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5] >
수많은 불의 창이 순진무구에게 들이닥쳤다. 아이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이내 폭발이 일었다. 지축이 흔들리는 폭발의 연쇄. 닿아 폭발을 일으키는 불의 창이었다. 수천발이 일시에 궤적을 그렸다.
-흥. 하찮은 것.
용이 콧김을 내뱉었다.
이제는 네 차레라는 듯 시엔을 바라보던 용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콜록, 콜록.“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자리에 새까만 숯덩이가 남았다. 아이의 형체를 한 숫덩이. 그 머리에 커다란 눈만 동그랗게 남았다. 놀란 눈이 연신 깜박거렸다.
”으. 이게 뭐야.“
숯덩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검은 재가 날리며 고운 피부가 드러났다. 머리를 흔들 뿐이나, 몸통에 묻은 검정까지 같이 떨어져 나갔다.
순진무구. 순수하여 제 생각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며, 무구하니 아는 것이 없어 상식과 맞지 않았다.
선의와 악의가 뒤섞여 알 수 없다는 점과 더불어, 최악의 대죄인이라 불리는 이유가 그 순진함이었다.
아이의 세계에서 제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익살스러운 모양새로 살아있을 뿐이기에.
”씨이. 나빠.“
순진무구의 눈이 도끼날의 형태를 취했다. 귀엽다 할 모습이나, 절대로 웃을 수 없는 모양새이기도 했다.
-도, 도대체 무엇이냐!
당황한 용이 마법을 쏘아냈다.
얼음 기둥이 솟아올랐다. 순진무구가 그 안에 얼어붙었다. 얼음에 금이 갔다. 그 내용물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조각이 빠르게 녹았다. 바닥에 흩어진 아이의 조각들이 함께 녹았다.
색색의 진득한 물감이 남아 서서히 한데 모였다. 이내 다시 아이의 형상이 땅을 디디고 섰다.
바닥이 열리며 아이가 무저갱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천정에 둥근 구멍이 뚫려, 아이가 도로 공동에 떨어져 내렸다. 쿵. 순진무구의 머리 위로 손톱만 한 별과 새의 조형이 떠올라 빙글빙글 돌았다.
땅이 뒤집혀 아이를 덮쳤다.
그 사이로 종이처럼 납작해진 아이가 튀어나와 제 엄지를 물고 바람을 불었다. 멀쩡한 꼴이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불었다. 아이의 목이 뎅겅 잘렸다.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아이의 몸이 종종 뛰어 제 머리를 주워들었다. 다시 어깨 위에 얹으니 등을 보고 거꾸로 붙었다.
아, 반대네? 아이가 키득거리며 제 손을 들어 머리를 돌렸다.
-대체! 대체 무엇이냐! 어찌 준엄한 법칙을 어기느냐! 이 부정한 것이 대체 무엇이냐!
”나?“
순진무구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안 가르쳐 주우지.“
아이의 손에 어느새 긴 장대가 들렸다. 그 끝이 두 갈래로 뻗어 둥글게 휘니,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부딪혀 맞물렸다.
거대한 집게였다.
용은 세상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세상 가장 강대하고 뛰어난 지능을 가지나, 그래서 오만하며 어리석었다.
-너, 마법사! 네 놈의 짓이로다!
”이런. 이제 와서.“
시엔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시엔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 그 자리가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그러나 시엔이 다시 나타나니 공동의 끄트머리, 석주가 그리는 그늘 뒤였다.
시엔이 피를 한 줌 토했다.
안 그래도 죽겠는데 또 마력을 쓰게 만드는구만. 시엔이 어둠 속에 조용히 숨었다. -소용없다! 용의 눈을 피하려 드느, 크아악!
”히힛, 이거 내 거!“
아이가 제 몸뚱이만 한 커다란 구슬을 뽑아들었다. 용의 눈알. 거기에 딸린 신경 다발이 길게 늘어졌다.
