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56화 (56/268)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6] >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이 도는 것이 아니라 시엔이 도는 것이었다. 시엔이 아니라 시엔을 받친 땅이 회전했다.

“장난은 정도껏.”

시엔이 발을 굴렀다. 음차원 에너지가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대지의 정령들이 불쑥 솟아올랐다. 부정한 마력이 땅에 퍼지니 정령이 울상이었다. 나쁜 인간! 정령이 외치며 후다닥 등을 돌려 달아났다.

정령에게 악의는 없었다. 이만한 땅의 움직임이 정령에겐 그저 커다란 장난에 불과하니. 그 위에 인간이 싸워 죽어가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것이 자연이기에.

시엔이 쓰러진 병사의 시체를 보았다.

정수리가 반쯤 갈라진 시체. 허옇고 뻘건 것들이 뒤섞여 흘렀다. 시엔의 입에서 부정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시체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네 원수를 찾아 해하라.”

병사의 시체가 걸어나갔다. 누군가는 기겁을 하고 넘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오줌을 지렸다. 죽은 자가 움직여 제 원수를 찾아다녔다.

부정 세계의 마수가 인간의 전쟁에 끼어들었다.

라탈랏. 꼬리 둘 달린 검은 고양이의 그림자. 눈코입 없이 온통 새카맣다. 니야옹, 니야옹. 시엔에게 몰려들어 볼을 부비고 꼬리를 스치운다.

“오냐. 가거라. 털가죽을 두른 인간이 바로 너희의 먹이다.”

수백의 라탈랏들이 전장으로 파고들었다.

야만전사가 눈을 깜박거렸다.

새카만 고양이가 문득 발아래 서서 캬아앗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검은 고양이는 불길하다. 야만전사가 고양이이게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야만인의 발이 허공을 휘저었다. 고양이의 몸체를 그대로 뚫고, 발에 걸리는 느낌이 하나 없었다.

라탈랏이 야만인의 그림자를 물었다. 그림자의 대가리가 한 입 떼어먹혔다. 순간 뺨이 화끈했다. 손으로 훔쳐 시뻘건 선혈이 묻어나왔다.

검은 고양이가 더 몰려들었다. 그림자에 대가리를 박아 깨어무니 통증이 계속해서 번졌다.

아악! 비명이 터졌다. 고통보다 공포에 속한 비명이었다. 야만전사가 미친 듯 발과 팔을 휘둘러 고양이들을 쫓았다. 그러나 라탈랏에겐 실체가 없다. 연신 허우적거리는 야만전사의 등에 강철이 틀어박혔다.

니야옹. 니야옹. 굶주린 고양이가 우는 소리. 왕국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고양이의 형상을 본 것도 같다. 그러나 당장 몸이 돌아 야만인이 앞에 보였다. 병사가 칼을 뻗었다.

그 옆에서 사제가 신성력을 쏟았다. 사제의 무릎 위로 아직 어린 병사의 얼굴이 창백했다. 순간 땅이 움직여 병사와 사제가 반대로 멀어졌다.

안 돼! 사제가 손을 뻗었다. 한 박자 늦었다. 사제가 쓰러져 멀어져가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기적이 있다면 저 아이를 보우하시길. 그저 속으로 기도를 할 수밖에.

그러자 저 멀리 병사가 비틀 몸을 일으켰다. 천신이시여! 사제가 중얼거렸다. 안도는 너무 일렀다.

소년병의 뒤로 야만전사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아직 어린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그러자 남은 몸이 야만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양손을 뻗어 머리를 움켜쥐고, 눈을 찔러 엄지가 전부 파고들었다.

사제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끔찍한 일이다. 목 잃은 몸뚱이가 연신 야만인에게 달라붙었다. 불가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리치가 하늘을 날았다.

땅 아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리치가 문득 인간의 발아래 뛰노는 검은 것들을 보며 날개로 눈을 비볐다.

