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57화 (57/268)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7] >

페시번 흐레이그. 전 연인의 현 연인이자 그 외에도 좋은 일로 엮인 사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가문에서부터 대재후로 세력권을 맞대 오래도록 서로 견제를 해왔다고 하니. 연회장에서의 소동 역시 그러한 일환이었으리라.

“입에 비해 실력이 가벼웠던 모양이지.”

“젠장! 나를 그따위로 내려다보지 마! 가, 가 버리라고!”

페시번이 소리질렀다.

시엔이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자, 잠깐! 잠깐 기다려!”

“뭐야?”

“그. 젠장. 필요 없어! 가 버려!”

페시번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엔이 대체 왜 이러나 하며 전장에 주저앉은 페시번을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몸에 걸친 것들이 살살 신경을 긁었다. 미스릴로 온 몸을 두른 것이라.

그 와중에 시엔이 페시번의 미스릴 군화를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 서슬에 페시번이 등을 찧으며 발랑 나동그라졌다.

미스릴 군화의 뒤편, 발꿈치 윗부분이 찢겨나갔다. 찢어진 틈으로 걸쭉하게 고인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다쳤네?”

“악! 이 개자식! 빌어먹을 티란디스!”

“힘줄이 잘렸으니 영락없이 발병신이군.”

어쩐지 형편없이 바닥을 기고 있다 싶었더니, 발목의 힘줄이 잘렸던 탓이다.

“놔! 놓으라고! 이 자식!”

“뭐. 원하는 대로.”

시엔이 군화를 놓았다.

페시번은 발이 붙들려 허리까지 들려있었다. 시엔이 놓자 자유를 되찾았다. 꼬리뼈가 지면과 격하게 만났다.

“흠.”

“날 내려다보지 마!”

“그럼 일어나던가.”

“큭!”

시엔이 무릎을 굽혔다. 페시번의 군화 이음쇠를 풀어 거칠게 빼냈다. 정강이받이와 하나 된 디자인에 무릎 보호용 뿔까지 돋은 명품이었다.

시엔이 페시번의 무릎 아래 바짓단을 북 찢었다.

힘줄은 평시에도 적잖은 장력을 가진 것이다. 끊어지면 말려들어가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붙잡아 빼 잇지 않는 한에야 일어서기는 틀렸다.

페시번의 종아리 윗부분이 볼록하니 그 쯤에 힘줄이 뭉쳐있으리라. 실력 좋은 의사 선생이 필요했다.

물론 시엔 역시 외과 시술엔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전장에서 살을 째고 힘줄을 뽑아 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엔이 찢어낸 바짓단으로 페시번의 발목을 단단히 동여맸다.

페시번이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왜?”

“큭.”

페시번이 오만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시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만인과 얽힌 이들이 보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천운이 아니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런데 하필이면 흐레이그였다.

델피르가 바로 원정군의 책임자였다.

병사를 천 명이나 지원한 흐레이그 가의, 그 가문을 이어야 할 대공자가 목숨을 잃는다?

왕자의 실책이 되리라. 그 순간 왕세자 책봉이 위협받을 정도의 큰 실책이었다.

‘하다못해 이걸 안전한 데에 갖다 놓기라도 해야······. 음. 안전한 데가 없지.’

시엔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이 전장에서 안전한 곳이 어디랴. 시엔의 주변이야 마력으로 정령을 쫒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달랐다. 땅이 흘러 전장의 전열과 후열이 계속 변하고 있음이라.

정령을 부리는 놈을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인간의 힘을 초월했으니, 다른 수작을 갖춘 놈이었다.

그러니 직접 나서서 처리하려 했다.

덜떨어진 놈이 발목을 잡기 전에는.

시엔이 고민하며 주변을 살피는 사이, 환청처럼 작은 목소리가 문득 귓전을 두드렸다.

“······고맙다.”

“뭐?”

“뭐, 뭣! 뭘 말이냐!”

“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다! 잘못 들은 거야!

페시번의 얼굴이 붉었다. 귓볼까지 시뻘겋게 물들어 마치 야만인의 혈색 같다.

시엔이 피식 웃었다.

때로는 말 한마디가 천금이 되어 목숨을 살린다 했던가.

“이렇게 되는군.”

피익! 시엔이 길게 손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이내 리치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왔다. 어깨에 내려앉은 리치가 속삭였다.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을 부르셨습니까?

