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길잃은 순정의 행방을 찾아서 [3] >
익인문의 보물 방에서는 익인의 장비가 나왔다. 그렇다면 해골문 뒤에는 흑마법사를 위한 무언가를 준비해 놓았으리라.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 던전에서 가져갈 전리품이야 사실 부차적인 수입이었다. 그러니 탐사야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시엔의 목표는 미끼를 던져 적을 끌어내는 것이었으니까. 대신 조금 이상한 게 끌려나왔다.
“나도 갈 거야.”
“흠흠, 얘. 조금 떨어지면.”
“놓으면 또 떠나려고? 안 돼.”
알렌이 헤인트를 꽉 끌어안았다. 보는 눈도 있는데 상당히 과감한 청년이었다. 헤인트가 시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머머, 곤란하게 이러면 안 되는데······. 어쩌죠, 선배님?”
“곤란하면 표정 관리나 좀 하던가.”
헤인트의 표정은 전혀 곤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그머니 치솟은 입꼬리며, 반쯤 감긴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아무리 봐도 음흉하기 짝이 없으니.
시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 적당히 해 둬. 애초에 탐사조에 네 자리도 없고.”
“흥. 보상 따위 안 받아도 돼. 내가 무보수로 끼겠다는데 누가 막을 거야? 난 부탑주라고. 화염탑의 부탑주.”
“무보수로 끼겠다고?”
“언제까지나 헤위 누나를 지키기 위해서야.”
“어머머머······.”
헤인트의 표정이 개개 풀렸다.
심장이 녹아난다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하기사, 지금까지 제가 짐승인 척 맹돌적으로 안기기나 했지, 누가 이렇게 어디 도망갈까 꼭 붙잡아 끌어 안아준 이가 있었던가.
시엔이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베른닐은 왜 따라간다고 안 해?”
“데려가실 겁니까?”
“아니.”
베른닐이 씩 웃었다.
“거 보십쇼. 별일 아니면 뭘 해도 데려가실 거 아닙니까. 도련님 성격에 제가 옆에 있으면 뭔가 문제가 될 거리가 있겠다 싶으신 거 아닙니까?”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이 덜떨이가 머리 하나만은 꽤 비상하지 않았던가. 요전에 카드카운팅 때 알았건만,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이 있으니 자꾸 잊어먹게 된다.
그래도 호위기사라고, 곁에 있다 보니 척하면 척 한 방에 미리 눈치를 챈 것이다.
“그래도 말이라도 좀 붙이고 그래야지. 어? 나름 호위 기사가 제 주인이 어디 간다는데 멀뚱멀뚱 구경이나 하고 말야.”
베른닐의 표정이 뚱했다.
“그러면 또 귀찮다 여기실 거 아닙니까.”
“젠장. 내 부츠나 찾아 놔.”
할 말이 없어진 시엔이 부츠 타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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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아와 합류해 던전 입구에 이르자, 열댓명의 탐사조가 눈에 들어왔다.
번들번들하니 손때가 탄 낡은 장비들. 그러나 손질 상태가 좋아 오랫동안 잘 관리해 쓴 것이다.
껄렁하게 바닥에 눕거나 바위에 등을 기대거나 하며 저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아 낄낄거렸다.
용병들이었다.
용병은 거칠었다. 그 태도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거칠었다.
일이 있으면 용병, 없으면 노동자로 일했다. 그나마 그렇게 노동이라도 하는 치는 개중 나은 편이다.
강도나 산적질은 예사로 하며, 암살자나 기도 따위의 온갖 지저분한 일에 손을 담그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걱정할 거리는 못 된다.
“어! 어어!”
“세상에.”
용병들이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용병의 삶이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수틀리면 귀족이고 뭐고 치받기도 했다. 너 죽고 나는 죽거나 살거나 해보자는 식이었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지금 그 위기가 온 들 어떠냐는 듯한 인생관이었다.
그런 용병들이라도 진심으로 공손해지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사제 앞에서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산 목숨은 아무렇게나 굴리나, 죽은 이후가 두려웠다. 그렇기에 사제를 보면 축복을 구하고 예를 표시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긴 했다. 종족과 직업을 막론하고 한 무리를 무조건 이러하다 묶을 수는 없으니.
예전에 한 소드마스터가 그랬듯이.
뷔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해골문 탐사조이신가요? 어떤 분이 조장이신지.”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이든······이라고 합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탐사 캠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하플링과 다투던 바로 그 레인저였다.
이름 뒤에 묘한 간격이 있으니 아마 제 성씨를 숨기는 모양. 제이든이 시엔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아. 그때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명예 대주교님이셨지요.”
“부츠는 잘 신고 있나요?”
“음.”
