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4] >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뷔아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잘근잘근 씹어대다, 이내 겨우 한 마디 덧붙이고 만다.
“탐사를 막았어야 하는데.”
결국 자책이었다. 시엔이 혀를 찼다.
“뷔아가 막은들 뭐가 달랐겠습니까.”
“하지만 신전에서 참여하지 않겠다 했다면.”
“그럼 사제 없이 왔을 겁니다. 그런 치들이죠.”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글쎄요. 저기 안 보입니까?”
호수는 피로 물들었다. 그 물을 끌어 올려 수로에 대는 모양이었는지, 어느새 수로 역시 같은 색이었다.
첨벙첨벙. 호수 안을 사람들이 헤집고 다녔다. 대개는 용병들이었다. 연신 잘린 사지와 몸통을 헤집고, 장비를 벗겨 앞뒤로 돌리며 살펴보았다. 간혹 용병 아닌 자들도 있었다.
“탐사를 준비하는 겁니다. 기왕이면 좋은 장비를 챙기겠다는 거죠. 그럭저럭 부수입도 되겠고.”
“저건, 저러면 안 돼요. 죽은 이들을 추모해야 하는 판에 사자의 신체를. 어찌 저럴 수가. 말려야.”
시엔이 일어나려는 뷔아의 팔을 붙들었다.
“죽은 자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남은 것은 산 사람이 쓰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던전이 위험하다는 사실이야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곳에 스스로 자처해 발을 디뎠으니, 그 죽음 역시 온전히 스스로 감당할 것이었다.
“누구도 자신이 죽을 거라 알고 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무지가 변명이 되진 않을 겁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를 섬기지 않는 자유인들, 용병 같은 치들의 목숨은 온전히 자신이 감당한 것이라.
누군가를 섬긴다면 죽음은 온전히 그 주인이 책임져야 할 것이고.
“뷔아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러한 책임에서 어중간하게 다리를 걸친 이들이 바로 사제들이었다. 기실 어떤 책임이 없으나 신을 사랑하고 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아껴 귀히 여기는 이들.
그래서 사제들이 존경받고 존중받았다.
뭐. 사제도 결국 인간이라 개중엔 몹쓸 놈이 있고 또 연고 없는 이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가 있는 법이긴 해도.
“어차피 돌아갈 길도 없으니, 이미 죽은 이보단 앞으로 있을 피해를 막는 데에 신경을 쓰시죠. 성녀가 죽상이면 탐사조 전체가 우울할 겁니다.”
“······그래야겠죠. 힘내자. 힘내야지.”
뷔아가 제 뺨을 짝짝 두드렸다.
꽤 호된 손길이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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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를 수습해 모아두고, 나머지 인원들이 다시 탐사에 올랐다.
벌써 인원이 절반이 줄었다. 그러니 이전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로 꼼꼼하게 훑어 나아갔다.
그러나 꽤 오래도록 함정도 수호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통로를 통과할 뿐이었으니.
앞서 지독한 함정을 보았으니 더욱 신중할 뿐이라.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이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뭔가. 몸이 가볍지 않아?”
“어? 나도. 나도 그러는데.”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몸이 가볍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는 와중이었다. 흑마법사의 몸이란 신성 치료가 받지 않으니 다쳐도 스스로 나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픈 몸이라 그 발걸음 역시 무거울 수밖에는 없었는데.
그런데 움직임이 편안하고, 두르고 짊어진 것의 무게가 유난히 가벼웠다.
아예 몸이 떠오를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어어, 우왁!”
“뭐야, 뭐야아!”
기분 탓이 아니었다. 탐사조원 한 명이 떠오르며 공중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를 시작으로, 한 명 두 명 발이 땅에서 떨어지니 허공으로 떠올랐다.
“함정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시엔이 살짝 발을 굴렀다. 땅바닥을 톡 치는 정도의 반동으로도 몸이 둥실 떠올랐다. 신체의 무게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양 벽면이 열렸다. 땅에 발을 붙인 트롤이며 오우거 따위의 대형 몬스터들. 함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쿵쿵 발소리를 내며 양옆에서 짓쳐 들었다.
