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91화 (91/268)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2] >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카레네가 당차게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제가 결정할 일이에요, 아버지. 작위에 애정없는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실 생각이신가요?”

“애정이 없다?”

후작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과연 그렇겠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카레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정이라고 하니 이상하네요. 관심이 없다 할까요? 굳이 승계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요.”

“책임 아래에서 굳건해지는 이도 있지.”

“그래서, 제게 책임을 지우실 생각이세요?”

“아직 결졍할 문제는 아니지. 더 지켜볼 시간은 충분하니.”

“그럼 이제부터라도 좀 삐뚤어져 볼까요? 전 왕도로 가려고 해요. 허락해주시지 않으시겠다면 몰래 빠져나갈 거에요.”

“왕도라. 왜 그러느냐.”

“검위공께서 계시니까요.”

후작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검위공께?”

“이전 제가 가르침을 청했을 때 말씀하셨거든요. 검위공께선 기사를 키울 줄만 아신다고. 그러니 둘 중 하나 아니겠어요? 배움을 포기하던가, 제가 기사가 되거나.”

카레네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시엔이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이 음흉한 영감이 매일같이 대련이랍시고 카레네 앞에 얼쩡거리더니. 슬슬 넘어올 때가 안 되었나 중얼거렸던 것도 들었지. 아이 앞에 사탕을 흔들듯 꾀어내던 수작이었다.

“······왕실 기사가 되려느냐?”

“에이, 아버지도 차암. 티란디스의 딸이 왕궁 따위에 명예를 찾을 이유가 있던가요?”

카레네가 어떠냐는 듯 웃어 보였다. 그저 배우러 가는 것 뿐이지 가문을 떠날 생각은 없다는 뜻이라.

후작이 한동안 침묵했다.

카레네가 뭐라 다시 입술을 달싹거리려는 참이었다. 후작이 입이 열렸다..

“작위 승계는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아버지!”

카레네가 발끈해 소리쳤다.

후작은 담담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승계와 별개로, 네 결정을 막진 않겠다. 후임을 추천하고 인계 후 떠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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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위공의 수작에 놀아났군.”

이런 식으로 후계 후보 하나를 지우려는 속셈인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시엔이 혀를 차자, 카레네가 킥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알거든?”

“그런데도 좋다고 왕성으로 달려갈 셈이야?”

“이런 수작이라면 천 번, 만 번이라도 환영이지.”

카레네는 홀가분한 기색이었다. 진지함이라곤 찾을 수 없지 실실 터져나오는 웃음만 봐도 알았다.

“발가락 하나야.”

“뭐?”

“발가락 하나라고. 검위공께서 지나가듯 한 말씀이야. 발가락 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처음에는 몰랐거든.”

“그래서?” “내 디딤발의 각도. 발가락 하나만큼만 틀어보라는 말씀이셨지.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알겠어?”

“안 들어봐도 알겠으니 검술 이론을 풀진 말아 줘.”

시엔이 손바닥을 내보이자, 카레네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에게 배워 익힐 단계는 진즉에 지나왔거든. 단장은 진작에 손을 들었고. 더는 가르칠 실력이 아니고, 실력도 없다고. 지도 없이 나아가야 할 때라는 거지.”

“검위공쯤 되면 다르겠지만.”

“그거야. 그러니까 어째. 가문의 주인보단 검의 주인이 더 되고 싶으니까.”

“그런 것치곤 유능한 병무관 아니었나?”

카레네의 미소가 짙어졌다.

“로우드가 금화 굴리는 건 잘해도 영주감은 아니었지. 성질머리도 나쁘고, 너무 효자라서 어머님 말씀에 꼼짝 못 하기도 하니까.”

“효자가 언제부터 그런 뜻이었담.”

“그리고 너는 애초에 제외였고, 제오스는 좋은 총독이지만 딱 거기까지지. 영지 전체를 어우를 기량은 못 돼.”

“그래서 본인이 직접 하시겠다?”

“그렇지. 누군가 작위를 계승한다면, 개중 가장 뛰어난 녀석이여야 가문의 이름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카레네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 네가 있잖아? 그러니까 가문은 이제 됐고,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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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 하인은 제 주인의 방에 딸린 쪽방에서 지내며 바로 가까이서 수발을 들었다.

세올이 쪽방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 나른한 저녁이었다.

트리예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이게 누구야?”

“앗, 선배님! 저 졸았던 게 아니라요.”

