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1] >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세오르그와 동급이겠거니 했더니 제법 각오가 다부지다.
“너랑 비슷한 아이를 내 이미 안다 생각했는데. 그럼 하나 묻지. 그 녀석의 대체 어느 부분이 그리 좋아서 차라리 죽겠다는 거야?”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시지요?”
“뭐?”
“어느 하나가 좋다 해서 그분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사라진다 하여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소녀의 마음이 그렇지 않아 그분의 모든 것을 사랑하여 아울러.”
시엔이 트리예의 말을 끊었다.
“그 녀석이 잘 생겼다며?”
“예? 아. 예에······.”
“대체 어떻게 생긴 면상이길래.”
“그분께서는. 후훗, 위대한 분께서도 꽤 약으셨군요. 이런 식으로 그분의 정보를 얻으려 하셔도 무용하답니다. 그분께 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게 아니시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랍니다. 현상 세계에 언어는 한계가 있어 그분의 용모를 어찌 표현할까요. 소녀의 어휘가 짧은 것인지 어떻게 그 용태를 설명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세오르그에게 들은 말과 결국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생겼냐니까 그냥 잘 생겼다고 답하지 않았던가. 그걸 돌려 말할 뿐이 아닌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 머리카락은 어떻지? 무슨 색이며 곧고 긴가? 눈 색은? 피부는 희나, 아니면 검나? 키가 큰가?”
“이젠 숫제 노골적으로 그분을 추정하려 하시는군요? 그렇지 않다 하시고선.”
“답답하긴 리치하고 다를 게 없네. 대답 안 해도 좋으니까 떠올려 봐. 아는 게 있나?”
“예? 그게 무슨.”
트리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색하며 표정이 굳으니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 어찌. 마, 말도 안 돼.”
동급 맞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는데.”
트리예가 손톱을 깨물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했다.
시엔이 이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헤인트와 리치, 그리고 트리예까지. 여인을 모종의 수법으로 매혹해 부려먹는 녀석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거짓으로 선동해 부린다라.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
수하에 둔 이는 마음 속 진심으로 따르거나 혹은 그가 진정 필요한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때에나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법이다.
거짓으로 이끈다 한들, 진실 앞에 이길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일단 여인을 현혹하는 수법을 쓰고.
소드 마스터의 경우에는 막대한 보상을 약속받았다 하던가. 비루한 이가 금화의 산을 말한들 믿음을 줄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소드 마스터가 보아 막대한 보상을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을 소유한 놈이고.
그리고 성유해. 그러니까 흑마법사의 죽은 신체를 가진 놈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뼈가 한 조각씩 나오니 명검이라도 되듯 제 수하에게 들려 휘두르게 하는 녀석이었다.
현재는 흐레이그 가에 적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어찌 이럴 수 있지요? 그 분, 아니 그는.”
“인칭이 바뀌었네?”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를 사랑했던, 어째서. 어째서지요? 혹여 답을 알고 계신지요?”
“쯧. 아까는 잰 체를 하더니만.”
“알려, 알려주세요. 제가 왜 이러죠? 제게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하셨나요? 소녀의 마음을 희롱하시나요? 어째서, 어째서!”
트리예가 시엔의 바짓단을 붙들고 늘어졌다. 애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시엔이 다시 혀를 차며 대답해 주었다. “매혹 종류겠지.”
“허나, 그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는 없잖아요. 허상을 보이고 상처를 후벼 팔지언정 마음을 현혹하여 매달리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내가 모든 마법을 알지는 못해. 이전에도 그리했고, 시간이 오래 흘러 지금은 더욱 그러하지. 네 키메라며 광전사 역시 내가 보기엔 신기하고 위대한 업적이었다.”
“아. 저, 정말이신가요? 소녀의 연구가 진실로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요.”
“거짓을 말하는 취미는 없어. 그것보다, 매혹의 한계가 있다는 건 알겠네. 본인이 눈치 채는 순간 깨지는 모양이야. 아직도 사랑에 죽겠다 생각하고 있어?”