“오냐. 오리는 잘 풀어놓은 것 같고. 정령을 부리는 놈은 찾았냐?”

-가마는 찾았는데, 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난전 속으로 스며든 것 같습니다만.

“찾아서 이 난리를 멈춰.”

-어. 음. 그. 선배님?

“왜?”

-이만한 이적을 부르는 이라면······

“왜. 실력이 딸려서 못하겠다?”

-아, 아닙니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의 실력을 잘 아시잖습니까. 선배님의 흑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역시 암흑 마도를 걸어 죽음을 한 번 극복한 위대한 리치······

“됐고.”

시엔이 리치의 말을 잘랐다.

손가락을 들어 저 멀리를 가리키니 금색의 빛기둥이 그 끝에 걸렸다.

“정령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분명 야료를 부렸겠지. 아마 저걸 매개로 삼은 모양인데.”

-마, 맞습니다!

“내가 직접 술자를 해치울 생각이었는데 조금 곤란하게 되었어. 그러니 가서 저걸 좀 어떻게든 해 보라고.”

-그렇군요! 역시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 선배님의 천리안과 같은 통찰에 감탄, 또 감탄하였습니다!

시엔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들었다. 리치의 부리 앞에 놓고 흔드니, 리치의 눈동자가 좌우 위아래로 떨렸다.

-이, 이건! 세계수의!

“잠깐 빌려주마. 이 정도면 되겠지!”

-물론입니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만 믿고 계십시오, 선배님!

리치가 부리로 나뭇가지를 덥석 물었다.

“분명 수비병이 있을 거야. 허나 무리하진 말고.”

-저, 이 세오르그 오스텐을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감동, 또 감동······

“뭔 소리야? 무리하지 말라고.”

시엔이 세계수에 나뭇가지에 앙증맞게 매달린 새순을 툭툭 건드렸다.

“무리하다 나뭇잎 쓰면 또 죽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아예 죽는 수가 있다.”

-아······

“알아들었음 가.”

리치가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전장 위의 점이 되어 멀어져간다.

‘영 불안한데.’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을 잘하는 놈은 대개 대답만 잘하는 법이 아니던가. ----

시엔은 자리에 서서 다가오는 야만인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상체를 틀어 도끼날을 피하고, 검을 들어올려 그저 자루에 댈 뿐. 자루를 따라 타고 미끄러진 검날에 야만인의 손가락이 잘랐다.

도끼가 떨어지고, 뒤이어 야만인의 머리도 떨어졌다.

“흠.”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근데 뭐가 이상하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대체 그게 무언지 알 수가 없으니.

문득 그림자가 져 올려다보니, 야만인 하나가 펄쩍 뛰어 날아들고 있었다.

시엔의 눈에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야만인의 얼굴에 화륵 불길이 일었다. 중심을 잃은 야만인에게 검이 닿았다. 야만인이 땅에 닿아 가랑이부터 배까지가 찢어진다. 속에 든 것들이 왈칵 쏟아져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오른쪽!”

페시번이 외쳤다.

야만인이 또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시엔의 손짓에 해피 드리머가 야만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야만인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뿐. 이내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리곤 시엔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동작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 무수한 실전으로 다져진 시엔에겐 하찮은 적이었다.

야만전사의 팔 상박, 상완동맥에 칼이 살짝 스쳤다.

인체의 급소가 여럿이고, 그중 유난히 밖에 자리잡은 대동맥이 몇 개 있었다. 예를 들자면, 팔꿈치 안쪽의 관절부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위가 그러한 급소였다.

손톱 하나 정도의 얕은 자상에도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자리였다. 일 분을 못 가 정신을 잃고 이내 피가 빠져 숨이 끊어진다.

해피 드리머의 거뭇한 형체가 바짝 쪼그라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니 풀이 죽어도 단단히 죽었다.

야만인에겐 해피 드리머가 유난히 힘을 쓰지 못했다.

마음속 어둠을 찾아 두려운 환상을 보여주는 악령이 아닌가. 야만족은 단순하고 아둔하니 스스로 죄가 없어 떳떳하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페시번은 연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제 발목이 나가 움직이지 못하니 눈이라도 놀려 적을 열심히 찾는 것이었다.

아. 시엔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전쟁통에 적을 발견하여 쓰러진 이와 선 자가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위험한 것은 멀쩡히 서 있는 적이었다.