용병 하나가 칼을 들어 트롤을 후려쳤다. 깡, 하는 금속성이 울렸다. 그러자 오히려 용병의 몸이 붕 떠올랐다.
신체의 무게를 잃었으니 작은 충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몸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트롤이 용병의 발목을 잡아채곤 거칠게 휘둘러 바닥에 처박았다. 퍽, 퍽, 퍽. 사람의 신체가 연신 깨지고 터졌다. 그러자 핏방울이 떠올라 허공에 둥글게 뭉쳤다.
난장판이 펼쳐졌다.
주문이 들려오고 불화살이 날았다. 그 앞에 제 무게를 겨누지 못하고 떠오른 탐사조원이 끼어들었다. 쾅! 사방으로 잔해가 튀었다.
헤인트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펼쳐진 것이 보였다. 수초처럼 뻗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이었다.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땅을 향하는 것이 정상이라. 아예 무게를 잃어버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모양이 나올 수가 있을까.
이내 시엔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위와 아래가 감각으로 잡히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 기준이 없어 몸이 공중에 머물렀다.
트아아! 트롤 하나가 부자연스런 고함을 지르며 시엔을 향해 달려들었다. 트롤의 그림자에서 검은 창들이 솟아 발목을 찔렀다. 톱니가 사방으로 튀고, 다리를 잃은 트롤 인형이 넘어졌다.
그 서슬에 바람이 일어 시엔의 몸이 뒤로 밀려나갔다.
흠. 이건 또 색다른 경험인데.
인형들은 영향을 받지 않아 발을 디뎌 날뛰고, 오로지 산 자들만이 무게를 잃고 떠올라 허우적거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니 전투가 제대로 벌어질 리가 만무.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가 동료 마법사에게 치며 한 덩어리가 되어 날아가고, 벽을 들이받아 그 속도 그대로 뒤로 튕겨 또다시 날았다.
탐사조원 하나가 몬스터 인형의 곤봉에 맞아 허리가 꺾였다. 피를 토하며 벽과 벽을 튕겨 날다 축 늘어졌다.
시엔이 쉐도우 스토커를 부리며 전장을 날았다. 시엔에게 달려들던 인형들이 솟아난 그림자의 창에 톱니를 쏟으며 바닥에 넘어졌다.
문득 등에 무언가 부딪쳐 함께 밀렸다. 목이 돌아간 시체 한 구였다. 문득 앞에서 인형이 달려드니 시엔이 시체를 당겨 앞으로 던졌다.
시엔의 몸이 뒤로 밀리고, 인형이 애꿎은 시체를 후려치며 괴성을 질렀다. 그것도 잠시, 어디선가 날아온 얼음창에 꿰뚫려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시엔이 쉐도우 스토커의 창을 뻗어 손에 쥐었다. 쉐도우 스토커의 창은 어느 때에도 그 그림자에 붙어있는 것이라. 급할 때 불러 손잡이로 쓰기엔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시엔이 창을 잡고 땅에 발바닥을 대어 버텼다. 몸이 더 이상 돌지 않으니, 한 군데 버티고 서는 것만으로도 한층 차분해졌다.
버닝 신을 풀어 보이는 인형을 태우니, 그 숫자를 하나씩 줄어나갔다.
그때였다.
-너로구나.
문득 귓가에 울리는 준엄한 음성이 있었다.
문득 시야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엔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이, 발목이, 정강이가 차례로 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시엔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몸이 그대로 아래로 쏠려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이윽고 머리가 바닥을 넘자, 저 위로 무게를 잃을 채 사투를 벌이는 탐사조원들이 훤히 보였다.
그조차 점점 멀어져갔다.
사방이 그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일 뿐. 저 멀리에. 탐사조가 비치는 광원들이 점차 멀어져갔다.
마침내 완전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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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에게 어둠은 편안한 장소다. 시엔이 어둠 속에서 긴 명상을 마쳤다.
자신이 어딘가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천정이 뻥 뚫린 공동이었다.
알 수 없는 빛이 새어 사위를 밝혔다.
