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기사가 죽어 그 핏값을 치르리라 [4] >
눈을 뜨니 온통 새하얀 것들이었다.
어느새 모여든 라프라크들이 떼로 뭉쳐 시엔의 주변에 가득 쌓였다. 뒤로는 다이어울프가 등을 받쳤다.
새벽이 하루 중 가장 추울 때였다. 그럼에도 따뜻하게 야숙을 마치니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키메라 한 마리가 사슴을 물고 나타났다. 대충 먹을 부위를 떼 가자, 그제야 우두머리 늑대가 머리를 박았다.
뒤이어 키메라들이 주둥이에 피를 적셨다.
베른닐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걸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영리하다고 해야 하나.”
“왜?”
“다이어울프가 바로 저 괴물 떼의 우두머리 아닙니까?”
“그렇지.”
“제 무리를 동원하면 저희라고 성치 못할 텐데, 그걸 모르고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닙니까. 사람 손에 길들어서 그런 걸까요.”
“영리해서 그런 거야.”
짐승의 감각으로 저보다 위험하다 판단했으리라.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시엔이 대충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흐레이그가 괴물을 만들고 있었군요.”
“글쎄.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기도 한데.”
“뭔가 더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저 괴물이라면야 굳이 출입금지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몬스터가 우글거린다 둘러대면 될 것인데. 뭔가 더 감추는 게 있겠지.”
시엔이 늑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법사가 아직 숲속에 있을 거야. 저 녀석이 죽었나 확인을 해야 할 테니까.”
페시번이 스프를 뜨다 말고 움찔 놀랐다.
시엔을 돌아보는 표정이 곱진 않았다.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뭐가 또 복잡할 것이 있나 모르겠지만.
“그럼 그 마법사를 기다리시는 거군요?”
“아니.”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뭐가 있어. 우리가 찾아가면 될 텐데.”
병법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했다.
상대가 공격해 올 때는 그 준비를 이미 갖춘 후이니, 적을 맞이해봐야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먼저 갖춰 공격해, 아직 준비되지 못한 상대의 허를 찌르는 편이 좋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혹여 이런 괴물들이 더 있기라도 한다면.”
“우리야 모르지.”
시엔이 늑대의 귀 어림을 긁으며 말했다.
“그런데 얘는 알고 있을걸?”
그러나, 제 주인에게 안내하라 늑대를 이해시키는 일은 생각 외로 난관이었다.
“네 주인에게 안내해 주련?”
늑대가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헥헥거리며 혀를 내미는 것이 기분은 좋아 보인다만.
“네 주인. 주인 말이야.”
늑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엔의 눈을 바라보다, 돌연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모았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러자 이번엔 바닥에 누워 배를 드러냈다. “아니. 애교 말고. 네 주인을 찾으라고.”
그제야 늑대가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시엔이 뒤를 따르려는 때에, 늑대가 딱 던지기 좋은 나뭇가지를 입에 물어 되돌아왔다.
전혀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말을 걸어보고, 또 혹시 모를까 싶어 같은 여성인 셜리와 에르제를 가리켜도 보고. 심지어 망토를 둘러 마법사의 차림을 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새벽이 가시고 아침 해가 쨍하게 뜰 때쯤에서야, 늑대가 몸을 움직여 앞장을 섰다.
“어쩌면 영리한 게 아닐지도 몰라.”
“짐승이 사람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그래도 개과는 어느정도 알아듣지 않나?”
“전부 훈련으로 가르치는 거지, 사람 말을 이해하고 알아듣지는 못하겠죠. 예전에 그 세올인가 하는 오리가 특이했던 겁니다만. 음. 그러고 보니 새로 들인 하녀가 세올이라는 이름이었지요? 흔한 이름은 아닌데.”
“그럼? 오리가 사람으로 변신이라도 했게?”
“그것도 그러네요.”
“그냥 마법사가 나타나길 기다릴 걸 그랬나 봐. 이게 어디로 안내하는지 모르겠네.”
시엔의 의심 반, 나머지 의심 반으로 늑대를 쫒았다. 그래도 앞장을 서니 바로 짐승이 오가는 길이라.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수풀을 넘자 좁은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 풀이 무성하고, 좌우로 단단히 눌린 땅이 드러나 두 줄로 죽 이어졌다. 마차, 혹은 수레. 바퀴 달린 것이 오간 흔적이었다.
늑대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또 한참을 따라가자, 야트막한 공터와 함께 산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른닐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만.”
“또 예감이야?”
“그게 아니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악령이라도 나타날 것 같긴 하네.”
체력이 달리는 두 여자가 페시번과 함께 뒤늦게 나타났다. 산장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우뚝 자리에 멈춰서 불안한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봉인 계열의 마법진인가?
강력한 음차원 에너지가 휘몰아쳤다.
이 정도면 당장 마경이 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산 자가 불안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혹은 바깥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마법진을 쳐 놓았으리라.
늑대가 옆으로 빠졌다.