으득. 이 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눈에 독기가 서리니 표독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웬만한 사내는 기가 죽어 목을 집어넣고 마른 침이나 삼킬 만한 모습으로.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 이 나를. 감히. 절대,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리고 하는 소리였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제 아는 걸 좀 이야기할 생각이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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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은 성유해를 통해 소녀에게 연락해 왔답니다. 심령 연결을 통한 다이빙이여요. 에슈름-카흘르드 법칙을 응용한 것이랍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성유해는 그만큼 초월적인 힘을 품고 있어요. 기본적인 믿음의 축적, 의미가 법칙을 만들었겠지요. 크게는 세 가지의 응용이 이루어지는데, 아스테 법칙의 확장, 텔라그램 이율표 왜곡, 테일데 대함수의 반접형 연속면으로······”
시엔과 일행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시엔을 제외한 일행에겐 분명 귀로 들어도 이해할 수 없기에 제대로 들었나 하는 확신이 사라진 것이었지만.
시엔 혼자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광전사 역시 그 응용이었고?”
“촉매재로 성유해를 가루내 사용했답니다.”
“한계를 제대로 극복해낸 건 아니었군. 성유해가 필요하다면 그저 일시적인 기술에 지나지 않지. 뭐, 차라리 다행이네. 비인의 영역에 속한 기술이니.”
“······면목 없는 일이에요.”
“광전사의 주인은? 너와 흐레이그인가?”
“명목 상으로는 흐레이그의 핏줄뿐이랍니다. 그러나 성유해를 통해 명령을 내릴 수도 있도록 만들었지요.”
“그럼 이제 내 거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메라 역시 마찬가지인가? 늑대가 날 따르더라니.”
“그, 그건 아니에요. 펠리는 소녀의 순수한 기술인데, 성유해와는 별개로······”
“호오. 거부 반응을 어떻게 해결했지? 마수의 본능 제어는? 보아하니 늑대의 뇌를 이용한 모양인데, 상위 개체와 하위 개체의 격은 어떻게 극복하고?”
“아. 그건 말이지요······”
“잠깐!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제 3자가 대화 속에 끼어들어 고함을 질렀다. 시엔이 고개를 돌리자, 페시번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대, 대체 뭐냐! 저 끔찍한 계집이 왜 친한 척 여기 붙어있냔 말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 몰라?”
“친구라니, 어찌 그런 과분한 말씀을······.”
트리예가 부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페시번이 분통을 터뜨렸다.
“젠장! 저 여자가 한 짓을 너도 봤잖아!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내 영민도 아닌데. 뭐.”
“뭐, 뭐야? 그걸 말이라고.”
“그리고 네 영민도 아니었고. 네 처지를 잊은 건 아니지? 아직도 흐레이그의 대공자 행세를 할 셈이야?”
“너, 너!”
페시번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얼굴 색을 참으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녀석이 아닌가. 저러다 터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가 몰려 시뻘건 얼굴이었다.
“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뭐라고!”
“지금 네가 분노하고 증오해야 할 대상은 나나 트리예가 아냐. 흐레이그 공작이지.”
“그건······.” “네 것이여야 할 모든 것을 빼앗고 내친 이가 누구야? 네가 그토록 생각하는 영민을 갈아 광전사를 만들도록 허락하고 제공한 이가 누구인데?”
제안은 매혹이나 써대는 그 놈이 했지만, 그를 허락하고 그 재료를 제공한 이가 바로 흐레이그 공작이었다.
애초에 기사단 하나가 전부 광전사로 만들어졌으니 공작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생각했다. 트리예가 진술했으니 그런 생각이 모두 사실이었다.
“부하의 죄는 그 주인이 책임을 져야지.”
“그렇다고 해서 저 계집이 벌인 일들이······.”
“뭐. 그건 맞는 소리지. 비록 눈이 멀어 이용당했다 해도 죄는 죄.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트리예가 고개를 푹 숙였다.
페시번이 당황해 물었다.
“그, 그런데 왜 저 여자를 싸고도는 거냐!”
“싸고돌다니? 누가? 내가?”
“안 그랬단 말이냐!”
“안 그랬는데.”
“그걸 말이라고! 너, 너!”
페시번이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혀 너, 너 하는 멍청한 소리만 반복했다.
시엔이 혀를 찼다.
“쯧쯧.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가문에서 버려진 거야.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먼저 네 적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네 힘인지 생각하도록 해.”
