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50화 (50/268)

< 13. 어린 왕자 또다시 [4] >

땀방울이 시엔의 뺨을 가로질렀다.

턱에 올망졸망 매달려 힘을 모으다, 이내 제 동료와 합류하여 보트 바닥으로 똑 떨어져 내렸다.

“세피, 덥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버틸 만은 하네요.”

“꽤 땀을 흘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원래 땀이 좀 많은 편이라 그래요.”

호수에는 그늘이 없으니, 보트 위에선 햇볕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공주는 얄팍한 가림막이라도 하나 손에 쥐고 있었으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시엔은 양손에 노를 잡았으니, 그저 올해는 참 덥구나 하는 감상뿐이었다.

세필리아가 손수건을 들어 시엔의 얼굴을 톡톡 찍었다. 그러나 땀이 흥건한지 오래라 손수건이 역시 이미 축축한 상태였다.

“차라리 제게 양산을 씌워주시는 것이?”

“한번 해 볼까요?”

세필리아가 손을 뻗어 시엔의 위로 가림막을 드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제 위로 가져다놓았다.

“팔도 아프고. 더워서 안 되겠네요.”

“굳이 제가 직접 노를 저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었던 겁니까?”

“그럼 제가 저어야겠어요?”

“사람을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야 단둘만의 시간이 아니잖아요?”

“흠.”

시엔이 대답 대신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엔이야 그렇다 치고, 여기에 공주가 있으니 왕가의 호위병력이 당연히 뒤를 따랐다. 공주가 둘이 타고 놀 것이라 하여 호위병력이 호수를 빙 둘러 빈틈없이 보초를 섰다.

그뿐이랴.

혹여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호수에 보트를 더 띄워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시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방법이건만. 생각보다 훨씬 지루하고 또 불편하네.”

“인정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공사 현장보단 낫다 생각이 드는데요.”

“이래서야 별반 다를 것도 없습니다만.”

세필리아가 앞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역시 축제인가. 시엔. 함께 축제에 가죠.”

“축제가 가고 싶다고 하여 아무 때에나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 열어 보세요.”

“축제도 명분이 필요한 법입니다만.”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던가요? 시엔과 제가 연인이 된 기념으로 축제를 열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그랬다간 연인 행세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곤란하죠. 흠.”

“이제 세피의 점수를 매겨도 되겠습니까?”

“잠깐 기다려 봐요.”

“아직 무언가 남았습니까?”

“호수 위에서 보는 달이 그리 각별하다 하더군요.”

“여기서 달이 뜨길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세피의 점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잠깐.”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연인 행세를 하는 데에 본인이 즐거운지는 중요하지 않겠네요.”

“그 말씀이라 하시면?”

“이미 저들이 증인으로 보고 있지 않나요. 이만하면 꽤 단란한 연인으로 보이리라 생각되지 않겠어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게다가 우리가 하는 일이 한 편의 극이나 마찬가지니, 배우가 즐거운지는 중요한 일도 아니에요. 그렇지요?”

“그것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허나 낙제점입니다. 세피.”

“젠장.”

세필리아가 인상을 구겼다. 얼핏 보면 증오가 깃들었다 여길 정도로 사나운 표정이었다.

허나 이미 얼굴을 본 것이 며칠이라.

원래 생긴 것이 저런 여인이라. 이제는 적응하여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 보셔도 점수가 오르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짓다 만 도로를 거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가산해 드리겠습니다.”

“흠. 일단.”

세필리아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항변하려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저 스스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요즘 야만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알고 있나요?”

“갑자기 야만족 이야기를 꺼내시깁니까?”

시엔이 이죽거렸다.

세필리아가 못 들은 척을 했다.

“야만족들은 기본적으로 작은 단위로 모여살아요. 부족이라고 하던가? 말이야 그렇지 마적떼들이죠. 저네들끼리 서로 배척하며 싸우는 그런 도적떼들.”

“그들로선 또 다를 겁니다만. 원래 땅은 주인이 없다 주장하는 이들 아닙니까.”

“내가 야만족의 사정을 봐 줘야 하나요?”

“뭐. 계속 말씀하시지요.”

“이번에 새로이 수장이 나타난 모양이더군요. 벌써 여러 부족이 한 사람 아래 모여, 그 숫자가 벌써 이천이 넘는다더군요.”

“어차피 티란디스가 신경 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야만족은 흐레이그가의 오랜 골칫덩이었다.

페벨룬 왕국의 북쪽에 드넓은 황무지가 있었다. 그레이파 황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라 어떤 왕국도 탐내지 않았다.

괜히 차지하여 다른 왕국과 국경을 맞대느니 빈 대지로 놔두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야만족들이 거기에 살았다.