산장의 입구가 아니라 그 옆으로 빠져 건물의 뒤편으로 향하니, 사람이 쫓아오지 않자 재촉이라도 하듯 컹컹 개소리를 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가 봐야지.”
시엔이 산장의 뒤편으로 향했다.
일행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시엔에게야 이만큼 쾌적한 곳이 또 있을까 싶은 장소였다.
음차원 에너지가 이만큼이나 모인 장소라.
필시 원한과 고통이 무수히 잠든 땅이리라.
그럼에도 딱히 망령이 보이지 않으니 또한 신기하기 그지 없는 장소였다. 대체 여기서 무얼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늑대가 산장의 뒤편에 이르러, 훌쩍 뛰어 벽면에 몸을 부딪쳤다.
뭔가 장치가 되어있던 모양으로, 기기긱 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밀려나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가 꼬리치며 계단 아래로 뛰어들었다.
얼핏 바라보니 빛을 내는 구슬들이 달려 저 아래까지 비쳐 꺾였다. 광원이 있으니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이겠지.
시엔이 계단참에 발을 들일 때였다.
페시번이 급히 만류했다.
“잠깐, 여길 내려갈 셈이냐?”
“여기까지 와서 와, 이런 게 있네, 하고 넘어가자고?”
“함정일 수도 있지 않나. 좀 더 조사를 해 보고 들어가는 게.”
시엔이 페시번의 말허리를 잘랐다. “싫으면 여기 남아있던가.”
“사람이 말을 하면.”
“숲에 괴물들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 남아있을래, 아니면 조용히 따라올래?”
“젠장. 빌어먹을 티란디스.”
페시번이 늘 그렇듯 툴툴거렸다.
시엔이 씩 웃으며 다시 계단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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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아래로 내려가 긴 통로를 지나니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던 늑대가 시엔을 반겼다.
“길이 막혔는데?”
컹! 늑대가 개 소리를 내며 다시 훌쩍 몸을 날렸다. 벽면에 붙은 광구 하나를 주둥이로 쿡 누르니, 사방이 진동하며 벽면이 스르륵 위로 말려들어갔다.
동시에 짙은 비린내가 훅 끼쳤다.
벽 너머의 광경이 드러나자마자,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웁. 웨엑.”
에르제가 아침을 고스란히 토해냈다.
“아아······.”
그 옆에서 셜리가 눈을 뒤집으며 쓰러지고, 페시번이 뻣뻣한 동작으로 급히 잡아챘다. 셜리가 쓰러지며 상처를 건드렸는지, 페시번이 악악 비명을 지르며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나 심약한 이가 이런 소동을 벌일 정도로 참혹한 꼴이 드러났음이라.
산더미처럼 쌓인 무언가.
팔과 다리, 잘려진 몸통과 머리 따위가 무질서하게 쌓였다. 사람의 일부분들이 뒤섞여 썩은 악취를 뿜는 시체의 산이었다.
“세상에······. 신이시여.”
베른닐이 좀체 찾지 않는 신을 입에 담을 정도였으니. 그 참혹함이 보통이 아니라.
시엔이 시체의 산을 올려다보았다. 대부분은 사람의 것이라. 그 나이대가 다양하니 아이로부터 늙은이까지 아주 골고루 잘라 쌓았다.
“이상한데.”
“도련님?”
“이만큼 시체가 쌓일 정도면 몇 명일까? 이백 명? 아니, 그건 넘겠고. 삼백 명 쯤?”
“용서받지 못할 짓입니다. 어찌 누가 이리도 참혹하게. 세상에 이런 일을······.”
“감상은 나중에 하고.”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이만큼이나 시체를 쌓았으면, 주변이 온통 피바다여야 정상이지.”
“피를 따로 뽑아냈군요.”
시엔이 시체 탑에서 손 하나를 꺼내들었다. 팔꿈치 아래로 존재하는 고운 손에, 곱게 물들인 손톱이 반만 붙어 덜렁거렸다.
“절단된 것 말고는 손상된 부분이 별로 없어. 피를 뽑고, 남은 걸 여기다 버려놓은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쌓아놨을까? 묻거나 태우면 될 것을.”
“과시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악의 범죄자로 꼽히는 이들을 보면 이런 식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을 자랑으로 삼더군요.”
“그것도 일리가 있긴 하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꼴을 보니 제정신으로 벌일 짓은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이는 무엇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그때였다.
늑대가 시체 더미로 다가와, 주둥이를 놀리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내 허벅지로 보이는 사체 부위를 덥석 물어 구석으로 향했다.
뒤이어 으드득. 늑대가 뼈 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먹이였네.”
“예?”
“먹이. 키메라들도 무언가를 먹어야 살 수 있을 테지.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여기 쌓아둔 거야. 사료 더미지.” “키메라라면 저 늑대가 부리는 괴물을 말씀하십니까?”
“응.”
“세상에, 맙소사······. 그럼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베른닐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였다.
“펠리야, 다 처리하고 왔니?”
