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3] >
대륙에는 많은 왕국과 소왕국이 존재했다. 작은 나라는 겨우 요새 하나를 품고 있을 정도라, 티란디스보다 작은 규모의 왕국도 무수히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대국이라 불리는 거대한 왕국들이 있었다. 총 일곱 개의 왕조가 강성한 힘을 가졌다.
페벨룬 역시 대국이라 불리는 나라였다.
굳이 순위를 꼽자면 가장 뒤쪽에 위치하긴 하나 그렇다고 하여 얕볼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왕국 간의 전쟁이란 서로의 전력을 깎는 일이고, 말석이라 해도 대국과 붙어 국력을 건사할 왕국이 없었으니.
대신 위아래로 대국과 낀 형세라, 더욱 번성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대륙 현자들의 평가인 모양이었다.
“그 녀석이 가시렌에 있다고?”
“예. 사실 소녀 역시 흐레이그에서의 일이 끝나 가시렌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답니다. 매혹에 빠진 줄도 모르고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정체는 모르고?”
“자신을 르베다르라고 칭하긴 하였으나.”
“르베다르?”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제언으로 사용되는 베릴 언어로 신위에 오른 자, 신과 같은 경지에 있는 자라는 뜻이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존재가 존재로 있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자, 죽어서도 세상에 남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만하고 불경한 이름이 세계의 미움을 사 단명하거나 한없이 불행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세상에 이름을 그따위로 짓는 부모는 없으니 스스로 지어 붙였다는 뜻이었다. 대개 그러한 것을 가명이라 했다.
“그런 얼간이한테 매혹을 걸렸단 말야?”
“······면목이 없습니다.”
트리예가 이를 으득 갈았다.
시엔이 다시 물었다.
“됐고. 그 외엔 아는 게 없고?”
“가시렌의 할른폴드에 그놈의 거처가 있습니다.”
“할른폴드라.”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페벨룬의 북쪽, 황무지와 맞닿은 가시렌 왕국은 명실공히 대륙 제일의 영토를 가진 왕국이었다.
가시렌의 수도가 바로 할른폴드였으니. 하필이면 그랬다.
“왕족이려나.”
“예?”
“소드 마스터를 동원할 정도의 능력, 야만족에게 정교한 무기를 제공할 재력. 그러면서도 타국에 수작을 부리면서 본인이 나타나지 못한다면 왕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귀족이겠지. 귀족이라면 수도에 거처를 잡진 않을테니, 남는 건 왕족들 뿐 아니겠어.”
“음······.”
“조만간 한 번 들러야겠는걸.”
적이 어디에 속했는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두고 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한 대 맞고 나면 정신이 들겠지.”
영원한 밤의 창날 한 방이면, 왕성의 반절은 깔끔히 도려내 줄 자신이 있었다.
거기 휘말려 죽으면 좋고, 안 죽어도 그만한 참극을 수습하려면 향후 몇십 년은 수작을 부리지 못하리라.
트리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소녀가 알기로는 가시렌의 정치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것이라······”
“흠. 어떻길래?”
“선왕의 사업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현 왕조의 왕권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는 수준이랍니다. 지금은 원로원이라 불리는 네 명의 수도 귀족이 거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요.”
“그러니까 왕족이 아닐 수도 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오히려 왕족보다는 원로원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에요.”
“두셋도 아니고 넷 중 하나란 말이지.”
“게다가 왕족 중 하나라는 시엔 님의 말씀 또한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여요. 아무리 왕권이 약해 흙바닥을 구른다고 해도 오래된 왕조엔 나름의 저력이 있는 법이잖아요?”
“다섯 중 하나라.”
시엔이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은 간단했다.
적과 죄인을 하나로 묶어 세상에서 지워 마땅한 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 무고한 자는 함부로 해칠 수는 없었다. 먼 옛날, 왕자의 왕국이 그저 본보기를 위해 불타 그 백성이 전부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제국과 같은 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
르베다르라는 얼간이가 왕족이라면 참 편한 일이었을 텐데. 주인의 죄가 곧 아랫것에게 통하니 그 백성 모두 무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리예의 말처럼 귀족 중 하나라면? 애먼 이를 해쳐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조만간 방문을 해 봐야겠어.”
그렇다고 언제 또 꼬리를 내밀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구실을 붙여 직접 가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을 터다.
