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73화 (73/268)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2] >

던전 탐사라기보다는 군대의 행진에 가까운 규모였다.

성녀가 던전에서 잃어버린 척, 책을 없애버릴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성녀의 탐사에 마법사들이 따라붙었다.

마법사들이 모이니 용병들 역시 용기를 얻어 합류하고, 인간이 많자 이종족들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볼일 다 봤다며 돌아가 버린 엘프나 몇몇 종족들만 제외하고도 머릿수가 이백에 달하는 거대한 탐사팀이었다.

“꽤 흉악한 물건을 차고 계십니다만.”

“아. 이거요?”

뷔아가 제 주먹을 들어보였다.

거대한 건틀릿이 시엔의 눈앞에 들이쳤다.

은은한 연보랏빛을 띠는 건틀릿. 이러한 색을 내는 금속이라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다만타이트로 만들어진 것이리라.

아다만타이트는 귀하나 자주 쓰이는 금속이 아니다.

단단하기로는 금속 중 제일이나, 무겁기로도 금속 중 제일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부피의 강철보다 다섯 배는 무겁다.

특히나 아다만다이트로 만든 건틀릿이 성인 머리통만한 경우라야.

아마 저 한 쌍이 귀족가의 영애보단 더 무거울 터. 그걸 양손에 태연히 끼운 채 이거요, 이러고 있다니.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성녀의 신체가 인간을 초월한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새삼 질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는.

무식한 게 힘만 세 가지고는. 근데 저걸로 한 대 맞으면 용이고 뭐고 박살이 나겠는데.

뷔아가 말을 이었다.

“시엔이 말하지 않았나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땀이 차서 별로 안 좋아하기는 한데, 그래도 준비가 되어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땀이 차서 안 좋아하시는 겁니까? 무거워서가 아니라?”

“시엔한테나 무거운 거죠. 사내가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어따 쓴담.”

“아니. 무슨.”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라.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늙은이 하나가 냉큼 그 자리를 꿰찼다.

“성녀님, 허허, 이 늙은이가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꽤 흥미로운 책을 가지셨다 들었습니다만.”

“아. 천공탑주님.”

창공탑주 혹은 천문관장. 천문관이라 불리는 대기 마법사의 수장이 성녀 옆에서 깔짝거렸다. 수염을 명치까지 기른 노인이었는데, 움푹 패인 눈매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마법서를 말씀하세요?”

“말 돌리는 취미는 없으니 바로 말씀드리리다. 이 늙은이가 좀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아쉽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요.”

“거 참. 아쉬운 일이구먼.”

그렇게 말하면서도, 천문관장 루흐스데의 눈길이 뷔아가 맨 가방을 훑고 지나갔다. 아쉬움과 탐욕이 반반쯤 섞인 눈빛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탑주라 하더라도 성녀의 개인 물품을 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엔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성녀님. 요 늙은이가 주책맞은 질문입니다만, 그 가방에 혹시······”

상상 이상으로 뻔뻔한 노인네였군. 성녀가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가방을, 그것도 여인의 것라면 더욱이 궁금하다 의심스럽다 해도 물어볼 것이 못 되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뷔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예? 방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철컹! 철컹! 뷔아가 연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니 건틀렛이 그에 따라 육중한 소리를 냈다.

“아, 아무것도 아니요. 이 늙은이가 주책맞은 소리를 좀 했습니다. 담아두시지 마시구랴. 허허.”

천문관장이 창백한 안색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늦췄다. 자연스럽게 뒤로 쳐져 멀어졌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이었다.

사실, 천문관장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의 시선 역시 연신 뷔아를 살폈다. 흘끗거리는 꼴이 마법서를 노리며 기회를 보는 눈치였다. 마법사라는 것들이 남의 지식에 탐을 내어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문득 마법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우와, 봤어? 봤어? 진짜 예쁘다.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소문이 잘못했네. 저건 그냥 예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돼. 언어를 넘어선 어떤 경지야.”

“왜 우리 탑에는 저런 미인이 없지? 파도등대에는 좀 있지 않아? 왜. 파도등대에는 여자들이랑 맨날 물놀이 나간다고 들었는데?”

“물놀이? 조류를 알아본다고 태풍 속에서 수영하는 걸 언제부터 물놀이라고 했어? 너네야말로 화염탑은 더워서 거의 헐벗고 다닌다면서.”

“벗고 다니긴 해. 젠장. 사내새끼들이 벗고 다니니 문제지.”

어쩐지 서글픈 대화였다.