그러니 야만인이 시엔에게 달려들고, 그 주변에 병사에게 달려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페시번을 처음 발견했을 때엔, 야만인 여럿에게 내몰려 땅을 기고 있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있지 않았던가.

“야.”

“왜, 왜 그러지?”

“흠.”

시엔이 시체들을 발로 뒤집으며 헤집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털모자를 벗기니 이미 죽어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것 봐라.”

야만인의 얼굴은 붉으며, 씻지 않으니 땀구멍에 때가 끼어 검은 깨와 콩이 박혀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시체의 얼굴이 깨끗하다. 시엔이 손을 뻗어 수염을 잡아뜯었다. 털가닥이 서로 연결되어 전체가 떨어져 나왔다.

가짜 수염이었다.

시엔이 손에 든 것을 들어보이자, 페시번이 침을 밷었다.

“퉷. 도망자로군.”

“도망자?”

“왕국에 죄를 짓고 황무지로 도망치는 놈들이 있다. 수염을 붙이고 야만인 행세를 하지.”

“도망자라. 도망자가 하필 널 공격했다고?”

“그놈이 어쨌는지 알 게 뭐냐. 어차피 야만인 속에 섞여 사는 놈들이다. 우연이라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

“야. 그거 줘 봐.”

“뭐, 뭘 말이냐.”

“네 그리브.”

그리브는 무릎을 포함하거나 혹은 포함하지 않거나, 그 아래를 전부를 감싸는 군화의 총칭이었다.

페시번이 품에 안고 있던 군화를 바짝 끌어안았다. “······이거 미스릴이다.”

“누가 달라냐? 그냥 줘 보라고.”

페시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순순히 그리브를 던져 넘겼다.

시엔이 받아 찢어진 뒷꿈치를 살폈다.

“뒤! 오른쪽!”

“알아.”

시엔이 왼편으로 크게 한 발짝 내딛었다. 동시에 손에 든 군화를 뒤로 휘둘렀다. 군화의 뾰족한 코가 야만인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눈알이 터지고 주변의 뼈, 안와가 박살이 났다. 야만인이 하체를 앞세워 공중에 떠올랐다 호되게 추락했다.

간질 환자처럼 몸을 떠니 고통에 의한 쇼크 증상이었다. 놔두면 금방 죽을 놈이네.

시엔이 관심을 잃고 군화를 마저 살폈다.

“이거 도금 아니냐?”

“어, 뭐, 뭐라고?”

페시번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시엔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물흐르듯 끊이는 곳이 없었다. 같은 상황에서 일부러 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건만, 숨 쉬듯 태연하니 전쟁 한복판에서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페시번이 넋을 잃은 사이, 시엔이 다시 물었다.

“이거 도금 아니냐고.”

페시번이 발끈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졌다는 기분이 들어 더욱 힘차게 소리쳤다.

“도금이라니! 내가 바로 흐레이그의 대공자다! 가문을 이을 몸이란 말이다! 그건 순수 미스릴로 만들어진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이게 통째로 미스릴이라고?”

페시번의 말대로라면 한 짝이라 해도 대단한 보물이었다. 이 정도라면 녹여 기사단 장검 열 자루에 미스릴을 입힐 수 있었다. 도금이라고 해도 칼이 날카로우며 기름이 달라붙지 않으니 보검과 같은 것이 아니던가.

시엔이 그리브를 툭 던졌다.

페시번이 제게 날아오는 미스릴 군화를 급히 받아들었다.

“누가 그랬어?”

“뭐, 무슨 소리냐.”

“그거 누가 그랬냐고. 누가 미스릴 군화를 찢고 발병신을 만들었지?”

“발병신이라니! 너 이 자식!”

“발병신을 발병신이라 하지.”

“젠장! 빌어먹을 티란디스!”

페시번이 분통을 터뜨렸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사소한 건 됐고. 누가 그랬어?”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하냐!”

“미스릴 무구를 찢어놨잖아.”

“오러를 다루는 놈이겠지. 야만인 놈들도 오러를 다룰 줄 안다.”

이미 다른 기운이 자리잡지 않은 이, 마법사나 신관이 아니라면 오래 수련한 전사는 미약하나마 오러를 다룰 수 있었다.

