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8] >
열을 갖춰!
병사의 귀에 외침이 파고들었다.
병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야만인의 시체 위에 올라타 연신 찍어내던 와중이었다.
퉷. 병사가 가래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세에 몰린 사제가 보였다.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문득 양옆에 어깨를 맞대니 같은 원정군이라. 창이 둘 뻗어 야만인을 걷어냈다. 그 사이로 병사가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멱을 땄다.
궁병은 뒤로! 후열이 지나도록! 길을 터!
궁병이 활을 번쩍 들었다. 머리 위로 장궁을 들자 원정군이 보고 슬쩍 옆구리를 내어준다. 궁병이 그 사이로 급히 빠져나갔다.
방패병 복귀하라! 깃발을 보라! 집결하라!
방패들이 비로소 이어지기 시작했다. 검을 내던지고 양손으로 방패를 받쳤다. 방패 서넛이 모여 적을 밀쳐내니 그 뒤로 창병이 따라붙어 가세했다.
기마대 좌향! 기사단 우향!
지휘관들이 소리쳤다. 떨어진 깃발을 주워들고 핏대를 높였다. 고장 난 톱니바퀴가 이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군대는 실전에서 몰락해 사라지나, 그 성장 역시 실전에서 이루어졌다.
적 앞에 하나로 묶이고, 전우가 쓰러져 피를 토하면 그제야 분노가 치밀어 창검이 뛰놀고 숭고한 우정이 피어올랐다.
전장을 누비던 고양이의 그림자와 죽은 이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지만, 인제 와서 그런 것이야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군대가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인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야만인들이 창칼 아래 쓰러졌다.
흉흉한 살기는 야만인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원정군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분노가 다르다. 정연히 정돈된 분노.
군대와 전사가 다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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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이 페시번을 집어 들었다. 짐짝처럼 어깨에 얹어놓고 나니 제 주제도 모르고 바락 소리를 질렀다.
“놔라! 내가 무슨 짐짝이냐! 이게 무슨 짓이야! 시엔 이 자식! 빌어먹을 티란디스!”
“그럼 안아주기라도 할까?”
“업어! 업기라도 하란 말이다!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이냐!”
“그럼 팔을 못 쓰잖아.”
“젠장!”
“아니면 걷던가. 버리고 가는 수가 있다?”
“젠장! 젠장!”
페시번이 축 늘어졌다.
시엔이 후방으로 몸을 돌렸다.
신관과 의사의 치료를 병행하면 멀쩡해질 녀석이었다. 그러나 놔두자니 그러다 죽으면 델피르에게 너무 타격이 컸다.
그렇게 착착 걸어 나가는 와중이었다.
페시번이 웅얼거렸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뭐?”
“가문을 빼면 내가 뭐가 남지? 젠장! 가문이 날 버렸다면 나는 이제 어찌한단 말이냐!”
“쯧.”
시엔이 혀를 찼다.
“둘 중 하나지.”
“너한테 말한 게 아니다! 신경 꺼라!”
“자기 것도 못 챙겨 그 모양이지. 이런 걸 후계자라고. 아니지. 애초에 물려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후계야 언제든 바뀌면 그만이니.”
“다 너 때문이다! 네가 연회장에서 크게 망신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그 때 실망하신 거야! 빌어먹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누가 먼저 시비를 걸던데. 그래서 살짝 밀었지.”
“역시! 너구나! 네가 그랬어! 이 빌어먹을 자식! 나쁜 놈! 감히 네가! 티란디스의 버린 자식, 쪼다 새끼 주제에 이 흐레이그의 계승자에게!”
“뭐. 그때는 그랬지.”
시엔이 여상히 대답했다. 시엔이 생각해도 원래 이 몸의 주인은 버린 자식이고 쪼다 새끼가 맞았다. 어차피 그건 다른 시엔이니 굳이 욕을 먹는다 해도 내 일은 아니었다.
페시번이 축 늘어졌다.
혼자서 열을 내봐야 상대를 해 주지 않으니 그뿐이었다. 게다가 심장을 깊숙이 찔러오는 말이 있었으니.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럼 지금은?
“젠장······.”
