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깊은 땅속 그 위로 [2] >
붉은 머리칼의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스푼을 쥔 손이 유달리 어색하다. 달달 떨리는 손을 저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제 눈으로 보곤 스푼을 고쳐쥐었다.
야무지게 손바닥 전체로 꽉 쥐어든 꼴이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여인이 스튜를 한 스푼 제 입에 밀어넣었다.
“아.”
여인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맛있다.”
여인이 허겁지겁 손을 놀렸다. 숟가락이 쉬지 않고 움직이니, 그야말로 씹지도 않고 삼키며 게걸스레 처먹는 꼴이었다.
그 모습에 간수가 당황했다.
사실 여인은 죄수고, 죄수의 밥이 으레 그렇듯 돼지죽에 가까운 것이 아니던가. 하인들이 먹고 남은 음식들을 전부 섞어 물을 붓고 끓여 만든 것이니.
남은 음식이란 원래가 맛이 없다 여기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한데 모아 고았을 뿐이니 그 맛이 어떠하랴.
그러나 여인은 세상 이리 맛난 것을 처음 먹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혹여 뺏길까 양철 그릇을 껴안고 양 볼이 빵빵하도록 밀어 넣고 있지 않은가.
‘진짜 맛있나? 오늘은 뭐 넣었더라?’
간수가 조용히 오늘 뭘 넣고 끓였던가 복기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한번 해 보리라 다짐하면서.
“쯧. 거지도 그렇게는 안 처먹겠다.”
시엔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여인이 움찔하며 눈알을 굴렸다. 급히 볼따구에 우겨넣은 것들을 삼키다, 샤례에 들려 큽, 하고 기침을 억지로 넘겼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니 코 쪽으로 건더기 몇 개가 들어간 모양. 잠시간 소리 없이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쯧쯧.”
시엔이 그 모습에 또다시 혀를 찼다. 저 꼴을 보면 누구라도 자동으로 혀가 앞니 뒤에 붙어 소리가 날 수밖에.
여인이 흠칫 놀라 그제야 허리를 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하게 앉았다. 우아하게 스푼을 고쳐 쥐곤 병아리 눈물만큼씩 퍼먹으며 얌전을 떨었다.
시엔이 고개를 젓고선, 간수에게 손짓했다.
물러가 보라는 뜻이었다.
간수가 허리를 굽혀보이곤 뒷걸음질로 나가 문을 닫았다. 이제 후작저에서 시엔에게 감히 공손하지 않은 하인이 없었다.
“그렇게 맛있냐?”
“어흠, 그, 그리 맛있는 건 아닙니다.”
“아깐 맛있다며.”
“그러니까 맛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맛이 있다는 게 아니라, 맛이 느껴진다는,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있다는······”
시엔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여인이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얼마만에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시선을 보내시면 이 후배가 얼마나 슬픈지 아십니까.”
“얼마만인데?”
“그야 이백.”
여인, 헤인트 랑그투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리치가 흠칫 말을 멈추었다.
“헤헤, 선배님. 숙녀의 나이는 묻는 것이 아니랍니다.”
“벌써 이백까진 나왔어. 오래 묵은 리치였네.”
“그렇게 따지자면 선배님은 천 년이 넘으셨는데······.”
“나야 뭐. 그동안 계속 살아있지는 않았으니까. 사유 없이 존재하는 것을 살아있다 치나?”
“헤헤, 그렇다면 사실 제가 선배님보다······”
“할멈이라고 불러주랴?”
리치가 급히 말을 돌렸다. “어흠, 그러니까. 음식을 씹고 맛보고 그 향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셔야 한다구요. 이 세오르그 오스텐,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리랑 매의 몸으로도 잘 처먹었던 것 같던데. 흑마법사가 악식에 구애받지 않는다지만, 벌레를 먹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지.”
“그것이.”
리치가 움찔했다. 얼굴에 떫은 빛이 떠오르더니 마침내 입맛이 떨어진 듯 스푼을 내려놓고 말았다.
“으, 갑자기 그때 생각이. 선배님 밥 먹는데 그런 이야길 하시다니. 너무하세요.”