“······.”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변심하여 이 편에 서겠다 하면 그 본의를 의심할 수는 있어도, 사악한 이라 내쳐서는 안 되지.”
“하지만 그러기엔.”
“별로 가문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진 않는 모양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게.”
“······젠장.”
폐시번이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파고드는 것이 있었는지, 셜리의 곁으로 돌아가고서도 복잡한 안색으로 조용히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베른닐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 그럼 이······ 레이디의 처우는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뭐. 일단은 후작가의 시녀 트리로.”
“당신의 뜻이시라면 소녀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또 시녀를 들이시는군요. 뭐, 도련님께서도 생각이 있으실 테니. 흠······.”
베른닐이 눈썹을 찡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넌 또 왜? 너도 싫다 소리를 하려고?”
“제가 도련님 하시겠다는데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가명을 참 대충 지으신다 싶습니다만. 제가 베르, 에르제 양이 에르, 이젠 트리예 양이 트리가 되었군요. 그럼 세올 양도 혹시······?”
“베른닐도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네?”
“제가 원래 한 날카로움 합니다만.”
시엔과 베른닐이 한데 킬킬거렸다.
그러자 트리예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시어요. 소녀와 연락이 끊겼으니, 그 놈 역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테지요. 그럼 흐레이그 공작 역시 알아차릴 것이랍니다. 광전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금방 군대가 들이닥칠 터이니, 이만 피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피해? 어떻게?”
“광전사와 키메라를 앞세우면 큰 혼란을 줄 수 있겠지요. 그 틈을 타 빠져나가신다면······.”
“광전사는 흐레이그의 손에 쥐어줄 거야. 가장 잘 듣는 검이 제 것이 아닐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까.”
시엔이 광전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상, 흐레이그에게 모른 척 넘겨주는 편이 나았다.
“키메라만으로 군대를 상대하기는······.”
“굳이 먼저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까. 마수학은 어떻지? 마물을 얼마나 풀 수 있어?”
“소녀의 재주가 미천하니 감히 말씀드릴 것이 못 되는 것이에요. 그나마 최대한 풀어놓으라 하시면 에이미데라스를 70마리 정도는······.”
“누구보단 낫네.”
“예? 낫다 하시면······”
시엔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군대가 얼마나 찾아올지 한 번 보자고.”
---- “왠지 기분이 나쁜데······.”
“기분이 나빠? 체했냐? 아까 빵을 그렇게 처먹더니만.”
“아니 그거 말고. 왜. 알고 봤더니 여기 소문이 엄청 더럽더라고.”
“소문이 더러워? 뭔데?”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숲이라더라. 공작의 이름으로 금지로 지정된 숲이라잖아.”
“어쩐지 으스스하더라니.”
“빌어먹게 춥기도 하고.”
“우리가 언제 그런거 따졌냐? 그리고 말하자면 보물이 묻힌 숲 아니냐? 놈을 잡기만 하면 인생 역전이야. 금화가 자그만치······”
현상금 사냥꾼들이 대화를 이어갔다.
범죄자가 알호른 숲에 숨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동시에 흐레이그 공작은 숲의 출입 금지를 풀고 페시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높였다.
그러자 일확천금을 노린 용병이며 현상금 사냥꾼들이 움직였다.
실상, 알호른 숲에 범죄자가 숨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 흐레이그의 수작이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용병과 현상금 사냥꾼을 사지로 이끌었으니 보통 영리한 수법이 아니었다.
이미 숲 속에 키메라 따위의 위험한 것들이 가득임을 아니 군대에 앞서 조금이라도 위험을 줄이고자 하는 수작이기도 했다.
바스락.
현상금 사냥꾼, 한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미니 웃고 떠들던 이들이 일시에 소리를 끊고 전투를 준비하며 수신호를 보냈다.
이 앞에 뭔가 있다. 대기. 제루가 살펴보러 가고. 예제가 뒤를 봐.
꽤 오래 함께한 팀이었다. 손발이 척척 맞으니 석궁을 겨누고 발이 가벼운 제루가 유령처럼 움직여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탁. 흰 털뭉치가 수풀을 뚫고 뛰쳐나왔다. 털뭉치가 긴 귀를 흔들며 대가리를 움직여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토끼잖아?”