-라탈랏? 선배님이신가? 선배님 치고 별로 강한 마수는 아닌데······. 앗. 원한회륜! 세상에! 순 뻥인 줄 알았는데!

죽은 자가 제 원수를 찾아 헤메이게 만드는 마법. 이미 실전되어 전설로 취급되는 비술이 아니던가. 이론상 가능하지만, 그 난이도가 인간이 다룰 것이 아니다 하여 선대들의 허세쯤으로 취급되는 마법이건만.

-심연탑으로 모셔야 하나? 가만, 그래도 되나? 다들 싫어할 것도 같고.

그 행보로 인해 흑마법사가 몰락했다 하여 이미 주적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세오르그야 시엔의 정신 세계, 그 진가를 두 눈으로 보아 그저 존경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전설의 마법을 직접 목격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나, 지금은 따로 받은 명령이 있었다.

리치가 연신 땅을 훑었다.

그렇게 전장을 선회하던 리치가 마침내 목표를 찾아 날아들었다.

꽥꽥꽥, 꽥! 꽥꽥! 보급대의 오리 우리였다.

리치가 날아들어 빗장을 부리로 밀어 열었다. 장의 문을 열고 위협을 가하자 오리들이 혼비백산 저마다 뛰쳐나갔다. 페사 소이어는 레이휴 백작가의 오십인장이었다. 원래는 제 아래 다섯 명의 십인장을 이끌고 전열전투를 맡아야 했다. 정신을 차리니 전부 흩어져 세상이 돌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적의 한복판이었다.

이를 악물며 칼을 휘둘러 둘을 베고 한 대 맞아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야만인이 도끼를 치들었다. 하핫······. 페사의 입에서 나지막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때였다.

꽤액! 오리 우는 소리와 함께 푸드덕 흰오리가 날아들었다. 우와악! 도끼를 내리치려던 야만전사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페사가 야만전사와 오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야만전사의 겁먹은 눈빛이 오리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설마. 혹시? 페사가 손을 뻗어 오리의 멱을 틀어쥐었다. 억지로 일어나 오리를 내밀었다. 야만인이 연신 두 발 두 손으로 뒤로 물러났다.

“병신 야만인 새끼! 기깟 오리가 무섭냐!”

페사의 눈이 번뜩였다. 오십인장쯤 되면 운으로 따내는 자리가 아니다.

야만인의 멱을 따자, 또 세상이 빙글 돌았다. 문득 또다른 야만전사가 달려들었다. 오리를 내미니 야만인이 움찔 물러났다. 빈틈. 어김없이 칼을 뻗어 찌르고 베었다.

땅이 흘렀다. 오리를 내밀자 야만인이 물러나 좌우로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다시 왕국군이 주변에 있음이라. 페사가 소리를 질렀다.

“오리! 오리를 잡아! 놈들이 오리를 무서워한다! 아주 병신새끼들이야!”

오리? 무슨 오리? 병사들의 눈에 의구심이 맴돌았다. 오리를 손에 쥔 채 야만인에 맞서는 이가 보였다. 오리를 앞으로 내밀면 야만인이 흠칫 몸을 떠니 그 빈틈으로 검을 뻗어 멱을 따고 있었다.

근데 오리는 또 어디서 났대? 병사가 황당하여 주변을 살폈다. 꽤액! 마침 한 마리가 홰를 치며 지나가니 병사가 곧바로 몸을 날렸다.

보탁은 크레하의 족장이었다. 부족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서니 제멋대로 움직이고 회전하는 바깥 것들의 병사들이 그 앞에 토막이 나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보탁이 광소를 터뜨리며 연신 철검을 휘둘렀다. 도끼만 한 손맛이 없지만, 가벼우니 몸이 지치지 않아 활력이 계속 넘쳤다.

그때였다. 보탁의 눈에 한 기사가 비쳤다. 붉은 오러가 줄기줄기 피어오르니 움직이는 동선에 야만 전사의 시체가 줄줄이 놓였다.