“벌레는 먹는다는 자각은 있었군?”
“끄으으······. 뭔가, 좀 달랐는데요, 짐승의 몸으로는 음식을 먹는다기보단 그냥 거기에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말입니다.”
“호오.”
시엔이 눈을 반짝였다.
꽤 재미있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가.
“그게 어떤 느낌이지? 지성체가 아니면 식사를, 맛을 즐긴다는 개념이 없는 건가? 인간의 영혼이 들어가도 그리하다면, 미식이라는 일련의 과정들이 특정한 종의 한정해 개체적 본능에 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 그러고 보니 그렇지 말입니다?”
리치가 맞장구를 쳤다.
한동안 흑마법사 둘의 아무런 영양가 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마법사라는 종족이었다.
마침내 결론이 났다.
“개체별로 실험을 해 봐야겠네.”
“어, 그게. 선배님?”
“추후에 개나 돼지 같은 동물에 들어가 직접 실험해보면 알 거 아냐.”
“윽······.”
리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신 세계가 불타 사라진 인간은 꽤 흥미로운 실험체였다.
신체적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없고, 영혼 역시 실재하는 상황. 그러나 정신 세계가 없으니 영혼 역시 그저 존재할 뿐 지성과 사유가 없다.
그렇다 하면 죽은 것도 아니라, 말을 하여 명령하면 또 거기에 따랐다.
먹어라. 씻어라. 자라. 앞으로 가라. 등등.
그러나 개인의 판단이 필요한 명령에는 또한 반응하지 못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다.
오히려 덕분에 별도의 수술 없이 리치의 영혼이 안착할 수 있었다.
죄수가 정신을 차렸다 난리가 났지만, 검사 결과 기억을 완벽히 잃은 타인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 진단의가 로즈라 하는 의사 선생이었다.
듣자하니 상당히 고명한 선생으로 유명한 이라고. 덕분에 후작가의 주치의 역시 선생께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하며 진단을 포기했다.
그 날 밤, 벨티는 도박장에서 금화 한 무더기를 땄다. 재수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죄수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디 오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마법을 부리던 이가 아니던가.
그런 주장을 통해 후작가의 하인으로 들였다.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는 구실로 새로운 이름도 받았다.
세올이 후작가의 식구로 처음 받아든 일거리가 바로 빨래였다.
“이 위대한 흑마법의 구도자, 죽음마저 초월한 세오르그 오스텐이 빨래라니······.”
세올이 툴툴거렸다.
빨래는 고된 일이었다. 물은 차고, 물 먹은 천은 또한 무거워 다루기 힘든 것이 아닌가. 그걸 또 들고 나르고 치고 비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못해 기진맥진 힘이 빠지고 팔이 아프고 온몸이 저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탁은 중노동이었다. 대개 힘만 좋고 일머리는 없어 다른 일에는 영 요령이 없는 사내들이 맡는 일이었다.
세올이 처량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늦가을에 접어든 계절이라 누비옷을 입어도 춥고, 손은 시리고, 몸은 아프고. 서럽기 짝이 없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들 용케 이러고 사는구나.”
세올이 세탁장의 하인들을 둘러보았다.
무거운 것들을 옮기고 메치며 터는 사내들이 아니던가. 하나같이 어깨가 건장하고 팔뚝이 굵어 근육이 선명했다.
이 싸늘한 날씨에도 옷이 젖으면 무겁고 오히려 더 춥다 하여 웃통을 까고 일했다.
빨래 방망이를 들고 연신 내리치는 사내의 등근육이 울끈불끈 파도를 쳤다.
“어머나.” 세올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이 그대로 드러내기는 했지만. 손바닥으로 감춘 입은 이미 헤 벌어진 채였다.
생각해 보니 빨래도 할 만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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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초입, 시엔이 후작저를 나섰다. 기사와 시녀 한 명씩, 그리고 혹이 하나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하니, 엘프 대사가 일행에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넷이서 교단에서 파견한 호위대와 함께 영지를 나섰다. 이웃한 손가 공국령까지 향하는 여정이었다.