“토끼를 보고 쫄은 거야? 크큭.”
“한스가 토끼를 무서워하는 걸 다들 몰랐던 모양이군. 토끼만 보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린다니까. 지금도 봐봐.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일걸?”
현상금 사냥꾼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한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들······.”
“저거 잡으면 간식은 되겠네. 내게 맡기라고.”
현상금 사냥꾼 하나가 석궁을 겨눴다. 푝, 볼트가 토끼에게 날았다. 폴짝. 토끼가 뛰어 피해냈다.
“아니, 저걸 못 맞춰? 눈이 갑자기 멀기라도 했나?”
“토끼 공포증이 옮은 모양이지?”
“이 샹것들이.”
토끼가 붉은 눈으로 인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도망도 안 가는데?”
“금지였다잖아. 원래 사람 못 본 짐승은 도망 안 치는 법이거든. 오히려 부르면 오기도 하고. 그때 콱 잡으면 되고. 자, 봐라.”
현상금 사냥꾼이 가지 하나를 꺾어 쪼그려 앉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먹이다. 먹이.”
가지를 살랑살랑 흔드니 토끼가 그에 관심을 보였다.
현상금 사냥꾼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토끼가 나뭇가지를 먹나?”
“풀도 처먹는 게 나뭇가지라고 안 처먹겠어?”
“흠. 그런가? 아. 먹나 보네.”
토끼가 톡톡 뛰어 다가오니 현상금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가 가까이 붙어 킁킁거리며 가지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현상금 사냥꾼이 벼락같이 손을 뻗어 귀를 붙잡았다.
“자, 봐라. 잡았지? 사람 못 본 짐승이 이렇다니까.”
“크크. 손으로도 잡는 걸 누군 석궁으로도 못 잡던데?” “젠장, 닥쳐.”
실없는 농담들이 오갔다.
그 때였다. 토끼의 아가리가 열렸다. 대가리가 아래위로 갈라지고, 몸통의 허리까지 닿는 거대한 아가리였다. 아가리 안 쪽 규칙 없이 빼곡하게 난 날카로운 이빨이 싯누렇다.
덥썩. 현상금 사냥꾼의 팔뚝을 덥썩 물었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부정 세계의 마수. 라프라크.
토끼와 닮은 귀여운 외양을 가졌으나, 실은 식탐에 굶주린 흉악한 마수에 불과했다.
“으아악! 이게 물었어, 물었다고!”
“봐, 봤어? 봤냐고?”
“괴물이다!”
아우우! 동시에 늑대의 하울링이 가까운 곳에서 울려퍼졌다. 파사사삭, 수풀을 뚫고 늑대들이 나타났다.
머리는 늑대이나, 늑대가 아닌 것들. 어떤 것은 사슴의 몸을 하고, 어떤 것엔 전갈의 꼬리가 달렸다.
그 대가리며 몸통 위에 라프라크들이 자리를 잡아, 함께 현상금 사냥꾼들을 덮쳤다.
피와 살점이 땅 위로 쏟아졌다. 내장이 흘러 겨울 대기에 김이 피어올랐다. 라크라크와 키메라가 서둘러 주둥이를 박으니 핏자국만 남아 바닥을 적셨다.
“괴, 괴물이야! 괴물!”
제루가 등을 돌려 달아났다. 몸이 날래고 가벼워 정찰을 맡던 이다. 그 특기를 살려 급히 도망치니 다른 먹이에 정신이 팔린 마수들이 미처 붙들지 못했다.
“헉, 헉. 여기 오면 안 됐는데······.”
금지가 괜히 금지가 아니었다. 현상금이 높았으니 그만큼 위험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지만 괴물이 있다 듣지는 못했는데.
“헉, 헉, 칵!”
제루가 무언가에 부딪쳐 호된 숨을 토했다. 물렁한 것을 들이받은 듯, 충격은 덜하지만 창졸간이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급히 몸을 추스르려 하나 그뿐이었다. 단단히 묶인 듯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발뿐이랴. 온 몸이 달라붙어 묶였다.
“뭐, 뭐야, 거미줄?”
눈으로 보아 겨우 흐릿한 것이 그물처럼 펼쳐졌다.
