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66화 (66/268)

< 15. 깊은 땅속 그 위로 [7] >

콰아아아! 슈라드가 제 아가리를 좌우로 벌렸다. 세로로 찢어진 입에서 녹색 숨결이 뿜어져나왔다. 망치를 휘둘러 인형 두셋이 박살이 나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인형들이 위협을 조정했다. 네다섯씩 붙은 공격조를 조정해 마수에게 더 많은 인형이 달라붙었다.

톱니가 연신 후두둑 떨어졌다.

인형의 잔해가 수북하게 쌓였다.

상처는 늘어가나 마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날뛰니 망치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슈라드가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워워. 그래.”

시엔이 손을 들어 슈라드를 진정시켰다.

마수가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시엔에게서 망령이 풀려나왔다. 슈라드가 손을 뻗어 망령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그대로 아가리로 밀어넣곤 꿀꺽 삼켰다.

다시 손을 내미니 모자라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비싸게 군다니까. 시엔이 툴툴거리며 망령을 더 풀었다. 자그마치 망령을 다섯이나 더 잡아먹곤, 이제 만족한 듯 온순한 숨소리를 냈다.

시엔이 마수를 역소환해 돌려보냈다.

기묘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경계와 경외 사이의 어떤 지점에 있는 감정들이었다.

마수가 해치운 인형이 절반 이상이었다.

마수에게 인형들이 몰려, 익인들 역시 전투를 좀 더 수월하게 펼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익인 셋이 죽었다. 숨이 끊어지고 나면 성녀라고 해도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익인들이 시체를 한데 모았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한데 모여 중얼거리니 저들의 추모식이리라.

익인의 추모 의식이 궁금하지만, 끼어들 때는 아니었다. 눈치가 아닌 배려의 영역이었다.

시엔이 멀찍이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뷔아가 말을 걸어왔다.

“시엔. 방금 그건 뭐였죠?”

“슈라드라고 하는 생물입니다만.”

“나는 이미 많은 마법사를 만났어요. 시엔과 같은 수법을 쓰는 이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하진 못하죠.”

“모든 상황이라. 이번엔 저도 꽤 애를 먹은 참입니다만.”

“대체 정체가 뭐죠?”

“제 소개를 다시 해야 합니까? 티란디스의 시엔입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방금 전 같은 괴물을 얼마나 부릴 수 있죠? 그게 시엔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가요?”

“뭐. 불러내는 것보다 돌려보내는 편이 훨씬 힘듭니다. 그저 풀어놓을 생각이라면 열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게 문제라는 거에요. 당신은 너무 강해. 그 힘이 만약 사람에게 향한다면······”

어떻게 되긴. 제국 꼴 나는 거지.

시엔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너무 가셨다니까. 자꾸 이러시네.”

“하아. 또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그래도 섭섭하긴 합니다. 내가 그리 나쁜 놈으로 보였습니까?”

뷔아가 움찔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럼 무슨 뜻이었습니까?”

“난 그냥······. 아, 진짜!”

뷔아가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미안해요. 됐죠?”

“흠. 뭐가 미안한 겁니까?”

“의심해서 미안하다구요.”

“그게 미안할 건 아닙니다. 의심은 합리적인 거니까. 아무리 절친한 이라 해도 의심 없이 믿는 건 멍청한 일이죠.”

“섭섭하다면서요.”

“의심과 신뢰는 완전히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나? 흠.” “아, 진짜. 쪼잔하게 이럴 거예요?”

시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그래도 뷔아라는 인간이 허튼 짓거리는 안 한다 믿습니다. 선량한 사람이니까. 이게 신뢰라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는 건 반칙인데······”

“물론 뷔아를 보면 속이 안 좋고 메스껍고 머리도 아프고 전체적으로 기분이 나쁜 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좀 저쪽으로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씨.”

뷔아가 툴툴거리며 저만치 멀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심경이 꽤 복잡한 모양이었다.

이리 못을 박아뒀으니 저 순진한 성녀도 더는 잡생각을 하진 않을 터. 어차피 어디서 떠들고 다닌 이가 못 된다.

뷔아는 선하고 순진한 이라, 제 목숨을 구한 데에다 돕겠다며 여기까지 와 준 시엔에게 결국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

익인은 폐쇄적이니 본 것을 이종족에게 풀어놓을 일이 없다.

그러니 흑마법을 마음껏 부려도 어디 새어나갈 염려가 없었다. 새어나갈까 염려하고 의심한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신뢰란 이런 것이었다.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렇기에 그 행동 이 당연히 그리하겠구나 미리 알고 믿는다.

그런 시엔의 곁으로 므위가 다가왔다.

“마법사. 혹시 불을 다룰 수 있나?”

