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55화 (55/268)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5] >

발리스타, 그것도 상당한 위력의 것이라.

“몇 기나 되지?”

-제가 본 것이 여섯이었습니다. 후후,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두 기를 부쉈으니 이제 네 기입니다만.

“발견했으면 다 박살을 냈어야지. 그걸 또 놔두었다고? 어차피 한 발 쏘면 끝이었을 텐데.”

-그것이, 오우거가 있는 바람에 말입니다. 오우거란 놈이 힘이 보통이 아니잖습니까. 장전도 순식간에 끝나버렸습니다.

“오우거? 오우거가 왜 나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몬스터를 가둬놓고, 전쟁에 풀어놓는 전술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리치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오우거를 부려 발리스타의 창시를 장전하도록 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게 가능한가? 흠. 천년이나 지났으니.”

왕자가 살던 시대는 이미 낡았다.

과거의 왕궁은 이제 일개 귀족의 성보다도 못했다. 규모로도 기능적으로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병사들의 무구는 또 어떠한가.

그때였다면 귀하다 여길만한 양품이, 이제는 보급품으로 지급되는 세상이 아니던가.

천 년 전의 음차원 에너지를 완벽히 회복하더라도, 지금과 같았다면 제국에 혼자 대적할 수 없었으리라.

-음. 선배님. 제가 알기로도 불가능한 일인데요.

“원래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법이야. 나는 천 년 전이라 그렇다 치자. 넌 대체 몇 년 전인데?”

-윽. 선배님. 숙녀의 나이를 그리 물으시면······

“리치에 남녀가 어디있어? 다 리치지.”

시엔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계속 수고를 좀 해 줘야겠다. 호수에 모여있다고 했던가. 가서 위험한 병기가 보이면, 최대한 노려서 박살을 내도록 해.”

-하, 하지만 선배님! 야만인이 모여있는데에 제가 간다고 치면······.

“두 번 죽었는데 세번은 못 죽겠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리치는 일곱 번을 죽었다.

여덟 번째 오리의 몸을 빌린 리치가 우는소리를 했다.

-저,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 이제 마력이 한계입니다. 쥐어 짤 것도 없어요······.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혀야 성장하는 법이지.”

-아! 그게 선배님의 마력의 근원입니까? 그렇군요! 단신으로 전쟁을 벌이며 계속해서 생사의 문턱을 오갔기 때문이군요! 그리하여 그리 강대한 마력을 가지셨던 겁니까!

“마력하고는 상관없어. 가끔 그렇다 우기는 놈들도 있긴 한데.”

몇몇 마법사들의 이론이었다.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심장을 비우는 것. 그리하여 마력 친화도가 올라가 전체적인 마력 성장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근회복이니 어쩌니 육체와 정신이 같은 원리라고 하던 것 같았는데, 시엔이 듣기로는 개소리였다.

거기에 직접 겪어보니, 아주 개소리였다.

“마력 초회복 이론은 엉터리야.”

-예? 그럼 어째서 이 세오르그 오스텐에게 이리 가혹한 일정을 주십니까······.

“그래도 실력은 늘지. 마력이 모자라면 어떻게든 아껴보려 별짓을 다 하게 되거든. 그러다 보면 마력 효율이 올라.”

마력을 채울 시간도 없이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극한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같은 음차원 에너지를 사용해도 더 지독한 마수 더욱 강력한 마법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아아! 그럼 이 모든 것이 제 역량을 키우기 위한 선배님의 뜻입니까! 이 세오르그 오스텐, 감격, 또 감격하였습니다!

시엔이 눈을 깜박거렸다.

“뭔 소리야? 필요하니까 쓰는 거지.”

-아닌 겁니까······.

“마력이 없으면 곤란하긴 하네. 가봐야 싸우지도 못할 테고.”

-그럼 조금만 쉬게 해 주시면.

“이번엔 내가 몇 붙여 주지. 대형 병기를 집중적으로 노려.” 시엔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꺼내들었다.

오리의 시선이 거기에 착 달라붙었다. 리치가 그 나뭇가지의 효능을 모를 리가 없었다. 손바닥만 한 잔가지라고 해도 부럽기 짝이 없었다.

이내 밤의 어둠 속 시커먼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13장의 날개가 원형으로 뻗고, 그 중심에 둥근 아가리가 달려 이빨을 딱딱거렸다.

