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43화 (43/268)

<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2] >

신비주의자와 흑마법사 모두, 망령이 죽은 이가 생전에 남긴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그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신비주의자들이 망령을 죽은 이가 세상에 남긴 의지이라 하여 존중한다면, 흑마법사는 그저 사라진 이의 잔존 사념이 뭉친 찌꺼기로 보고 도구로 다룬다.

그리하여 흑마법사들은 자연스레 다른 연구에 도달한다.

육신이 죽어 흩어질 영혼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면? 신체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생불멸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결과 리치가 탄생했다.

음차원 에너지가 담긴 보존구에 핵을 만들어 영혼을 담는다. 그를 통해 존재를 확정하며, 다른 매개를 통해 물리적 신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다 뿐 대개 시도하진 않는다.

일단 시술의 성공률이 낮으며, 성공한다 해도 본연의 신체 없이 영혼 혼자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치의 자의식은 강력하다.

필사적으로 ‘나’를 정의하며 어떻게든 제 자아의 존재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다.

딱 이런 식이었다.

-나는 세오르그 오스텐. 나는 너희들의 종말을 내릴 자다.

마력으로 생성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떤 억양도, 개인적 특징도 없어 금속과 같은 음성이다.

-내 앞에 헛된 저항은 그저 괴로움일 뿐.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라. 이것이 내가 내리는 마지막 자비이니.

한기가 밀려든다. 음차원 에너지 앞에 영혼이 느끼는 오한이다.

산 자들의 눈에 절망이 서린다.

이윽고 리치의 종언이 시작된다.

-스하-레시아-카흐 하 세오르그! 하······

“닥쳐! 사특한 것!”

앙칼진 목소리가 주문을 잘랐다.

흰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이가 한 명. 긴 머리채를 휘날리며 주먹을 앞세우니 성광이 번쩍였다.

리치의 몸이 빛에 녹아 사라지고, 걸친 로브만이 걸이를 잃어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착. 뷔아가 땅 위로 착지했다.

얼굴이 땀에 절어, 누가 보면 물에라도 빠진 꼴이다.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하는 것이 곧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윽. 별것도 아닌 게, 후우우. 무게는 더럽게 잡네. 후욱. 썩을 놈이.”

뷔아가 그 와중에도 모진 말을 뱉어냈다.

그 모습을 모든 산 이가 멍하니 지켜보았다.

뭐야? 끝이야? 한 방에? 종말이 어쩌구 하더니 그냥 죽었어? 역시 성녀님이시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지?

“어머나. 실수.”

뷔아가 뒤늦게 우아한 척을 하며 입을 가렸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몇몇 이들이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아마 성녀의 본색을 이미 알고 있던 이들이리라.

뷔아가 급히 땀을 훔쳐 얼굴을 닦고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니 이 와중에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다.

시엔이 정신을 바짝 곤두세웠다.

리치의 육신은 이미 죽어 없으니, 제 몸이라 빌어 나타나는 것이 전부 거짓이다. 그저 물리력을 가진 허상이니 절대 끝이 아니다.

시엔이 수해의 어둠 너머를 노려보았다.

이곳에 뒤섞인 신성과 음차원 에너지 사이 이질적인 것이 하나 잡혔다.

생기로 가득한, 그러나 흉포하기 짝이 없는 기운. 시엔이 아는 마력 중 그러한 것이 없으니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오러.

은밀한 살기가 흐른다.

시엔의 대련 상대가 바로 검위공이었다. 엘딘의 특기가 은밀한 것이다. 평소 훈련된 감이 살기를 눈치챈다.

살기가 뷔아를 향했다.

“젠장!”

시엔이 몸을 날렸다.

“흠. 크흠. 자. 여러분. 강대한 적이 있었으나 우리는 모두 이겨냈답니다. 먼저 떠난 형제, 자매의 영혼를 위해 우리 모두 기도, 꺅!”

시엔이 뷔아를 들이받았다. 뷔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둘이 한데 엉켜 바닥을 뒹군다.

시엔의 얼굴에 뜨거운 것이 훅 끼친다. 뜨겁고 질척하고 비리며 또 뜨겁다. 얼굴을 급히 쓸어내리자 시뻘건 선혈이 묻어났다.

툭.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내린다. 성복의 어깨 아래부터 잘린 소매. 그리고 그 속에 원래 자리하던 한쪽 팔이었다.

땅에 떨어진 것의 손에 흉악한 건틀릿이 붙었다. 뷔아가 쓰던 것이다.

그럼 그 주인은?

시엔이 급히 뷔아를 살폈다.

어깨 아래 이어져야 할 것이 없어 피가 왈칵 쏟아진다.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떨어진 팔에 씌워진 옷을 붙들고 턴다. 주인 잃은 팔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남은 소매로 뷔아의 환부를 단단히 동여매니 흐르던 피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호오. 그걸 느꼈다고? 아직 솜털도 안 가신 게. 누구 제자야? 대단한걸? 재능인가?”

숲속에서 검을 쥔 이가 걸어 나왔다.