던전이란 흔치 않은 보고였다. 뚜껑을 따면 그 안에 금은보화가 넘치니 누구나 탐을 내며 손을 뻗었다.
그런 이유로 던전 탐사는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다.
온갖 곳에서 손을 내밀어 한 몫 챙기고자 하니, 땅의 영주로부터 왕국까지 침을 흘렸다. 그런가 하면 마법사들이 몰려들고, 여러 이종족이 자기네 선조의 것이라 주장하며 끼어들었다.
시엔에게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신전에게 보상을 약속받았으니 좋은 게 있으면 달라 요구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내 적이 거기에 있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지.
“네 이름이 뭐라고?”
“헤인트 랑그투입니다. 선배님.”
“다시.”
“헤인트 랑그투요.”
“뭐라고?”
“헤인트 랑그투입니다.”
아무리 확인을 시켜도 영 미덥지가 않다. 리치가 그간 보여준 모습들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고생 좀 하라 세탁장에 보냈더니, 거기서 또 하인들이나 구경하고 있지 않았던가.
세탁장에 하녀가 드물고 뒤집어쓴 껍데기가 미인이었다. 그러니 하인들이 아주 상전인 양 모셨다.
놀고 구경하며 하는 일이 없으니, 결국 그 작태에 다음엔 혼자 별채의 대청소를 하라 시켰더니, 묘지서 해골을 일으켜 부려먹는 것이 아닌가.
“쯧.”
“아이참. 선배님두. 걱정하지 마시지 말입니다. 이 세오르······. 앗.”
“쯧.”
시엔이 혀를 찼다.
베른닐이 위로를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세올 양도······.”
“헤인트.”
“아. 헤인트 양도······”
“쯧.”
시엔이 재차 혀를 찼다다.
기사와 시종이 한 명씩인데, 결국 둘 모두 같은 수준이었다. 모자란 것들. 내 이런 것들을 믿고 일을 꾸며야 한단 말인가.
“가명이란 건 생각보다 쓰기 어려운 일이야. 항상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누가 불러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저. 만 믿으시라니까요.”
어째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있는 말이었다.
시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쩌랴. 최대한 연습을 시키는 수밖에는.
적은 리치를 알고, 또한 뒤집어쓴 껍데기 역시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겉과 속 둘 중 하나라도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그 역시 적과 연관이 있으리라.
일단 헤인트의 몸을 차지했으니, 누군가 알아본다면 본인인 척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시엔이 다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베른닐. 나 심심한데.”
“예?”
“재미있는 얘기 좀 해봐. 두건은 괜찮았다 치자. 교훈도 있었고.”
“또 이렇게 됩니까?” “두건? 두건은 또 뭔가요?”
“베른닐에게 들어.”
“크흠.”
베른닐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떫고 찌그러진 얼굴이 딱 봐도 묻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비설이 말했다.
“궁금해”
눈치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엘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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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앞은 이미 천막이 가득 들어섰다. 급조된 목조 주택들까지 가세하니 외딴 산기슭이 어느새 작은 마을과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주민들끼리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경계선을 그어 저들끼리 뭉친 꼴이었으니까.
한편에선 이미 거친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난쟁이는 하플링이고, 그 옆에서 주로 개-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내뱉는 사내의 행색이 유독 눈에 띄었다.
허리로부터 장화까지 이어지는 선을 따라 빽빽하게 단검을 끼웠다. 등에는 활을 찼는데, 일반적인 활과는 달리 짤막한 활몸과 긴 겨냥대를 가진 물것이었다.
레인저가 쓰는 물건이다.
대개 숲이나 산악 지형을 낀 영지의 병종이었다. 복잡한 지형에서의 교란, 암살, 급습 등 특수전을 벌이니 정예병 중에서도 정예로 꼽히는 이들이 아니던가.
“아. 싸운다.”
비설이 중얼거렸다. 귀의 각도는, 음. 호기심이구나.
확실히, 엘프에게는 꽤 신기한 일이리라. 서로 핏대를 높여 죽일 놈이니 개의 자손이니 하는 싸움이란.