그 얼굴이 낯이 익었다.

“샹라!”

“보탁?”

“어, 어째서 네가 형제를 베고 있느냐!”

“형제? 아아. 그렇군. 넌 모르겠어.”

“무슨 말이냐!”

“대족장이 날 죽였다. 내 실력이 두려워 사지로 몰아넣었지. 나는 살아남아 평원을 버렸다.”

“네 놈! 평원을 배신했구나! 불쌍한 놈! 네 영혼은 영원히 메마른 땅에 떨어질 것이다!”

“영원히 메마른 땅? 웃기는군.”

“한때 벗이었던 정으로 내 직접 네 목숨을 거두겠다! 샹라! 도끼를 들어라!”

“이젠 검이 더 편한데 말야.”

“타락했구나! 어찌 바깥 것들처럼······.”

“네가 든 건 검이 아니라 도끼인가?”

보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바깥 것의 무구를 든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할 말이 없어진 보탁이 그대로 샹라에게 달려들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샹라는 굳건히 서서 버텼다. 보탁은 뒤로 세 발짝 물러났다.

명백한 실력의 차이였다.

샹라가 따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맞닿으나 이번엔 소리가 없었다. 붉은 오러가 치솟아 붉은 면을 그리자 보탁의 검이 잘려나갔다.

“보아라. 이것이 문명인의 검술이다. 수천년 역사가 만든 제대로 된 검술이다. 평원의 자손? 웃기는군. 우리는 너희를 야만인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지.”

“샹라!”

“미안하지만, 난 꼭 할 일이 있어서 바쁘거든. 한때 친우의 정으로 한 번은 살려주마.”

샹라가 등을 돌려 걸어나갔다.

나름 멋지게 퇴장할 속셈이었다.

마침 땅이 반대로 움직였다. 발은 앞으로 디디나 땅이 움직여 뒤로 밀어냈다.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니 제자리걸음이었다.

보탁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보아라. 평원에서 난 전사는 결국 평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크레하의 전사들이여, 변절자의 목숨을 거두자! 평원의 자식이 평원에서 죽도록 자비를 베풀자!”

크레하 부족의 전사들이 달려들었다.

샹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핏빛 오러가 폭사하며 치솟았다.

베른닐은 정신이 나갔다. 입은 크게 벌어져 흰 이를 드러내고, 눈동자에 기쁨이 흘러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티란디스를 위하여!”

예전의 바로 그 외톨이, 혹은 망나니 베른닐이 아니었다. 왕국 가장 위대한 검사를 스승으로 두지 않았던가.

매일같이 얻어맞고 구르고 터지는 나날이 이어지니 내가 실력이 늘었나 안 늘었나 알 수 없던 참이었다.

검위공은 입만 열면 둔한 놈이니 멍청한 놈이니, 차라리 개를 가르쳐도 너보단 잘 배우겠다 폭언을 쏟았다. 그러니 자신감이 가라앉아 저 깊은 기저까지 침몰한 참이었다.

촤악! 은빛 오러가 야만인을 둘로 분리했다.

뼈와 살을 분리하나 힘이 들지 않고, 은빛 오러를 연신 뽑으나 속에 부치는 것이 없었다.

베른닐의 검이 또다시 야만인을 갈랐다. 도끼를 휘두르던 손목이 바닥을 나뒹굴고, 뒤이어 깊숙히 박힌 검이 명치를 심장을 찔러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그 아래 눈을 질끈 감았던 왕국 병사가 놀란 눈으로 베른닐을 올려다보았다. 놀라움이 경이와 감사, 존경으로 바뀌었다. 제 은인에게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티란디스!”

베른닐이 부러 크게 소리쳤다. 기사의 낡은 로망이었다. 가문을 외치며 그 이름을 빛나게 하리라.

베른닐은 빛나고 있었다.