제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시엔이 그 시선을 쫓았다. 다 터져 해진 부츠를 면포로 둘둘 감은 넝마가 눈에 들어왔다.
“성기사분들이 쓰시던 물품을 감히 신을 수가 없다며 저 꼴이죠. 자기 죽을 때 같이 묻어달랍니다.”
“묻어 주려구요?”
“일단 묻어는 주고, 하루쯤 있다가 파내기로 합의했습니다. 그쯤이면 저걸 신고 낙원문 앞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요.”
“과연.”
시엔이 씩 웃었다.
용병들의 자기소개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너도나도 축복을 내려달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내민 탓이었다.
뷔아가 미소를 띤 채로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은 퍽 성실한 성녀인 따름이었다.
“여기는 화염탑의 알렌과 헤인트.”
“화염탑의 마법사 분들이십니까? 하지만.”
“순수하게 학술 목적이에요. 보상에는 관심이 없으니 무료 봉사라고 생각해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제 출발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 물론이죠. 앞장서겠습니다.”
시엔 일행을 용병들이 사방으로 둘러쌌다. 이전의 탐사와는 달리 꽤 극진한 대접이었다.
용병들은 성녀의 눈치를 보며 괜스레 눈알만 굴렸다. 알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헤인트의 손목을 움켜쥐곤 연신 주변을 살피며 경계했다. 헤인트는 그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해골문을 지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저 꼴이라니.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제이든이라 했던가요?”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티란디스라면 페벨룬의 대귀족이시지 않습니까?”
“흠. 그러지 뭐. 티란디스를 아나?”
“티란디스의 섬광은 유명하니까요.”
“어쩐지 레인저 복장을 하고 있다 했지.”
“한때는 그랬지요.”
티란디스의 섬광이란 가문의 레인저 대대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레인저는 정예 중 정예 병사라, 그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특히나 산지나 숲으로 유명한 영지라면 더욱이. 티란디스의 영지 대부분이 숲이 아니던가. 섬광대대 역시 높은 봉급을 받으며 톡톡히 대우받는 정예병들이었다.
“레인저 출신 용병이라. 흔치 않은 일인데. 이유를 물어도 될까?” “제가 어디 묶이는 성격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용병이 되니 자유로워서 좋더군요. 특히나 실력이 있는 용병은 더욱 자유롭습니다.”
“실력이 있다? 자신감이 넘치는걸.”
“레인저 출신이지 않습니까. 공자님께서 일을 맡기시려 하신다면, 어중이떠중이를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레인저 출신을 쓰시겠습니까?”
“거야 물어볼 필요도 없지.”
“그런 이유랍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나아가다보니, 어느 새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뼈대가 반절, 인간의 모습이 반절로 이루어진 조각이 새겨진 석문이었다.
석문이 열리자, 돌연 한기가 피어올라 일행을 휩쓸었다. 신체로 느끼는 추위가 아니다. 옷을 껴입어도 막을 수 없는, 음차원 에너지 특유의 영혼을 에는 한기였다.
용병들이 주춤거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본능적인 공포였다. 저 안에 무언가 끔찍한 것이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그런 공포.
그 사이에서 헤인트가 한 마디 내뱉었다.
“아. 기분 좋다.”
“헤위 누나?”
“내가 방금 기분이 좋다고 했나? 아하하, 그러니까 이 세오, 아니, 이 헤인트가 반대로 말하고 말았구나. 하, 하하······”
어설프고 수상하며 궁색하기까지 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알렌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냐?”
알렌이 손을 뻗어 헤인트의 이마를 짚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때 제이든이 손벽을 짝짝 치며 정리에 나섰다.
“자. 본격적인 탐사 전에,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체들입니다. 그러니까······”
네 개 탐사조가 이 구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된 사실들은 이러했다.
이 구역에서 사망하게 되면, 일정 시간 후에 일어나 산 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시체들이었다.
특히 이전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한 백여 명의 탐사자들을 생각하면 그 숫자도 무시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해골들. 던전 내부에 무성히 널린 해골들이 있어, 개중 일부가 일어나 공격하는 패턴이었다.
해골은 상대하기 꽤 까다로운데, 두개골을 깨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른 뼈대를 주워 끼워 맞춘다고.
설명을 들은 알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별거라고. 다 태워버리면 되잖아?”
방화광다운 소감이었다.
일행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알렌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시체니 해골이니 애초에 보이는 족족 태워버리면 그만인 거 아냐?”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마법사는······”
“내가 바로 부탑주야. 화염탑의 부탑주라고.”
알렌이 제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으스댔다. 그러면서도 헤인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대놓고 누구 보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소년의 정석이라고나 할까. 뭐. 제가 자처해서 일하겠다는데야.
