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4] >
다른 마법과 마찬가지로, 한데 묶어 흑마법이라 이를 뿐 그 안에 계파가 여럿이었다.
세오르그 오스텐은 리치의 강신체가 아닌 산 육체, 특히 아름다운 육체를 얻기 위해 연구를 해왔다.
그래서 그녀의 실력은 대개 피와 뼈를 다루는 데에 있었고, 그 다음이 마수 소환이었다.
그나마 마수도 강력한 개체는 부리지 못하고 자잘한 것을 여럿 부리는 정도에 그쳤다.
성유해가 있었을 때는 그 마력의 증폭이 압도적이라 수천이나 되는 숫자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본인이 가진 마력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외엔 영 재능이 없으니, 망령술 방면에는 견습생만도 못한 실력이었다.
‘흥. 세상에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선배님 빼고.’
세오르그는 시엔의 정신 세계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다. 그 광대한 정신 세계라니. 세오르그가 감히 꿈꿔본 적도 없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아득한 경지였다.
그걸 생각하면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 반푼이 흑마법사였는지 깨닫게 된다. 겨우 좋은 도구 하나 얻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새삼 시무룩해질 수밖에.
“워워. 이웨. 코이웨.”
멍청하게 생긴 야만인 하나가 손을 내밀었다. 뭘 했는지 이마에 흙을 잔뜩 묻히고는, 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품을 벌렸다.
세오르그는 단지 한 명의 흑마법사로 미숙할 뿐이었다. 그것도 흑마법사 중 가장 위대한 이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감히! 네 주제도 모르고 이 세오······.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시엔이 이름을 밝히지 말라 명했다. 버릇이라 튀어나오고 나니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세오르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오오옷! 그 얼굴로 감히 이 몸을 유혹하려 드느냐! 프 라뎃싸! 아크흐 라 세올! 카하마!
세오르그의 정신 세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시엔의 통로에 비하면 앙증맞아 귀여운 수준의 심연이었다.
그 사이로 한 떼의 미꾸라지들이 헤엄쳐 들이닥쳤다. 손가락만한 길이의 작은 미꾸라지들이었다.
이내 정신 세계가 현상계에 실체화했다.
“우왓, 우와악!”
야만인의 머리 위로 후두둑 미꾸라지들이 쏟아져내렸다. 야만인이 머리를 움켜쥐며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한참 비명을 지르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제야 바닥을 보니 온통 작은 생선이 깔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카쉐?”
문득 생선의 옆구리에 무언가가 비죽히 튀어나왔다. 긴 털실같은 것이 삐져나와, 양옆으로 펼쳐지니 잠자리와 같은 날개로 변했다.
베히아드라.
부정 세계의 독특한 생태 중, 어류와 곤충의 중간쯤으로 구분되는 작은 마수였다. 물에 있을 때는 헤엄을 치고, 뭍에 나오면 날개를 펼쳐 날았다.
아가미나 눈구멍 등, 약한 곳으로 파고들어 속살을 파먹고 피를 마시는 흉악한 놈으로, 한 개체는 사람이 밟아 터뜨릴 정도로 약하니 거대한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마수였다.
베히아드라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바로 앞에 향기로운 살내를 풍기는 먹이가 있었다. 심지어 비늘도 없고 단단한 껍질도 없으니 모든 곳이 물어뜯을 곳 천지라.
베히아드라가 야만인을 덮쳤다.
가죽옷을 종이장처럼 뚫어버리고, 생살에 그 주둥이를 박고 꿈틀거리니 이내 몸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췄다.
“끄아아악!”
산 채로 속이 뜯어먹히는 고통에 야만인이 입을 벌려 비명을 질렀다. 베히아드라가 어찌 놓치랴. 이리 들어오라 절로 벌려준 꼴이었다. 베히아드라가 신이 나 그 속으로 연신 파고들었다.
“우웁! 웁! 웁!”
살 아래 베히아드라의 꿈틀거림이 선명하다. 야만인의 몸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전신에 구멍이 뚫려 수백의 베히아드라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가라, 저기 너희의 먹이가 있다. 이 세, 음. 내가 함께하리라! 먹고 뜯어 축제를 즐겨라!