대충 이쯤인가.
시엔이 슬그머니 바람을 넣었다.
“이참에 갈아타지그래?”
“뭘 갈아탄단 말이냐.”
“1왕비는 은원이 칼같은 사람이거든.”
“날 더러 가문을 배신하라고?”
“어차피 전하가 왕위에 오르면 흐레이그는 밀려날 수밖에 없겠지. 그때야 뭐.”
“흐레이그는 왕국의 역사와 함께한 대귀족이다! 왕실에 복속할 수는 없다!”
“뭐. 알아서 해. 어디서 뒤통수 맞고 죽어도 가문에 보탬이 되긴 하겠지.”
“······.”
페시번이 입을 다물었다.
이쯤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판단은 본인이 내릴 것이고. 그래도 대공자쯤 되면 가문에서 아예 힘이 없는 것은 아닐 터.
적의 내분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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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대계가! 후퇴, 후퇴를 해야 해!”
대주술사 알루가 소리쳤다. 그 옆에 선 족장이 분노를 터뜨렸다!
“후퇴라니! 어디로 후퇴한단 말이냐!”
“이대로면 다 죽는다! 다 죽는다고!”
“선조의 땅에 적을 들이느니, 여기서 싸워 죽겠다! 겁쟁이는 영원히 마른 땅으로!”
마몰의 족장 랴하티가 검을 들어 올렸다. 랴히티가 문득 검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으로 내던졌다.
등에 맨 도끼를 끌어 손에 들고는, 이제야 좀 전사답다 중얼거렸다.
“랴하티?”
“먼저 가겠소이다, 대주술사.”
“랴하티! 랴하티!”
랴하티가 도끼를 앞세워 뛰쳐나갔다. 알루가 소리쳐 불렀으나 소용이 없다.
대주술사의 호위병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오가니 알루가 급히 호통을 쳤다.
“이놈들! 내가 바로 대주술사다! 선조로부터 내려온 두 개의 신물을 다루며, 천지조화가 바로 내 손에 있다!”
알루가 뼈와 원석을 들어 올렸다.
호위병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뿐, 눈빛이 불경하니 대주술사의 위엄이 통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알루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큭, 보아라! 이것이 선조의 보우하심이다!”
알루가 손을 휘저었다.
입에서 기이한 언어가 흘러나오고, 눈이 까뒤집혀 핏줄이 돋았다. 통통 뛰며 몸을 흔들고, 연신 땀이 배어 줄줄 흐르니 그 품새가 미친 사람과 같았다.
우르릉! 땅이 흔들리며 굉음이 몰아쳤다.
바위들이 솟아 떠오르고 저들끼리 붙었다. 마침내 거인의 형상을 취해 기지개를 켰다.
알루가 흐르는 땀을 닦았다.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이 지고, 입 주변이 깊숙이 패어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꼴이었다.
‘수명이 십 년은 줄었겠군.’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위엄을 보이지 않으면 훗날을 도모할 수 없다. 야만인을 더는 야만인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평원의 자손들이 서로 상잔하는 미래를 막기 위해서. ‘빌어먹을! 야만스러운 족장 놈들! 얌전히 방어전을 했으면. 그러니 야만인 소리를 듣지!’
후원자에게서 받은 투석기가 열 기에, 방어를 위한 마법 함정이 이미 수없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평원의 자손에겐 방어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전투란 달려나가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행위일 뿐이었으니.
‘이번에 왕국에 최대한 큰 피해를 준다. 그리고 십 년, 이십 년이라도 다시 준비하면 돼. 차라리 잘된 일이야.’
알루가 눈을 번뜩였다.
전사가 한번 쓸려나가면 남은 것은 아직 아이들뿐이었다. 선대의 야만이 몸에 배기 전에, 교육해 제대로 된 군대를 꾸리리라.
“보아라! 이것이 선조의 보우하심이다! 평원의 대자연이 바깥 것들을 멸할 것이다!”
알루가 소리쳤다.
거대한 암석거인은 자체로도 무시무시했다. 야만전사들의 눈에 용맹이 깃들었다.
