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77화 (77/268)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6] >

살이 발리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톱날에 뼈가 갈리는 기분이란. 몽롱하니 고통은 없었지만, 드드득 톱날에 갈려 울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체험하기란 여간 지독한 일이 아니었다.

싱글생글 웃으며 배를 가르는 순진무구의 얼굴을 보며, 시엔은 그냥 정신을 해방하기로 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넓은 공동에 그 혼자뿐이었다. 발치에 얌전히 놓인 쪽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음에 또 놀자.」

커다란 쪽지에 커다란 글씨. 겨우 몇 글자 안 되는 글귀를 두 줄로 큼직하게 박았다.

아마 자신이 기절하고 나선, 심심하니 심층 심연으로 돌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후우.“

시엔이 한숨 돌렸다.

정신을 해방하기로 한 일이 얼마나 옳은 선택이었는지 새삼 잘했다 느껴졌다. 아마 깨어있었다면 언제까지고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을 테니.

“그나저나.”

시엔이 쪽지를 살폈다.

쪽지라기에는 무척이나 컸다. 어지간한 책 네 권을 붙여놓은 크기였으니. 그 색이 희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잔주름이 잔뜩 들어섰다.

시엔이 쪽지를 뒤집었다. 뒷면에 잔뜩 잘라붙은 검붉은 것들이 부스러져 손에 묻어났다.

시엔이 그 냄새를 맡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인피잖아.

인피. 사람의 가죽. 아마도 등 부분의 가죽인 것 같은데.

시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인피가 났을까. 애초에 이 곳에 사람이란 시엔 혼자뿐이었으니. 설마. 이거 내 가죽이야? 이만큼 떼어냈으면, 그 자리에 뭘 채워놓은 거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길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손해였다.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지.

몸 상태는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살며 이보다 개운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음차원 에너지를 끌어올리자,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마력이 반응했다. 대로를 질주하는 명마처럼 거침없는 속도.

시엔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건 또 왜 이래.

조만간 순진무구를 한 번 더 봐야할까. 대체 신체에 무슨 짓을 해놓은 것인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터였다.

그래도 설마 해로운 짓을 했을까. 하지만 순진무구의 선의가 받아들이는 이에게 선악이 없는 끔찍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단은 여길 탈출하고 생각을 해 보자.

시엔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빛이 들어오는 거대한 틈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엔이 또다시 당황했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공동 천정의 중앙, 위로 뻥 뚫린 수직갱이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동의 조명 역시 용의 마법이라. 용이 숨지고 나니 끊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보여?

시엔이 인상을 썼다.

어떤 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이었다. 그런데 앞이 보였다. 땅에 솟은 석주들이, 천장에서 드리운 종유석들이. 그리고 한편에 널브러진 용의 잔해가.

용의 잔해. 시엔이 눈을 빛냈다.

그러자 실제로 눈이 빛났다. 시엔의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졌다. 옅은 청록색의 동공이 다시 열려 금빛 홍채가 드러났다. 시엔의 눈가에 금빛 휘광이 맴돌았다. 거울이 없으니 시엔이 모르는 일이었다.

금빛 비늘이 한편에 산처럼 수북이 쌓였다. 순진무구의 사고는 아이와 같으니,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그 숫자가 많으니 오히려 흥미가 떨어졌던 모양.

그 증거로 용의 눈알은 보이지 않았다. 단 두 개뿐인 것이라 순진무구가 챙겨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용의 백골이었다.

가죽도 살과 피도, 내장 조각 하나 없이 깔끔하게 발린 상태였다. 그 덩치가 있으니 그 부산물의 양 역시 어마어마했을 터. 그러나 남은 것은 비늘과 뼈뿐.

이 또한 순진무구가 벌인 일이리라.

왜 그랬는지는, 글쎄. 순진무구가 한 일에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할 터. 그냥 이런 결과가 되었구나 여기는 것이 맞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용의 골격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온전히 보존된 싱싱한 상태의 골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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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조는 더욱 참담한 꼴에 이르렀다.

신체의 무게를 잃은 상태에서의 전투를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겠는가. 제 몸조차 겨누기 힘들어 사방과 위아래가 마구 휘둘리는 가운데 몬스터 인형들이 들이닥쳤으니.

시체들이 즐비했다. 짓이겨지고 깨지고 터진 시체들. 그리고 불타거나 얼어붙은 시체들도 역시 상당수였다.

다급해진 마법사들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마법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방향이 잡히지 않으니, 주변을 몽땅 얼리거나 태워버린 탓이었다.

부상자를 살피던 뷔아가 멈칫했다.

으레 이쯤 이죽거리며 말을 걸어와야 할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어째 말을 걸어오지 않는 탓이었다.