오리가 날개를 펴 날아올랐다. 그 주변으로 베히아드라가 새까맣게 몰려 함께 날았다. “저, 저게 뭣이야!”
“정령, 정령이 노하신 검다!”
“바깥 것을 함부로 들여놓아서······”
“정령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무기들 들어!”
게라발이 버럭 외쳤다. 그러나 겁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러 해 약탈을 나가 세상을 보아왔지만, 저 비슷한 것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러나 그는 대장이었다. 대장은 가장 용맹한 전사니 여기서 주눅들 수는 없다.
게라발이 검을 휘둘렀다. 삭삭 여린 것이 베이는 촉감이 연신 전해져왔다. 하지만 숫자가 많았다. 베히아드라 한 마리가 팔뚝에 달라붙어 이빨을 박아넣었다.
“크악! 빌어먹을!”
시큰한 고통이 치밀었다.
게라발이 손으로 베히아드라의 몸통을 쥐어뜯었다. 미끈한 몸통이나 억센 아귀힘으로 떼어내니 쩌적, 불쾌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머리 잃은 베히아드라의 몸뚱이가 손 안에서 뭉개졌다. 남은 머리는 아직도 팔뚝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지독하지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한 마리, 네 마리, 열 마리. 베히아드라가 계속해서 살을 파고들었다. 괴물이 제 몸 사리지 않고 달려드니 겨우 팔 두개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라발이 검을 내던지고 땅바닥을 굴렀다.
-스하-레시하-카흐 시아 세올!
사특한 주문이 울려퍼졌다.
땅에서 가시들이 솟구쳤다. 흰 뼈로 이루어진 가시들이었다. 더러는 구르는 야만족을 찌르고, 일부는 등을 보이는 야만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베히아드라를 위한 연회가 펼쳐졌다.
사람과 말이 합쳐 오십. 신선한 피와 무른 살. 부정 세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베히아드라가 끝없는 식탐을 발휘했다.
한 무리의 야만인 전사가 핏기없는 시체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베히아드라가 아직 부족하다 날아올라 뭉쳐 춤을 추며 일렁거렸다.
-자, 가자! 가서 털가죽을 뒤집어쓴 것들의 살을 파먹고 그 생피를 마시자꾸나! 이것이 나의 계약이다!
오리의 말에 베히아드라가 한데 뭉쳐 날았다. 오리가 다시 말했다.
-잠깐! 이것들아, 그쪽 말고. 이쪽. 이쪽이다! 털가죽 뒤집어쓴 것들을 먹으라고!
베히아드라의 군체가 움찔하며 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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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술사 알루의 천막.
“대주술사!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전사가 계속해서 죽어가나고 있지 않소! 도대체 날아다니는 우죠대가 대체 무엇이란 말요!”
우죠대는 야만족의 말로 미꾸라지를 뜻했다. 요 사흘, 벌써 일곱 개의 별동대가 참변을 당해 생존자가 손에 꼽았다.
생존자가 말하기를, 작은 우죠대 날개를 달고 하루살이 떼처럼 까맣게 몰려 달려들었다고.
산채로 파고들어 사람을 속살을 먹는데, 작고 민첩하여 전부 잡을 수 없고 또한 막을 수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증거도 있었다.
살아남은 이의 피부를 째고 날개 달린 우죠대를 꺼내 평원의 자손들이 전부 그 괴물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진정 정령께서 노한 것이오? 바깥 것들의 물건을 함부로 들여놓았기에?”
“허튼 소리! 전부 바깥 것들의 얄팍한 술수다! 그에 흔들려서는 아니 되느니!”
“하지만 내 그런 끔찍한 생물이 있다 들은 적이 없소!”
“에에잇,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알루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황금빛 광채가 서려 후광으로 떠올랐다. 평원의 영령이 바로 저러한 모습일까.
“흠흠.”
“전사들의 사기가 영 말이어야지······”
그러나 족장들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았다.
위엄과 권위는 알루가 부리는 신비한 주술, 그리고 그로 인한 승리의 약속에서 나왔다.
