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1] >
용의 문이 열렸다.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탐사대는 흥분으로 바글거렸다.
작은 문에서 나온 보물들이 심상치 않았다.
무구는 오래되었지만, 그 재질이 미스릴이라면? 심지어는 오리하르콘까지 발견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교단은 침묵했다.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작은 문들을 공략하는 데에 지금까지의 사망자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니 가장 큰 문 너머에선 대체 무어가 기다리고 있겠냐는 것이다.
탐사대원들이 사제 없이 탐사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은 그저 불만을 꾹 감추고 기다릴 뿐.
시엔은 붉은 광물 덩어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진홍의 반투명한 원석 덩어리. 대주술사에게서 빼앗았고, 대죄인이 바깥 것이라 칭한 바로 그 보석이었다.
성유해의 도움을 받았다곤 하나, 리치가 제 능력을 넘어 심층 심연에 강제로 접속하도록 만든 물건이기도 했다.
‘이것도 연구를 해 봐야겠지. 아직은 좀 이르다 생각했건만.’
시엔이 눈을 감았다. 영혼이 가진 정신 세계. 그 드넓은 광야가 시엔의 속으로, 그리고 또한 눈앞으로 펼쳐졌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정신 세계 속이니만큼 이렇게 안락한 곳이 또 있으랴.
순간 검은 점이 일렁였다.
점이 펼쳐져 면으로, 면이 확장되어 커다란 구멍이 되었다. 순수한 어둠. 그 너머가 까마득하여 보이지 않는 무저갱.
심연 세계의 통로였다.
그때였다.
정신 세계에 황혼이 내려앉았다.
천구가 붉게 물들고, 사위는 피빛으로 물들어 모든 것이 화광이 비친 듯 빨갛게 번들거렸다.
리치가 말한 현상인가. 정신 세계가 피빛으로 물들고 뒤이어 뒤틀리고 왜곡되었다 했다.
다음 변화는 사상의 지평선이었다.
정신 세계의 한계와 그 너머의 미지 영역을 가르는 선이 뭉개지며, 물감이 번진 듯 모호해졌다.
그러자 자연히 하늘과 대지가 뒤섞였다. 위아래로 땅이 서고, 깨지고 갈라진 틈 사이로 하늘이 그 아래 자리를 잡았다.
시엔이 가만히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
피빛은 갈수록 더 붉고, 정신 세계는 더욱 기괴하게 뒤틀렸다. 이미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 생소한 낯선 장소에 서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온 사방에 작은 선이 무수히 그어졌다. 수십만, 수백만의 선들이 세상을 메웠다.
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선이 위아래로 열리고 좌우로 열려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수한 눈이 모든 곳에 눈꺼풀을 열고 세상을 훑었다.
시엔이 발밑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 앞에 눈동자 하나가 있어, 한 번 건드려 볼까 하고 발을 놀리려던 참이었다.
“안 그러는 게 좋을 껄?”
돌연 아이의 목소리가 시엔을 만류했다.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심연 세계의 통로, 무저갱의 끝자락에 팔을 괴어 매달린 아이가 보였다. 시엔을 보며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부패가 신나서 떠들더라. 진짜네? 내 자리까지 오는 친구가 있잖아? 안녕! 또 안녕!”
“당신께선?”
“내가 누구게?”
예닐곱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표정에는 한 점 그늘이 없이 유쾌하고, 시엔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크고 곧으며 정직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가 심층 심연에 닿았습니까? 순진무구께서 왕림하셨군요.”
대죄인 중 한 명, 순진무구.
세상에서 가장 큰 죄 중 하나였다.
순수하고 천진하여 또한 죄악을 몰랐다. 그리하여 죄를 범하여 그것이 죄임을 알지 못하는 죄였다.
그녀가 존재하기에, 모든 아이가 제멋대로 남의 것을 탐하고 벌레를 해체해 죽이며 세상 모든 것이 저를 위한 것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이 사악한 것이라.
세상 모든 인간을 악인으로 만든 죄, 대죄인으로 심층 심연의 연옥에 갇혔다.
“히힛, 줄여서 순무! 순무는 좀 이상하네. 그럼 순구? 진구? 음. 진구는 뭔가 좀 그렇네. 흑마법사는 뭐가 좋아?”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안 돼. 하나 딱 정해. 정하라구우!”
시엔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하필이면 이런 게 튀어나와서는.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제 모든 행동이 죄가 아니니 무엇을 해도 자유롭지 않겠는가.
“그럼 순진으로 하겠습니다.”
“좋아. 난 순진. 너는?”
“저는 시엔 티란디스라고 합니다만.”
“그럼 너는 시티야. 아니, 시란? 시디? 시스? 으음. 시란이 좋겠다. 넌 시란!”
“시란이라. 특이한 애칭이로군요.”
“그럼 특이해야지. 나만 부를 거니까!”
순진무구가 으스대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한 점 근심이 없는 맑디맑은 웃음이었다.