세올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뺨이 눌려 벌건 자국이 선명한 꼴이었다. 세올이 뺨을 문지르며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누구······?”

세올이 트리예를 경계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세올은 원래 미인을 보면 잔뜩 경계했다. 이전 삶의 기억 때문이었다.

칼 같은 단발 속 사나운 인상이 자신을 올려다보니,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움츠러들었다.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 갑자기 사라져 죽은 줄 알았더니. 이런 데 숨어있었네?”

“그, 누구신지.”

“답잖은 수작은 그만 두지? 기억을 잃은 척이라도 하시겠다? 헤인트, 헤인트 랑그투.”

“음? 아······”

세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인트라 하면 이 몸뚱이의 주인이었던 여인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어여쁜 알렌이 좋아했던 여인이기도 하고.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세올이 난감해졌다.

헤인트랑 구면인 사이 같은데, 아무 이유 없이 시엔 방 안쪽 쪽방까지 들어올 리는 없을 터가 아닌가.

그럼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지?

시엔이 돌아와 굳이 깨우지 않았던 탓이었다. 연구가 가득한 책상 위에서 엎드려 졸고 있으니 답지 않게 기특하다 하여 더 자라 놔 두었으니.

덕분에 어떤 정보도 없는 세올이 허둥거렸다.

트리예가 그런 얼빠진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 보아하니 그분을 보고 그새 마음을 바꾼 모양이지. 사내 갈아타는건 아주 세상 제일이지.”

“어, 음······.”

“그 몸뚱이 굴려서 재미는 좀 봤나 모르겠네? 왜, 이번엔 뭐야. 또 기억을 잃었다고 할 셈이야?”

세올이 진땀을 흘렸다.

“하긴, 순진한 척 동정 사는 거야 그 알량한 방화 실력보다는 뛰어났지.”

“어······.” “여기가 어디라고 굴러들어온진 모르겠는데, 내가 가만히 두고 볼 줄 알아? 당장 네 더러운 속내를 파헤쳐줄 테니까.”

세올이 이를 악물었다.

듣자듣자하니까 고만고만한 게 감히 이 세오르그 오스텐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선배님만 아니었으면 당장에 요절을 냈으리라.

“하. 이게 방이야 쓰레기장이야? 이 꼴로 감히 위대하신 분을 모신다고? 하, 이건 또 뭐야?”

트리예가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 위로 어지럽게 널린 종이를 하나 집어드니, 트리예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이건 또 뭐야? 야스니콜슨 함수? 강신체 대열 공식? 어?”

트리예의 눈이 급히 수식을 훑었다.

삐뚤빼뚤 악필이라 군데군데 알아볼 수 없기는 해도, 그 내용이 보통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게 이렇게 응용이 되나.”

세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엔이 없는 한 달 여, 강신체의 변환 재구성 수식을 드디어 완성해 검토하던 와중이었다. 시엔의 감수를 받아 수정하면, 아마도 새로운 마법의 이름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 은근 기대하던 결과물이었다.

“그분께서 쓰신 공식인가?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면, 말도 안 돼. 하지만 이 부분은, 여기서 에르니 함수를 쓸 이유가······.”

“음?”

세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 시간 리치의 삶을 살며 연구에 매진한 세올이었다. 본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으나 대신 시간으로 때웠으니 그 경지가 어떠하랴.

시엔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이미 본인의 연구를 수백 년 간 계속해왔으니 대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으리라.

“흑마법사?”

“하, 새삼 왜? 겨우 불이나 피울 줄 아는 저급한 방화광 주제에 위대한 학문을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불은 원숭이도 피울 줄 아는데 하찮은 재주 가지고는.”

“그건 당연한 소린데······.”

“이젠 자존심도 버렸나? 아니지. 원래 버릴 자존심도 없었잖아. 할 줄 아는 거라곤 아양떨며 매달리는 것 뿐이었지.”

세올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감히 이 세오르그 오스텐에게······.”

“뭐?”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오래도록 심연탑에 왕래하지 않았다고 하나,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지 못할 것도 없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후배? 누가 후배······”

여상히 대꾸하던 헤인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올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흑광, 흘러나오는 음차원 에너지를 확인한 탓이었다.

“어, 어떻게, 네가 흑마법을! 두 마력을 동시에 다룰 수는 없는데······”

“겨우 네가 보아 판단하는 것이 전부 진실이라 생각하느냐?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넓은 아량으로 참아주려 했으나 더이상은 그 방자함을 용납할 수가 없구나. 네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면 다시는 고개를 치들지 못하겠지.”