”으. 징그러. 이건 됐어.“
순진무구가 구슬을 내팽개쳤다. 용의 눈알이 튀어나와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 쪽은 괜찮을까?“
아이가 어느새 용의 콧잔등 위에 섰다.
-그만, 그만두어라! 그만 둬!
”싫은데?“
-아아아악!
용이 두 눈을 잃었다. 느껴본 적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홰를 치고 발을 구르며 광분해 날뛰었다.
”너 재미있다! 웃겨! 이상한 춤을 추네!“
아이가 고통에 날뛰는 용의 모습을 보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타인의 고통 따위 알지 못하고, 또한 알고 싶지도 않으니 순진무구라.
아이가 집게를 놀려 용의 비늘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용이 날뛰니 아이가 거기 채이고 밟혀 찌그러지고 튕겨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그뿐. 벌떡 일어나 집게를 들어 용의 비늘을 노렸다.
용의 비늘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다.
처음엔 용의 비늘을 가지겠다 했건만, 이제는 그저 뽑아내는 일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용이 고통에 날뛰며 비명을 지르고, 그러면 아이는 재미있다 바닥을 구르며 맑디 맑은 웃음소리를 높였다.
가장 아름다운 생물이 몰락하고 있었다.
어느새 찬란한 비늘은 다 떨어져 드러난 가죽 위로 연신 핏기가 어렸다. 눈구멍이 드러나 뻥 뚫리고, 혀가 길게 뽑혀 아이가 묶은 나비 모양의 매듭이 축 늘어졌다.
섬뜩한 모습이었다.
순진무구에겐 선악이 없다. 그저 제 본위로 모든 것을 판단하니 저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
‘흠. 그런데 이제 어쩌나.’
문제는 제멋대로인 대죄인이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제 딴엔 즐겁게 노는 것뿐이었다. 용과 놀고 아직 모자라다 하면 시엔 역시 저 꼴이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때였다.
용이 비통한 목소리를 높였다.
-너 순진무구!
”응? 어떻게 알았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이 탄식했다.
-죄인 중 죄인, 대죄인이구나. 마법사, 네가 죄인을 풀었구나. 세상에 죄악을 불러들였어. 정도를 모르느냐. 법칙을 거스르고 세상의 혼돈을 가져왔구나. 그 감당을 일개 하찮은 영혼이 어찌 감당하려느냐.
체념 섞인 탄식이었다.
용의 지능은 다른 지성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 죽음을 이해했다.
진작에 대죄인의 정체를 알았으면 모르되, 이 지경에 와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이해했으리라.
시엔이 숨어있던 석주 너머로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 할 말은 해야지.
”그러니 거절하겠다 했잖습니까.“
-나는 네게 영광을 베푸려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이 이러한 배덕인가? 용의 수호자가 되어 지키어 함께 수명을 누리니, 어떤 산 것도 이르지 못하는 지고한 영광이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과 대죄인이 결국 같은 것이 아닙니까. 지성을 가진 이는 상대의 처지를 알고 이해할 줄 알지요.“
-하. 웃기는군. 겨우 백 년을 사는 멍청한 것이 감히 용의 지혜를 저울질하느냐. 네 하찮은 판단으로 용을 가름하려 하지 말아라. 용이야말로 진정 옳음이니, 네 하찮은 사고가 전부 틀림을 모르겠느냐.
"당신을 지킬 사람을 찾으시려거든, 먼저 마음을 취하셨어야 했습니다. 당신을 지켜라 강권하신들, 그게 어떤 영광이라 해도 인간에겐 즐거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니 너희가 언제까지나 어리석은 것이다. 하찮은 것아.
그리고는 용의 신체가 땅 위로 쓰러졌다. 미동 없이 축 늘어지니 바로 용의 최후였다.
용은 최후까지 오만했다.
그렇기에 용이리라. 그렇지 않은 용은 용이 아니라 할 터이니.