엘프의 말은 형식을 떠나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라, 원수가 되어 칼을 겨눌지언정 저리 서로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 없으니.
“안 돼.”
비설이 손을 들었다. 등에서 저절로 뽑혀나온 네 자루 칼이 정령의 도움을 받아 허공을 갈랐다.
탱! 단검 한 자루가 엘프 검술에 막혀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구경하던 하플링 하나가 급히 관중 사이로 도망을 쳤다.
험악하게 욕설을 쏟던 레인저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이 개자식! 기습이냐!”
레인저가 검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이들이 레인저의 동료들이라. 말싸움을 벌이던 하플링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냐! 모르는 새끼였다고!”
“지랄 마라! 개자식, 죽여!”
레인져가 소리쳤다.
하플링이 주변을 살폈다. 시엔 일행을 바라보곤 다급히 외치며 뛰쳐들었다.
“아이고! 사제님들! 사제님드을! 저 고약한 용병 놈이 사람을 죽이려 듭니다아!”
용병이었나? 시엔이 호기심을 보였다.
레인저는 귀한 자산이었다.
티란디스 역시 영지 대부분이 숲이라 레인저 병단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병사의 열 배가 넘는 봉급, 그만한 대우와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니 레인저가 용병을 하는 일이 드물다.
레인져가 사제 뒤로 숨은 하플링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용병은 절대 사제에게 무례한 법이 없다.
레인저 역시 그러한지 공손히 손을 모았다. 시엔에게 말을 거니 일행의 대표라 여긴 모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그 죽일 놈, 아니 그 하플링을 넘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흠. 왜죠?”
“그자는 도둑입니다. 제 동료의 부츠를 훔쳤지요.”
레인저가 손을 펴 한쪽을 가리켰다. 과연. 비쩍 마른 사내 한 명이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시엔이 하플링을 바라보았다.
“거,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둘 모두가 서로 거짓말이라 하니 누구의 말이 맞을까. 시엔이 레인저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있냐는 뜻이었다. “제 동료는 걸음걸이가 특이하여 신발창의 안쪽이 쉽게 닳습니다. 저자의 부츠를 확인하시면 아실 겁니다.”
“저도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요! 제 걸음걸이를 보고 저것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루 전에 스튜를 쏟아 고약한 냄새가 날 겁니다. 쥐고기 육포를 끓인 것이라 쥐 누린내가 납니다.”
“저도 스튜를 쏟았습니다! 저것이 제 실수를 지켜보고 그러는 것입니다요!”
서로의 의견이 팽팽했다.
시엔이 하플링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쪽이야?”
“예?”
“어느 쪽에 스튜를 쏟았냐고.”
“그.”
하플링이 눈알을 굴렸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시엔이 눈을 가늘게 뜨자, 하플링이 급히 외쳤다.
“왼쪽, 왼쪽입니다!”
시엔이 레인저를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끄덕인다. 하플링이 잘 맞춘 모양이었다.
“또 다른 특징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증명할 방법이 또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때였다.
착착 정연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길을 비키니 순백의 갑옷을 차려입은 한 떼의 성기사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중 앞서는 이의 얼굴은 이미 알았다.
“라이벵 경.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형제님."
명예 대주교가 되었으니 부르는 호칭이 형제라.
라이벵이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성흔을 뵐 수 있겠습니까?”
“어. 음. 그러세요.”
시엔이 왼손을 내밀자, 라이벵이 무릎을 꿇어 간단히 성흔 위에 입을 맞췄다.
성흔의 부작용이었다. 보이는 사제마다 입을 맞춰 예를 표하기를 원했다. 여사제라면야 기꺼이 내어주겠으나, 시커먼 사내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
라이벵이 비켜나자 또 다른 성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시엔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정연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경건한 표정으로 한 명 한 명 다가와 입을 맞추고 기도를 올렸다.
사내놈들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도 고역이긴 하다. 그런데 입술을 찍은 곳에 또 다른 이가 입술을 찍으면 그건 음.
시엔의 표정이 점차 썩어들어갔다.
< 15. 깊은 땅속 그 위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