세올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시엔 아래에서 온순하다 뿐이지, 원래 리치의 성격이 빈말로도 좋다 할 것이 아니었다. 흉포하고 잔인하니, 본디 눈치 안 보고 피를 보기를 즐기는 이였다.

세올이 막 그 분노를 토해내려던 참이었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워?”

시엔이 쪽방의 문을 열었다.

두 여인이  서로를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선배님! 요 건방긴 게 감히······”

“시엔 님! 이게 얼마나 더럽고 추잡한······”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서로 손가락을 겨눠 눈이 마주친 두 여인이 눈을 꿈뻑거렸다.

“선배님? 선배님이라니······”

“시엔 님? 왜 선배님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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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이 세올의 수식을 검토했다. 32장에 이르는 긴 수식이었다. 온통 고급 이론으로 떡칠한 수준 높은 마법 이론이었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눈으로 훑어 막히는 부분이 없으니, 한 장 두 장 넘겨 그 속도가 참으로 빨랐다.

“어때요, 선배님? 괜찮습니까?”

“대충 이런 건가.”

시엔의 손짓에, 그 배후로 해골이 착착 조립되어 형상을 갖췄다. 흑마법사라면 누구나 다루는 기초 마법인 강신체였다.

시엔의 입에서 사악한 진언이 한 번 더 쏟아지자, 강신체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뼈 위로 근육이 한 겹씩 씌워져 붙고, 혈관이 복잡하게 얽혀 솟았다. 순식간에 속살이 오르고 피부가 뒤덮었다.

어느새 해골이 청년의 상반신으로 탈바꿈했다. 다소곳이 눈을 감은 커다란 청년의 상반신이었다.

“세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팔을 들어 벌을 서던 트리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연 위대하신 분, 기적과 같은 마법을 이리도 쉽게······”

그러면서 슬그머니 팔을 내리니, 세올이 도끼눈을 뜨고 트리예를 노려보았다.

“슬그머니 자세 풀지 마라?”

“칫.”

트리예가 바람을 뿜으며 다시 손을 들었다.

“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답니다. 세올 선배.”

“방금 소리 냈잖아!”

“소리일 뿐이지, 말은 아니랍니다. 세올 선배.”

“이, 이, 이. 네가 선배도 몰라보고 방자하게 구니까······.”

“제가 몰랐기에 한 행동이라, 무례에 사죄드렸지 않았나요?”

“무지가 자랑이야?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심각한 하극상에도 간단한 벌로 최대한 자비롭게 넘어가 주는데도 불구하고······”

“세올 선배. 제가 지금 스물아홉인데 무릎 꿇고 손들어는 좀 아니지 않나요?”

“스물아홉? 지금 겨우 그걸 가지고······”

“아, 맞다. 나이가 많으시지.”

“아, 안 많거든?”

세올이 당황했다.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 모지리가 후배 하나도 못 잡고 절절매고 있으니 어찌 안 웃길까. 어차피 시엔 입장에선 핏덩이도 못 되는 저 아랫것들이라 둘이 한 기수가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굳이 끼어들어 뭐라 할 것이 아니었다.

“그만.”

시엔이 혀를 찼다.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마법을 벌써 가져왔어? 이래서야 살만 붙인 셈이잖아.”

시엔의 강신체가 눈을 떴다. 눈두덩 안쪽으로 아무것도 없으니 퀭하게 뚫린 그 안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올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그런 복잡한 장기는 아직 구현이 힘들어서 말입니다······”

“장기가 하나도 없어. 적어도 심장은 만들어 놔야 응용 가능성이 있지. 유사 신체를 만들 생각을 해야지, 이래서야 그냥 무거운 강신체일 뿐이야.”

“아직 멀은 겁니까······.”

세올의 어깨가 축 쳐졌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발상 자체는 훌륭하네.”

“저, 정말이세요?”

“네 옆에 트리예가 생물 개조학에 뛰어나니까. 장기 쪽은 전문가일 테니, 둘이 연구를 공유하면 해법이 나올 것도 같은데.”

그러자 두 여인이 반발했다.

“얘가요? 하지만 아직 새파란 아이가 뛰어나봐야 얼마나 뛰어나다고······”

“시엔 님. 저는 강신체를 대신할 육체 생성에는 별 관심이 없답니다. 연구를 공유한다 한들 제게는 크게 이유가 없는······”

쯧쯧. 시엔이 다시 혀를 찼다.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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