“어. 그런데 그건 왜?”

“도움이 필요하다. 죽은 이에겐 안식을 베풀어야 한다.”

“안식?”

“인간은 모르겠군. 시체가 남으면 영혼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 주변을 맴돌지. 깨끗이 태워 죽은 이를 보내줘야 한다.”

“아. 그런 식인가.”

세 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웠다. 흑마법사의 시선에는 그 주변을 맴도는 익인의 망령이 함께 보였다.

버닝 신이 풀려나 이미 죽은 이들을 태웠다. 그 화력에 피가 끓고 살이 익었다. 종래엔 새까만 재만 남긴 채 그 형체를 잃었다.

그러자 익인의 망령들이 서서히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므위의 말대로, 제 시체가 불타 사라지자 영혼 역시 그러하는 것이었다.

오랜 믿음이 죽어서도 그 힘을 발휘했다.

“고맙다.”

“뭘. 이정도를 가지고.”

“그럼, 이제 탐사를 계속하겠다.”

므위와 익인들이 몸을 돌렸다.

시엔이 므위의 뒤로 따라붙었다.

“저들은 그냥 두는 거야? 재를 챙긴다던가.”

“영혼이 이미 안식을 찾았지 않나.”

“아. 그런 거군.”

타고 남은 재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꽤 합리적이기도 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정한 일이기도 했다.

죽은 자가 남긴 것은 산 자를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인간이 묘를 남겨 추모하는 행위는 온전히 산 이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익인의 관습은 왜 다를까. 밀림은 습하고 더우니 죽어 금방 벌레가 끼고 또 같이 썩으니 태워 치우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을까.

공동 반대편의 닫혀 있던 석문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다시 대열을 갖춰 탐사를 시작한 것도 잠시, 작은 방을 끝으로 길이 막혔다.

벽면엔 창과 사슬갑옷이 걸렸다.

맑은 은빛이 은은하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흑마법사가 불편하게 느끼는 무구라면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이리라.

미스릴 창과 갑옷이 한 세트로 총 열 쌍이었다. 손에 쥐어 들어보니 놀랍도록 가벼운 것이라. 다른 금속이 섞이지 않은 통짜 미스릴 무구였다.

다만 창이 너무 가볍고, 사슬 갑옷은 보지 못했던 생소한 모양새였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므위가 개중 하나를 집어들어 제 가슴에 씌웠다.

아아. 익인을 위해 만들어진 무구들이로군.

시엔이 금방 이해했다.

그 반대편에는 궤짝이 하나 놓였다.

열어보니 온통 누런 광채가 흘렀다. 손바닥만한 금괴가 차곡차곡 쌓여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양이었다.

“시엔의 말대로네요. 보물방이라.”

“이제 좀 믿음이 갑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흠. 뭐. 이제 할 일 하시죠.”

뷔아가 품에서 가짜 마법서를 꺼내 궤짝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넣었다. 이제는 전리품을 분배하고, 그 과정에서 가짜 마법서를 내 몫으로 주장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우리에게는 황금도 마법서도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구를 챙기겠다.”

별다른 논쟁 없이, 전리품 분배는 허무하게 끝났다.

탐사는 다시 돌아오기까지가 탐사였다.

악질적인 던전은, 탐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무리를 습격하는 함정을 배치해 놓기도 했으니까.

다행히 던전의 입구까지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던전의 입구 앞에서, 므위가 시엔을 불러세웠다.

“이봐. 마법사.”

“응?”

므위가 제 깃털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오오! 상위!”

“상위가 깃털을 뽑았다!”

“시끄러! 이것들아!”

므위가 와락 인상을 쓰며 외쳤다.

익인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휘파람을 불고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머릿수가 다르니, 일부러 더욱 유쾌를 떠는 것이리라.

므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특별한 뜻은 없으니 오해하지 마라.”

“오해 안 해.”

“절대, 절대 특별한 뜻은 없다.”

“안다니까.”

시엔이 깃털을 받아들었다.

“살베스를 못 찾아서 유감이네.”

“내가 못 찾으면 내 아들이, 그리고 그 아들이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그게 바로 숙명이지. 인간에게도 그런 것이 있나?”

시엔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그가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있긴 있지만. 저마다 다를 거야.”

누군가에겐 가문이, 누군가에겐 왕국이, 누군가에겐 대를 이어 전해야 할 가업이 있을 터였다.

그걸 숙원이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또 보지. 마법사.”

므위가 익인을 이끌고 사라지고 나자, 금괴가 든 궤짝이 혼자 남았다.

물론 시엔의 손엔 깃털이, 뷔아의 손에는 가짜 마법서가 남았다.

시엔이 말했다.