엘딘이 봤다면 당장 다리를 후려 넘어뜨리고 잘근잘근 밟았으리라. 제 힘에 취해 앞뒤 분간 못하고 날뛴다 질책을 했을 터였다. 그러나 엘딘이 여기에 없었다.

야만족의 상급전사대. 바깥 것들의 실력자를 처리하기 위해 상급전사로 짜여진 암살조였다. 그들의 눈에 베른닐이 보였다.

강철검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베른닐에게 달려들었다.

“크큭, 오너라!”

베른닐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검을 내밀어 공격을 맞받으니, 쩡! 팔로 전해지는 힘이 심상지 않다.

실력 좀 있는 놈인가?

“하지만 이 베른닐에겐 아직 이르다!”

베른닐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상급전사들이 연계를 이뤄 달려들었다. 머리를 노려 두 공격이 이어 들어온다. 창! 창! 검을 기울여 막았다. 순간 욱씬 근육이 저렸다.

상급전사 둘이 베른닐을 내리눌렀다. 베른닐이 오러를 일으켜 저항했다.

아. 뭔가 이건 아닌데.

베른닐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또다른 상급전사가 베른닐의 허리를 노렸다. 베른닐이 바로 펄쩍 뛰었다. 뒤로 넘어지듯 한 바퀴 구르고, 세상이 빙글 돌았다.

하늘 아래 야만족의 도끼. 베른닐이 연신 왼쪽으로 굴렀다. 푹! 야만전사의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문득 야만전사가 비치니 급히 힘을 주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문득 가랑이가 시큰했다. 양발을 좌우로 쫙 벌리자, 그 사이로 검날이 떨어져 땅을 찔렀다. 중요한 곳 아래였다. 간담이 서늘했다. 베른닐이 허리를 튕겨 하체를 들었다. 발로 야만

인을 걷어차 밀고, 땅을 짚어 헤엄을 쳤다.

푹푹푹! 야만전사의 공격이 연신 땅을 찍었다.

“두더지의 환생이냐! 크크크!”

상급전사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베른닐은 알아듣진 못했지만, 비웃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제야 엘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병신같은 놈! 적을 베고 탈진해 쓰러질 생각이더냐! 주변을 살피고 상대를 보아 최소한의 힘을 써야지!’

후회막급이었다. 베른닐이 그제야 주변을 살펴 활로를 모색했다.

도박장에서와 같았다.

잃고 나서 후회하며 남은 금화를 살폈다. 전부 걸어 그저 행운이 따르기를 기도할 뿐.

다만 다른 점이라면, 더는 행운에 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늦었지만 이제야 필사적으로 상대의 동선과 흐름을 파악하려 애썼다.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검이 아니라 눈이, 감각이 앞서야 한다는 귀중한 깨달음이었다.

베른닐의 기세가 뒤바뀌었다. 공격에 앞서 나와 적을 살피고 그 움직임을 앞서 찌르니 이전의 기사는 없고 훌륭한 검사가 남았다.

행운이란 고약하기 짝이 없다. 저를 믿고 손을 내밀면 매몰차게 내친다. 필요없다 외면하면 그때야 슬그머니 품에 안기곤 했다.

베른닐이 벌떡 일어나 칼을 들었다. 쩡! 공격을 막았으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베른닐의 검을 떨궜다.

주우려 손을 뻗으니, 팔을 자르려는 상급전사의 공격이 떨어져내렸다. 순간 베른닐 아래의 땅이 돌았다. 뻗은 손이 반원을 그리고 야만인의 검이 맥없이 땅을 내리쳤다.

베른닐이 팔꿈치를 뻗었다. 야만인의 옆구리에 깊숙히 박혔다. 억, 바람 빠지는 소리. 베른닐이 손을 뻗었다. 야만인의 머리채를 움켜쥐곤 찍어눌렀다. 동시에 무릎을 치켜들었다. 빡! 전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동거렸다.