시엔에게 성녀의 신성이 끔찍하고, 뷔아에겐 시엔의 흑마력이 신경을 긁어 거슬리는 것이라.

둘 모두에게 불쾌한 일이긴 해도, 어쨌거나 근처에 두고 서로 어디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사이였다.

뷔아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미약하게나마 찝찝한 불쾌함이 저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희미하기 짝이 없으나, 그래도 일단 감각에 잡힌다는 데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 인간이 다쳤나? 다치긴 하나?”

어째 시엔이 아프다 절절매며 끙끙거리는 꼴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역병 때도 쓰러져 놓고는 아픈 기색이란 하나도 없이 그저 잘 자는 꼴이지 않던가.

어째 기운이 미약한데, 많이 다친 거 아냐?

뷔아가 부상자의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쾌한 기운을 따라가니, 시엔은 없고 한 쌍의 남녀가 딱 붙어있을 뿐이었다.

“으. 아파라······.”

“헤위 누나, 괜찮아? 내가 호 해줄까?”

“어머머. 정말이니? 얘도 참. 남사시럽게. 무슨 그런 걸 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퉁퉁 부은 손목을 내밀었다. 그걸 또 호호 불고 앉아있는 청년은 분명 화염탑의 부탑주였던가.

이건 또 뭐야. 뷔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 꼭 이 꼴을 보여줘야해? 뷔아가 욱하는 성질을 꾹 참고 다시 시엔의 기척을 더듬었다.

기척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헤인트였다.

뷔아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뷔아가 급히 달려들어 헤인트의 어깨를 붙들었다.

“다, 당신!”

“꺄악! 서, 성녀! 꺅! 아파!”

뷔아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깨가 으스러져라 쥐는 악력에 헤인트가 비명을 질렀다. 알렌이 벌떡 일어났다.

“성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봐요, 당신! 시엔, 시엔은 지금 어디 있죠? 왜 당신한테 시엔의 기운이.”

“아파! 놔!”

“성녀!”

알렌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억지로 뷔아를 떼어냈다. 헤인트가 급히 지팡이를 꺼내들어 성녀를 겨눴다.

“기습인가? 이 세오···아니 헤인트, 언젠가 너와 담판을 지을 날이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그게 바로 지금이로구나!”

“헤위 누나?”

헤인트의 눈에 선연히 적의가 서렸다.

뷔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헤인트가 의기양양 소리쳤다.

“크하핫, 꼴 좀 보라지! 내 두려움을 깨달았느냐! 그렇다고 해서 내 자비를 구할 생각일란은······”

“그럼 시엔은?”

“응? 선배님?”

헤인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리치가 아니라 헤인트 랑그투의 몸이었다. 성녀가 갑자기 덮쳐 놀라 본색이 나왔으나, 생각해 보니 제 정체를 알 리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엔, 시엔은.” 헤인트가 사방을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선배님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아마 볼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지.

“어. 음. 선배님, 아니지. 공자님은 지금 좀 멀리 계신 것 같은데요.”

“멀리? 그럼 설마 아주 먼 곳에······.”

“아주까지는 잘 모르겠고. 아마 곧 돌아오시려나. 원체 자유로우신 분이니까요.”

“예?”

뷔아의 큰 눈이 더 커졌다.

“그, 시엔은······.”

“전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이 세, 아니지 이 헤인트가 나중에라도 확실히 전해드리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시엔은······.”

“어디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계시잖아요. 아마 어디 볼일 보러 가신 모양인데.”

“시엔이 무사하단 뜻인가요?”

“거야 이. 헤인트가 멀쩡한니 선, 시엔 공자님도 무사하시죠.”

헤인트의 몸을 강신체로 쓰고 있을 뿐, 리치의 본체는 여전히 시엔의 뼈에 있었다. 그 뼈가 시엔에게 흡수되어 허수 상태로 영혼에 기생하고 있었다.

“화, 확실해요?”

“음. 아까는 좀 위험하신 거 아닌가 싶었는데, 지금은 멀쩡하시네요. 오히려 전보다 더 격이 오르신 것 같은데. 뭐지? 뭘 하면 존재의 격 자체를 높일 수가 있지?”

헤인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치의 영혼과 시엔의 영혼은 상당히 큰 격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그건 가장 멀리에 도달한 위대한 마법사와 그 후배의 차이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아예 다른 차원에 도달한 것 같은, 얇지만 절대 깰 수 없는 벽 너머에 계신 것 같은 차이가.

역시 선배님이시지.

헤인트가 그렇게 이해했다. 선배님이시라면 뭘 이루셔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여쭤보면 가르쳐 주시려나.

그 어조가 평이하니 눈곱만큼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뷔아가 안도했다.

“아. 다행이다······.”

뒤이어 뷔아가 혼란에 빠졌다.

