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유료연재 첫번째 편입니다! [3] >
원정군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몇 번의 간헐적인 교전이 있었다. 그러나 원정군에선 사망자 몇 명, 그리고 부상자나 조금 몇 나왔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할 일 없는 군종 사제가 나서니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반면, 떨어진 야만인의 머리가 백여개에 달했다. 당연히 원정군의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원정군이 더욱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델피르 왕자를 중심으로 수비를 갖춘 본대가 진군하고, 각 귀족이 지휘하는 자율 공격대가 오가며 야만족을 토벌하는 식이었다.
팬틴 르누와는 르누와 자작가의 셋째였다. 르누와 자작가는 2왕자파에 속하니 그저 생색을 내기 위해 기병대 일부를 파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지휘로 온 팬틴 역시 계승권에선 일찌감치 밀려난 처지.
‘하지만 이젠 달라!’
팬틴의 눈에 야심이 서렸다.
이번 원정에서 공을 세워 델피르 왕자에게 줄을 댈 수 있다면. 그러나 왕실에 직접 선을 잇기엔 팬틴은 너무 피라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엔 티란디스라면? 왕자가 형제처럼 총애하며, 왕비가 밀어주는 유력한 차기 티란디스가 아니던가.
1왕자가 대관을 하고 나면 왕국의 정세 역시 뒤바뀌리라. 그러니 지금 선을 대면 가문에서의 영향력도, 그 이후에 가문의 주인을 차지하는 것도 그저 희망만으로 끝나진 않으리라.
바실레 오세 역시 같은 처지였으며,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생색내기로 찾아온 두 부대가 뭉쳐 그럴듯한 병단이 하나 만들어졌다.
“전방에 부락이 있다는군.”
“또 비어있는 건 아니겠지?”
“척후 말로는 연기를 얼핏 본 것 같다더군.”
“드디어 야만족 놈들의 꼬리를 잡았구만.”
“기회가 왔지.”
두 청년이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야만족은 약해빠진 겁쟁이들이었다. 부락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은 지가 오래다. 그러니 야만족의 모습을 구경하기가 더 힘든 지경이었다.
“가자고, 친구.”
“그럼. 가야지. 가고 말고.”
두 청년이 주먹을 부딪쳤다.
가문에서 찬밥 신세라 동병상련으로 이미 우정이 싹튼 두 청년이었다.
기병이 반이요, 오세 가문의 예비 기사단원이 절반이었다. 두 청년이 선두에 서서 말을 달렸다. 기병이 누런 풀잎을 날리며 황무지를 질주했다.
야만족의 부락이 보였다. 노파 하나가 놀라 달아나며 소리를 지른다. 뒤이어 천막에서 야만족들이 뛰쳐나오고, 기병을 보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잡목 따위를 엮은 울타리는 기병 앞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 기마의 발에 채여 간단히 박살이 나고, 기병이 부락으로 들이닥쳤다.
“모두 베어라! 왕국을 위해 야만족을 토벌하라!”
팬틴이 검을 치들었다.
검 끝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순간이었다. 말의 발목이 꺾이고, 몸이 앞으로 홱 쏠렸다. 말이 앞으로 쏟아졌다. 팬틴이 앞으로 튕겨 나와 지면에 격하게 입을 맞추었다.
우득. 팬틴의 목이 꺾였다. 뒷통수가 제 등에 닿았다.
즉사였다. 팬틴은 제가 죽는지도 몰랐다. 그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무와 나무의 밑동을 매어놓은 밧줄이었다. 야만인이 양팔을 들어 띄우자 기마의 발이 걸린 것이다. 돌진하던 힘이 남아 기마의 엉덩이가 공중으로 치솟으며 거꾸로 넘어갔다.
“젠장! 정지! 멈춰! 함정이다!”
바실레는 운이 좋았다.
밧줄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아, 몇 기를 고꾸라뜨리곤 끊어져 버린 탓에 목숨을 건졌다.
“빌어먹을 놈!”
바실레가 밧줄을 놓고 줄행랑을 놓는 야만인을 쫒았다. 검이 야만인의 등판에 틀어박혔다. 고삐를 채니 기마의 편자가 야만인을 짓밟아 잘게 다졌다.
“이런 빌어먹을! 빌어먹으을!” 바실레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당하는 놈이 얼간이인, 가장 기본적인 대 기병 함정이었다. 그러나 야만인은 전략전술에 무지한 놈들이 아니던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상상조차 못 하여 당한 일이기도 했다.