“아. 금괴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지금 말이라고.”

“뷔아는 이미 챙기지 않았습니까.”

시엔이 뷔아가 손에 든 마법서를 가리켰다.

뷔아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걸 그걸 지금 말이라고······.”

“말이 되라고 그러는 겁니다.”

뷔아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남은 탐사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법사들이 보기엔 그것보다 귀한 물건은 안 나올 겁니다.”

“이게요?”

“그러니 그걸 가지고서 또 금괴를 가져갔다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아니면 교단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건 좋은 상황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걸 전부 홀랑 삼키시겠다?”

“저도 안타깝습니다만, 적을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이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뷔아가 움찔했다. 결국, 가짜 마법서를 만든 이유도 그게 아니었던가.

시엔이 유들유들 웃으며 사족을 붙였다.

“제가 알아서 좋은 곳에 쓰고, 그래도 남으면 신전에 기부하던지 뭐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익.”

“아. 무거우니까 일단은 맡겨놓겠습니다. 천신의 사도들께서 남의 재산을 탐하지 않는다 신뢰하고 있는 거 아시죠?

”이이익······.“

뷔아가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럼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죠.”

시엔이 손을 들어 인사하곤 숙소로 향했다.

금화 수백 개는 할 분량의 금괴다.

참으로 횡재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뷔아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미 늦은 시간, 다들 잠을 청해야 할 그런 시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디선가 웃고 떠들며 노래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누가 몰상식하게 이 야밤에 소음을 내고 있나.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소리가 숙소로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니, 시엔의 표정 역시 점점 일그러졌다. 종일 걷고 날고 마법을 쓴 데에다, 일행에 성녀를 끼웠으니 몸도 속도 전부 엉망이었다.

당장이라도 누워 잠을 청해야 할 때에, 숙소 가까이 이다지도 몰지각한 이들이 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리고 교단으로부터 배정받은 목조 주택의 앞. 시엔이 이마를 짚었다.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요 안에서 떠들고 있었음이라.

“꺄하하하!”

“마셔, 더 마셔! 캬하, 잘 마신다! 잘잘 마신다아!”

“쨔! 한병 더 갑니다앗!”

시엔이 문을 열자, 난장판이 펼쳐졌다.

술병이 벌써 수십 개가 바닥을 구르고, 향긋한 과일 향기가 코를 콱 뚫고 파고들었다.

베른닐은 이미 뻗어 바닥에 널브러지고, 리치는 술을 병째로 들어 주둥이에 물었다.

그리고 엘프들.

열댓명의 엘프들이 이미 거나하게 취해 춤추고 노래하고 소리를 지르며 꺅꺅거리고 와글와글 웃음소리를 냈다.

“아. 시엔. 왔네.”

“비설. 이게 다 뭐지?”

“파티.”

“왜 갑자기 파티인데?”

“친구들. 검은누룩 숲에서 왔대.”

젠장. 이걸 생각을 못 하다니.

엘프는 절대 점잖은 종족이 못 되었다.

그저 숲에 살며 나오지 않고, 또한 누가 들어가지 못한다 뿐이었다. 배척은커녕 얼굴을 들이밀고 신기한데 너는 무어냐 나는 누구다 달라붙는 종족들이 바로 엘프가 아니었던가.

“오. 비설이 말한 친구야아?”

“진짜 인간 같지가 않네요!”

“신기하다! 저기요, 혹시 그 나무를 불러줄 수 있어요? 얘가 얼마나 자랑을 해 대던지.”

“헤에, 그거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아닙니까? 잠깐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우리 꺼랑 뭐가 다른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만.”

“자자, 이러지 말고 마시자구.”

특유의 엘프 화법이 존대와 평대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손에는 술잔이 들리고 엉덩이 아래엔 푹신한 방석이 깔렸다.

“잠깐. 다들 나 지금 피곤하니까.”

“자자. 마셔. 마셔. 이거 한 잔이면 피로도 한 방이라니까.”

“사람 말 좀······”

시엔이 분통을 터뜨리려는 찰나, 향긋한 과일 내음이 코를 스쳤다. 그 향기가 범상치 않으니 시엔이 멈칫하며 잔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뭐야?”

“우리 일족 비장의 사봉실주야. 꿀과 일곱 가지 과일이 들었지.” “호오.”

짙은 황금빛의 맑은 술이 찰랑거렸다. 달디단 향이 흐드러지니 절로 군침이 넘어갔다. 피곤할 때는 한 잔 먹고 뻗는 게 최고이기는 한데.

게다가 엘프의 술이 아닌가. 이런 걸 또 언제 먹어보겠나 싶기도 하고.

시엔이 한 모금 술을 넘겼다.