귀족의 몸으로 타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영 귀찮고 복잡한 일이라 당장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단은 뭐. 좀 쉬어야겠다. 일을 열심히 했더니 몸이 쑤셔서.”
시엔이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밀랍 봉인문은 사슴의 옆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야스텔테 가문의 문장이었다.
과거, 야스텔테의 차녀가 후작의 처로 들어왔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날 때부터 병약해 걸핏하면 병을 달고 살았다던가.
몸이 약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제 아이를 세상에 내고 대신 떠나간 여인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모진 환경 속에 성장하여 실연 후에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다른 이가 그 몸을 빌어 눈을 떴다.
“쉬신다 하시면?”
“연회장서 맛난 거 먹고 마시며 떠들면 그게 쉬는 거지 뭐.”
시엔이 편지를 집어들었다.
「불어오는 춘풍에 힘입어, 여기 새로이 두 가문이 하나로 엮이는 경사를 고합니다. 명예 추기경이자 또한 야스텔테의 피를 나눈 시엔 티란디스 님. 부디 참석해 주시어 새로운 인연으로 역사를 이어갈 남녀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사촌이 결혼한다니, 가서 좋은 말이라도 몇 마디 던져줘야 하지 않겠어?”
연회는 왕자 때부터의 오랜 취미였으니.
시엔이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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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마다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과거 왕자의 왕국은 어땠던가. 왕자가 거리에 나오면 휘파람을 불며 술을 건네거나, 제 딸이 오늘 밤에 기다린다는 둥 농담 반 섞인 인사를 건네오곤 했다.
후작가는 또 어떠한가.
귀족을 본 티란디스의 영민들은 조용히 모자를 벗고 인사를 올려 예를 표했다. 기본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 행렬을 막아선 노인처럼, 곤경에 처해서는 주인이 그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 믿고 앞에 나서기도 했다.
후작의 인품이 어떠한지 알 만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텔테 영지의 분위기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귀족가의 마차를 본 영민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이 행동들이 존경이라기보단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들이라.
게다가 야윈 이가 많고 해진 옷을 입은 이가 언제나 시야 한 곳에 자리잡았다.
어느 영지나 여름엔 옷을 벗고 가을엔 배가 부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늦겨울에서 초봄에 이르는 곤궁한 시기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가문의 재력이 빛을 발할 때라.
사업을 벌여 금화를 풀고, 곡식을 사다 풀어 다시 거두니 그 규모가 곧 영민의 꼴을 결정하는 시기였다.
아무래도 야스텔테 백작가는 가난한 편인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흠.”
백작저가 온통 화사하게 피었다.
저택의 바깥에서부터, 날개처럼 세워진 양 별채 사이와 본채 앞으로 펼쳐진 앞뜰, 그 광활한 공간에 흐드러지게 꽃들이 펼쳐졌다.
바람이라도 불면 꽃향기가 아찔하게 밀어닥치니 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신관들이 말하는 낙원이 이런 모양일까.
“어머머, 예뻐라.”
“훌륭한 저택이네요. 아아. 좋아라.”
두 시녀가 감탄을 토했다.
시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를 녹여 만든 풍경이었다. 누구나 보아 아름답다 할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가 고장이 난 이뿐이리라.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환영 인사가 날아들었다. 위는 없고 양옆에만 희끗한 머리가 남은 늙은이였다.
시엔이 내리자, 반갑게 팔을 펼쳐 포옹하니 꽤 격한 환영 인사였다.
“오오. 시엔이 왔구나. 어미를 꼭 빼닮았으니 한눈에 알겠어.”
으레 하는 말이었다.
티란디스의 마차가 관문을 지나마자나 시시각각 그 위치를 보고받았을 테니. 게다가 애초에 티란디스의 마차에서 예복을 입고 내릴 사람이 시엔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귀족의 인사란 이런 식이었다.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백작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이지. 우리가 같은 피가 흐르니 성이 다르다 해도 가족과 마찬가지 아닌가. 허허.”
하늘 위에 녹색 염료를 아주 살짝 콕 찍어낸 듯한 청록색의 눈동자였다. 시엔 역시 같은 눈이니 이 가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물론 그거야 신체의 사정이고, 존재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차피 처음 와보는 곳이고 처음 보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으니.
시엔이 신체에 남은 기억을 더듬었다.
내 것이 아닌 기억이라 이제는 흐릿하니 꽤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잡아낼 수 있었다.