바실레가 말에서 내려 팬틴을 끌어안았다.
“젠장, 팬틴! 이렇게 가다니! 이 복수는 내가 이루겠다!”
서로 벗이 된 것이 오래지 않았으나, 같은 처지 같은 생각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마치 오랜 벗처럼 기꺼웠으니, 이제는 그 마음이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뭣들 하느냐! 너희의 주인을 정중히 모시지 않고!”
르누와의 기병이 다가와 시체를 수습했다.
바실레가 다시 외쳤다.
“오세의 기사는 말에 오르라! 르누와의 병사들이여, 복수를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부락을 우회하여 저 잡놈들을 주살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병이 부락을 빠져나가 크게 돌았다. 함정이 하나 있으니 둘은 없으랴. 아예 부락 밖으로 도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사람과 기마의 기동력은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바실레의 기마가 이내 도망치는 야만족의 꼬리를 잡았다.
“다 죽여!”
바실레가 악을 질렀다.
굳이 바실레가 명령하지 않더라도, 기마대는 이미 분노에 차 있었다. 칼날과 발굽이 도망치는 야만인들을 유린했다. 연신 내장이 쏟아지고 다져져 땅에 스며들었다.
바실레가 연신 소리를 질렀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한 놈도!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 다 죽이란 말이, 억.”
바실레가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사슬 갑옷을 뚫고 틀어박힌 화살대가 보였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폐가 뚫려 호흡이 막히니 힘이 풀려 그래도 말에서 미끄러졌다.
“흐어, 흐어어.”
무언가 외쳐보려 하지만, 그저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
‘이게, 이게 왜······’
바실레의 시선이 화살깃에 못박혔다.
나무를 깎아 붙인 깃은 일반적인 궁사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십자궁, 석궁이라 불리는 활을 본뜬 기계로 쏘아내는 물건, 볼트였다.
바실레의 시야가 부옇게 번졌다. 초점이 흐려 뭉실한 세상에서, 계속해서 쓰러지는 기마대의 모습이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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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이라구요?”
“이걸 좀 보게나.”
엘딘이 화살을 내밀었다. 일반적인 화살보다 한 뼘은 짧은 것이었다. 게다가 나무깃이라니. 시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군요.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누군가 조달을 했겠지. 이건 예삿일이 아닐세. 적어도 대영주, 아니면 왕국 차원에서 개입이 있었던 걸세.”
석궁이라는 물건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활은 제대로 쏘는 데에 일 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나, 석궁은 사흘을 배워 바로 실전에 능숙히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이미 화살을 재워놓으니 언제든 원하는 때에 방아쇠를 당겨 발사할 수 있고, 활을 당기지 않으니 자세에 구애받지 않고 좁은 곳에서도 운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연사할 수 없고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나, 2인 1조로 사수와 장전수를 나누어 석궁 두 정을 붙이면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는 단점이었다.
물론 숙련된 궁사는 바람을 읽어 자유자재로 목표를 맞히고, 분당 십여발 이상을 쏘니 그 화력에 비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궁사는 재능을 가진 이가 여러 해를 익혀야 하지 않던가.
그러니 석궁의 제조와 유통은 대륙의 어느 왕국이건 왕명으로 엄격히 다스리는 것이었다. 또한 영주들이 어떻게든 왕가의 눈을 피해 마련해 놓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의외로 정교한 기계라. 그 완성도에 따라 정확도며 위력이 천차만별이라, 제대로 된 석궁의 가격은 무척이나 비쌌다.
어찌 야만족이 가지고 있단 말인가. 시엔이 볼트를 살펴보곤 말했다.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네요. 야만족이 이걸 만들었을 리는 없겠어요.”
“제련을 못 해 중병기 따위나 휘두르는 것들이 석궁을 만들 수가 있을 리가 없지.”
“골치 아프게 되었군요.”
석궁병대를 상대하려면 보병대가 피해를 무릅쓰고 전진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중기병이 필요했다.
중기병.
두꺼운 마장과 판금으로 무장한 기병대였다. 화살 따위 아예 무시하고 달려나가는 전장의 파괴자들. 중기병의 창돌격은 이미 방진을 갖춘 보병대라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기사단보다도 많은 금화를 잡아먹는것이 중기병이었다. 게다가 야만인을 상대한다 하면 또 쓸모가 없지 않은가.
결국, 육천의 군대 중 전혀 가진 바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석궁이 얼마나 되겠는가.”