”어, 뭐야. 자나? 일어나 봐. 응?“
아이가 용의 사체를 건드리나, 이미 죽은 신체가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순진무구가 울상을 지으며 용의 매듭진 혓바닥을 쿡쿡 찔렀다.
시엔은 그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히 빛나는 영혼. 진정 고귀한 격을 가진 용의 영혼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내 천년이 못된 짧은 삶이었으나, 내 죽음을 타의에 맡기지는 않겠다.
”이렇게 되었으니 죄송할 따름이군요.“
용의 영혼이 말했다.
-그러나 하찮은 것이 용을 살해한 죄를 알겠는냐. 내 영혼과 이름으로 너를 저주하겠다. 흑마법사.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드마스터 네다섯만 있어도 용 정도는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용이 진정 귀찮은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다.
세상 가장 가치 있는 영혼이 그 대가로 불러오는 강대한 저주.
시엔이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냥 순순히 가시면 좋을 텐데. 꼭 뒤끝을 남기시는군요.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만.“
-너는 천 년을 죽지 않고 살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처도 낫지 않고 또한 살아있는 것이 늙어감을 피할 수 없으니, 오롯한 고통 속에서 천 년을 살리라. 터지고 깨지고 병들며 늙어 그저 죽음을 원하며 천 년을 살리라.
”심보도 고약하시지.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만두시는 게 좋을 거라고.“
-이는 란사스데히타하, 세상 가장 귀한 영혼이 그 이름을 걸고 바라는 바이니. 흑마법사. 죽음을 바라며 오래 고통받으리라.
용의 영혼이 붉게 물들었다. 영혼이 순수한 악의를 가져 스스로 악령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저주, 최악의 악의, 용의 악령이 시엔에게 날아들었다.
시엔이 가방을 풀어 보석을 꺼내들었다.
부패한 환희가 말하기를 바깥 것이라 부른,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붉은 원석이었다.
시엔이 보석에 음차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보석이 빛나며 음산한 붉은 광휘를 뿜었다. 시엔이 보석을 앞으로 내밀었다.
용의 저주, 용의 악령이 날아들었다. 흉흉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 기세 그대로 붉은 보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용의 오만한 음성이 손을 타고 전해져 올라왔다.
-이게 무슨 짓이지?
”하여간 말은 더럽게 안 듣고.“
-멍청한 것. 세상 가장 귀한 보석조차 감히 용의 영혼을 감당할 수 없다. 이깟 것, 부수어 나가면 그만인 것을.
보석의 안쪽, 봉인된 영혼이 꿈틀거렸다.
붉은 보석이 진동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경악한 음성이 전해졌다.
-말도 안 돼! 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저도 모릅니다. 바깥 것이라 하던데. 그러니 내 하지 말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는 그냥 거기 계시지요.“
이전, 보석의 영향으로 온통 붉게 물든 정신 세계 속.
순진무구는 한 줄기 미약한 푸른 별을 가리켰다.
그때 시엔은 붉은 보석뿐 아니라, 셰도우 스토커가 봉인되어있던 손톱만 한 푸른 보석 역시 품에 가진 채였다.
사파이어와 비슷하나 결코 사파이어는 아닌 기묘한 보석.
붉은 보석이 정신세계를 붉게 오염시키니, 푸른 보석 역시 푸르게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거대한 붉은 보석과는 달리 푸른 것은 미약하기 짝이 없으니, 정신 세계에 끼치는 영향 역시 미비했으리라.
본디 악령은 가둘 수 없으나 푸른 보석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붉은 것 역시 그러할 수 있으리라 몇 번의 실험 끝에 마침내 그 사용방법을 알아냈다.
시엔이 용의 영혼이 깃든 붉은 보석을 바라보았다.
이 역시 조각에 불과하니,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커다란 것이었으리라. 용조차 가둘 정도로 강력한 것이 본래는 더 큰 덩어리였다면.