다행? 왜 다행이야? 콱 죽어버리지, 그딴 인간. 그러니까, 시엔이 죽으면 곤란하니까. 티란디스 가에 면이 안 서고, 명예 성자가 될 인간이 죽어버리면 교단의 위신도 많이 떨어지고.

뷔아가 혼자 허둥거렸다.

헤인트가 관심을 끊고 다시 엄살을 부렸다.

“아야야······.”

슬쩍 알렌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눈만 깜박이던 화염탑의 부탑주가 그 엄살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헤위 누나? 어디 아파?”

“손목이, 손목이 아야야······.”

“아 씨. 별꼴이야.”

뷔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떴다.

뭔가 손해만 잔뜩 본 그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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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이 절벽을 타고 올랐다.

평상시라면 마수를 부려 날았을 것이나, 바깥 것, 붉은 보석을 가진 상태라 소환하기가 여의치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도대체 신체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도 확인할 겸, 암벽을 타고 오르는 참이었다.

“흠.”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한 팔로 암반을 붙들고 매달린 채였다.

왜 안 힘들지?

힘을 주면 근육이 당기고, 또한 그 후에 피로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힘들 기미가 없다.

숨은 평안하고, 몸은 차분하니 땀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수직에 가까운 암반을 타는데도 불구하고,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안하니 몸이 도대체가 정상이 아니었다.

시엔이 암반을 붙든 팔을 휘둘렀다. 한 팔의 힘으로 훌쩍 뛰니 몸이 위로 치솟았다. 다시 팔을 뻗어 붙잡고, 또 힘을 주니 험한 절벽을 제집처럼 가볍게 돌아다니는 꼴이었다. 그렇게 공동 천장의 수직갱을 계속해서 타고 올랐다. 빛이 없으니 낮인지 밤인지 시간이 또 얼마나 흐르는지 알 것이 무어랴.

시엔이 마침내 평탄한 땅 위에 이르렀다.

넓은 공간이었다. 시엔이 타고 올라온 수직갱이 중앙에 크게 뚫렸다.

바닥과 평평하고 벽면이 매끈하니 반원을 그리니 인공적으로 만든 모양새라. 아마 던전 어딘가로 솟았으리라.

그리고 한편에 선 거대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거인?”

말 그대로 거인이었다. 시엔이 그 앞에 이르러 머리가 거인의 발목에 닿을 뿐이니 실로 아득한 크기라.

그러나 산 것이 내는 소리가 없었다.

사체는 무엇이든 흑마법사가 한눈에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라, 이것이 무언가의 유해가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이것도 인형이네.”

용이 죽었으니 인형이 움직일 리가 없다.

게다가 인형이 멀쩡히 남아있으니 사람이 닿은 곳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던전의 끝이라.

시엔이 주변을 둘러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통로가 이어지니 저 멀리서 직각으로 꺾였다. 모퉁이을 돌자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저 멀리에 출구가 보였다.

던전의 끝이었다.

결국, 용의 보물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하기사 용 스스로 수호자를 뽑기 위해 만든 곳이라 하지 않았던가. 다른 문 너머에 있던 것들은 그저 미끼라. 이미 용의 문을 지나치면 낚인 물고기니 더는 밥을 줄 필요가 없었겠지.

던전이 발견된 산기슭의 반대편이었다.

시엔이 밤을 가로질러 캠프로 돌아왔다.

배정된 숙소로 다가갈수록 왁자지껄 흥겨운 소리가 커졌다. 문을 열자, 익숙한 술판이 눈앞에 펼져졌다. 또 엘프들이었다.

“아! 시엔이다!”

“안녕안녕!”

“탐사는 끝났나요?”

엘프들이 일시에 재잘거렸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숲으로 돌아간다 하지 않았나?”

“그럼 비설이 심심하잖아요.”

“아. 비설이 있었지.”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얘는 기껏 따라와 놓고는 다른 숲의 엘프들과 어울리느라 결국 던전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베른닐은 창문 아래 웅크리고 누워 잠들어 있는 참이고.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술이나 줘.”

“좋지! 이번엔 비장의 사봉사주야!”

“도대체 비장의 술이 얼마나 있는 거야?”

“글쎄. 집집마다 하나씩이니까.”

신체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혀 피곤한 낌새가 없었다. 그러나 시엔은 피로를 느꼈다. 정신적인 피로였다.

그리고 정신적인 피로란, 놀고 먹다보면 자연히 치유되는 것이라.

용은 죽었고, 대죄인은 되돌아갔고. 탐사조야 이제 알아서 기어 나올 테니, 먼저 쉰다고 해서 별문제는 없으리라.

뭔가 하나 잊은 것 같은데. 별일 있겠어.

시엔이 술잔을 들었다.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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