눈가에 길게 난 상처로 인상이 더럽기 짝이 없는 사내다.

“성녀님을 지켜!”

“성녀님을 지켜라!”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교단의 군세가 달려든다. 이미 지친 몸이나 정신이 필사적이라. 기세가 사납고 용맹하다.

사내가 버럭 외쳤다.

“해골바가지! 언제까지 죽은 척하고 있을 거야!”

-나는 이미 죽어 존재한다. 어리석은 것.

허공에 재가 뭉쳐 해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리치가 손을 들자 뼈가 솟구친다. 거대한 뼈가 촘촘히 솟아 벽을 이룬다. 교단의 군세를 가로막으니, 뼈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사내가 이죽거렸다.

“자. 장래가 촉망한 꼬맹아. 성녀를 살리고 싶으면 어디 한 번 덤벼 봐. 소드 마스터와의 실전이다.”

시엔이 대답 대신 뷔아를 어깨에 들쳐멨다. 바로 몸을 날려 뛰쳐나가니, 사내와 리치가 위치한 곳의 반대편이다.

사내가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쯧 찼다.

“도망인가? 흠. 난 추격전은 자신 없는데. 수해는 이제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사내가 리치를 바라보았다.

네가 가란 뜻이다. 리치가 대답했다.

-나는 성녀를 맡겠다. 저들을 처리하도록.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어야 한다. 알고 있겠지?

“그럼. 사제를 베면 꿈자리가 안 좋긴 하지만. 그럼 빨리 해치우고 돌아오라고. 해골바가지.”

-나를 그따위로 부르지 마라!

“아니. 해골을 해골이라 하는 데 문제라도 있나?”

-흥. 기고만장하군. 네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라. 그때 무례를 빌어도 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야말로. 성녀를 놓치면 그 반질반질한 면상이라도 유지할 성싶으냐?”

리치가 코웃음을 쳤다. 무기질한 음성에 코웃음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하! 어둠이 내려 사방이 어둡고, 앞과 위와 아래로 막힌 것이 많아 미로와 같은 수해다. 나와 같은 이에겐 최고의 무대이니, 너는 네 걱정이나 해라. 얼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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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단련된 이라 해도 어깨에 짐짝을 들고 험한 수해를 헤쳐나갈 순 없으리라.

체구가 유달리 작은 몸이라면 더욱이.

시엔의 입에서 주문이 흘렀다.

내게 오라, 시엔의 이름으로, 내게 복종하여 명령을 따를지어다.

시엔의 정신 세계에 균열이 일고 깨어져 구멍이 뚫린다. 오로지 악의 뿐인 부정 세계의 심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심연에서 털이 빽빽한 긴 다리가 뻗었다.

일곱 마디를 가진 다리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온전히 넘어온다.

13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

부정 세계의 마수, 바르키아올이다.

정신 세계가 현상 세계와 맞닿으니 곧 실체를 얻어 시엔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마수이나, 지금은 술자의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어 제 몸통을 내밀었다.

시엔이 그 위로 올랐다. 세 개의 다리가 시엔과 뷔아를 휘감아 단단히 붙들었다.

“가자.”

키엑. 바르키아올이 다리를 뻗었다. 다리의 끝이 창칼과 같이 날카로우니 나무를 찍어 몸을 드니 이러한 수해에선 나는 것처럼 그 운신이 자연스럽다.

시엔이 문득 바르키아올의 몸통을 내려다보았다.

몸통에 가득 들어찬 물컹한 촉수를 깔고 앉으니 편안하기가 침대보다 낫다.

촉수 몇이 쭉 뻗어 뷔아의 환부를 툭 건드린다. 싱싱한 피에 이끌리는 것이다. 촉수 하나가 슬그머니 환부에 닿아 맛을 본다. 이내 까맣게 썩어들어 바스라진다.

“먹지 마. 지지야.”

신성이 녹아든 피란 마수에겐 독이다. 끼엑. 마수가 애처로운 소리와 함께 촉수를 거둬들였다.

바르키아올은 심통이 났다.

먹기 전에 가르쳐줄 것이지, 먹고 나서 먹지 말라 할 것은 또 뭐람. 독과 같은 것이 확 스미니 아까운 촉수만 버리고 말았다.

허나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제 주인이다.

바르키아올은 시엔의 정신세계를 이미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그 안, 일곱 허수 차원과 통해 무한에 이른 강대한 어둠을 이미 보았다.

그리하여 시엔에게 화를 낼 수가 없으니, 그 화를 대신 점액을 뿜어 대신한다.

수천개의 촉수에서 뿜어진 시커먼 점액이 저마다 닿은 것에 달라붙어 끈적한 거미줄을 이뤘다. 순식간에 사방이 덫으로 뒤덮였다.

“쯧.”

시엔이 혀를 찼다.

천 년 전. 그 강대한 제국조차 시엔이 숲에 이르면 더 쫓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 퇴로를 막고 아예 숲 전체를 소각할 뿐, 그 안에서 흑마법사를 상대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내게서 도망칠 수 없다! 순순히 포기하고 내게 굴복하라! 내 자비로우니 편안한 죽음을 베풀 것이니! 하찮은 네가 감히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이 무슨 죄악이란 말이냐!

