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1] >
겨울 숲이 얼마나 잘 타는지는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물기 없이 빼빼 마른 것들이 숲 안에 이미 가득했다. 숲 전체가 불쏘시개로 뒤덮였으니.
버닝 신, 화마를 두른 악령이 닥치는 대로 불을 놓았다. 사람을 태운 불이라 그 화기가 어떠하랴. 금세 연기가 오르고 불이 번졌다.
흑마법사가 제국과 싸울 때에, 이러한 화공을 한 두번 당한 것이 아니었다. 숲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불이 일었으니.
그렇게 당하며 대처하다보니 이미 화공에 있어서는 방화광보다도 낫다 자부할 정도였다.
불을 지르는 위치와 방향, 숲의 지세 등등.
불은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바람의 방향으로는 거칠고 빠르게, 역풍을 맞아서는 소심하고 조심스레 번지니 그 속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러니 그 발화원을 잘 고르면, 불이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파고들며 몰아치는 법이었다.
시엔이 악령을 보내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빠져나가며 한 번 더 불을 질렀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나란히 남쪽으로 향했다. 두 불길 사이에, 흐레이그의 1군단이 끼었다.
어설프게 불을 지른다 해서 화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적이 최대한 불타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 화공의 최고 미덕이었으니.
산불이 나서 가장 먼저 알아챈 이는 시엔이었다. 불을 질렀으니 본인이 가장 먼저 알았다.
그 다음이 숲 밖에 차단선을 친 1군단 외의 인원들이었다. 연기가 오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어둑한 하늘이 잿빛에 먹혀 가까이 내려앉았다.
오히려 숲 속에 든 병사들이 가장 늦게 알았다. 나무가 천정을 이뤄 하늘을 가리고, 그 몸통이 숲을 이뤘으니 멀리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붉은 화광이 번지고 나서야 알아챘으니, 그 때는 이미 좌우로 불길이 일어 숨통을 조이는 와중이었다.
해가 떨어져 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위는 밝았다. 큰 불이 지상에 있어 밤의 어둠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 안에서 무수한 삶들이 타들어갔다.
산 채로 불타 죽은 악령이 기쁨에 울부짖었다. 산 자가 산 채로 불타니 그 고통이 제게 모이는 것이라.
버닝 신의 텅 빈 눈두덩이에서 푸른 불꽃이 흘러나왔다.
또 한 단계 격이 올랐다. 덕분에 더욱 지독한 불을 다루게 되는 것이라.
“보석을 수배해야겠는데.”
“예?”
“아니. 그런 게 있어.”
시엔이 요요한 빛을 뿜는 사령석, 만월을 내려다보았다. 무려 한 개 군단이라. 화세를 보아하니 한 개 군단의 세 명 중 둘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저 불길 중 반절은 악령의 것이라, 거기에 죽은 이들이 버닝 신의 양분으로 먹혔다.
이름난 보석이라 하여 앞으로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더니,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더 귀한 보석을 구해야 하게 생겼다.
“서둘러! 불길을 차단해야해!”
“삽이랑 톱, 있는 대로 챙겨!”
“거기, 어디 가! 어이!”
“젠장! 거기! 군견 목줄 매! 날뛰잖아!”
잘 훈련된 군대라도 자연 재해 앞에서는 허둥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엔 일행이 그 사이를 바쁜 척 뛰어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누군가 소리치고 부르나, 무시하고 뛰니 뭔가 바쁜 모양이다 끝까지 붙잡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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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불이 일어나면, 그 불씨가 땅에 남아 몇 번이고 다시 불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진화를 위해선 나무를 베고 땅을 뒤엎어 조금씩 안정을 시켜야 하니 사람의 손이 아무리 많아도 이만한 재해란 쉬이 제압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마가 잡히는 데에는 꼬박 세 주가 걸렸다.
그나마도 비가 내려 빨리 진화한 것이었다. 큰 불이 일어나면 으레 비가 내리니 특별히 행운이라 할 일은 아니었지만.
“젠장.” 킬지언이 까슬하게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알호른 숲에 주둔한 지가 벌써 한 달에 가까웠다. 일이 잘 풀리면 모를까,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제 몸 단정히 꾸밀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지저분한 행색으로, 킬지언이 연신 막사 안을 맴돌았다.
2군단장은 딱딱하게 서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말이 군단장이지, 군단은 이미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남은 부하가 거의 없으니 이름뿐인 직함이나 다름없었다.
군단 체계를 개편해 베테랑 병사를 채우고, 신병을 들여 만든다 해도 그 훈련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네 개 군단 중 하나가 줄었으니, 흐레이그의 피해는 막대하다고 표현하기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킬지언이 초초해하며 소식을 기다리는 이유였다.
“참모장님! 찾았답니다!”
“정말인가!”
“이미 불탔으나 토대가 남았습니다. 현재 출입 금지하여 엄중히 지키고 있습니다만.”
“내가 직접 가지. 대기를, 아니 바로 간다.”
