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40화 (40/268)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5] >

말이란 한 번 퍼지고 나면 생명을 얻어 저 혼자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잡아들일 수 없어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이미 퍼진 소문을 어찌하랴.

직접 피고름을 째고 침식을 잊은 채 환자를 돌보느라 수고가 많다고?

소문을 거둘 수 없다면, 최소한 소문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수밖에.

시엔이 한창 바쁜 이유였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하여 아직 처방이 가지 않은 환자들을 돌보는 이유였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으면 탈이 나기 마련이라, 가만히 뉘어놓으면 살이 터져 욕창이 나고 뼈와 근육이 점차로 녹아 물러진다.

시엔이 조심스레 환자를 뒤집었다. 성수를 적신 천으로 환자를 닦고, 수포를 째 고름을 빼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그런데 속이 영 좋지가 않다. 먹은 것이 체하기라도 한 양, 가슴이 죄고 머리가 무지근히 아파왔다.

흑마법사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았으니 비위야 대륙 제일이라 자부했건만. 겨우 환자를 좀 돌보았다 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시엔이 가진 음차원 에너지가 불안하게 요동을 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정을 몰아내는 신성이 짙다. 아까부터 조금씩 그 밀도가 높아지고 있었으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이제는 멀지 않은 곳에 그 신성의 중심이 느껴지니 성녀가 저만치 문가에 서 있는 모양.

굳이 아는 체 하기도 싫고 하여 시엔이 모른 척 계속 환자를 돌봤다.

뷔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환자를 다루는 손길이 능숙하니 이미 손에 붙어 익숙한 것이다. 그러니 여간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잠조차 잊은 채 환자를 돌본다는 소문은 그리 허황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제 영민을 위해서라.

그녀가 봐온 귀족이란 깔끔을 어지간히 떨며, 한편으론 뷔아의 얼굴과 몸을 번갈아 보며 침이나 삼키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본디 귀족은 제 영민을 살펴 평화롭게 하는 이다. 그러니 봐온 귀족들 중에 시엔만한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왜이렇게 꼴뵈기가 싫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뷔아의 마음이 그러했다. 왠지 가식을 떠는 것 같고, 그저 시선에 드는 것으로 거슬리기 짝이 없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퐁퐁 솟아오르니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시엔 역시 속으로 그냥 가라 기원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허나 낮선 목소리가 시엔의 기대를 와장창 깨 버리고 만다.

“아이, 참. 성녀님. 왜 이렇게 서 계세요. 엣헴. 시엔 공자님?”

“아. 이런. 손님이 오신 것도 몰랐군요. 무례를 용서하시죠.”

“괜찮습니다. 자자. 저는 미욱하나마 주교의 관을 쓴 수히 알렌티라 해요. 성녀님을 모시고 있지요. 성녀님께서 전해드릴 말이 있다 하여 이리 찾아뵙게 되었답니다.”

“아. 예.”

신관 치고는 수더분한 여인이었다. 또 신관 치고는 그 목소리가 개구지기 짝이 없기도 하고. 아마 그러한 성격일 것이 틀림없다.

“성녀님을 계속 세워두실 건가요? 레이디를 무안하게 두시면 사내 실격이랍니다.”

시엔이 잠시 생각했다.

사실 별로 할 말이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시엔이 환자의 핑계를 댔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이 환자를 마저 돌보아도 되겠습니까?”

“어쩜. 듣던대로시군요! 그럼 저희도 돕도록 하겠어요. 빨리 끝내고 두분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세요. 자, 성녀님?”

“······알겠습니다. 자매님.”

성녀의 목소리가 왠지 불퉁하다.

시엔은 초면에 멱살을 잡히지 않았던가. 저 외양 속에 흉포한 성정이 있음을 진작 알았다. 신성이 곧 선량함의 척도는 아니니, 맞지 않는 이가 있다 해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원래 인원에서 손 두 개가 더해졌을 뿐이나, 신성을 부리는 이가 환자를 돌보는 속도란 의사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렇게 환자들의 붕대를 갈고 몸을 닦고 나니 더는 댈 핑계도 없었고.