겨우 바깥 놈들 몇을 해치우고는, 오히려 계속해서 변고가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알루가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멍청한 놈들! 평원에도 왕이 필요하거늘! 이러니 야만적이다 소리를 듣지!’
평원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원한 지배체계가 없어 뭉쳐도 그뿐 다시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눈으로 성과를 보여줘야 할 일이었다. “젠장! 내 철궁전사들을 움직일 것이오! 사특한 수작 따위 평원의 진정한 전사들 앞에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보여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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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는 한데 뭉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척후를 뿌려 앞뒤를 조심히 살피다. 그렇게 조금씩 황무지의 중심을 향해 진군해 나갔다.
황무지의 중심에는 넓은 호수가 있었다.
왕국의 첩보로는, 가장 세력이 강한 부족만이 호수를 끼고 부락을 차린다고 했다.
야만족이 한데 뭉쳐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상, 결국 호수에 집결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보고드립니다. 척후가 또다시 적의 잔해를 발견했습니다. 증상을 같습니다. 전신에 구멍이 뚫리고, 남은 피가 없어 창백한 시체들입니다.”
“흐음.”
“괴질이라도 도는 게 아닙니까?”
“야만족만 걸리는 괴질인가?”
귀족들이 머리를 맞댔다.
그렇다고 딱히 어떤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시엔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베히아드라. 괜찮은 선택이지. 마수 소환이 미숙해도 다루기 쉽고.’
마수의 크기가 곧 술자의 실력이었다. 그러니 작은 마수를 얕잡아보는 흑마법사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큰놈은 큰 대로, 작은놈은 작은 대로 그 쓸모가 있는 법이었다.
베히아드라는 연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일단 이빨을 박아넣으면 사람이 당황하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러니 수백이 뭉쳐 습격하면 적은 인원으로는 막아내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신관 하나만 있어도 성력 앞에서 사르르 녹아 몰살을 당하는 데에다, 군대와 같이 사람 수천이 모여 베히아드라와 동수를 이룬다면, 그때부턴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시엔의 시선이 흐레이그의 대공자를 쫒았다.
“샹라, 뭔지 모르겠어?”
“예, 작은 주인님. 저 또한 짚이는 것이 없습니다만.”
“큭. 대체 뭐야? 싸우지도 않고 왜 저들끼리 알아서 죽어주냔 말야. 뭐, 잘 된 일이기는 한데······.”
연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페시번이 연기를 능숙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생각할 수도 없었다.
흐레이그의 배후가 있어 흑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면, 페시번이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리치가 잘해주고 있는 모양이니. 얼마나 더 흔들어야 제대로 반응이 나오려나.’
일종의 낚시였다.
미끼를 풀어 살살 휘둘러, 적이 약이 올라 튀어나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상대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은, 아무리 잘 싸워도 비기는 데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 내 능력은 숨기여,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여 아는 것이 싸움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패가 있으면 빨리 꺼내는 게 좋을 거야.’
시엔이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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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에 양 끝에 두꺼운 밧줄이 매였다. 그 가운데에 나무를 걸고 연신 뒤로 잡아당겼다.
철봉이 천천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거대한 활이었다.
거목으로 짠 몸체에, 철로 된 활몸이 단단히 붙었다. 복잡한 톱니가 들어차, 손잡이를 돌려 시위를 당겼다.
곧게 패인 틀 위에 육중한 철창이 올랐다. 그 두께가 성인의 허리통과 같으니, 철창이라기보단 철 뭉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발리스타라 불리는 병기였다.
그 크기는 천차만별이나, 이만한 정도라면 인마를 갈며 날아가 성벽에 박히고 성문을 뚫어버릴 위력이 있으리라.
“놈이 보인다! 조준해!”
철궁전사장의 외침에, 야만인들이 열심히 핸들을 돌렸다. 끼릭끼릭끼릭. 부품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발리스타의 거체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1번 철궁 준비 완료입니다!”
“2번 철궁 준비 완료입니다!”
“3번 철궁 준비 완료입니다!”
철궁전사들이 연신 준비 완료를 외쳤다.