“그래서, 이걸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시군요.”
“응. 안 돼.”
“어째서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해줘도 시란은 모르지롱. 모른대요.”
“흠.”
“지금은 시란을 안 보거든. 근데 시란이 그걸 건들면, 그때부턴 시란을 볼 거야. 시란은 술래잡기 좋아해?”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건들지 마. 술래가 쫓아올 거거든. 아. 술래래! 술래, 꺄하하하핫!”
순진무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입을 벌려 웃다가, 휘청 중심을 잃더니 괴인 팔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무저갱 너머로 떨어져 자취를 감추곤,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쿵! 하고 호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엔이 잠시 망설였다.
순진무구가 떼를 쓰면 답이 없는데, 아예 지금 통로를 닫아버리고 현상 세계로 도망치는 게 어떨까.
그러나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대죄인의 분노를 살 필요는 없었으니까. 특히나 그 분노를 종잡을 수 없는 대죄인이라면.
시엔이 가만히 기다리자, 무저갱 위로 아이의 상체가 다시 솟았다.
머리 위에 주먹만 한 혹을 단 채였다. 진짜로 주먹만 한 혹이 아이의 머리 위에 달렸다.
“아. 아파. 나 혹 난 것 같은데.”
“맞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야! 인내! 이거 어쩔거야! 아프다구! 아파!”
-참아라.
무저갱 아래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빠! 놔! 놓으란 말야! 나도 나갈 거야!”
-참아라.
“아이, 진짜! 부패는 놀러 나갔잖아!”
-참아라.
“싫어! 내가 왜 그러는데! 안 할거야!”
-참아라.
“놓아 줘! 놔 달란 말야!”
-참아라.
시엔이 납득했다.
저 순진무구가 무슨 변덕으로 온전히 올라오지 않고 반만 걸쳐있나 했더니. 아래에서 누군가 붙잡고 있던 모양이었다.
대화를 듣자 하니 누군지 알겠다. “인내하는 슬픔께서도 계셨군요.”
-그렇다. 내 반가워 할 말은 많으나, 지금은 참아야겠다. 추후를 기약하자.
아마 그 추후는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모든 욕망을 인내하고 참아 가두는 대죄인이었다. 그리하여 사는 동안 하고 싶은 것을 끝내 하지 않았다.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지었으니 이 또한 비할 데 없는 거대한 죄악이었다.
“나빠! 나쁘다고!”
순진무구가 분한 눈을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시란! 얘 좀 떼 줘!”
“아시잖습니까.”
“몰라! 모른다구! 나도 나갈래! 나갈 거라구! 나갈 거란 말야!”
순진무구가 울고불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놔 둘 인내하는 슬픔이 아니었다. 순진무구가 제풀에 지쳐 쌕쌕 힘겨운 숨을 내뱉을 때까지, 그저 참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너무해······.”
결국엔 단념하고 만 모양. 순진무구가 힘없는 표정으로 시엔을 올려다보았다.
“시란, 지금 말고. 나중에 또 볼 거야? 아냐. 보자! 약속해, 약속!”
“약속 말씀이십니까?”
“그래. 약속. 새끼손가락 걸고. 자.”
순진무구가 제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보란듯이 펴서 내민 채였다.
“약속하면, 내가 좋은 거 알려줄게.”
“좋은 거 말씀이십니까?”
“빨리! 빨리! 인내가 잡아당긴단 말야!”
시엔이 잠시 고민했다.
대죄인과의 약속이란 그저 말로만 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지켜야 할 숙명이 되는 것이다.
“좋습니다. 약속하지요.”
“그래! 약속한 거야!”
순진무구가 질질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겁하며 팔을 뻗어 땅을 긁으며 버텼다.
그러다 안 되겠다는 듯 이내 손을 번쩍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기 봐야 해! 저기 좋은 거! 야! 인내! 시란, 안녕!”
순진무구가 결국 그렇게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통로가 저절로 닫히니 아마 인내하는 슬픔이 힘을 쓴 모양.
그나저나 좋은 거라.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온통 붉게 침식되어버린 정신 세계 속, 저 멀리 희미한 푸른 별이 빛나고 있었다.
누가 보라고 하여 집중하지 않으면 찾아낼 수 없는 아주 희미한 푸른 별빛이었다.
과연. 좋은 거라.
시엔의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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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문 탐사가 지연되자, 슬그머니 불온한 소문이 돌았다.
교단에서 던전을 묻으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 근거는 마법서였다.
제목만 봐도 마법의 근간을 뒤틀만한 가치 있는 마법서가 아니던가.
교단이 어떤 이들인가. 마법사의 개인의 일탈이 항상 큰 재난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매번 간섭해대는 집단이었다.
그러니 마법서의 공개를 통한 마법사의 수준 향상을 막기 위해 교단에서 마법사의 열람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나아가 용의 문 너머에서 비슷한 것이 나올 수 있기에 아예 탐사 자체를 무효화하고 던전을 막아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교단과 마탑은 적이 아니었다.