리치가 계속해서 투항을 강요하니 도대체가 시끄럽기가 계집보다 더한 꼴이다.

-어차피 네겐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다! 나, 세오르그 오스텐, 위대한 존재가 너를 찾고 있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라! 그 끝에 내가 너의 종말으로 찾아갈. 억!

허공에 떠올라 수해를 가로지르던 리치가 거미줄에 걸렸다. 당황해 허우적대니 줄과 줄이 당겨 더욱 엉겨 붙어 단단히 붙들리고 만다.

-이게 무슨. 바르키아올? 말도 안 돼! 그와 같은 마수는 부른 적이 없거늘!

“어째서 안 되지? 흑마법을 부리는 이가 또 없을 것이라 생각했더냐.”

거미줄을 타고 거미가 내려온다.

그 위에 편히 앉은 이가 있어, 가면 안으로 비치는 눈동자에 검은 광채가 흘렀다. 어둠 속에 어둠으로 빛나는 부정 세계의 빛이라.

-흑마법사!

리치가 탄성을 내질렀다.

시엔이 면박을 주었다. 기분이 나쁘니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자여!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가! 세상 숨어 남은 이의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어서 거둬다오!

“맹세? 무슨 맹세를 말하지?”

-모르는 척 할 셈인가!

“아니. 진짜 몰라서 그러하다. 내 심원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으니.”

심원은 마법사의 모든 것이오, 말은 내뱉어 역사로 남는 것이다. 그러하니 마법사가 심원을 건 맹세란 절대적인 진심이다.

-······또 다른 전승이 남아있었구나!

“또 다른? 하긴. 널 보니 흑마법사가 아예 역사에서 지워진 건 아닌 모양이야. 그래서, 그 맹세란 게 뭐지?”

-흑마법사는 서로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맹세다. 모든 흑마법사는 뭉쳐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뭉쳐 살아남는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한차례 절멸했다. 죄 없는 이의 피가 흘러 세상을 채웠다. 우리는 모두 그 가운데 살아남은 이의 후손이니 곧 가족이며 하나가 아니겠는가.

“아. 그래서 서로를 방해하지 않겠다?”

-그렇다. 이리 만났지만 나는 참으로 기쁘도다. 너도 네 스승과 동문이 있을 터. 세상에 위대한 학문이 살아남은 이가 또 있음을 알았으니.

“쯧.”

시엔이 혀를 찼다.

천 년 전에 흑마법사가 대륙을 활보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스승과 제자의 법도가 엄격하고, 심연탑의 선배와 후배의 도리가 있던 시절이다. 선배는 앞서서 뒤처진 이를 이끌고, 후배는 그에 따르며 존경하며 경애했다.

“이게 버르장머리 없이 누구 앞에서······”

리치의 말이 자연스럽고 자아가 똑바로 잡혔다. 아직 리치가 된 지 얼마 안 된 놈이다.

흑마법이 비맥으로나마 이어지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시엔이 누구인가.

흑마법사 중에 가장 멀리에 있던 이라, 심연탑의 탑주도 시엔 앞에선 고개를 숙여야 할 터다.

그런데 새파랗다 못해 배분이 어디쯤인지 셀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후배가 지금 뭘?

선배의 존안을 뵈었으면 당장에 대가리 처박고 공손하게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엔이 뷔아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고, 또한 피가 많이 흘러 안색이 창백하니 남은 시간은 길지 않으리라.

게다가 교단에 군세와 남은 소드 마스터는 또 어떠한가. 이미 지쳐 그 전력이 온전하지 못하니 참극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내 땅에서 무구한 이가 죽어 피가 흐르니 네 소행이로구나. 아마도 이것이 네 전쟁이라. 내 그 반대에 서니 네가 바로 내 적이라. 그러한 것이 전쟁이 아니겠느냐.”

시엔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일단 얌전히 있거라. 내 너의 보존구를 찾아 다시 찾을 터이니.”

-안 돼! 이걸 풀어! 풀란 말이다! 파 크라샤 안브 카이하······

“거 참. 시끄럽게.”

시엔이 손짓에 바르키아올이 다리를 재게 놀렸다. 거미줄을 두드리고 또 흔들어 전체를 움직이니, 곧 리치의 몸이 빙글빙글 돌아 고치에 들었다. 그도 모자라 고치가 점점 그 덩치를 불리니, 바윗덩이 같은 것이 허공에 붙들려 떠 있게 된다.

서로의 실력을 드러내 겨루는 일은 어리석은 이나 하는 짓이다.

검사를 상대하면 검을 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마법사를 상대하면 마법을 부리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법이다.

리치라면 치워도 다시 나타나 귀찮은 놈이니 그저 제압해두고 천천히 보존구를 찾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가자꾸나.”

시엔이 바르키아올의 등을 쓰다듬었다.

일단 소드 마스터부터 해결하고. 리치와는 천천히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

<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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