보아하니 마법서가 아니라, 성녀의 얼굴에 관심이 더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탐사는 별일 없이 진행되었다.

“우와악!”

“피해!”

간혹 함정에 정찰조가 피투성이가 되는 것만 빼면 별일 없는 편이었다.

함정도 다양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서, 고전적인 화살이나 낙석, 추락은 기본. 마법적 처리가 된 함정들이 있어서 얼어붙거나 불붙은 정찰조가 달려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이 역시 대규모 탐사에는 으레 있는 일이었다. 던전이란 애초에 창고, 들어오지 말라 만들어놓은 것이니 순순히 들여 보내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던 중 거대한 함정이 길을 가로막았다.

통로가 어느 순각 각이 지며, 가파른 내리막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각선보다 조금 더 가파른, 절벽과 내리막길 사이쯤 어딘가에 위치한 그런 경사지였다.

촤아아. 물 흐르는 소리가 청량했다.

내리막의 시작지점에서 물이 솟아나니 연신 아래로 흘러 급류를 이뤘다.

마법적인 기운이 흘러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한동안 저들끼리 수군거리더니, 그중 하나가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비정상적으로 마찰력을 줄여놓았습니다. 저기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간······”

마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찰팍. 물에 손을 담가 세수를 하려던 용병 하나가 미끄러졌다.

“으앗? 으아아아······!”

용병의 몸이 물살에 밀려 살살 미끄려졌다. 그러다 점차 속도가 붙었다. 쭉쭉 미끄러져 수로를 탔다. 비명이 급히 멀어져갔다. 시야가 닿는 저 끝, 완만한 커브를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후로도 비명이 한참 이어졌다. 아아아······! 첨벙. 그 끝에 희미하게 수면을 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젠장! 카일! 괜찮냐!”

“카일!”

용병의 동료인 듯한 이들이 물가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저 제 동료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 아니 물이 흐르니 내리막 수로라고 할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그 바닥의 마찰력을 줄여놓았다고 하지 않는가. 한번 발을 들이면 그대로 끝까지 미끄러지도록 만든 설계였다.

“젠장! 카일! 평소에 씻지도 않더니!”

“돌아가면 고백하겠다더니······!”

“여관을 차리겠다고도 했는데······!”

“이번 탐사로 용병질 그만두고 은퇴하겠다고 했잖아······”

용병들이 동료를 잃은 비통함을 토했다.

“잠깐. 잠깐만 조용히 해 봐.”

개중 하나가 동료들을 제지하니, 탐사조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어이······들려······아무도······

물소리에 희미한 메아리가 섞였다. 목소리가 다급하지 않으니 별 위험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미끄러진 용병이 저 아래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허허. 묘한 함정이구만. 흠. 함정인가? 이걸 함정이라 불러야 하나? 얘들아.”

천문관장이 앞으로 나섰다. 이내 제자 몇을 불러 지시를 내리자, 천문관 둘이 주문을 외워 몸을 띄웠다. 내리막 수로 아래로 유유히 날아 사라졌다.

잠시 후, 되돌아온 천문관이 말했다. “아래로 상당히 길게 이어졌습니다. 저 커브로부터 큰 원을 그리며 두 바퀴 정도 더 내려갑니다. 수로 끝에 얕은 호수와 연결이 되어, 안전하게 착지 가능하고, 먼저 내려간 용병도 멀쩡합니다. 그 외엔. 음.”

천문관이 망설였다. 천문관장이 재촉했다.

“왜? 뭐 문제라도 있는가?”

“아니. 그게······. 꽤 재미있어 보입니다. 관장님.”

“재미있어 보인다니?”

천문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던전 안에서 방심해도 좋다 가르쳤던가? 재미라니.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죄송합니다.”

“에잉. 쯧쯧쯧······.”

천문관장이 혀를 찼다. 천문관은 괜히 말을 꺼냈다는 표정이 역력할 뿐이었다.

천문관장의 말이 맞았다. 침입자가 재미있으라고 설치했겠는가.

탐사조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안전한 것 같다고는 하나, 확신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먼저 내려가기는 싫다는 표현이었다.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기사들이 그들의 대장인 라이벵을 바라보았다. 이젠 어떻게 할까요, 단장. 라이벵이 뷔아를 바라보았다. 이젠 어떻게 할까요, 성녀님. 이런 눈빛이었다.

그러자 뷔아가 시엔을 보며 물었다.

“시엔, 이제 어쩌죠?”

“······그걸 저한테 물으십니까?”