그 숫자가 많지 않고, 그나마도 서로 갈라져 치고받고 싸우니 위험한 적은 아니었다.

남하하여 왕국의 토지를 약탈하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다. 그러나 황야와 접한 영지란 흐레이그와 그 파벌의 것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왕국에서도 굳이 나서지 않고, 다른 파벌은 아예 관심이 없어 염두에 두지 않았다.

흐레이그 공작가 역시 딱히 토벌에 나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야만족들이 여럿으로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큰 병력을 일으켜 섬멸하고자 하면 분명 뭉쳐 대적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왕국의 지원 없이 흐레이그의 파벌들만이 모여 병사를 일으키기엔 수지가 맞는 일이 아니다.

“제 말 못 들었나요? 그 수가 벌써 이천이 넘었다 하지 않았던가요? 한데 뭉쳐 국경을 넘는다 하면 왕국에 큰 화가 닥칠 것이에요.”

“거야 흐레이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언제부터 왕실이 그리 걱정을 했습니까?”

“나라의 주인이 제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던가요?”

“뭐. 딴은 그렇습니다만.”

왕실로서는 팔을 들어 반길 일이 아니던가.

이천의 야만족이라면, 지금의 흐레이그 가문이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닌 터.

대귀족 하나가 병력을 잃어 세력이 줄어든다면, 왕가는 기뻐하며 축배를 들 것이다.

물론 흐레이그 출신의 2왕비는 속이 좀 쓰리겠지만.

그러나 세필리아는 1왕비 태생이며, 왕비와 뜻을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나 델피르 왕자의 왕세자 책봉이 이뤄지지 않고 계속 시일만 흐르고 있다면.

시엔이 결론을 내렸다.

“······델피르 전하께서 왕세자 책봉을 앞두고 계시는군요.”

“너무 쉽게 알아듣네. 진짜 매력 없다니까.”

“거야 세피의 기준에서겠지요. 요즘 매일같이 매파가 극성이라 물리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나한텐 내 기준만 중요하니까. 다른 사람 기준이 필요해요?”

“어차피 제 짝이 되실 것도 아니시잖습니까. 그러니 매력이 있건 말건 무슨 상관입니까?”

“또 모르죠. 어머님께서 작정하신다면 시엔이 막을 수 있겠어요?”

세필리아가 눈썹을 까닥거렸다.

시엔이 딱 잘라 대답했다.

“어떻게든 막을 겁니다. 저도 세피는 좀 그렇습니다. 제 취향이 아니신지라.”

“어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쩜. 어디 한 번 서로 비난하는 시간을 한 번 가져 볼까요?”

“저야 뭐 상관없습니다만. 그건 한 번 제대로 날짜를 잡아보도록 하고, 그래서, 델피르 전하께서 토벌대를 이끄시겠군요.”

“너무 늦었으니까요.”

이미 왕세자 책봉이 늦은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니 적당한 공로 하나쯤으로 명분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야만족이 그리 어려운 적이 아니다.

스스로를 전사라 칭하지만, 전사와 군인은 또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던가.

같은 숫자의 전사와 군대가 맞붙으면 그 승패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물며 왕명으로 왕국의 군대가 모이면 그 숫자가 얼마일까. 절대 질 수가 없으리라.

게다가 왕실 입장에선 어떠한가.

왕세자 책봉에 명분을 만드는 것 이외에도, 귀족들의 군대를 조금이나마 소모시킬 수 있으니 또한 기꺼운 일이라.

아무리 쉬운 전쟁이라 해도, 결국 군대는 금화를 녹여내 먹고 자고 싸우는 집단이다. 그 금화가 귀족의 주머니에서 나오니 결국 어떻게든 손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마마의 전령으로 오셨군요.”

“그럼 왕족이 심심해서 놀러왔겠어요? 물론 요즘 델피가 워낙에 힘들어해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하지만 어머님께서 응석을 받아주시는 분은 아니세요.”

“흐레이그라. 이긴 싸움이라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수완을 좀 부려 보라는 말씀입니까?”

결국, 흐레이그의 땅, 그리고 그 땅 너머, 흐레이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뤄지는 전쟁이었다.

2왕비는 제 왕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 할 터. 2왕비는 흐레이그 위피 페벨룬. 결국 흐레이그의 피가 흐르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흐레이그가 원하는 바도 마찬가지.

“수완까지는 필요 없으니 넣어두도록 해요. 그저 미리 알고 준비하라는 거니까. 어차피 흐레이그와는 앙숙이 아니던가요?”

“후작님께선 알고 계십니까?”

“굳이 내가 여기서 말을 꺼내잖아요? 시엔이 직접 왕실의 뜻을 전할 수 있게 말이에요.”

“어깨가 무겁군요.”