매달린 종유석들이며 솟은 석주가 여간 거대한 것이 아니다. 분명 수천년, 혹은 그를 넘어 수만년의 역사가 쌓여 만들어진 곳이리라.
그리고 잠든 용이 있었다.
세상 가장 거대하며 또한 아름다운 지성체가 바로 이 장소에 있었다.
거대한 동체는 각진 곳 없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금빛 비늘은 찬란하니 절로 감탄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하기사, 공간을 초월하는 마법을 부리는 이가 달리 또 누가 있을까.
시엔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께서 부르셨군요.”
용이 눈을 떴다. 세로로 찢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시엔에게 향했다.
-그렇다. 인간. 내가 너를 불렀다. 아니. 내가 너를 선택했노라.
“선택이라 하시면.”
-수호자를 아느냐?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잠에서 도중에 깨어본 적이 있느냐? 대단히 불쾌한 경험임에 틀림없지.
“맞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용의 잠을 지켜야 한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깨우지 못하도록. 세상 가장 고귀한 생명체가 불쾌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니겠느냐.
대단히 오만한 말이었다.
시엔이 다시 물었다.
“허면 저를 부르신 이유가.”
-그렇다. 네게 영광을 베풀기 위해서다. 오로지 가장 담대한 영혼만이 용을 수호하여 지키는 영광을 가질 수 있지.
“당신께서 잠에서 깨지 않도록 말씀이시죠.”
-그렇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용이 다시 말했다.
-너희 것들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같았지. 영생. 영원히 사는 것. 용의 수호자가 바로 그러하다. 내 심장을 받아 함께 사니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존재하며 또한 늙고 병들지 않으니 그 삶이 무한하다.
“영생이라. 그거 이상한 일이군요. 수호자가 영원히 산다면, 당신께서 이미 수호자를 두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용에게 수호자는 단 하나뿐이니. 내 아직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번거로이 시험대를 만들어 너희를 불렀다. 개중 네가 가장 뛰어나니 너를 불렀을 뿐이다.
시험대. 용이 말했다.
이 던전 모든 것이 수호자를 찾기 위한 시험대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저 번거로운 작업에 불과했으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겐 다른 할 일이 있습니다. 수호자는 다른 이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가 네게 선택하라 하였더냐?
“과연. 그렇게 나오시는군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 가장 아름답고 강대하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지성체. 그것이 바로 용이었다.
대적할 이 없는 육체와 정신 세계를 타고나 본신의 힘과 마법 모두 다른 종족과 견줄 수 없는 수준에 있는 생명체.
그러니 다른 지성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벌레가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그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사람은 없는 법이었으니.
시엔의 눈에서 흑광이 비쳤다.
정신 세계 어딘가에 무저갱이 열리고, 음차원 에너지가 새어 마음의 창을 통해 비쳤다.
“일단은 거절하겠습니다.”
-하, 하찮은 것 주제에 웃기는 재주가 있구나. 거절이라? 네까짓 게 거절해서 어찌하겠느냐. 나는 용이다.
“저는 인간이지요.”
-인간이 아무리 재주를 가졌다 한들, 고작 하나 치우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임을 모르겠느냐?
“힘으로 찍어눌러봐야 진정한 백성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아래에 둔 이가 진정 마음으로 섬겨야 그 주인의 자격이 있다 배웠습니다만.”
-그건 하찮은 것들의 변명이지. 어찌하겠느냐. 이 자리에서 죽겠느냐, 아니면 심장을 바치고 영원히 살겠느냐. 시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문득 공간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앙증맞은 손가락 여덟 개가 비집고 나와, 양옆으로 애를 쓰니 사이가 쫙 벌어져 작은 몸뚱이가 하나 쿵 떨어져내렸다.
“아고고. 아파. 아프다구. 젠장. 젠장. 어, 용이다. 용이네? 용 맞지?”
“용 맞습니다.”
“역시! 용이네! 음? 시란? 어디 아파?”
대죄인, 순진무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투였다.