이런 이유로 탐사는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알렌이 앞장서서 보이는 족족 전부 태워버리니, 시체고 해골이고 일어날 새도 없이 전부 재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한바탕 화염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면, 시엔의 특명을 받은 헤인트가 슬그머니 추임새를 넣었다.
“와. 참 대단하다.”
리치가 연기를 못 한다는 사실이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누가 들어도 영혼 없는 칭찬이 아닌가.
“뭐.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헤위 누나는 나만 믿으면 돼.”
“어머머······. 방금은 진짜 멋있었. 크흠.”
그러면 또 순진한 청년이 대번에 입이 벌어졌다. 더욱 신이 나서 날뛰니 탐사조가 할 일이라곤 그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뷔아가 시엔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시엔. 어떻게 생각하죠?”
“대뜸 그러시면.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씀입니까?”
“해골. 시체. 당신 전문 분야 아니에요? 그래서 불렀더니만, 오히려 일은 다른 사람이 신나게 하고 있네요?”
“흠.”
그러고 보니 애초에 뷔아가 초대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가.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뭘 알아볼 새가 있어야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재만 보고 알아볼 수도 없고. 아니면 일 잘하는 녀석보고 그만하라 할 수도 없잖습니까.”
“괜히 불렀네요. 와서 하는 일도 없고.”
“뭐. 적어도 원하는 대답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뷔아가 눈을 빛냈다.
“그게 뭐죠?”
“저 비쌉니다만.”
“아, 씨. 벌써 황금을 한 궤짝이나 처먹곤.”
“그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고.”
“됐으니까 말해 봐요. 뭐죠?”
“뭐. 던전에 교단의 적이 개입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죠?”
“거야 용의 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모르냐는 투였다.
뷔아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이걸 몰라? 영 맹탕이네. 시엔이 기가 막혀 말문을 잃은 사이, 뷔아가 되물었다.
“용의 문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용을 팔아먹으면 용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슨 짓을 꾸미더라도 용의 진노를 사는 건 현명한 일은 못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함부로 용을 들먹였다간. 아. 젠장.”
용은 자존심이 무척 센 종족이었다.
그래서 용을 우러러 문장으로 삼거나 기사단의 이름을 짓거나 하는 데에는 관대했다.
그러나 어떤 사익을 위해 그 이름을 빌린다? 어째서 용이 최강의 생명체라 불리는지 직접 체험하게 될 터.
영리한 이가 자주 하는 착각 중 하나는, 자신에게 당연한 상식이 상대방에게도 그러하리라 여기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시엔의 상식은 천 년 전의 것이었다. 뷔아가 모르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정말로 몰라서 그러하다는 뜻이 아닌가.
이 또한 잊혀져버린 지식이리라.
“뭐.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럼, 그 용이 교단의 적일 가능성은 없나요? 용이 직접 나섰다면······.”
“뷔아는 개미를 잡을 때 계획을 짜고 사람을 모아 부려먹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
“용이 교단을 뭉개려고 했으면, 직접 날아와 불을 뿜었을 거란 뜻입니다.”
그때였다.
긴 통로의 끝,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무슨.”
“천신이시여.”
누군가는 탄식하고 누군가는 신을 찾았다.
공동의 모습은 참혹했다.
수많은 시체들.
앞서 돌아오지 못한 탐사조의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레-사아드-레-아-알렌······”
그 입구에서 알렌의 주문이 길게 이어졌다. 붉은 마력이 올올히 풀려나오고, 그 서슬에 붉은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거대한 마력의 유동. 이내 거대한 불의 파도가 위아래로 불어닥쳤다. 바닥과 천정의 파도가 치솟아 서로 만나 거대한 기둥을 이뤘다. 하나, 둘, 셋, 넷 불기둥이 계속 늘어나 서로 맴돌고 어울리며 휘몰아쳤다.
과연. 부탑주라더니.
시엔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천 년 전의 화염탑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 아닌가. “후우, 후우. 어때? 내가 이, 후, 정도야.”
손색은 좀 있었다.
누가 봐도 무리를 한 꼴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에 진땀을 쏟으며 알렌이 잰 체를 했다.
마력이 가시자, 공동 안의 참혹한 꼴은 없고, 그저 흰 재가 너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방화광의 심화는 꺼지고 나면 바로 온기를 잃는 것이라.
탐사조가 공동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시야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공동의 천정부터 스멀스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벽면으로 내려와 안개가 끼듯 검은 어둠이 날름거렸다.
“말도 안 돼! 천신이시여!”
뷔아가 경악하며 신성을 끌어올렸다. 성광구가 그 부피를 키워 강렬한 빛을 뿜었다.
그러나 그뿐. 이내 모든 것이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온전한 어둠이었다.
< 16. 길잃은 순정의 행방을 찾아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