베른닐이 전사의 머리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어 무릎을 세웠다. 빡! 빡! 파삭! 얼굴이 움푹 패며 전사가 축 늘어졌다.

“노옴!”

격분한 상급전사가 일시에 달려들었다. 베른닐의 등을 향해 찔러나가는 두 자루의 검. 순간 또 땅이 반 바퀴 돌았다.

야만전사의 가슴팍에 두 자루 검이 솟았다.

베른닐이 전사를 힘껏 밀었다. 시체 하나와 상급전사 둘이 일시에 나동그라졌다. 급히 검을 주워 하나의 멱을 따자, 땅이 밀려 뒤로 쭉 밀려났다. 베른닐이 있던 자리에 도끼 하나가 허공을 휘저었다.

상급 전사 한 명이 석궁을 들어 베른닐을 겨누었다. 명예롭지 않은 일이나, 저만한 바깥의 전사를 상대하기 위함이다.

땅이 밀리고 돌아 정신없이 움직이니, 잠시 멈추는 때야말로 바로 화살이 나는 때라. 상급전사가 숨을 멈추었다. 베른닐의 움직임을 보고, 겨냥대가 그 앞을 겨눴다.

상급전사가 신중하게 겨누는 사이.

꼬리 둘 달린 고양이의 형체가 살금살금 접근했다. 전사의 그림자에 소리 없이 다가가, 앙증맞은 입을 들어 머리를 콱 물었다.

‘지금이다!’

상급전사가 석궁의 당김 쇠를 당기는 순간, 콱! 뺨의 살점이 사라져 이빨이 볼때기 사이로 드러났다.

크악! 상급전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 서슬에 석궁이 발사되고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화살이 베른닐의 뺨에 살짝 바람을 일으키며 스쳤다. 그 너머 검을 든 상급전사 목에 틀어박혔다.

컥. 상급전사가 눈을 부릅떴다. 숨이 턱 막혀 팔을 휘젓는다. 거기에 하필 또 다른 전사의 눈이 스쳤다.

아악! 전사가 눈을 움켜쥐었다. 베른닐의 검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죽여! 저 자식을 죽여!”

상급전사장이 고함을 질렀다. 벌써 상급전사 열둘이 쓰러졌다. 괴물 같은 놈이었다.

상급전사 셋이 호흡을 맞췄다. 같은 부족 출신이라 함께 연마한 이들이었다. 유난히 마른 체구와 작은 키를 살려, 나란히 움직여 세 급소를 일시에 노리는 공격은 가히 평원 최강이라 자부했다.

베른닐의 앞으로 세 명이 어깨를 맞대고 달려들었다.

그워어! 순간 괴성과 함께 왕국 병사 하나가 뛰어들었다. 있는 힘껏 달려 몸을 날려 상급전사의 옆구리를 덮치니, 체구가 작은 셋이 동시에 균형을 잃었다.

베른닐이 검을 휘둘렀다. 키마저 같은 세 명이라, 한 궤적에 목젖 세 개가 연달아 갈라졌다.

“고맙소!”

“그에엑!”

병사가 벌떡 일어나 또다시 달려나갔다. 베른닐이 아차 하여 병사의 뒤를 따랐다. 보아하니 이성을 잃은 모양. 생명의 은인을 그리 놔둘 수는 없으니.

베른닐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는 가슴부터 배까지 한데 갈라진 시체였다. 온갖 장기가 이미 떨어져 속이 텅 비었다.

야만인이 보기에, 피칠갑을 한 바깥 놈이 시체를 부려 형제를 베어내고 있었다.

으악악! 사악한 술법이다! 영원히 마른 땅의 저주다! 영령이 노하셨다! 야만인들에게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이 터졌다.

야만인이 병사를 보며 연신 주춤하고 움찔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베른닐이 감탄했다.

무장을 보건대 병사에 지나지 않는 자다. 그러나 그 용맹이 저 야만인조차 놀라게 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어찌 내 몸을 사리랴. 어찌 힘을 보존해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랴!