인제 보니, 초대는 물론이고 연회 등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 무시해왔던 늙은이였다.
물론 그 마음도 알만 한 일이었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자식이라. 그런 놈은 한심하여 후작가의 애물단지요 버리는 패라. 당연히 그 낯짝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리라.
물론,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이었다.
“자자, 이러지 말고. 그렇지. 명예 추기경이 되니 좋은 날을 맞이한 동생에게 축복을 내려줄 수 있겠나?”
어차피 이 몸뚱이의 인연은 독을 마셨던 때에 끝이었다. 살갑게 대하며 반기니 일단은 내 편이라.
시엔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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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데엘 야스텔테는 올해 스물으로, 시엔의 두 살 아래라 사촌 동생이라 불러도 될 터였다.
시엔이 받은 첫인상은, 새신랑치고는 꽤 우중충하다는 것이었다.
우울한 면상을 하고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 결혼이 아니라 초상이라도 치르는 모양새가 아닌가.
“왜 그래? 표정이 썩 좋지 않은데.”
“음. 형님······. 이라 불러드려야 합니까?”
“그게 백작께서 바라시는 일이겠지.”
“그렇군요.”
“네게 축복이라도 내려줄까 했는데, 이제보니 꼴이 좀 그렇네.”
결혼을 맞아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나, 신랑부터가 별로 밝지 않으니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시엔이 다시 물었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어차피 모르실 겁니다. 시녀를 둘이나 달고 다니시다니.”
“음? 뭐. 거야.”
시엔이 머리를 긁적였다.
전속 하인이야 가까이 두고 친구처럼 부리는 이라. 여느 귀족이든 한 명은 곁에 두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보통 그러한 관계는 동성 간에나 통용되는 것이었다.
전속 하인이야 언제든 쪽방에 붙어 종소리를 기다리고, 밖에 나서서도 그 곁에 붙어있지 않은가.
사내가 여인을 전속 하인으로 부린다면 누가 뭐래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실제로 전속 하녀가 어느 순간 첩이 되어있는 경우가 아주 흔한 일이 아니던가.
후작가에서 일은 안 하고 매양 사내 구경만 하는 세올임에도, 감히 건드리는 하인이 없는 이유였다.
그게 하나도 아니고 두 명이라.
게다가 둘 다 평범한 얼굴은 아니었으니.
“공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뭐?” “공주님과 연인 사이이시지 않습니까.”
“뭐. 공식적인 사이는 아니긴 해도.”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시엔이 눈을 꿈벅거렸다.
룬데엘의 말에 힐난이라 할 감정이 역력히 들어가 있는 탓이었다.
시엔이 황당해 되물었다.
“내가 뭘?”
“연인이 있으신데 어떻게 다른 여인을 둘이나 품을 수가 있으시냔 말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시지도 않으십니까?”
이걸 어찌 설명해준담.
시엔이 잠시 고민 후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한테만 하는 소리인데 말야.”
그러니까 소문대고 다녀도 좋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말귀를 알아들었기를 빌여 말을 이었다.
“얘네 둘은 사실 하녀가 아니라 내 비밀 호위거든. 사실 대단한 실력자들이라, 저 둘이면 어지간한 분대 하나는 쉽게 쓰러뜨리거든.”
룬데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이라니까. 세올, 마법 하나만 써 봐.”
“예? 여기서요? 하지만······”
세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엔이 기다리지 않고 버닝 신에게 마력을 전달했다. 머뭇거리는 세올의 앞으로 불줄기가 화륵 타올랐다 자취를 감추었다.
룬데엘이 입을 떡 벌렸다.
“마법사, 화염 마법사였군요! 그럼 옆에 있는, 아니 계신 분도?”
“응. 둘 다 마법사거든. 사람 태우는 데는 아주 전문가들이지. 그러니까 뜬금없는 오해와 비난은 사양하겠어.”
“아······. 죄송합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됐고. 그래서 왜 그래? 경사를 앞두고 죽상을 하고 있으면 손님들이 잘도 축하를 해 주겠어.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더라도, 그렇게 티를 내고 있으면 손님 맞는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말입니다.”
룬데엘이 눈치를 보았다.
보아하니 대놓고 할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라, 시엔이 흑마법사 여인 둘을 내보냈다.
단 둘이 되자, 비로소 입을 열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룬데엘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이 결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