왜 시엔의 얼굴이 창백한지, 입가에서 연신 검은 피가 흐르는지, 나뭇가지를 쥔 손이 덜덜 떨리다 결국 그조자 붙잡지 못하고 바닥에 떨구고 마는지.
시엔이 겨우 대답했다.
“사실 이미 반쯤 죽었습니다. 의외로 꽤 마력을 쓰게 만드시는군요.”
대죄인을 소환하는 데에 상상 이상으로 막대한 마력이 소모된 탓이었다.
소모되었다고 할까. 현상 세계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짜내졌다고 할까. 역량을 넘어서는 음차원 에너지의 소모가 곧 생명력의 소모로 이어졌다.
순진무구가 키득거렸다..
“반쯤 죽었어? 그럼 반은 살았네.”
“이대로 있다간 나머지도 죽겠으니, 잠깐 쉬고 있겠습니다.”
“안 돼. 그럼 난 누구랑 놀고?”
말이 안 통하기는 용이나 순진무구나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다른 점이 있긴 했으니.
“용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네!”
순진무구가 몸을 빙글 돌렸다.
용의 시선이 인간의 작은 아이에게 향했다.
-인간의 아이? 너는 무엇이냐?
“용은 처음 봤어! 너 비늘 참 예쁘다. 나 하나 주면 안 될까?”
-이런 방자한!
용의 앞발이 높이 들렸다. 동시에 땅으로 떨어지지 굉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그 서슬에 시엔이 비틀 휘청이다 결국 힘이 풀려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위로 용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았느냐? 네가 할 수 있는 수작은 내게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수호자가 되겠느냐?
“글세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만.”
-뭐라고?
용의 앞발을 비집고, 하늘하늘한 무언가가 슬그머니 새어나왔다. 종잇장처럼 얇게 눌린 순진무구였다.
“으으. 이게 뭐야. 납작이가 되고 말았잖아.”
순진무구가 손발을 팔랑거리다, 이내 흐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풍선이 차오르듯 납작한 몸에 공기가 들어차 다시 원상태를 이루었다.
“너무해. 그럼 그 대신에. 나 있잖아. 비늘 하나만 가져간다?”
-이 무슨······.
순진무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내 다시 나타난 곳이 바로 용의 정수리 위였다. 쪼그려 앉아 작은 손으로 비늘을 쥐곤, 힘자게 일어나며 기어코 한 장 뽑아내고 말았다.
“얏호, 시란, 이것 봐봐! 비늘이야, 비늘. 예쁘지? 예쁘지?”
-너, 이, 빌어먹을, 하찮은 것 주제에.
용의 음성에 분노가 가득 실렸다.
순진무구가 개이치 않고 시엔의 앞으로 공간을 접어 도약해 나타났다. 그리곤 비늘을 내밀어 자랑하기 바빴다.
“시란 자자 봐봐. 예쁘지? 예쁘지?”
“예쁘군요.” “그렇다고 주진 않을 거다? 내 거거든.”
“흠. 그럼 용의 눈은 어떻습니까?”
“어? 눈?”
순진무구가 고개를 돌렸다.
“진짜네! 예쁘다! 눈이 예뻐! 용아, 나 줘! 나 주라!”
-뭣이, 지금 감히 하찮은 것이.
“치사하게. 두 개나 있으면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이 버러지가!
용이 분노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요동치며 불길이 일었다. 불길이 창의 형상을 취하니, 수만 자루의 창끝이 순진무구를 겨눴다.
“뭐야뭐야? 노는 거야? 그럼 나 눈 한 짝만 주는 거다?”
“하나로 되겠습니까? 예쁜 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시엔이 추임새를 넣었다.
“아, 그렇네! 그럼 두 개 다 내 꺼! 내 꺼 찜했다! 다 내 꺼야!”
순진무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열셋의 대죄인 중,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하나를 뽑으라 하면 당연히 그녀를 뽑으리라.
순진무구한 악의.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니. 또한 그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이미 벌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사소한 일이라 금세 잊어버려 잔혹하기 그지없는 순수함이라.
-이만 죽어라.
“히힛, 놀자는 거지?”
용과 대죄인의 목소리가 서로 얽혔다.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