쿵! 쿵! 쿵! 지축이 떨렸다. 전장을 돌아본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위의 정령? 거대한 암석을 몸으로 삼아, 크고 작은 바위들이 팔과 다리로 뻗어 이어졌다.
“저, 저게 대체!”
페시번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시엔의 등에 업혀있는 상태였다. 군대가 질서를 찾았으니 후방으로 빼내던 참이었다.
“흠.”
바위의 정령은 자체로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돌덩이라 창칼이 듣지 않았다. 어떤 기술이나 기교 따위는 없지만, 집채만한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떼어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미 가공할 병기가 아니던가.
검위공이 있으니 못 잡을 것도 아니다만, 이미 야만인에게 입은 피해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저런 것이 날뛰면 인간의 군대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직접 나서서 피해를 좀 줄여야 할 텐데.
시엔이 잠시 망설였다. 이걸 여기서 버려, 말어? 이제 땅이 안정도 되었겠다, 이 짐덩이를 병사에게 맡겨버려도 될 것 같은데.
알루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매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청깃매. 전사의 혼을 인도하는 신성한 새였다.
청깃매가 날아들었다. 알루가 얼떨결에 팔을 들어 올렸다. 청깃매가 그 위에 척 올라서 오만하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알루가 쾌재를 불렀다.
“보라! 청깃매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선조의 보우하심이다!”
오오오! 야만전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청깃매는 전사의 새다. 홀로 살며 영역을 지켜 다른 날것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니 전사 중의 전사였다.
또한, 죽은 전사의 영혼을 선조의 품으로 인도하는 신성한 새다. 청깃매가 바라보는 전장에서 죽으면 그 혼이 영령에게 통했다.
야만인의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졌다.
죽음을 불사하는 투지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
청깃매는 길드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새가 대주술사의 어깨에 스스로 내려앉아 날개를 쉬니, 그야말로 선조의 계시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선조의 보우하심이다! 선조께서 야만의 고리를 끊고 평원의 자손이 일어남을 바라신다!’
알루 역시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다. 날다 지친 청깃매가 잠시 쉬어갈 곳을 찾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선조의 도움이라 해석할 수밖에 없는 기적이었다.
알루의 눈이 희열로 물들었다.
그런데 청깃매가 부리에 문 나뭇가지가 문득 범상치 않았다.
“음? 이건!”
작은 것이나 마력과는 다른 영험한 기운이 뻗으니 보통 물건은 아니리라. 세계수의 나뭇가지라도 되는 것일까.
오오! 알루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 순간이었다. 청깃매가 푸드덕 홰를 치더니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웠다. 알루가 손에 쥔 검은 뼈를 콱 움켜쥐었다. “어어?”
청깃매가 또다시 발톱을 뻗었다. 알루의 손을 할퀴고, 그 안에 든 루비 원석을 요령 좋게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포로로 날아 하늘 높이 사라졌다.
“아, 안 돼!”
알루가 뒤늦게 비명섞인 절규를 쏟았다.
뭐야? 뭔데? 대체 무슨 일이야?
난데없이 날아든 신성한 새가, 성물을 훔쳐 달아났다.
야만족의 눈빛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암석 거인 앞에서 군대가 주춤 물러났다. 우뚝 솟은 성채와 같은 거대한 대적.
그 앞에선 누구나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존재 자체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는 근원적 공포였다. 군대라 해도 이겨낼 수 없었으니.
“전하. 아무래도 늙은이가 나서야겠군요.”
“검위공!”
“허허. 저런 것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제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델피르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엘딘이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전하.”
“하지만 검위공. 저걸 어떻게······.”
“전하. 여기 모두가 전하의 백성입니다. 저 또한 전하의 검에 불과하니, 아무리 보검이라도 뽑지 않으면 그저 장식에 불과합니다. 검을 휘둘러 백성을 지키십시오.”
어린 왕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델피르는 이미 참혹함이 무엇인지 보았다. 검위공에 옆구리에 끼어 그 모든 전장을 지켜보았다.
떨어지는 머리와 쏟아지는 내장, 팔다리를 찾아 기어다니는 이를 보았으며, 이성을 잃고 피를 뒤집어써 그저 시체를 짓이기는 병사를 보았다.