그것이 하나, 둘, 셋······ 전부 다섯 마리.

날개가 달렸으나 움직이지 않고, 그저 두둥실 떠올라 기묘한 인상을 주는 마수였다.

마수가 시엔의 팔다리에 달라붙었다. 날개를 접어 매달리니 나무에 붙은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요 녀석들.”

시엔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치라누크! 말 더럽게 안 듣는 애들인데! 아니, 희소종을 그리 쉽게 다루시는군요!

마수 소환의 난이도는 전적으로 마수의 크기에 달렸다. 정신 세계 속 심연, 부정 세계와의 통로가 얼마나 넓고 깊은가에 달렸다.

그러니 최악의 마수는 쓸데없이 덩치만 크고 약한 것, 좋은 마수는 실제적 크기가 작고 강한 것이다.

하지만 마수란 대개 몸집과 그 강력함이 비례하는 법이라, 치라누크와 같이 작고 강한 종류를 희소종이라 불렀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 새삼 선배님 능력의 감탄, 또 감탄을······

“이게 바로 효율이지. 데리고 산책이나 다녀와. 가서 소리지르는 거 잊지 말고. 나 세오르그 오스텐, 이건 절대 하지 말고.”

-윽.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존재를 스스로 잊어먹게 된단 말입니다.

“육신이 있으니 안 해도 괜찮을걸.”

-정말입니까?

“몰라. 이론대로면 그렇겠지.”

-모르시는 겁니까······.

오리가 날아올랐다.

그 뒤로 새도 아닌 기묘한 것이 따라붙었다.

-다른 데로 새지 말고 내 뒤만 따라오렴.

오리가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딱딱! 치라누크가 불만스러운 듯 이빨을 두들기더니, 두둥실 떠올라 오리의 앞으로 날았다.

-아이, 씨. 앞에 말고 뒤에! 뒤에 따라오라고!

치라누크가 못 들은 척, 저들끼리 바글거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주인께서 따르라니 따르긴 하겠지만, 말을 곧이듣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아오, 진짜! 말 더럽게 안 듣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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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전쟁이었다.

야만족과 왕국군의 전쟁이었지만, 정작 둘 모두 자신이 누구와 싸우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야만족은 괴물을 몰고 오는, 심지어 말까지 하는 오리에게 시달렸다.

기껏 해치우면 또 한 마리가 나타나 괴물을 몰아왔다. 동시에 뼈를 싹틔워 가시가 돋으니 계속해서 전사들의 피가 흘렀다.

원정군 역시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야만족과의 일전을 위해 한데 뭉쳐 진격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발견되는 것은 전투의 흔적이며 야만인의 참혹한 시체 뿐이었다.

그러니 천천히 호수를 향해 진격해 나갈 뿐.

“젠장, 대주술사! 도대체 흰오리는 어떻게 된 거요! 그놈에게 벌써 전사대 몇이 깨져나간 줄 아나!”

“벌써 바깥 놈들의 군대가 하루 거리까지 밀고 들어왔소! 대계를 당장 실행하시오!”

대주술사 알루가 머리를 짚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석궁으로 무장한 전사로 적의 소모를 이끌고, 비장의 철궁전사로 큰 피해를 줄 계획이었다.

이상한 오리 때문에 철궁을 전부 잃어버린 데에다, 선조의 땅을 침범당했다 하여 부족들의 사기 역시 떨어진 지 오래였다.

허나 아직 오우거들이 남았고, 땅에 설치한 함정이 있었다. 그러니 방어하여 대승을 거둘 계획이었건만.

‘빌어먹을 오리! 대체 그게 무어란 말인가!’ 알루가 오리의 탓을 할 때였다.

카라콤의 족장, 요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카라콤의 전사들은 나가 맞서 싸울 것이다!”

“요앙!”

“내 대주술사가 영령의 가호를 받아 기적을 부리기에 믿고 있었으나, 이제보니 순 요술쟁이에 불과했어! 선조의 땅에 저들이 발을 들이게 놓아둘 성 싶은가!”

선조의 땅. 중앙 호수를 야만족이 이르는 말이었다. 가뭄이 와도 마르는 일이 없어 황무지에서 가장 비옥하고 아름다운 장소였다. 가장 강력한 부족만이 선조의 땅에 부락을 차렸다.