잘 훈련된 군대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복장은 야만족이나, 그 정연한 질서는 절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1,3,5번 발사!”
“1,3,5번 발사!”
철궁전사가 깃발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일사분란한 복창이 이어졌다.
퉁! 육중한 발사음이 울려퍼졌다.
강철 활대가 일순간 펴지며, 시위에 걸린 철창이 허공을 날았다. 발사구의 홈을 따라 회전력을 얻어 강맹하게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쐐애애액! 대기를 찢는 소리가 요란했다.
베히아드라를 이끌고 저공비행을 하던 오리가 깜짝 놀라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쐐애애액! 오리의 물갈퀴 아래로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퍽 거리가 있었으나, 회전하는 철창이 내는 와류에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베히아드라의 군집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뚤렸다. 그 구멍이 세 개나 되었다. 일격에 베히아드라 수백이 잘 갈린 살점이 되어 분분히 흩어졌다.
-꺄악! 맙소사! 세상에!
오리가 사람의 말로 비명을 질렀다.
“2,4,6번 발사!”
“2,4,6번 발사!”
2차 포격이 뒤를 따랐다.
베히아드라의 군집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컥! 발리스타! 야만인이 발리스타라니! 어찌하여! 허나 소용없다!
오리의 입에서 왈칵 토사물이 튀었다. 마물이 소멸되어 그 반동이 몸을 덮친 까닭이었다. 이전에는 성유해가 그 반동을 막았으니 새삼 신물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 뼈 하나만 달라 하면 주시지 않을까. 큰 건 바라지도 않으니 발가락이나 손가락 한 마디, 아니면 뼛조각이라도······.
오리가 엉뚱한 생각을 했다.
놀라 정신이 흩어지고, 마물 소멸의 반동으로 속이 진탕이 된 상황. 그러나 흑마법사의 이성은 아직 문제가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발리스타란 재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무기였다. 그 장력만큼이나 막대한 힘이 들어가니, 공학의 힘을 빌어 사수가 한참 애를 써야 겨우 다시 쏘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러나 틀린 판단이었다.
-오우거!
두터운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인간형의 몬스터였다. 그 힘이 생나무를 통째로 뽑아 휘두르니, 사람 수백이 모여도 당해낼 수가 없다.
족쇄를 찬 오우거들이 나타나 발리스타의 시위를 당겼다. 그 강맹한 힘에도 쉬이 당겨지지 않으니 대체 얼마나 강력한 장력을 가진 활대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어째서! 몬스터를 어떻게!
오리의 상식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부정 세계의 마수는 계약으로 그 심상을 연결하여 흑마법사가 부리는 것이지만, 인간 세계의 몬스터는 하나같이 흉포하고 적대적이라 절대로 길드는 방법이 없었거늘.
-서둘러라! 저 하찮은 것들을 빨리 치워야 한다! 서둘러!
오리가 날고 베히아드라가 그 뒤를 따랐다.
야만인들의 눈동자에 황당함이 서렸다.
저 맨 앞에 것은 뭐야? 흰오리?
오리가 부리를 열었다. 그러자 인간의 목소리가 문득 사방에서 울러퍼졌다.
-이 놈들! 이 하찮은 것들! 이 세오, 아오! 이 몸께서 너희에게 파멸을 선사하리라! 어떤 수작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이. 나, 이 몸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젠장! 긴급 발사!”
“긴급 발사!”
철궁전사장이 급히 명령을 내렸다.
아직 완전히 장전이 되지 않은 발리스타가 성마르게 철창을 쏘아냈다. 그 힘이 이전에 미치지 못하나, 가까우니 수많은 베히아드라가 일시에 갈려나갔다.
-컥, 이 놈들!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이! 이 위대한 나, 이 몸, 나! 으아! 답답해 죽겠네! 감히이! 가
오리의 눈가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스하-레시하-카흐!
땅에서 뼈 가시들이 솟구쳤다. 남은 음차원 에너지를 있는대로 전부 쏟아부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무리해 끌어다 쓴 일격이었다.
발리스타 둘이 일격에 박살이 나고, 사수들이 꿰어 허공에 들렸다.
