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87화 (87/268)

< 19. 기사가 죽어 그 핏값을 치르리라 [5] >

살과 뼈로 이루어진 플래시 골렘이니, 키메라들에겐 움직이는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다.

팔을 휘두르고 발을 굴러 키메라가 터지고 깨져 죽어나갔다. 그러나 집요하게 달려들어 살점을 삼키고 뼈를 깨부숴 빼내니 골렘의 덩치가 점차 줄어들었다.

시엔이 플래시 골렘에게서 관심을 잃었다.

“베른닐, 문을 부숴.”

“예. 도련님.”

베른닐이 오러를 둘러 검을 앞세웠다. 문을 사선으로 베어내니 그 두께가 한 뼘은 되는 목재라. 페시번이 발로 차고 어깨로 받아도 멀쩡한 것이 당연했다.

다시 또 통로가 이어졌다.

개 짖는 소리 우는 소리를 등뒤로, 시엔이 통로로 접어들었다. 그 뒤를 일행이 급히 따라붙었다.

그 끝에서, 트리예가 시엔을 반겼다.

“여기까지 오시다니. 실력이 대단하신 모양이시여요. 이 정도리라 생각지는 않았는데요.”

“아까는 급히 도망치더니, 이젠 또 살아서 의기양양하네?”

“도망이라니, 잠시 바쁜 일이 있다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트리예가 손벽을 짝짝 쳤다.

그러자 트리예의 등 뒤로, 갑옷을 차려입은 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시번이 아는 체를 했다.

“엄브슈릴 경? 창완 기사단은 극비 임무로 파견을 나갔다고······.”

“······.”

“엄브슈릴 경? 하. 이제 확실하군. 아버지께서 관여하신 거야. 아버지께서 영민을 죽여 언덕을 쌓고······.”

페시번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욱욱 불쾌한 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억지로 삼키는 모양새였다.

“젠장, 뭐 때문에? 뭐 때문에 죄 없는 영민들을······.”

트리예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손사래를 치며 농담은 그만하라는 투로 말을 이었다.

“에이, 대공자님도 차암. 이제 와서 성군의 흉내라도 내실 참이신가요? 어차피 영민이라 하여 아무렇게나 쓰는 아랫것 취급이셨지 않았나요.”

“웃기지 마라!”

“이런. 대공자님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흐레이그의 백성을 대공자님이 마음대로 다루시는 게 무어 문제이던가요? 그 때는 어차피 대공자님의 것이 될 것들이니 제 주인이 부리는 대로 휘둘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요.”

“너는······”

“각하의 영민을 각하께서 마음대로 쓰시겠다는데 그게 무어 문제인가요? 오히려 위대한 업적에 동원되었으니 영광스러운 희생이라 해야겠지요.”

놀고들 있네. 시엔이 뒤편에서 멀거니 구경하며 생각했다.

고귀하게 태어난 이의 의무란 그러한 것이 아니지만. 영민이 존경하고 사랑하여 섬기니, 귀족이 그들을 지켜 품어 기쁘게 해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어차피 내 영민 아니라서 시엔이 알 바는 아니었다. 티란디스의 피가 티란디스를 챙기면 그만이지, 다른 영주가 제 영민으로 탑을 쌓건 스튜을 끓여먹건 무슨 상관이람.

트리예가 양 팔을 펼쳤다.

그러자 발소리가 울려퍼지며, 기사들이 나타나 그 뒤편에 도열했다.

“흐레이그 나이트, 친위 기사단 분들이시랍니다. 한때는 창완 기사단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공작가의 최정예 기사단이지요.”

“그게 무슨······.”

호오. 시엔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재밌는 걸 만들었네? 어쩐지 시체가 산더미더라니.”

피가 빠진 시체를 키메라의 먹이로 주고, 겸사겸사 플래시골렘의 재료로도 썼다.

그러면 그 피는 대체 어디다 썼을까.

그 답이 눈앞에 있었다.

“당신,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군요?”

“혈정을 취해 생명력을 심었나? 이론상으로야 가능하지만.”

“너, 심연탑의······. 어쩐지 혼자 태연하더라니. 젊어 보이는데? 신입인가? 몇 기야?” “몰라.”

“예의를 차려. 네 선배가 눈앞에 있어.”

트리예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지자면 까마득하여 계산도 할 수 없는 녀석이 선배 운운하니 이건 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심연탑의 위계가 좀 센 편이긴 했지. 아직도 그런 모양이야?”

“아직도? 어, 음.”

시엔이 당당하자, 이번엔 트리예가 당황했다.

“어, 푸른달의 맞붙이가 필 때 입문했사옵니다만, 혹시 선배님이신지······.”

“핏덩이네.”

“윽. 이런 젠장.”

“이제 인체 실험도 허락해주나? 심연탑이?”

인체 실험은 흑마법사의 규율로 엄격히 금지된 것이었다.