그러니 야만인들이라고 못 다룰 것은 아니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오러는 다룰 줄 아는데 검은 아니지.”

야만인의 무기는 중병기였다. 제련기술이 모자라 병기 자체의 무게로 날카로움의 모자름을 채운 것이다.

배후 세력의 지원인지 강철검을 든 야만족이 제법 많으나, 결국 본디 중병을 쓰던 놈들이었다. 결국, 검을 쥐어도 그 쓰임이 중병과 같으니 그저 파괴적이고 강맹할 뿐 정교한 기술이 없다.

그 때 야만인이 또 불쑥 달려들었다.

시엔이 상대하는 사이, 페시번이 제 군화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찢긴 부분이 너무 깔끔했다. 오러를 능숙히 다룰 줄 아는 이의 솜씨다.

게다가 하필 그 부위가 발뒤꿈치가 아닌가. 애초에 지점이 낮아 공격하기 쉬운 부위가 아니었다. 게다가 팔을 치들어 내리찍거나, 날을 앞세워 돌진할 줄이나 아는 야만인이었다.

“왜, 어째서?”

시엔이 대답했다. “그 샹···어쩌구 하는 네 야만인 기사는 어디갔지?”

“샹라 경은 더는 야만인이 아니다! 내 기사를 모욕하지 마라!”

“그래서, 그 야만인 기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듣는 척도 안 하는군. 빌어먹을 티란디스. 땅이 제멋대로 움직이니 중간에 헤어지고 말았다. 어쩔 테냐!”

“그 발은 언제 병신이 됐고?”

“누가 병신······!”

발끈해 소리치던 페시번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페시번의 눈동자가 날뛰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바락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라! 어째서 샹라 경이 나를 해한단 말이냐!”

“짚이는 게 있긴 한가 보네?”

“모욕이다! 내 기사를 모욕하지 마라!”

“내가 왜 널 지켜주고 있는지 알아?”

“그건.”

페시번이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보니 왜? 시엔의 입장에서 자신은 그저 옛 연인을 빼앗은 원수가 아니던가. 심지어 그로 인해 음독까지 했으니 그 원한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 연회장에서 알 수 없는 수로 개망신을 주고, 왕자를 구워삶아 비열한 수작으로 결투에 검위공을 내밀지 않았던가.

“왜? 왜지?”

“네가 죽으면 누가 가장 이득을 보는지 생각해 봐.”

“내가 죽으면?”

페시번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시엔이 그대로 놔 두었다. 원래 제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 아니던가. 그 결론이 충격적이라면 더욱이.

“나, 날 죽여서 1왕자에게 타격을 입힌다고?”

“아예 멍청이는 아니었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가문의 계승자다! 내가 바로 대공자란 말이다!”

“대공자가 죽으면 할 말도 많겠지. 이것들이 정말 도망자가 맞을까?”

시엔이 수염을 떼어낸 시체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나는······”

“근데 왜 네가 계승자야? 티란디스는 아직 결정이 안 됐거든. 장녀는 기사단을 휘어잡고 날뛰지. 장남은, 음, 전형적인 소인배의 전형이긴 해도 재무관으로는 썩 괜찮다고들 하고. 넌 왜 계승자야?”

“나는 장남이다!”

“그게 전부야?”

“나는, 나는······!”

“뭐. 아니면 말고.”

시엔이 대충 대답했다.

흐레이그가 정말로 저들의 대공자를 죽이려 했는지, 아닌지는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이 전장에서 숨을 붙여두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그런데 이대로 이 멍청이를 살려서 돌려보내면 그건 그것대로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의심은 가장 지독한 잡초와 같다.

아무리 뽑아도 그 뿌리가 남았다. 땅을 파헤쳐도 실낱같은 잔뿌리 하나가 남아 다시 틔워 자랐다. 잡초는 어찌해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의심이 바로 그러한 것이니.

어쨌거나 흐레이그의 계승자라는 놈이 의심을 품었다. 그것이 진실이건 아니건 시엔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어어!”

문득 하늘 끝까지 치솟은 황금빛의 기둥의 색이 바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 자취를 감추니 왼쪽 오른쪽으로 둘러싼 빛기둥 전체가 하나둘씩 사그러들어 자취를 감췄다.

땅에 깃든 마력이 흩어지고, 흐르던 땅이 멈춰섰다.

리치가 해낸 모양이었다.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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