“육천의 군대가 있으면 갓난아이라도 야만인을 토벌할 수 있죠. 그냥 뭉쳐 전진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문제는 그 피해가 얼마인가 아닙니까.”
“그렇지. 쯧. 일이 고약하게 되었어.”
야만족이 불순한 움직임을 보였기에 짜인 원정이었지만, 그 이전에 델피르의 왕태자 책봉을 위한 공훈 쌓기라는 목적이 있었다.
병력이 적으면 모르되, 오히려 많기에 더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일개 야만족을 토벌하는데 군대를 잃었다? 공과는커녕 무능함만 드러내는 결과가 되리라.
“일단 독립 작전 부대를 전부 불러들이세요. 일단 한데 뭉쳐 진을 짜고, 혹시 모르니 4교대로 야간 방어를 세워야겠어요.”
검위공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글쎄.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석궁을 가졌어도 야만인들일세. 차라리 기병을 한데 모아 진격하고, 본대가 뒤따르는 편이 피해가 적지 않겠는가.”
검위공의 말도 맞았다.
야만인은 대부분이 기마병력에, 석궁을 갖춰 궁기병으로 치고 빠지는 운용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보병으로 막기는 하겠으나 쫓을 수가 없고, 기병이 추격하더라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석궁은 뒤로도 손쉽게 발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오래 끌수록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속전속결, 빠르게 끝내버리자는 것이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전략의 기본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흠.”
“석궁이 몇 정이나 있는지는 모릅니다. 백여 정에 불과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천정이 넘는다면요?”
“석궁이 천이라니. 그게 말이 되겠나?”
“최악의 상황 말입니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석궁을 가졌으니 다른 것이 없다 하겠습니까? 야만족이 체계적인 전투 훈련으로 전사가 아니라 군대를 만들었다면? 아니면 그 지휘관이 전략전술을 배웠다면요? 함정을 설치해 놓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마법사를 갖췄을지도 모르죠.”
검위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어찌 야만인이 그럴 수가 있겠나? 그 정도 전력이 있다면 벌써.”
검위공의 인상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천운이 따랐다고 해야 하나. 자네 말대로 최악의 상황이라면, 올해 겨울에 참사가 일어났겠군.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라도. 놈들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게야.”
“뭐, 서두르시려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쪽은 피해만으로도 승리가 승리가 아니니 말일세. 허나 자네 말대로라면 오히려 패배를 당할 수도 있겠으니.”
검위공이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자네도 참 대단하이. 보면 볼수록 내가 사람 하나는 참 잘 보았다 싶어. 야만인이 그러하겠다 누가 생각하겠는가?”
“왜 또 갑자기 얼굴에 금칠을 해주십니까?”
“내 진심으로 하는 소릴세. 이 나이를 먹고 보니,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대단하다는 걸 알겠네. 그게 설령 아주 간단하고 당연하다 해도 말이네.”
엘딘의 표정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태도로 칭찬을 하니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게다가 시엔의 가정은 이미 겪은 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우드란드의 역병 사태에서, 적은 리치와 소드 마스터를 부리지 않았던가. 리치는 조금, 아니 많이 모자란 곳이 있어 쉽게 구워삶았겠다 싶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아니다.
그 실력만으로도 대륙 어디서든 작위를 받아 명예롭게 살 수 있는 이가 아니던가.
물론 용병이라 하여 괴팍한 놈이었지만, 그렇다면 대체 얼마의 금력, 또는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치를 수 있는 배후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티란디스를 노린 것이 아니었어.’
일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머리가 트였다.
일련의 사태들. 광산 분쟁의 헤인트로부터 역병, 지금에 이르기까지.
티란디스를 노려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구인가. 지금까지는 영향권을 맞댄 흐레이그 가문이 유력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건 작은 이유였다.
델피르가 왕자로 남고, 2왕비 태생의 2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흐레이그의 권력은 제후에 그치지 않으리라.
‘하지만 흐레이그의 힘으로 소드 마스터를 부릴 수는 없지. 리치, 그리고 내 뼈도.’
그러니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다.
흐레이그가 손을 잡았건, 아니면 그 세력에 복속하여 아래에 있건 어차피 같은 뜻이었다.
“갑자기 왜 말이 없나?”
“흐레이그를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그렇죠. 정확히는 흐레이그가 아니라, 그 뒤에 거대한 세력이 있다고 봐야겠는데요.”
“증거가 있는가?”