“귀신 들린 오리다!”
“선조가 노하신 게야!”
뒤이어 이젠 숫자가 얼마 남지 않은 베히아드라가 야만인들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악!”
“떼 줘! 떼어 달라고!”
일부 야만인들은 등을 돌려 도망쳤다. 야만인은 미신에 약했다. 훈련받아 군대의 흉내는 제법 잘 내었으나, 그 본질은 여전히 야만인이었다.
“젠장, 활을 쏴! 맞춰! 저걸 죽이라고!”
철궁전사장이 악을 쓰며 손가락질을 했다. 제게 달라붙는 베히아드라를 손으로 떼고 찢어 내팽개치며 기어코 활을 꺼내 오리를 겨누었다.
-크하하! 죽어! 감히 이, 나, 이 몸에게 도전하려 한 결과다! 너희에겐 자비로운 죽음조차 아깝다! 크하하핫! 하하하하!
오리가 광소를 터뜨렸다.
제 힘에 취해 주변을 살피지 않는 꼴이었다. 철궁전사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심한 사자는 들개에게도 물려죽는 법.
철궁전사장이 시위를 놓았다.
-크핫, 크하핫, 크하······. 아, 이것도 꽤 힘든데, 악!
오리에 목에 화살이 박혀들었다. 그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화살대가 깊숙이 파고들어 깃대가 목 가운데 걸려 겨우 멈췄다.
-아아······.
오리가 땅으로 추락했다. 목을 꿰뚫려 목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세상 다시없을 끔찍한 고통이 영혼을 쥐어짰다.
짐승의 몸뚱이가 의외로 질겨 지옥과 같은 끔찍한 시간이었다. 일 초가 일 분처럼 느리게 흘렀다.
“빌어먹을 사악한 것이!”
철궁전사장이 베히아드라를 쥐어짜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이내 오리의 목을 움켜잡고 치켜들어 그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쿠앙, 네 목숨을 거둔 전사다! 영원히 마른 땅에 떨어져 목마름에 영원히 고통받아라!”
영원히 마른 땅은 야만인들이 믿는 지옥이었다. 그곳엔 물 한 방울이 없어, 떨어져 죽지 못하고 영원히 목마름에 울부짖어야 한다고.
철궁전사장, 쿠앙이 오리의 대가리를 손으로 잡았다. 목과 대가리를 잡고 힘차게 당기니 버티지 못하고 둘로 분리되었다.
오리의 눈빛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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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엔? 왜 그래?” 델피르가 시엔의 안색을 살폈다.
시엔이 눈을 찡긋해보였다.
“전하.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 그거구나. 응. 다녀와.”
산 자라면 응당 생리현상이 있으니, 귀족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델피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엔이 참모 천막을 나와 외진 곳으로 향했다.
물론 진중 화장실을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갑자기 정신 세계에 끼어든 이물질 때문이었다.
-선배님! 이 세오, 아 괜찮구나! 세오르그 오스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흐아, 죽는 줄 알았어요! 으으.
“리치가 그럼 죽었지 살았냐?”
-윽. 선배님. 저 많이 아팠는데요, 아파서 죽는 줄 알았는데요. 이 세오르그 오스텐에게 아주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 주시면······
“너 하는 거 봐서.”
-예, 선배님······ 으우······
리치의 목소리가 흐물흐물 맥아리가 없었다.
세오르그의 영혼은 원래 보존구에 담겼으나, 성유해와 융합하여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 성유해가 바로 시엔의 뼈였다.
성유해는 에너지로 화하여 시엔에게 흡수되었고, 리치의 영혼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허수 상태가 되어 시엔의 정신 세계에 묶였다.
워낙에 시끄러운 데에다, 정신 세계에 타인을 두는 것도 질색이었다. 그래서 잠시 오리의 몸뚱아리에 리치의 영혼을 심었다.
그러나 오리의 숨이 끊어졌다. 리치의 영혼이 제가 속한 장소로 돌아왔다.
-······저, 그럼. 선배님. 이제는 어떻게 하시나요? 제가 여기에 돌아와 버렸는데.
시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보급에 오리가 한두 마리일까.”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