킬지언이 급히 안내를 따랐다.
숲의 가장 깊은 곳, 이미 불타 무너진 잿더미나 건물이 있던 흔적이 있었다.
킬지언이 그 잔해를 급히 살피니, 오래 걸리지 않아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열어 계단을 발견했다.
“참모장님?”
“병사들을 물려. 기사들과 함께 진입한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천신이시여, 제발 가호하시기를.
킬지언이 속으로 기도했다.
한 개 군단을 잃었으나, 광전사들, 흐레이그 나이트라도 건사해야했다. 죽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용맹하며 충성스러운 기사들.
쓰임에 따라서는 한 개 군단에 견주어 모자랄 것이 없을 것이 아닌가.
마법구가 깨지고 터져 지하는 어둡기 짝이 없었다. 불탄 대지 아래에 있으니 후끈한 열기로 가득해 숨이 턱 막혔다.
아무리 수백명 분의 생명력을 가진 광전사라지만, 이 안에서 살아남기는 무리가 아닐까.
킬지언과 기사들이 지하로 진입했다. 불길이 이미 잡혔으나 이 안이 이리도 뜨겁다면. 킬지언이 불안한 생각을 억지로 떨쳐냈다.
“이쪽입니다!”
기사 하나가 외치니, 킬지언이 급히 뛰었다. 뜨거운 공기에 숨이 막히고 맥이 풀리기 직전이나, 사안이 사안이라 그것도 모르고 달려들었다.
“오. 천신이시여.”
킬지언이 신을 찾았다.
지하의 가장 깊은 곳. 수맥을 흘려놓은 수로 안. 서른 명의 사내들이 머리만 내놓은 채 몸을 담그고 있었다.
지하수는 사시사철 같은 온도를 가진 것이라, 이 안에 있었다면 지상이 불바다라 해도 버틸 수 있었으리라.
제작에 쓰인 촉매가 제 자신의 유해가 아니던가. 시엔 역시 명령하여 조종할수 있는 것들이었다. 적의 비장의 무기가 실상 제 손아귀에 있지 않은가.
시엔이 살려놓으려 일부러 물에 담가두었으나, 그를 모르는 킬지언이 천신을 찾았다.
수천의 무고한 이를 죽여 만든 괴물이 무사함에 감사하여 기도를 올리니, 사람의 선악은 제 것이며, 신은 판단하지 않았다.
“흐, 흐레이그 나이트, 눈을 떠라.”
킬지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 역시 흐레이그의 핏줄이었다. 광전사들이 조용히 눈을 떠 명령에 대답하니, 킬지언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이런.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요. 시체들인 줄 알았지 뭡니까. 생존은 확인했습니다만, 이래서야 쓰임이 있겠습니까?”
공작의 심복인 샹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광전사는 커녕, 빈민가의 기아 같은 꼴이 아닌가. 전신에 살집이라곤 없어 뼈 위에 가죽만 씌워 놓은 모습이었다.
무기는커녕, 스푼이라도 쥘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닐까 싶었다.
킬지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기술로 제작은 무리이나, 유지 보수의 방법은 우리도 이미 들어 알고 있다네.” “유지 보수라. 그게 어떤 방법입니까?”
“각하께 못 들었나?”
“저는 공작님의 가장 잘 드는 검입니다. 검이 안다 하여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구태여 물어 듣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꼴을 보니 걱정이 되서 말입니다. 공작님께서 실망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렇지 않네. 숨이 붙어만 있으면, 생명력을 보충하여 불사를 누리는 기사들이니까. 생피를 마셔 생명력을 채우지.”
“피를 말입니까?”
샹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불사에 산 자의 피를 마신다니. 이래서야 완전 괴물이 따로 없지 않은가. 그저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본질이 부정하고 사악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걸로 공작님도 한 숨 돌리실 게야.”
“한 개 군단이 박살이 났습니다만.”
“병사야 뽑아 훈련시키면 되겠지만, 흐레이그 나이트는 그렇지 않으니.”
“죽을 이를 또 구해야겠군요. 모든 도시의 빈민이 씨가 마르고, 작은 촌락들도 더 지울 곳이 별로 없습니다만.”
“영민은 많네. 늙어서 일하지 못하는 이들의 희생이 필요하겠지.”
“희생이라. 뭐,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군요.”
검은 휘둘려 피와 살을 찢어 뒤집어쓰면 그만이었다. 은인에게 바친 삶이며, 또한 피와 살을 보아 즐거우니 그것으로 전부. 그 외에 검이 판단하여 무엇하랴.
샹라가 관심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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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저녁은 기본적으로 티란디스의 핏줄이 참석하는 것이 암묵적 규칙이었다.
물론 일이 있다면 예외였다. 덕분에 시엔이 자리하는 것이 거의 두 달 만의 일이었다.
후작이 별 일 없었냐는 듯 물었다.
“돌아왔느냐.”