“던전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일단 별 위험은 없다고 하는 모양입니다만.”

“저도 귀는 장식이 아니랍니다.”

“내려가는 거야 쉽겠지만, 다시 올라오기는 어려워 보이는군요. 천문관들이야 날아다니니 그렇다 쳐도, 저걸 거슬러 오르기는 힘들다 봐야겠죠.”

“퇴로 차단인가요?”

“아니면 물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겠죠. 몸이 젖기만 해도 둔해지는 데에다, 체온을 빼앗기면 체력 소모도 심해지니까.”

“그러면 어찌?”

“말뚝을 박고 밧줄을 매어 흘려봅시다. 혹시 모르니 붙잡고 내려가고. 올라올 때도 붙잡고 올라오면 될 테니.”

“좋은 생각이네요. 보면 잔머리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다니까.”

“잔머리?”

“칭찬이에요, 칭찬.”

그렇게 대형 천막용 강철 말뚝을 땅에 대고, 뷔아가 건틀렛으로 몇 번 두드렸다. 건틀렛이 대형 해머보다 더 무거우니 아주 쑥쑥 파고들었다.

거기에 줄을 매어 흘리는 사이, 파도등대의 마법사들, 물길잡이들이 먼저 움직였다.

셀시 아스데니아.

수계 마법사, 물길잡이를 이끄는 파도등대의 차석 등대지기가 수로를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이거 아무래도 그거 아니냐?”

“누님? 그게 무슨. 아. 그거요? 어. 그러고 보니 그거 같은데요? 규모만 크다 뿐 아니에요?”

“물 자체는 마법처리가 안 되어있으니 뭐 여차하면 길 잡아다 멈추면 되겠는데요.”

“좋아. 그럼 내가 먼저 간다.”

차석 등대지기가 수로 위로 슬그머니 제 엉덩이를 붙였다. 등 뒤로 뻗은 팔로 땅을 밀어 나아가, 이내 곧게 누워 양 팔을 교차해 가슴 위로 얹었다.

꺄아아아······! 웃음기 섞인 비명이 아스라히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수로 한 편의 물이 솟아올라 손의 형상을 취했다. 물로 이루어진 손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좋아, 나도 간다!”

물길잡이들이 차례로 자세를 잡고 내리막 수로를 타고 미끄러졌다.

시엔이 개중 한 명의 어깨를 급히 붙들었다. 젊은 마법사 한 명이 무슨 일이냐는듯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죠?”

“아. 이거요? 이거 그거잖아요. 그럼 타야죠.”

“그게 대체 뭔데요?”

“어. 그건 그건데. 아, 잘 모르시겠구나.”

물길잡이가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저희는 그거라고 부르는데요. 등대 꼭대기가 등대지기님 방인데요. 아 등대지기님은 아시죠? 취미가 고약하신 분이신데요. 그러니까 방에다 뭘 설치해 놓으셨는데. 그게 말이에요.” 마법사답지 않게 설명에 약한 녀석이었다.

종합하자면 이랬다.

등대지기는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양반이었다. 어느날 제 방에 함정을 설치해 놓고는, 뭔가 잘못을 하면 거기에 빠뜨려 버린다고.

함정에 이어진 관에 급류가 흐르고, 관이 등대의 외벽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 마지막에 바다로 뚝 떨어져 내린다고.

“그게 너무 재미있는데, 또 그게 재미있으면 등대지기님이 치워버릴 것 같으니까, 저희 사이에선 그거그거 하고.”

그래서 부르는 이름이 그거. 재미있다 말하면 치워버릴 테니, 꼭 당하고 나서 너무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일 것.

파도등대의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등대지기를 보러 갈 때면 일부러 말실수했다. 오늘 문어를 잡았다던가 뭐 찬란히 빛났다거나 벗겨졌다던가 빠졌다더라 하는 식의 말실수였다.

“그럼 전 이만.”

우오오······! 마법사가 신나는 비명을 지르며 수로 아래로 미끄러졌다. 시엔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시엔, 설치 다 끝났는데, 지금 뭐 해요?”

“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시엔?”

시엔이 수로에 몸을 실었다.

몸이 미끄러지나 싶더니, 전혀 상상하지 못한 속도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짜릿함과 상쾌함. 휙휙 쏘아진다 싶더니 빙글빙글 돌고, 종래엔 얕은 호수에 시원하게 내던져졌다.

서서 가슴팍까지 오는 얕은 호수였다.

시엔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을 털어내던 참이었다.