“그러니까 델피에게 여동생이라도 좀 붙이고 그래요. 이상한 엘프랑 어울리게 두지 말고. 그 오리는 또 뭔가요? 정말로 사람 말을 알아듣나요?”

“여동생 말입니까? 흠. 비설은 이상하긴 해도 이상한 엘프는 아닙니다. 그리고 오리는 정말로 사람 말을 알아듣습니다만.”

“그래요. 여동생. 이왕이면 순종적인 아이가 좋겠어요. 어머님이 그런 아이를 좋아하시거든요. 아. 오리가 그런다니 신기하긴 하네요. 내 개나 새매가 말을 알아듣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오리는 또 처음 들었네요.”

“일 없습니다. 슈드릴 영애가 계시는데 제가 어찌 연적을 만들겠습니까? 그리고 새매도 말을 알아듣는데 오리라고 하여 못 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라리는 영리하고 착한 아이에요. 델피에게 정치적 반려가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니, 기꺼이 두 번째 자리를 내어줄걸요? 그럼 그 오리는 어찌 얻었지요? 꽤 요긴히 쓸 구석이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겁니다. 혼인한 사이라 서로 한 사람만 두고서도 평탄하지 못한 이들이 많은데, 여인이 둘이면 그게 화목하겠습니까? 그리고 오리는······.”

“오리는 이제 됐어요.”

세필리아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답지 않은 장난기 가득한 모양새였다.

“여인이 둘이면 화목하겠느냐고요? 시엔은 이상한 데서 멍청한 소리를 하네요. 영리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순 맹탕이야.”

“멍청한 게 아니라 현명한 겁니다.”

“아뇨. 그건 멍청한 소리가 맞아요. 우리는 귀히 태어나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 먹고 평생 편하게 잘 사는 운명을 받았잖아요? 그러니 반려까지 원하는 이를 얻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세피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말싸움은 피하시겠다?”

“세피를 설득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시엔을 멍청이라 여기더라도 설득할 생각은 없는 거죠?”

“생각 없습니다.”

“멍청이에 얼간이에 바보 천치라 여겨도요?”

“······하아. 그럼 그렇다고 칩시다.”

이 여자, 은근히 속을 긁을 줄을 아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세필리아가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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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델피르의 휴가가 끝났다.

러스티힐의 관문 앞, 델피르가 시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시엔. 우리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올해 안에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올해 안에? 그럼 왕성에 와 주는 거야? 아. 탄신연에 또 보겠구나!”

“탄신연 말씀이십니까?”

시엔이 세필리아를 바라보자, 공주가 고개를 미묘하게 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 델피르는 제 출전 사실을 모르는 모양.

전쟁은 크나 작으나 참혹한 것이다.

과연 어린 왕자가 잘 이겨낼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니 절로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비가 비정하다 할 것도 아니었다. 이것 또한 의무가 아니던가. 이른 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결국 전쟁이란 왕자로 태어난 이가 이겨내야 할 운명이었으니.

시엔이 델피르의 어깨를 짚고 눈을 맞췄다.

“전하. 곧 알게 되시겠지만, 조만간 왕자님께 큰 책무가 주어질 것입니다.”

“책무?”

“예. 허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저어하지 마시고 씩씩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아시겠지요?”

델피르의 눈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음. 잘 모르겠지만······. 괜찮을까?”

“그때 제가 왕자님 곁을 지켜드릴 겁니다.”

“시엔이? 시엔이 그래 준다면 뭐가 문제겠어? 알겠어!”

왕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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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르의 휴가로 가장 행복했던 이는 정작 따로 있었다.

-선배님! 선배님! 세상에, 이 세오르그 오스텐, 제가 왕자님의 품에 안겼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세상 어떤 여인이 왕자님의 품에 안겨보겠습니까! 그것도 온종일이요!

“흠.”

-다만 인간의 몸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 이제 슬슬 그 인간의 신체를 취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술식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없지. 이론상 실패 확률도 한없이 낮으니 지금이라도 시술엔 문제가 없을 거다.”

-그, 그렇다면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 오랜 시간을 하나로 기다려오던 그 순간이 지금 찾아왔다 기뻐해도 되겠습니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으······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전에 해줄 일이 생겨서 말야. 인간의 몸은 아쉽지만 조금 미루자고.”

-이를 말씀이십니까! 이 세오르그 오스텐, 어떤 궂은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어떤 궂은일이라도 말이지?”

시엔이 되묻자, 오리가 눈을 깜박거렸다.

-어. 음. 이왕이면 좀 덜 궂은 일이면 좋겠습니다만, 선배님······.

“별거 아냐.”

-혹시 어떤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냥 뭐, 간단한 일이야.”

시엔이 여상히 말을 이었다.

“전쟁이지.”

< 13. 어린 왕자 또다시 [4]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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