“야만족을 지원해 누가 이득을 보겠습니까?”
“황무지에 접한 왕국이 우리뿐이던가. 우리가 해를 입으면 다른 왕들은 기뻐하겠지.”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필이면 이 시기에요. 델피르 전하께서 왕태자에 오르시지 못하시면, 누가 가장 이득을 볼까요?”
“그야······. 허나 흐레이그는 공신가네. 아무리 권력을 위한다 한들 타국과 통하였겠는가? 외세를 끌어들이진 않았을 걸세.”
“왕비님께선 타스테스테 왕국 출신이시지요.”
엘딘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면, 왕비 역시 제 친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시엔이 다시 말했다.
“어떤 이들은 권력을 위해 무엇이든 하곤 하죠. 피붙이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 하던가요.”
“허허.”
“그저 조심하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리 경계하여 마음속에 두시면······.”
“알겠네, 알겠어. 맞네. 맞아.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 가장 정신을 차려야겠구먼. 적의 앞마당에 서 있는 셈이니.”
엘딘이 새삼 시엔을 다시 쳐다보았다.
“자넨, 음. 자네도 권력을 바라는가?”
“갑자기 뭡니까?”
“흐레이그의 반대편에 티란디스가, 정확히는 시엔, 자네가 있지.”
천 년 전, 왕국이 왕자의 것이었다. 또한, 왕자가 왕국의 것이었다.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다. 내 백성을 돌보고 또한 백성이 나를 사랑하리라.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더는 왕자가 없으니 시엔 티란디스가 남았을 뿐. 시엔이 대답했다.
“일 없습니다. 티란디스면 충분하죠. 그랬으면 진작에 검위공의 제자라 온 대륙이 떠들게 만들었을 겁니다.”
“허면 무엇을 바라는가?”
“전하께서 절 의지하지 않으십니까.”
어린 왕자가 자신을 의지하며 사랑하니, 그 또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첫 인연은 사소한 연민이었으나, 사람의 관계란 그렇게 작은 씨앗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허허.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가 않지. 새삼 내 잘남에 감탄하게 되는구먼.”
“농담이시죠? 농담이면 기꺼이 웃어드릴 수 있겠는데요.”
“진담일세. 그나저나, 심각한 이야기를 했더니 괜히 몸이 쑤시는 것 같으이. 이참에 ······”
“대련은 됐습니다만.”
“쯧쯧. 이젠 아예 말허리를 끊어먹는구먼. 어째 점점 성질머리가.”
“성질머리 말씀이십니까?”
“내 말을 말지. 쯧쯧.”
엘딘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혹시 삐치셨습니까?”
“삐치긴 누가 삐치나. 자네 말을 들으니 왕자님 곁에 좀 있어야겠다 싶어서 말이야.”
“에이, 삐치신 것 같은데.”
“일 없네.”
엘딘이 그렇게 자리를 떴다.
시엔이 자리에 남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문득 찹찹 소리와 함께 무언가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시엔이 눈을 뜨자, 천막의 입구를 헤치고 오리 한 마리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오리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 선배님? 명상중이셨나요? 혹시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방해를 끼친 것은 아닌지······
“아냐. 됐고. 그래. 이제 밥값을 좀 해야지?”
이제는 노골적으로 흔들어 볼 때였다.
그리고 리치는 거기에 써먹기에 딱 좋은 전력이 아닌가.
-밥값 말입니까? 선배님, 그럼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해온 일들은 대체······
“그걸로 밥값이 되겠어? 계속해서 오리로 있던가 그럼.”
-헤헤, 사실 요즈음 든 생각인데,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헤인트를 본 적이 있던가? 네가 들어갈 몸인데 말이야. 객관적으로 충분히 미적인 부분에서 뛰어나다고 말을 해 줬던가?”
-그 말씀은······
“미인이라고. 대단히 아름답지.”
그러자 오리가 날개로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대답했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 선배님의 가장 충실한 후배가 아닙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맡겨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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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라발은 숨상 부족의 전사였다.
게라발은 바깥 놈들을 천시하고 그 문명을 나약한 것이라 여겼다. 야만족이라면 누구나 비슷하니 딱히 그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깥 놈들의 무구는 달랐다.
“캬. 이건 쥑여준단 말이지. 그지?”
“바깥 놈들이 이런 건 잘 만들지 말임다.”
“워낙에 나약한 것들이니 무기라도 잘 만들어보려 한 거 아님까.”