베른닐의 깨달음이 도로 원점으로 돌아왔다.

베른닐이 다시 앞뒤 분간이 없이 병사와 함께 날뛰었다. 간혹 치명적인 공격들이 사각에서 날아오나, 땅의 움직임과 함께 어이없이 계속해서 빗나갔다. 변덕스러운 행운이 베른닐의 품에 제대로 안겼다.

마침내 소강 사태에 이르자, 베른닐이 숨을 몰아쉬며 검을 늘어뜨렸다. 그 와중에도 함께 사선을 돌파한 병사의 이름을 물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그뤠엑!”

병사의 시체가 마침 괴성을 질렀다. 아직 원수를 찾지 못한 시체가 다시 전장으로 돌진해 사라졌다. 베른닐이 채 붙잡기도 전이였다.

“그레엑? 아! 그렉이라는 이인가?”

베른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병사가 쉬지 않는데 어찌 기사가 숨을 돌릴 수는 없었다.

베른닐이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시엔과 리치 의외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죽은 전우가 다시 일어나 싸우니 두려우나 한편 용기가 치솟고, 이따금 야만인이 공연히 고통스러워 몸을 뒤트나 그저 적이라 찔러 해할 뿐이었다.

땅이 연신 움직여 세상이 핑핑 돌고 내 자리가 도대체 어디냐 계속해서 뒤바뀌고 있었지만, 이미 전쟁이 벌어지니 그에 생각할 시간이 없어 눈앞의 적을 치웠다.

게다가 본디 원정군의 숫자가 훨씬 많은 전투였다. 거기에 오리가 한 번 날면 기겁하여 우르르 물러나니 원정군의 사기가 점차 치솟았다.

‘어떤 놈이 정령을 부렸을까.’

시엔의 눈이 연신 전장을 훑었다.

이미 형세는 뒤바뀌었다.

그러나 본디 이겨야 마땅한 전쟁이라. 이겨야 본전이고, 피해가 클수록 어린 왕자에겐 독이 되는 것이었다.

정령을 부리는 그 대요술사인지를 잡으면 야만족 따위 일시에 정리가 될 것이었다. 군대는 하나로 움직여야 제힘을 발휘하니, 흐르는 땅이 안정되면 비로소 그 위력을 찾으리라.

시엔이 전장을 누볐다. 시엔의 곁으로 땅의 정령이 접근하지 못했다. 시엔은 야만족과 같이 땅의 흐름에서 자유로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시엔이 검을 휘둘러 야만인의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살아 감사의 뜻을 높였다.

‘마력이 그리 넉넉하진 않은데.’

전장에 풀어놓은 라탈랏의 숫자가 삼백이었다. 거기에 원한을 새겨 움직이는 시체들이 또 이백에 이르렀다.

그래도 이만하면 천 년 전보다는 얼마나 수월한가. 함께 싸우는 군대가 있으니 이러하다.

시엔의 시선이 한편에 붙들렸다.

왕국군 한 명이 연신 수세에 몰려 바닥을 기고 구르며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귀한 갑옷을 입고 있으니 귀족가의 대표가 틀림없으리라. 병사를 이끈 귀족 대표가 죽는다면 델피르에겐 한 명 한 명이 뼈아픈 실책이 된다.

시엔이 움직였다. 야만족의 목을 베고, 또 다른 놈의 오금을 걷어차 넘어뜨려 척추를 찔렀다. 존재감이 옅어 야만족이 눈치채지 못하니, 결국 야만전사가 어찌 죽는지 모르고 연신 쓰러졌다.

“괜찮습니까?”

시엔이 귀족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귀족이 기어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몸을 뒤집어 상체를 들었다.

시엔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쯧. 괜히 구했네.”

“뭐, 뭐야?”

귀족이 바락 대들었다.

바로 흐레이그의 대공자, 페시번이었다.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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