문이 열리며 여인의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검은 로브를 대충 뒤집어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걸친 로브자락 안으로 헐렁한 잠옷을 입은 채로 눈을 부비며 나타났다가, 이내 시엔을 바라보며 화들짝 놀라 손가락질을 했다.
“너, 너!”
“취미가 꽤 고약한걸. 실내 장식 치고는 꽤 인상깊은 조형 아닌가?”
“여길 어떻게······!”
“애완동물 관리를 잘했어야지.”
“그게 무슨!”
“저 녀석 이름이 펠리인가? 펠리, 이리 온.”
시엔의 부름에, 늑대가 반쯤 먹다 남은 허벅지를 내팽개치며 달려왔다. 시엔의 발치에 앉아 꼬리를 흔드니, 트리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젠장. 펠리, 뭐 하는 거야. 이리 와! 이쪽으로 오라고!”
늑대가 트리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엔을 바라보고, 다시 트리예를 바라보고. 몇 번이나 번갈아가며 고개를 돌리다, 이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뗐다.
“어허. 안 돼.”
끼잉. 늑대가 애처로운 울음을 흘리며 자리에 섰다.
“뭐, 뭐야! 펜리 이리 와! 이리 오라고!”
“안 돼.”
“내가 주인이야! 내가 주인이라고! 물어! 공격해!”
늑대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앞발을 들어 제 두 눈을 가리니, 저도 이제는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너, 너! 어떻게!”
“나도 몰랐는데, 짐승에게 사랑받는 체질이었나 보지. 그나저나, 대답은 아직인가? 이 실내 장식에 대해 물었던 것 같은데.”
“너, 용병 나부랭이 따위가······”
“트리예!”
분노에 찬 목소리가 트리예의 말을 끊었다.
“몇 년 전부터 영민이 계속 실종되더라니, 이제 보니 네 짓이다! 감히······”
“어머. 대공자님께서 아직도 숨이 붙어 계셨군요. 젠장. 전부 멀쩡한. 빌어먹을 개새끼가.”
끼잉, 끼잉. 늑대가 앓는 소리를 냈다.
트리예를 두려워하는 태도였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나! 내 당장.”
“당장? 당장 어쩌시겠어요? 공작저로 돌아가 각하께 이르기라도 할 셈이신가?”
“너······!”
“그렇게 하시겠다면야 그렇게 하시던가요. 각하께서 손수 목을 베어주실 테지만.”
“네 년이!”
“뭐. 그래도 소용없답니다.”
트리예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흠. 글쎄요. 잠시 이걸 봐 주시겠어요?”
트리예가 로브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되돌아나온 손에 검게 변색한 뼈가 들렸다.
시엔이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또? 대체 남의 뼈를 가지고 본인 앞에서 흔드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것이 당신의 정강이뼈입니다?
“카- 스라. 사하트 흐 트리예, 에- 레- 스!” 사악한 진언이 울려퍼졌다.
“저는 잠시 바빠서 이만.”
트리예가 몸을 돌려 열린 문 너머의 통로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젠장! 놓칠 성 싶으냐!”
분노한 페시번이 달려가 문을 붙잡았다. 그새 잠긴 모양. 어깨로 들이받고 발로 차나 문은 튼튼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으으으······.
가래 끓는 소리 수백이 얽혀 귓가를 두드렸다.
“도, 도련님!”
“흠. 이런 식인가?”
시체의 탑이 꿈틀거렸다. 팔과 팔이, 다리와 다리가, 몸통의 등에 머리가 붙고, 그 정수리에 다시 팔이 붙고 다리가 붙었다.
잘린 시체들이 제멋대로 엉겨 붙으며 꿈틀거리니 이내 한데로 뭉쳐 거대한 형상을 이뤘다.
플래시 골렘. 골렘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종류라. 사람의 살과 뼈로 이루어진 골렘이었다.
“먹이로도 쓰고. 침입자 격퇴로도 쓰고.”
“도련님, 피하셔야 합니다.”
“됐으니까 유르반 영애나 챙겨.”
“예?”
플래시 골렘은 골렘 중에서는 가장 질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방화광의 라바 골렘처럼 끓는 용암 뭉치라 아예 건드리지도 못할 것도 아니다. 암석이나 얼음처럼 단단하지도 않았다.
사자재림의 술로 시체를 부리고, 그 후에 부서져 못 쓰게 된 잔해를 재활용하기 좋다 뿐이 아니던가.
물론 복원력이 뛰어나 잘 죽지 않아 성가신 상대로, 이만한 시체가 모이면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침 손에 들어온 것이 효과적이니 이럴 때 써먹기에 딱 좋지 않은가.
시엔이 늑대를 바라보았다.
“펜리야. 네 먹이가 움직이는구나.”
아우우. 펜리가 거친 하울링을 토해냈다.
우두머리의 부름에, 대기하던 키메라들이 일시에 뛰쳐 들었다. 타타타 짐승의 발소리가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뒤이어 입구로부터 키메라들이 쏟아져 골렘을 향해 달려들었다.
< 19. 기사가 죽어 그 핏값을 치르리라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