“옳소! 데칸 부족의 전사들 역시 카라콤과 함께 할 것이오!”

“이대로 언제까지 적을 기다릴 셈인가! 전사는 싸우는 자다! 우리도 싸울 것이다!”

알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식한 새끼들! 그러니 야만인 소리를 듣지! 내가 누굴 위해 이러는데!’

그러나 알루는 무기를 들지 않은 자였다. 주술을 부리지만 그뿐, 평원의 자손은 전사를 따르지 주술사를 따르지 않았다.

“흠흠, 다들 진정하도록 하거라. 내 그렇다면 이제부터 대계를 위한 제사에 들어갈 것인즉. 그때에 평원을 위해 싸우도록.”

“진작 이랬어야지!”

“드디어 바깥 놈들의 피를 제대로 보겠군.”

족장들의 입이 벌어졌다. 살기어린 미소로 전투를 반긴다.

‘젠장, 적을 죽이고 나를 살려 무리를 도모해야 할 족장들이 저 모양이라니. 무식한 놈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

알루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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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해 올 기세네요.”

“이해할 수가 없군. 어찌 방어의 이점을 버리고 공격을 하고자 하는지.”

“그러니 야만족인 거겠죠.”

왕국군과 야만전사들이 황무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말을 탄 이, 말을 타지 않은 이. 저마다 제 무기를 쥐고 눈을 부라렸다. 그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진형을 유지하라!”

방패를 땅에 대어 단단히 붙들고, 창수가 창을 사이로 내미니 창진이 이미 완성되었다.

“일보 전진!”

보병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진형이 흔들리지 않은 채 전체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군대였다.

야만인들이 장비를 갖추고 무기를 얻은들, 저마다 뛰어난 전사일지는 몰라도 하나 되어 싸우는 법을 몰랐다.

척, 척, 척, 척! 원정대가 점차 앞으로 나아갔다.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돌격 거리까지 서서히 좁혀나가는 것. 그러다 기병이 나서 적을 와해하고, 이후 보병의 총돌격이 이루어지게 된다.

군대와 군대 간의 싸움이라면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띨 것이다. 먼저 돌격하는 편이 불리한 법이었다.

마법사와 궁병이 나서 서로를 흔들고, 우회 부대를 편성해 자리를 조정해나가며 조금이라도 우세를 잡기 위해 수 싸움을 벌였을 터.

그러나 상대는 야만족이었다.

그저 늘어서서 제 무기를 꼬나쥐고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니.

그때였다.

개중 야만인 넷이 든 가마가 나타나니, 높은 의자에 앉아 온통 금색으로 치장한 야만인이 보였다.

이내 어눌한 음성이 크게 울려퍼졌다.

발음뿐만 아니라 문법도 엉망이었다.

“나는 알루, 평원의 영혼의 수호의 받는 요술사이다! 바깥 놈들가 듣다! 너희는 받을 것이다. 오래된 영혼의 분노이다! 보아라 이것이 나의 힘!”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나, 쩌렁쩌렁히 하늘과 땅에 울리니 원정군이 웅성거리며 동요했다.

“땅의 바른 영혼이 바로 내게 편이다!”

먼 곳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금빛의 기둥이 차례차례 솟아오르자, 이내 땅이 두두두 점차 그 떨림을 키워나갔다.

이건 또 뭐야?

대지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마력. 적대적인 것은 아니나 이치와 법도가 점차 흐려지니 시엔조차 이전 생과 지금 삶에서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무언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시엔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예닐곱 살 정도의 아이. 그러나 그 피부가 광택이 없고 각이 져 마치 바위와 같은 형상이었다.

“대지의 정령?”

바른 영혼이란 정령을 말하는 것이었던가. 하지만 어찌? 인간은 정령을 다룰 수 없다. 게다가 대지의 정령은 온순하여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인데.

“히힛. 놀라지 마?”

정령의 입이 열리고, 문득 세상 모든 것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엘딘이, 델피르가, 왕실친위대의 기사들과 다른 참모들이 멀어져갔다.

대지가 물처럼 흘렀다.

소용돌이치고 갈래로 흐르며 교차함과 하나됨에 어떤 법칙도 없었다. 땅이 연신 흐르며 그 위에 선 인간이 뒤섞이고 있었다.