그러니 시엔의 방에 두 사제가 발을 들였다. 흑마법사의 거처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손님이나 딱히 대접할 것이 없다. 성녀야 독과 병이 통하지 않아 맨 얼굴이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니 다과나 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잠시 무안히 서 있으니 수히가 쾌활한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알겠죠?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성녀님, 알겠지요?”

“자매님, 꼭 그러지 않으셔도.”

“아니요.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되세요!”

좋은 시간 되라니.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인가. 수히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밷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다. 영문 모를 행동이었다.

그렇게 수히가 문을 닫고 나가버리고 나자, 두 사람이 방 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하실 말씀이란 게?”

“······후우.”

대뜸 한숨이 날아온다. 시엔이 눈썹을 치켰다. 아니, 면전에서 지금 뭘 하자는 거야?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귀하께서 보여주신 헌신이 참으로 인상깊은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귀족의 귀감이라 할 것이고, 또한 그 아니라도 인간의 연민이 닿아야 할 도리가 아닙니까. 도리어 천신을 섬기는 이로서 참으로 존경스럽고 또한 저희의 마음가짐을 새로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

“그리하여 위에서 아래로 이르기까지 성직에 모인 자가 입을 모아 명예로운 이라 칭하니, 비록 교단에 속하지 않았다 하나 그 적을 올리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명예 성직을 수여해 드리고자 합니다.”

어째 금칠을 해 준다 했더니 이 소리였다.

무슨 뜻인지도 알겠다.

시엔의 이름이 높으니, 슬쩍 기대 교단의 공으로 좀 포장을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어찌 보면 무임승차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신전 역시 이 사태에 큰 노력을 기울였으니 무임승차라 하기엔 그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게다가 명예 성직이란 여러모로 유용한 것이다.

교단에 이름을 새겨 그 대우가 신관과 같다. 해하려 하는 이는 교단의 이름으로 처단이 될 것이오, 뜻을 펼치고자 함에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할 권리또한 가지게 된다.

그에 반해 교단의 법과는 무관한 이라, 신관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물론, 허물이 있으면 얼마든지 파면될 수 있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그래도 권리는 있고 의무는 없는, 그야말로 꿀처럼 달달한 직위가 아닌가.

시엔이 잠시 고민 후에 대답했다.

“소문은 부풀어오른 것이라 제가 거기에 미치진 않습니다. 그러니 제게 과분하니 거두어 주시지요.”

시엔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편리하고 유용하다 하나, 흑마법사가 명예 성직에 오른다는 것이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흑마법사의 자부심, 신성에 대한 거부감과 요 앞에 밉상을 한 여인 때문에라도 굳이 받고 싶은 직위는 아니었다.

“어머. 거절하시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공자께서는 충분히 자격이 있으세요.”

“과한 것은 모자르니만 못하다고 하지요. 제겐 과분하니 거두어 주시지요.”

“모두가 공자를 칭송하는데 그리 겸손하실 필요는 없으시답니다.”

“겸손이 아니라 주제를 아는 것이지요.”

시엔과 뷔아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뷔아의 미소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입매는 부드럽게 휘었으나 눈은 그렇지 않으니 보기에 사납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자격이 있으시다니까요?”

“괜찮습니다.”

“아니, 준다는데 왜 안 받으세요?”

“괜찮습니다.”

“명예 성직이라 하면 대단한 영광인걸 모르세요?”

“괜찮습니다.”

시엔이 같은 답변을 반복했다.

성녀의 시선이 매섭다. 시엔이 말했다.

“처음 뵈었을 때의 인상이 여간 머리속에 남는 것이 아닌데. 이러고 계시니 마치 다른 분이 와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성녀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차가운 침묵이 흐르고, 이내 아름다운 입술이 열리며 청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에이, 씨.”

“이제야 본색이 나오네?”

“그래, 나왔다. 어쩔 건데?”

“역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하다더라.”

“뭐야.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지금 멱살 한 번 잡혔다고 빼는 거야? 삐져서? 에라이.”