그렇다면 온전한 덩어리에는 무엇이 봉인되어 있었을까. 그리고 이게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봉인되어 있던 그 무언가가 풀려나 세상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문득 소름이 돋았다.
용보다 강대한 영혼이란 대체 무엇일까. 바깥 것이라 하였으니.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그 너머의 어떤 무엇인가 강대하기 짝이 없는 것이란.
-당장 해방하지 못할까! 감히 용의 영혼을 가둘 수는 없다! 하찮은 것이······
”시끄럽게.“
툭. 시엔이 보석을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보석이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뿐이었다.
탁탁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순진무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란. 모처럼 재미있었는데. 으.“
”수고하셨습니다.“
”근데, 시란. 어디 아파?“
순진무구가 석주에 겨우 기대고 앉은 시엔을 보며 고개를 가웃거렸다.
실제로 시엔의 몸은 엉망이었다.
애초에 대죄인을 불러오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보석의 힘과 더불어, 순진무구와 손가락을 내밀어 맺은 약속이 힘을 발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안 그래도 속을 다친 상황에서 그 여파로 속의 혈관이 터지고 속이 상했다. 게다가 생명력이 까여 심장이 미약하니 피가 돌지 못해 나른하니 정신이 옅었다.
”몸이 엉망이군요. 마력로도 온전치 못하고. 내장이 많이 상했습니다“
”쯧쯧. 조심했어야지.“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법사. 정신 세계의 수양자들은 정신과 신체를 하나로 묶는 방법을 알았다. 당장 심각한 내상은 명상을 통해 해결하고, 이후 탈출해 후작저에서 요양하면 되리라.
몸 상태가 심각하니 일 년은 족히 요양해야겠지만 뭐. 아프다는데 부려먹진 않을 테니.
”그렇구나. 그런데 나 심심해.“
이런 젠장. 시엔의 안색이 굳었다.
늑대를 잡으려 호랑이를 푼 격이었다.
급하니 일단 늑대를 잡긴 했는데,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냈다.
”심심하다구! 심심해! 심심해! 놀자!“
”놀아드리고 싶습니다만, 지금 움직였다간 제가 죽겠습니다.“
”그래서?“
”예?“
”놀자.“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시엔이 전략을 바꿨다.
”제가 죽으면 순진께서 다시 세상에 나오시지 못할 텐데요.“
”그건 안 돼. 그럼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그러니 좀 쉬어야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 그럼 내가 심심하잖아.“
”음.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랑 놀고, 시란이 안 죽으면 되잖아?“
시엔이 입만 달싹거렸다.
애초에 말이 안 통하는데 무슨 대화를 하랴.
”왜? 왜애? 왜애애애?“
”음.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만은.“
”그럼 그렇게 해.“
”능력이 안 되니 어쩔 수가 없군요.“
”능력이 안 돼?“
”인간이지 않습니까.“
”으음. 으으으음. 아냐. 돼.“
순진무구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시엔이 입을 열었다.
”의사 놀이는 어떻습니까?“
”의사 놀이? 아! 그거 재미있겠다. 내가 의사! 시란이 환자! 시란이 아프니까 내가 고치면 되잖아!“ 순진무구가 일으키는 기적의 기원이 바로 믿음이라. 스스로 고칠 수 있다 믿는다면 그 과정이야 어쨌든 고쳐지고 말 터. 겸사겸사 몸도 좀 치료하고.
아이의 복장이 어느새 뒤바뀌었다. 흰 백의를 차려입은 채였다.
손에는 망치와 톱을 하나씩 들었다.
투투둑, 무언가 시엔의 발치로 떨어져내렸다. 집게와 정, 각진 칼과 삽이며 곡괭이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설마 이걸 쓰려고? 내가 내 무덤을 판 거 아닌가? 정말로 이게 최선이었나?
시엔의 정신이 그만 아득해지고 말았다.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