“얘.”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셀시라고 했던가. 파도등대의 차석 등대지기가 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엔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자, 셀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말야.”

“왜?”

“얘. 일단 올라오렴. 젖은 채로 있는 것도 몸에 안 좋아.”

시엔이 호수에서 나오자, 셀시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시엔의 몸에서 물줄기가 뻗어 밖으로 나가니 곧바로 보송하니 몸과 옷이 말랐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얘, 너 말야. 성녀님이랑 제법 친해 보이던데. 맞지?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

시엔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건 또 무슨 끔찍한 소리야?

셀시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 표정 보니 그건 아닌 건 알겠다. 그럼 잘됐네. 너 말야, 그 마법서 본 적 있어? ‘심층 심연과의 병렬 통로를 통한 영구적 순환계의 구성 및 일원화를 통한 다차원 원소 활용추출 및 그 활용’ 말야.”

“마법서가 목적이었네.”

“탁 까놓고 말해서 여기 마법사 중에 그거 안 보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병렬 통로를 통한 영구적 순환계라니. 아. 생각만 해도 벌써 오싹하네.”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팔뚝을 문지르며 하는 소리였다.

“창공탑의 영감쟁이처럼 속으로 음흉한것보단, 그래도 당당한 게 낫지 않아?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잖니? 어디 보자. 올해 등대 예산 절반까지는 써도 된다고 했으니까.”

“등대 예산이 얼마인데?”

“대충 이 정도.”

셀시가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그 위로 물이 모여 숫자를 이뤘다.

“금화로?”

“구미가 당기는구나? 당연히 금화지. 우리 예산이 은화로 이만큼이면 진작에 파산이야. 파산.”

“절반을 주겠다고.”

“깎고 당기고 밀고 하는 건 취미가 아니거든. 여기서 딱 절반. 뭐 특식 빼버리고 간식 없애고 희귀 시약 신청 기각해 버리고 하면 반만 있어도 등대 돌아가는 건 문제없겠지.”

그러자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이던 물길잡이들이 한데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

“누님, 특식은 안 됍니다!”

“간식도 안 돼요!” “차라리 희귀 시약을 가져다 팔죠!”

“시끄러, 이것들아.”

셀시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우리 애들이 좀 정신머리가 나가서. 산을 가까이하고 바다를 멀리하라더니, 일 년 내내 바다에 살았더니 다 저 꼴이네.”

“하지만 어떻게?”

“간단하지. 성녀님한테 책을 보여달라 해서, 필사한 후에 내게 건네주면 끝. 어때?”

“흠.”

시엔이 생각하는 척을 하자, 셀시가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라구. 필사해다 우리한테만 팔 거야? 천문관은 아예 대가리가 직접 왔다구. 땅지기도 비서관이 직접 왔고. 방화광은.”

셀시가 으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화광은 좀 애매하네. 거기 부탑주가 보면 마법서보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해서. 웬 계집애 뒤꽁무니만 쫒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던데. 어쨌거나 걔네도 돈 달라면 달라는 대로 다 줄걸?”

“흠. 그런데 왜 나야?”

“거야 네가 성녀님이랑 친하잖아.”

“별로 안 친한데.”

“아냐. 이 누님이 보기엔, 성녀님이 분명 네게 마음이 있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아니. 너 표정. 하. 진짜 진심으로 싫은가 보네.”

“끔찍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그래도 떼돈 벌 기회잖아? 이 참에 눈 딱 감고 한 번만 아양 떨면서 보여달라고 해 봐. 아마 못 이기는 척 보여 준다니까. 정말로.”

“뭐. 별로 돈이 궁한 처지는 아니라서.”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셀시가 움찔했다.

“돈이 안 궁하다고?”

“딱히.”

“음. 저기. 혹시 너 누구신지······?”

시엔이 대답 대신 왼손을 들어보였다. 셀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장갑. 시엔이 장갑을 벗어 성흔을 보여주었다.

“너, 시엔 티란디스. 하.하.하. 명예 대주교님이셨구나. 어쩐지 얼굴에 부티가 팍팍, 음. 아······.”

셀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음.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해 주시겠어요? 제가 나이 먹고 좀 주책이라. 바다를 너무 오래 봤나 봐.”

“그럼 못 들은 거로 하죠.”

“휴. 다행. 크게 얼굴 팔릴 뻔했네.”

셀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또 머리를 긁적거리다, 슬쩍 눈치를 보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공자님 혹시 용돈 필요하신 건······”

“일 없네요.”

시엔이 딱 잘랐다.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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