함께 전선을 펼쳐 토벌에 나가기도 하고, 서로 자문을 구하기도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던가.
네 개 마탑 전부가 항의하고 나선 지금, 뷔아가 뻗대는 일도 슬슬 한계였다.
실제로는 가짜 마법서에 적이 낚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슬슬 버티기도 힘들어요. 교단의 적은 언제쯤 나타나는 거죠?”
“이미 와 있을 겁니다. 소문이 돌더군요.”
“확실해요?”
“소문이 부자연스럽게 빠릅니다. 교단이 쌓아온 인심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소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무너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에 있죠?”
“마법사들 사이에 섞여 있겠죠. 누가 적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은.”
“마법사 중에 적이 있다······ 확실해요?”
“소드 마스터가 있었는데 마법사라고 없겠습니까? 게다가.”
현재까지 회수한 뼈는 한쪽 팔과 한쪽 정강이가 전부였다. 만약 적이 온전한 유해를 가졌다면, 아직도 그 조각들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성유해라는 아주 좋은 무기를 가졌으니, 마법사 한둘 꼬시기야 일도 아닐 터. 실제로 헤인트가 그렇게 나서지 않았던가.
“게다가?”
“뭐 그런 게 있습니다.”
“대체 무슨 비밀이 그리 많아요? 그래서 앞으로는요?”
“캐묻지는 않습니까?”
“말해줄 거에요?”
“물론 아닙니다.”
“아, 씨. 그럼 내 입 아프게 말해서 뭐해. 시엔이 교단에 해를 끼칠 것도 아닐 테니 그냥 팔자다 하고 넘어가야지.”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선택하셔야겠네.”
“어떤 선택이죠?”
“적을 어디서 맞이할지에 대해서입니다. 던전 안일지, 아니면 바깥인지.”
“어떤 차이점이 있죠?”
“전자는 뷔아가 위험하고, 후자는 모두가 위험하겠죠.”
교단으로 돌아가 마법서를 파기하겠다 선언하면, 적은 복귀 행렬을 습격해 마법서를 탈취하려 할 터였다.
적의 화력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복귀하는 성녀는 물론이고 성기사단과 사제들마저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성녀가 마법서를 던전에서 몰래 파기해 손실 처리를 하려 한다는 소문을 흘리고, 던전 공략에 나서는 방법도 있었다.
적의 목적이 마법서라면 도중에 어떻게든 마법서를 가로채려 할 터. 이렇게 되면 적의 목표가 뷔아 한 명으로 줄어들었다.
설명을 들은 뷔아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즉답이었다.
“그럼 내가 위험한 편이 나아요.”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던전 탐사는요? 용의 문 너머에 뭐가 있을지 알고 들어가죠?”
“어차피 탐사를 막을 순 없을 겁니다. 사제 없이 들어가겠다 하면 교단에서 막을 겁니까? 아니, 막을 수는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보물을 원할 이유가 대체······. 하아. 그래요. 욕심이죠. 시엔이 보기엔 어떻죠?”
“사망자가 많을 겁니다. 그나마 고위 마법사들이 많으니 던전 공략은 문제없을 겁니다만.”
“공략이야 아무래도 좋아요.”
“최악의 경우엔 용이 나타날 겁니다.”
“용이 나타나면요?”
“어떤 용이냐에 따라 다릅니다만, 강대한 용이라면 공략이 아니라 생존부터 걱정해야 할 겁니다.”
뷔아가 시엔의 눈을 바라보았다.
“만약 용이 나타나면, 시엔이 처리할 수 있나요?”
“일단 준비는 마쳤습니다.”
영창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용이라 해도 버티지 못할 거대 마법이 몇 개 있었다.
게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대죄인을 꺼내 들 수도 있었다. 부패한 환희나 순진무구. 둘 모두 어지간한 용은 상대할 수 있을 테니.
어쩌면 최악의 상황에선 둘 모두 소환하던가.
“그럼 용에 대한 대비는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대비가 아닙니다. 그저 몇 가지 수단일 뿐. 용이 나타난다면 생존자는 몇 없을 겁니다. 그저 그 안에 제 이름을 올릴 준비가 되었을 뿐이죠.” “대체 용이 어떻길래 그래요? 그렇게 강대한 존재인가요? 탑주 한 명과 부탑주 둘, 그 급의 마법사가 휘하 인원을 끌고 왔는데도.”
“싸움이란 게 전력을 더해서 더 큰 쪽이 이기고 그런 게 아니니까. 용이 있다면 저긴 용의 소굴입니다. 짐승도 제집에선 일단 먹고 들어가는 법입니다만.”
“씨이. 대체 던전이 다 뭐고 마법서가 다 뭐라고.”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엔이 대답했다.
“그게 바로 지성이죠. 스스로 생각해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 지성체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