 한 줄이라도 써서 보낼 줄을 모르냐고. 팔을 몸통에서 분리해버리겠다고.”
“누가 들었는데?”
“수히 누님이요. 아무래도 늘 붙어계시니까.”
시엔이 단호하게 말했다.
“편지를 기다리긴 하는 모양인데, 적어도 나는 아니야.”
“그런가요?”
“확실해.”
“그럼 누구지······.”
테이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손뼉을 치곤 또다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아. 맞다. 성사를 본 적이 있으세요?”
“있을 리가.”
“윽. 사실 성사를 보러 왔는데요, 으, 자신 없는데. 성사를 본 적도 없고 몇 번 지켜본게 전부인데. 아무래도 제가 성사를 보기엔, 좀. 그렇잖아요?”
성사란 혼인식의 주례를 맡는 일을 뜻했다.
신랑과 신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맞이하며, 덕담과 더불어 미래를 축복하는 이라.
대개는 가장 권위 있는 이가 맡았다. 그 권위가 곧 혼인식의 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성자 성녀가 맡아준다면 혼인식의 품격이 이보다 높을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 성자가 아직 소년이어서야.
영 모양새가 이상하게 되었다.
보아하니 교단 나름의 항의인 모양이었다.
교단이 막대한 기부를 받았으리라. 그것도 그냥 기부가 아니라, 샤인 급의 성사를 요청할 정도로.
다만, 영민은 나몰라라 혼인식만 호화롭게 꾸미고 앉았으니, 교단 입장에서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터. 받긴 받았으니 보내긴 해야겠고, 그렇다고 순순히 따르기엔 백작의 통치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이다.
샤인은 샤인인데, 성사를 보면 그림이 이상해지는 그런 어린 성자를 보내는 것으로.
“아, 실수하면 어떡하지.”
“성자가 성사를 봐 주는 일이니 다소 실수해도 상관없을 거야. 사실 성사가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 그 자리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그렇지만,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왜?”
“그야 두 사람에겐 평생에 한 번 있는 좋은 날인데, 영영 기억될 순간인데, 제가 버벅거려서 망치면 안 되잖아요.” 선의의 결정체 같은 녀석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신랑의 사정이 복잡해서 좋은 날은 못 될 거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복잡하다니요?”
“귀족의 사정이지.”
테이가 제 옆머리를 슥슥 잡아당겼다.
“음. 사랑 없는 결혼, 이런 건가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어차피 앞으로 함께 살게 될 거라면, 최대한 잘해주고 아껴주고 서로 그렇게 하려고 하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질 못하니까.”
“그럼 제가 더 힘을 내야겠어요! 결혼식부터 문제가 생기면 두 사람이 더 힘들지도 모르잖아요? 훌륭한 성사를 진행 시켜 보이겠어요!”
테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