향과는 달리 은은한 단맛이 깔끔하고 뒷맛이 없어 개운하기 짝이 없었다. 목넘김은 부드럽고, 입에 머금자 향이 속에서 폭발하니 온통 꽃밭에 잠긴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화끈한 열기가 치솟았다. 독하기도 어지간히 독한 술이었다.

먹기에 순하고 이후에 열기가 치솟으니 홀짝홀짝 기분 좋게 계속 들어간다. 어느새 잔을 비우고 나니, 그제야 혀끝이 얼얼하니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톡 쏘는 느낌이 있는데.”

“아. 그건 독. 독사와 말벌을 넣어 십 년을 묵혔거든.”

“그건 안 듣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괜찮아. 오래 묵으면 다 약이야, 약. 자. 한 잔 더?”

“약이라고? 그럼 한 잔 더 해야지.”

시엔이 잔을 내밀었다.

이름 모를 엘프가 히히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먹고. 마시고. 웃다가. 또 마시고.

꺄르르깔깔 웃는 소리와 얼굴이 한데 뭉치고 일그러지고 뭉개졌다. 결국 기분 좋은 심상으로 남은 지점에서, 시엔의 기억이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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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심연과의 병렬 통로를 통한 영구적 순환계의 구성 및 일원화를 통한 다차원 원소 활용추출 및 그 활용.

길고 긴 책의 제목이었다.

뷔아가 책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게 대륙어로 써있긴 한지, 아니면 대륙어의 모습을 한 어떤 그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영문 모를 제목이었다.

뷔아가 한숨을 쉬며 책을 펼쳤다.

잠시 후, 수히가 뷔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뭔가 후다닥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어쩐지 붉은 얼굴의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뷔? 뭐 하고 있었어?”

“아. 아무것도 아냐. 왜, 왜 그래?”

“마법서의 열람 신청이 또 들어왔는데.”

“안 되는 거 알잖아.”

“천공탑의 공식 전문인데. 얼마나 급하면 벌써 연락이 왔겠어. 한 번 보여주기만 해도 그 대가로 대신전 세 개를 지어주겠다더라.”

“돈이 썩어난대? 겨우 이거 한 번 보겠다고.”

“성황님께선 너무 크게 뻥을 친 거 아니냐고 걱정하시나봐.”

“아, 씨.”

수히의 말에, 뷔아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서가 발견되었다며 그 제목과 저자를 발표한 것이 이제 겨우 일주일 전이였다.

서해의 주열락 제도에 세워진 천공탑이었다.

캠프의 마법사가 천공탑에 소식을 전하고, 탑주가 결정을 내리고, 또 교단에 요청을 넣고. 그 요청이 성녀에게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단 일주일이었다.

급하기도 어지간히 급했다는 뜻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벌써 캠프에 마법사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다. 한 영지에서 한 명이나 볼까 말까 한 마법사들이었다.

지금은 마법사가 너무 많아, 탐사조마다 네다섯 명씩 붙어 나가고 있는 지경이었다. 던전이 공략되는 속도 역시 무시무시했다.

‘그렇다고 이걸 보여줄 수도 없잖아. 좀 적당히 만들던가. 이게 뭐야.’

뷔아가 이를 으득 갈았다.

표지만 그럴듯하지, 그 내용은 싸구려 도색 소설이 아니던가.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하고 무도한 것이라 세상에 풀 수 없다는 명목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이런 규모로 난리가 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래놓고 자기는 놀고먹고 난리가 났단 말이지.’ 뷔아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시엔이 머무는 숙소에서 매일같이 술판이 벌어졌다.

처음엔 시끄러우니 어찌 해달라 진정 요청이 들어왔다. 좀 자제하라 해도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러니 주변 숙소의 탐사조원들이 직접 쳐들어가 담판을 지으려 했나 보다.

그렇게 따지러 간 이를 술판에 또 끼우고, 같이 떠들고 놀아 또 누가 따지러 오면 또 슬쩍 자리에 앉혀놓고.

술판의 규모가 점점 크게 벌어졌다.

술이 떨어지면 그만두겠지 했거니만.

엘프들의 숲이 하필이면 바로 요 근처였다. 술 수레가 매일같이 도착하고 새로운 엘프들이 나서 교대하며 작정하고 놀고 있다고.

뷔아가 부득 이를 갈았다.

‘씨이. 그런데 저 혼자 놀고먹는다 이거지? 한 병쯤 보내줄 법도 하잖아. 엘프의 술이 좋다고 난리던데. 나쁜 놈. 나도 목구멍 달렸는데······.’

시엔을 원망하는 초점이 살짝 빗나갔다.

< 15. 깊은 땅속 그 위로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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