“으악! 으아악!”
제루가 비명을 질렀다. 몸을 흔드니 거미줄이 출렁였다. 그러자 거미줄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 셋의 다리를 가진 거대한 거미. 무수한 눈이 번들거리고, 몸통엔 거머리 같은 촉수들이 가득 붙어 꿈틀거렸다.
꿈에 볼까 끔찍한 생물. 부정 세계의 마수인 바르키아올. 제루가 공포에 질려 그저 비명만을 쏟아냈다.
“흐아악! 으아아아, 웁.”
비명이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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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비명 같은 게 들리지 않았나?”
“그랬나요?”
“저쪽, 저쪽이야.”
용병이 눈을 빛냈다. 숲 안에 비명이 울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현상범을 찾아 전투가 있다는 뜻이겠지.
용병이 일행을 이끌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 사라졌다.
잠시 후 거대한 벌레가 바닥을 기었다. 긴 몸통의 아래와 위, 오른쪽과 왼쪽으로 무수히 다리가 달려 꿈틀거려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몸통이 나선형으로 돌아 앞으로 나아가니 그 속도가 빨랐다.
그 뒤로 같은 벌레들이 연이어 움직였다. 용병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무리지어 소리 없이, 그러나 빠르게 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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킁킁킁. 사냥개가 분주히 냄새를 맡았다.
사냥꾼에게 개는 좋은 친구라. 추적에 능하고 용맹하고 충직한 친구. 잘 훈련된 사냥개는 어지간한 실력자 하나는 단숨에 물어 죽이니 그 전투력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개가 앞장을 서고, 목줄을 쥔 사냥꾼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열댓명의 용병이며 현상금 사냥꾼들이 섞여 그 뒤를 맡았다. 킁킁킁. 사냥개가 고개를 쳐박고 계속해서 냄새를 맡았다. 사냥꾼이 다가가 그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펜스, 뭔가 찾았니? 어디 보자.”
낙엽을 헤치자 패인 자국이 드러났다. 분명 사람의 신발이 남긴 흔적이었다.
“잘했어. 자. 펜스.”
사냥꾼이 간식을 꺼내 사냥개에게 물렸다. 사냥개가 꼬리를 흔들며 말린 쥐고기를 단숨에 씹어 삼켰다.
“펜스. 꼭꼭 씹어 먹으라니까. 아주 홀랑 삼켜버리네.”
끼잉, 끼잉······. 사냥개가 앓는 소리를 냈다. 꼭 뭐라 하면 이리 애교를 부리니 영리한 녀석이라 그랬다.
사냥꾼이 피식 웃었다.
“알겠다, 알겠어. 내가 뭐라 하겠니.”
끼이잉······.
사냥개가 계속 낑낑거렸다.
“펜스?”
깨갱! 돌연 사냥개가 소스라치며 앞발과 뒷발을 휘두르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얘가 왜 이래?
사냥꾼이 인상을 찌푸리는 찰나, 사냥개가 돌연 펄쩍 뛰어 달려나갔다.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억센 힘에 사냥꾼이 진땀을 흘렸다.
“워워, 펜스. 진정해. 펜스? 이봐요, 좀 도와 줘요.”
사냥꾼이 질질 끌려나가며 도움을 청했다. 용병 몇이 붙들기 위해 달려 나왔다.
한 발 늦었다. 커다란 사냥개가 진심으로 줄을 당기니 결국 버티지 못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사냥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펜스? 펜스!”
“뭐요, 사냥꾼 양반?”
“이러면 안 되지? 사람 찾는 데엔 저 개가 최고라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럼 어쩔 거요?”
용병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사냥꾼이 진땀을 흘렸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아. 저기 오네요.”
“개새끼가 사람 놀라게 만들고 있어.”
사냥개가 다시 되돌아왔다.
사냥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냥개가 아니었다. 개의 가죽을 어설프게 뒤집어쓴 시커먼 무언가. 걸음마다 피가 묻어나 바닥을 적셨다.
“이게 무슨······”
사냥꾼이 경악할 시간은 없었다.
동시에 검은 것들, 대가리 없이 검은 몸통만 남은 네 발 짐승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 달려들었기에.
< 20.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