이미 죽은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직 산 자를 실험으로 소모하는 것은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랴.

물론 몇 가지 경우. 흑마법사가 제 신체를 직접 이용하거나, 피험자의 치료 혹은 부상 종류의 극복을 위한 실험이라던가.

아니면 극악한 범죄자들을 사용하던가.

무고한 이의 생명으로 쌓은 업적은 의미가 없었다.

마법사의 궁극 목적은 세계에 도달해 이해하고 신비를 지식으로 남겨 세상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대한 학문이라 불렀다.

“흐레이그 나이트!”

트리예의 외침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도니 핏빛의 오러가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동도가 매정하다 하셔도 어쩔 수 없답니다. 저마다 제 길이 있으니, 반대편에서 마주치면 어느 한 쪽이 비켜서야 하는 법이 아니겠어요?”

“입을 막겠다?”

“광전사들이에요. 제대로 된 완성품이죠. 저항하지 않으신다면 편히 보내드리겠어요.”

광전사.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의 생명력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바로 피였다.

생명력이 신체를 흘러 구석까지 닿으니 비로소 인간이 살아 숨을 쉬고 몸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 생명력을 타인에게 옮기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만약 여려 명 분량의 생명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늙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강인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백파이어를 극복하는 철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론일 뿐이었다.

한 사람의 피가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높은 확률로 부작용이 닥쳐 목숨을 잃었다. 서로 다른 생명력이 반발하여 몸속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명력이라 결정하는 요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지. 생명력이 제 것이라 여기는 의지를 완전히 제거한다면? 그러면 두 피가 만나더라도 누구에게 속한 생명력이 아니라 충돌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의지를 제거하니 사람이 아니라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의지가 없기에 또한 제 몸이 상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을 터.

이상적인 군대, 광전사 이론이었다.

몇몇 왕국들은 이 이론에 관심을 가져 사형수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다만 이론일 뿐, 우선 산 채로 의지를 제거하는 작업이 첫 번째 문제.

의미가 있을 만큼의 피를 한 몸에 모으는 것이 두 번째. 그렇게 완성해봐야 누구의 명령이라도 순순히 따를 터이니 피아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 세 번째 문제였다.

시엔이 다시 물어보려 할 때였다.

“저것들을 처리해!”

트리예의 외침에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시엔이 악령을 불러들였다.

검은 가시가 솟아 기사의 복부를 꿰뚫고, 불이 타올라 기사를 삼켰다. 챙! 곁을 막아선 베른닐이 검을 부딪쳤다. 날카로운 검격이 서로의 급소를 노리여 쏘아지고, 막고 막히다 부딪히며 연신 쇠 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젠장! 셜리, 피해!”

“아가씨, 이쪽이에요!”

페시번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급히 통로로 몸을 돌리는 두 여인에게 기사 하나가 달려들었다.

“누굴 노리느냐!”

페시번이 펄쩍 뛰어 기사의 허리를 들이받아 한 덩어리가 되어 굴렀다. 챙강. 페시번이 떨어진 검을 주워 기사의 목을 찔렀다.

“다 죽여! 다 해치워라, 흐레이그 나이트여!”

트리예의 목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불타는 기사가 고개를 돌려 시엔을 바라보았다. 살이 녹아 불타나, 그 아래 새로운 살이 올라 허물이 되어 떨어져나갔다.

익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며 시엔에게 달려드니, 오히려 버닝 신의 불길이 더 위협적이라. 시엔이 불타는 악령을 거둬들였다.

뱃가죽이 뻥 뚫린 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한 걸음 뛰어 옮길 때마다 복부의 구멍에 살이 차올라 아물어갔다.

아까 본 시체가 몇이었던가. 그만큼의 생명력을 품어 죽지 않고 재생되는 것이었다.

“빨리 죽여! 어떻게든 죽이란 말야!”

트리예의 사나운 목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베른닐이 기사의 정강이를 밀어찼다. 기사가 잠시 균형을 잃자, 오러가 깃든 검이 목의 왼편으로 들어가 오른편으로 빠져나왔다.

기사의 목이 땅에 떨어지고, 베른닐이 급히 시엔을 불렀다.

“도련님!”

“젠장, 방심하지 마! 조심해!”

“제가 당장 가겠습.”

시엔을 돕기 위해 뛰쳐나가려던 베른닐이 돌연 바닥에 쓰러졌다. 발등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내려다보자, 기사의 검이 발을 꿰뚫어 바닥까지 파고들었다. 목 없는 기사였다.

“이 무슨!”

베어도베어도 죽지 않는 기사들이라. 셋이서 다섯을 상대하니 조금씩 상처가 늘어날 뿐.

시엔이 두뇌가 핑핑 돌았다.

광전사를 죽이는 방법은 단순한 것이리라. 생명력을 품어 죽지 않으니, 그것이 다할 때까지 죽이고 또 죽이면 그만이었다.

시엔 자신이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겠지만, 나머지 둘은 버틸 재간이 없으리라.