“예.”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시엔. 이게 뭔데? 갑자기 사라져서, 탄신연에도 불참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돌아왔다 하면 끝이야?”
“아. 탄신연이 있었지.”
“있었지? 너무 무심한 거 아냐?”
“무심하다니. 나름 열심히 일하고 돌아왔더니. 나만큼 바쁜 사람이 또 있나 모르겠네.”
카레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말없이 자리를 비운 거야 그만한 성과가 있으면 그만이니까. 물론 두 달이면 그만큼 납득할 만한 성과가 있어야겠지만.”
“말도 없이 가출했다는 비난은 아니네. 그럼 뭔데?”
“정말로 무심하기 짝이 없네. 공주님께서도 어쩌다······.”
카레네에 말에,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님? 왜 갑자기 공주님이······”
카레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 기별도 없이 연인이 탄신연에 안 나왔는데, 공주님 기분이 어떠시겠어?”
“아니. 잠깐. 연인이라니. 아. 맞네.”
생각해보니 그런 연극을 하지 않았던가. 속이야 어쨌건 대외적으로 시엔과 세필리아가 연인으로 보이도록 했으니.
두 사람 모두 입 밖으로 직접 연인이라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몇 번의 그럴듯한 애정 행각을 드러내 보였으니.
그 애정 행각의 실제가 어떻건 간에.
“그래서, 공주님껜 뭐라 말씀드렸는데?”
“일단 아프다 말씀드리긴 했지.”
“그럼 됐지.”
카레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엔이 되물었다.
“왜?”
“공주님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그것도 연인이라 그런 건가.”
시엔이 보이지 않는다는 세필리아 공주에 말에, 아프다 했더니 뭐라 대답이 돌아왔던가. 그럼 됐어요. 그러곤 끝이었다.
오히려 델피르 왕자님께서 걱정이라 탄신연 내내 얼굴만 마주치면 괜찮으냐 물어도는 통에, 거짓으로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카레네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손님은 언제 오시는데?”
“조금 늦네. 많이 지쳤었나 봐.”
시엔은 오늘 점심 지나 돌아와서는, 만찬에 손님 둘이 참석할 것이라 집사에게 알리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방문을 닫아 잠그고 베른닐이 앞에 서서 주무신다 막아내니 따질 새도 없이 지금이 만찬이었다.
덕분에 두 자리가 비어, 후작도 식기를 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손님이라기엔 꽤 무례한 태도였다.
“대체 누구길래······.”
“그, 손님께서 드십니다.”
그 때였다. 집사가 들어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이라면 으레 어느 가문의 누가 드십니다 말해야 했다. 그러나 알려줄 수 없으니 몰래 데려오라 들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이내 남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서자, 카레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셜리? 셜리야?”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이젠 아가씨라 불러드리면 안되겠네요.”
“그럼 그 옆에 계신 분이······.”
카레네가 셜리의 옆에 선 까까머리 청년을 바라보았다. 군인이나 할 법한 머리를 하고 귀족의 차림을 하니 어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
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 너 대체 뭘 하고 돌아온······.”
“그만.”
후작이 카레네의 입을 막았다.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티란디스의 모두가 그대로 기립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 어서 오시게. 흐레이그의 장손께서 참가해 주시니 자리가 빛나겠어.”
페시번의 눈이 커졌다. 예상지 못한 정중한 태도 때문이었다. 셜리가 옆구리를 쿡 찌르니 그제야 어색하나마 인사를 붙였다.
“그, 페시번 흐레이그입니다.”
“셜리 유르반이에요. 오랜만에 뵈어요, 후작 각하. 불미스런 일이 있어 면목이 없습니다만.”
“가문 간의 일이 꼭 그러하지 않으니 유르반 영애의 책임은 아니지. 큰일이 있다 들었는데, 이리 무사하니 다행이군.”
“예. 덕분에. 감사드립니다.”
셜리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당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례에 불구하고 후작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남편과 제가 불합리한 핍박에 신변이 위험하여 쫒기니, 부디 티란디스의 품에 피신하여 숨기를 청합니다.”
“망명을 허락하오. 식사가 식겠어. 들지.”
그렇게 만찬이 시작되었다.
옆에 앉은 카레네가 목소리를 낮췄다.
“시엔, 너.”
“뭐 하고 왔는지 이제 알겠지?”
“어떻게······.”
“뭐 있어? 가서, 빼왔지.”
여상한 대답에 카레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말없이 자리를 비우더니, 흐레이그의 정통성을 낚아 데려왔다. 그 의미를 어찌 모를까.
카레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그러나니 식기를 다루는 손이 어지러워 달그락달그락 연신 소리를 냈다.
만찬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후작은 원래 별 말이 없고, 주인이 그러하니 손님도 입을 다물었다. 손님이 있으니 원래 떠들던 몇도 같이 침묵하니 조용한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말미에, 카레네가 돌연 스푼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후작이 장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카레네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작위 승계를 포기하겠습니다.”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