게라발이 강철검의 자태를 황홀한 눈빛으로 연신 훑어내렸다.
부족의 도끼보다 훨씬 가벼운 무기였다.
자체로도 가볍지만, 더 끝내주는 것은 정확히 중심이 잡혀 더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
덕분에 휘두르면 그 속도는 배에 달하고 그 위력 역시 그에 따랐다.
그런가 하면 날카롭기는 세상에 이런 무기가 없다. 거기에 단단하기로는 부족의 어떤 도끼보다도 튼튼했다. 둘이 부딪혀 오히려 도끼가 상하지 않던가.
“저는 이게 더 마음에 듭니다요.”
“사내라면 휘둘러야지, 그딴 장난감이.”
“크크, 장난감치곤 대단하지 않씀까.”
부하가 석궁을 내보이며 말했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저 석궁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간담이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부족의 쏜다 하는 사수들보다도 강력한 화살을 쏘는 물건이었다. 정확하기는 오히려 사수들보다 더했다.
며칠만 연습하면 아이때부터 활을 다룬 사수가 부럽지 않으니 어찌 세상에 이런 무기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깥 놈들이 전부 석궁을 들었다면, 애초에 약탈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때였다.
“대장! 대장!”
정찰을 나갔던 막내가 급히 돌아왔다.
“뭐야?”
“그것이 말입니다. 구릉 아래에 처음 보는 생물이 있습니다. 혹시 바깥 놈들의 수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흠. 일단 한 번 보자고. 별 거 아니기만 해 봐. 다들 뭐해? 무거운 엉덩이들 들어! 막내가 뭘 봤다잖냐!”
“아이고, 막내가 전사들을 부려먹는구만.”
“별 거 아니기만 해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오로지 막내만 심각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서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저 그렇게 굳어 속으로 빌 뿐이었다.
‘아이고 신령님, 조상님, 영령님들, 제발 별 것이 아닌 게 아니도록 해 주시옵소서.’
전사들이 조랑말을 타고 달렸다.
언덕 위에 이르자 구릉 아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저겁니다!”
막내가 손가락을 뻗었다.
흰 털을 가진 짐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게라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야이 무식한 놈아! 그냥 오리잖아!”
“오, 오리 말입니까? 무슨 오리가 저리 생겼습니까?”
“멍청한 놈! 저건 바깥 놈들이 기르는 오리다! 바깥 놈들이 기르는 오리는 저렇게 생겼다고!”
막내가 아직 약탈을 가 본 적이 없어 흰 오리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게라발이 그걸 헤아려 줄 이유는 없었다.
“하, 이놈 봐라. 아주 빠져가지고. 오리 한 마리에 지금 여기 전사들이 몇이나 달려오게 만들었냐?”
“그, 그, 그, 그, 죄, 죄송합니다!”
“필요 없고. 대가리부터 박자.”
“알겠습니다!”
막내가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았다.
게라발이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 다시 오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문득 군침이 고였다.
“흠. 그나저나 흰오리는 참 맛이 좋지.”
“맞습니다. 저도 꽤 오랜만에 보는 겁니다.”
“바깥 놈들이 먹으려고 챙겨왔다 하나 흘린 모양인데. 막내야.”
“옙!”
“그만 됐으니 가서 저거나 잡아와라.”
“어, 어떻게 잡습니까?”
“야이, 멍청한 새끼!”
게라발이 막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막내가 필사적으로 서서 버텼다. 아픈 척을 하면 한 대 더 얻어맞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 흰오리는 사람 무서운 줄을 몰라서, 가까이 가도 도망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그냥 천천히 다가가서 목줄을 틀어쥐면 된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그럼 뭐 해? 안 가고?”
“지금 당장 갑니다!”
막대가 달음박질을 쳤다.
게라발이 소리쳤다.
“멍청한 놈아! 뛰면 겁먹고 도망친다니까!”
“거, 걷겠습니다!”
막내가 걸었다.
게라발이 소리쳤다.
“막내놈이 다리가 보이네? 오리 잡아 올 때쯤 내가 늙어 묻혀있겠다! 이 새끼야!”
시발, 개 같은. 막내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뛰지도 걷지도 못하면 어쩌란 말인가.
결국, 막내가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애매한 움직임으로 오리에게 다가갔다.
문득 오리가 고개를 돌리니, 그 눈이 딱 마주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신에 소름이 오도도 휘돌아 전신으로 번졌다.< 14. 유료연재 첫번째 편입니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