어둠을 타고난 왕자는 또한 다른 것을 보았다.
죽었으나 죽지 못해 피어난 망령들을 보았다. 악의로 가득 차 원수의 살점을 찢으라 울부짖는 검은 형체들을 보았다.
슬픈 일이었다.
어째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죽어서도 그 원한에 서로 미워하며 울부짖는가.
야만인은 무엇이고 내 백성이 도대체 무엇이랴. 모두 모아 하나로 사람인데 어떻게.
“전하.”
“검위공. 나는······”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자의 심장 속, 영혼 어딘가 깊숙하게 자리 잡은 어둠이 꿈틀거렸다.
바로 연민이었다.
죽음이 하나로 참혹하고, 망령으로 남아 증오가 되는 일이 진심으로 측은하여 슬펐다.
어둠의 축복이 그 싹을 틔웠다.
투명한 어둠이 살포시 여린 싹을 내밀었다.
일찍이 최초의 신비주의자가 그러했듯이. 그 모든 증오의 연쇄, 거대한 슬픔의 고리에서 탈피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진리로 향하는.
바로 그런 싹이었다.
그때였다.
쿵쿵 지축을 울리며 쇄도하던 암석 거인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돌 부스러기가 피어오르고 크고 작은 바위가 쏟아져 구르니 그저 그 잔해만 덩그러니 남았다.
“음?”
“어?”
노소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저건 갑자기 또 왜?
그러자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던 어둠의 싹이 슬그머니 다시 씨앗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왜냐면 민망하니까.
연민과 슬픔이 황당함에 쓸려나간 탓이었다. 청깃매가 하늘 높이 날며 소리쳤다.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해냈습니다! 과연 선배님의 혜안에 감탄, 또 감탄할 따름입니다!
오리의 몸을 빌려 날뛰고, 청깃매에 깃들어 돌아다니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시엔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오리와 청깃매는 그 태생이 달랐다.
구름 위로 날아 추위가 몸을 침범하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거나 강하와 상승이 자유롭고 그 속도마저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청깃매가 신이 났다. 너무 많이 났다.
입에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물고, 발에는 성유해를 쥐었다. 신물이라 불릴 것을 두 개를 갖췄으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무엇이랴.
-가만있자. 이대로 돌아가면.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휘둘러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었다.
그런데 어차피 영혼이 시엔에게 속했으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얌전히 바치기엔 뭔가 아쉬웠다.
한 번은 휘둘러 봐도 되지 않을까.
-음. 어차피 적이니까 선배님도 뭐라고 하시진 않겠지? 그럼 딱 한 번만.
청깃매가 선회해 방향을 돌렸다.
쩌정! 난데없는 천둥이 난폭한 음파가 되어 대지를 휩쓸었다.
“어어.”
하늘을 올려다본 원정군과 야만인이 한데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순식간에 번져 해를 가리니 전장에 어둠이 드리웠다.
시엔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익숙한 마력의 파장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게 또 무슨 헛짓거리를······”
순간 끔찍한 괴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심약한 이는 오줌을 지르고 바닥에 주저앉게 만들 정도의 높은 격이 담긴 하울링이었다.
순간 저 멀리, 야만인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올랐다.
거인의 형상이었다. 끔찍한 거인이었다.
온몸에 종기가 올라 터져 진물이 흐르고, 나병 환자처럼 살이 녹아 흘러내렸다. 그 안에 꿈틀거리는 것이 툭툭 땅에 떨어지니 거대한 애벌레였다.
진물이 터진 자리에 또다시 진물이 터지고, 연신 쏟아지는 것이 살을 파먹던 벌레들이며 반쯤 녹은 살덩어리였다.
저게 왜? 그리고 어떻게?
부정 세계의 심층 심연, 열셋의 죄인이 바닥없는 지옥에 갇혀 끝없이 고통받았다.
그중 태초에 질병을 가진 이가 있어, 세상의 모든 병이 그에게서 비롯하니 죄인 중의 죄인, 대죄인이라.
역죄, 부패한 환희라 불리는 심연의 대죄인이었다.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