일렬로 짠 방진이 흩어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던 기병이 어느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붙어있던 이가 저 멀리 떨어지고, 떨어져 있던 이들이 등을 맞대고 있으니 앞과 뒤가 좌우가 뒤섞였다.

창을 든 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뺨을 두드려 돌려보니 말의 궁둥이가 눈앞에 있었다.

참모가 정찰병과 마주보고, 사제가 기도를 마치니 어느새 본대 앞 공간에 혼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땅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 위에 선 이들이 계속해서 위치가 바뀌며 빙글빙글 돌았다.

“온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방어를 해!”

야만족들이 일제히 돌격했다. 땅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곧게 달려들었다.

전사의 도끼가 번쩍 들렸다. 태양 아래 그 날이 번뜩였다. 방패병이 방패를 치들었다. 훈련된 병사의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지가 움직였다. 대지가 회전하니 그 위를 딛고 선 방패병이 같이 회전했다.

야만인의 도끼가 떨어지고, 피가 튀었다.

크리스는 취사병이었다.

전투 훈련에 나가선 거대한 솥에 스튜를 끓이느라 바빴다. 눈앞에 야만 전사가 있었다. 손에 쥔 것이 거대한 국자 뿐. 용기를 내 국자를 휘둘렀다. 깡! 손아귀가 저리고, 도끼가 코앞에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노옴!”

엘딘이 노성을 내질렀다.

한 손으로 검을 쥐고, 한 손으로는 왕자의 허리를 꼭 감은 채였다. 이변이 일어나자나마 왕자를 끌어안아 보호해 이 난리에서도 흩어지지 않았다.

검 위로 찬란한 색이 선명했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검을 뿌리자 야만 전사 하나가 세로로 잘렸다. 다시 검을 뿌리자 조랑말과 야만인이 사이 좋게 반토막이 났다.

“내가 바로 검위공이다!”

노장의 고함에 야만인들이 한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낙마하여 바닥을 굴렀다.

심검. 살의가 검이 되어 찌르니, 눈이 마주치면 거대한 칼날이 제게 날아오는 환상이 보인다. 그러나 환상이 아니다. 찔러오는 칼날에 심장이 갈라지니 그 순간 숨이 끊어졌다.

땅이 회전하고 밀려나 엘딘의 시야가 돌고 움직이며 사방에 적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큰 일이랴. 뒤와 앞에 한데로 검이 뻗으니 야만 전사들이 감히 대적이 되지 않았다.

깡! 검과 도끼가 부딪혔다. 은은히 빛나는 도끼. 요앙 역시 오러를 다루는 수준이었다. 헌데도 도끼를 쥔 손이 아려오니, 검을 쥔 기사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라.

카라콤의 족장 요앙이 미소를 머금었다.

바깥 놈 주제에 제법 실력이 있구만. 모처럼 재미있겠는데.

요앙의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나는 카라콤의 족장 요앙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카라콤? 요앙? 카라콤?”

기사가 되물었다.

말은 달라도 전사끼리는 알아보는 법. 요앙이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요앙! 카라콤의 전사 요앙!”

“카라콤!”

그러자 기사가 돌연 투구를 벗어던졌다. 요앙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기사가 말했다.

“카라콤의 사내는 여인을 치는 것을 일생의 치욕으로 여긴다지? 그럼 어디 한 번 여인에게 죽어 봐!”

카레네가 검을 뻗었다.

검이 뻗어온다. 시엔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야만 전사의 눈에 황당함이 맴돌았다.

겨우 작은 나뭇가지가 검을 막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워.”

전사의 뒤로 검은 형체가 떠올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오른다. 전사가 비명을 지르고, 이내 눈을 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등판이 까맣게 탄 잿더미가 되어있으니 속까지 고루 잘 익었으리라.

시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군과 아군이 뒤섞여 엉망이고, 적은 바깥에 있으나 계속해서 안과 밖이 뒤바뀌니 난전도 이런 난전이 없었다.

야만족은 땅이 흐르는 영향을 받지 않으니 계속해서 당하는 것이 바로 원정군이라.

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제법 쓸 줄 아는 놈이겠지.

그러나 준비한 것이 고작 이 정도에 그친다면, 진정 강대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리라.

과거 흑마법사의 전쟁이 바로 한 명과 군대의 싸움이었다. 난전이야말로 가장 익숙한 무대였으니.

시엔의 눈에서 검은 기운이 올올히 풀려나왔다.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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