“빨리 죽여! 다 죽이란 말야! 젠장, 미완품이라도.”

트리예가 손벽을 치자, 쨍그랑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먼 곳에서 울려퍼졌다. 뒤이어 발소리가 가까워지니 알몸의 사내들이 달려오는 꼴이 보였다.

미완성품이라고?

저것들까지 합세하면, 저는 몰라도 베른닐과 페시번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페시번이야 놔두고 베른닐이 죽으면 꽤 기분이 더럽겠지.

“죽여라! 전부 죽여 지워버려!”

트리예가 연신 고함을 질렀다.

꺅꺅대는 하이 톤으로 죽여라 죽여라 시끄러우니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도 마법사가 아니던가, 왜 죽이라 명령만 줄창 내리며 구경만 하고 있담.

시엔이 이어 생각했다.

왜? 마법으로 가세하면 훨씬 불리해질 텐데.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흐레이그 나이트여! 저들을 모두 죽여라!”

시엔의 눈이 빛났다.

“페시번!”

“젠장! 빌어먹을 티란디스! 왜!”

페시번이 고함을 지르며 대답했다. 기사의 아래 깔린 채, 필사적으로 검을 밀어내는 와중이었다.

“명령해! 멈추라고!”

“뭐!”

“명령하라고! 흐레이그 나이트인지 뭔지!”

“그게 무슨 소리냐!”

“멍청아! 멈추라고 해!”

“젠장! 뜬금없이, 멈춰! 멈추라고! 어?”

광전사들이 그대로 정지했다.

“안 돼! 죽여! 다 죽여라, 흐레이그 나이트!”

기사들이 다시 움직였다.

“멈춰! 검을 버려!”

기사들이 검을 내던졌다.

죽여, 멈춰, 죽여, 멈춰. 아이들의 유치한 말싸움 비슷한 것이 계속 이어졌다. 기사들이 갈피를 못 잡고 움직임과 정지를 반복했다.

시엔이 씩 웃었다.

광전사가 불가능하다 불린 이유 중 하나가 누구의 명령이든 가리지 않고 듣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걸 극복했다 치더라도, 명령권자를 설정하려면 의지 없는 광전사도 이해할 정도로 단순해야 할 터였다.

예를 들자면 네 창조자를 따르라던가.

공작의 명령으로 만들었으니, 공작 역시 명령이 가능해야 할 터. 하지만 항상 명령자가 곁에 있어야 하니 공작 혼자만으로는 영 효율이 안 나올 터였다.

그러니까 흐레이그의 피를 따르라던가.

“어쩐지 여기까지 내몰려서야 광전사를 꺼내들더라니. 키메라도 플래시 골렘도 굳이 더 강한 게 있으면 써먹을 이유가 없잖아?”

시엔의 눈에서 흑광이 풀려나왔다.

음차원 에너지가 검은 빛을 발하며 눈가에 스치자, 동공이 한 꺼풀 열리며 황금빛 용의 눈이 드러났다.

트리예가 기겁해 한 발 물러나며 외쳤다.

“괴, 괴물!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러자 알몸으로 달려들던 미완성 광전사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 물러났다.

“아니, 너희 말고! 흐레이그 나이트! 공격을······”

알몸의 광전사들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냥 가 버려! 빌어먹을 것들! 페시번의 외침에 다시 몸을 돌렸다.

“아, 안돼, 꺅!”

물러서던 트리예가 발이 걸려 넘어졌다.

“오, 오지 마!”

트리예가 허둥지둥 제 허리춤을 더듬어 지팡이를 들었다. 검게 변색된 뼈의 형상을 한 마법봉이 시엔을 겨눴다. 곧바로 사악한 주문이 이어졌다.

“아-샤 흐레 페 트리예······, 아앗······!”

트리예의 주문이 미완성으로 끝났다.

손아귀에 들려있던 지팡이가 재가 되어 스러지니 휘몰아쳐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문득 바람이 불어 재들이 시엔에게 흘러 몸으로 스며들었다.

“얌전히 돌려주니 얼마나 좋아.”

“서, 성물이, 어떻게······”

“본디 나의 것을 내가 취하니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 것이라니, 그게 무슨.”

“어느 흑마법사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재림할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재림!”

트리예가 창백하게 질렸다. 팔과 다리를 휘둘러 뒤로 계속해서 물러나니 시엔이 한 발씩 내딛어 나아갔다. “내 적이 있어 남의 유해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모양이다. 네가 알고 있으니 네게 물어야겠다.”

“나는, 그분께서는.”

돌연 트리예의 눈이 흔들림을 멈추었다.

이를 악무니 표정에 각오가 서림이라.

트리예가 말했다.

“차라리 죽이시지요. 소녀에겐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제가 하찮으니 감히 대적할 수 없으나, 그렇다 하여 굴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19. 기사가 죽어 그 핏값을 치르리라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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