“거 말뽄새 하곤. 천박하게.”

“뭐? 천박?”

뷔아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허나 짐짓 괜찮은 척 미소지으며 말한다.

“이 쪼그만 게 어디서 누나한테. 그런 말 하려거든 밥이나 좀 더 처먹고 쑥쑥 커서 오지 않으련?”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천 년 전의 왕자도, 대륙을 전화로 물들인 흑마법사도, 그리고 이 시대 티란디스의 소공자 역시 키가 크지 않다.

그러니 은근히 신경쓰고 있던 것이다.

“명예 성직이 아니라 명예 주교를 줘도 안 받아. 그렇게 알고 그만 돌아가지?”

“윽.”

뷔아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억지로 온 이유가 그것이 아니었던가. 마음 같아서야 명예 성직은 커녕 신전에서 나온 먼지 쓰레기도 주고 싶지 않다.

허나 신전의 위신이 달렸다는데 어찌하나.

“아니, 주겠다는 걸 왜 안 받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다 너희 좋자고 주는 거 아냐?”

“윽.”

뷔아가 또 움찔했다.

걸걸한 입담 치고는 꽤 알기 쉬운 성녀였다.

“그래도 받으면 너도 나쁜 건 아니거든?”

“안 받는다고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뭐.”

“네가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명예 성직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니거든? 신전의 보호가 평생 따라다니고, 언제든지 성사도 받을 수 있고. 주교급의 치유도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또 음······.”

“물건 팔러 오셨나?”

“아이, 씨. 이게 진짜!”

“왜? 또 멱살이라도 잡게?”

“왜? 또 잡히고 싶어?”

“한 번 잡혔는데 두 번 잡혀줄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오갔다.

원래 가식 없이 민낯을 드러내면 누구나 유치해지는 법이다.

뷔아는 성녀로 살며 평소 속에 담긴 것들이 많았다.

천성이 이러한데 매양 다소곳하니 있으려니 그것도 화가 되어 담기고, 신전 돌아가는 꼴에 정치가 끼어 못 볼 것이 계속 보이니 또 화가 쌓여 똘똘 뭉쳤다.

평소엔 옆에 수히가 있어 그나마 답답한 속을 달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뷔아에게 시엔은 보기만 해도 눈에 거슬려 치워버리고 싶은 이다.

성녀의 신성이 시엔의 심장 깊숙히 숨어든 부정한 기운을 파악해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지만, 흑마법이 지워지고 나니 그 까닭을 어찌 알까.

하니 본능적으로 싫고, 그냥 싫은 이다.

그런 이가 앞에서 깐죽거리고 있었다.

뷔아의 신성은 눈 앞의 이를 치워버리라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으니.

결국 터졌다.

“야이, 썅!”

뷔아가 손을 뻗었다. 강인한 전사에게나 볼 법한 매서운 손놀림이었다. 성녀의 신체는 이미 인간을 초월했다.

하지만 이미 시엔은 대비하고 있었다.

상체를 빼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손을 피해낸다.

“어쭈? 피해?”

“그럼 잡혀줄까?”

“야! 이게!”

시엔과 뷔아가 좁은 방 안에서 날뛰었다.

뷔아의 신체가 인간을 초월했다 하나, 시엔 역시 전투로 다져진 전투술이 검위공과의 대련으로 한층 성장한 상태였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한 마디를 지지 않으니 성녀가 점점 울화가 치민다.

우당탕쿠탕 탁자가 나뒹귈고 의자가 날았다.

그리고 그 소리에 놀란 한 명.

-성녀님?

수히의 목소리에 성녀가 아차 싶었다.

“아, 들어오면 안 돼!”

그리 외쳐 보지만 이미 끼익 문 뒤틀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깜짝 놀라니 발이 꼬인다. 빠르게 움직이던 몸이 중심을 잃고 저돌적으로 쓰러지고 만다.

본디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눈 먼 화살이라. 저를 노린 공격은 피해도, 예상하지 못한 채 목적 없이 오는 일격은 대처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잘 피해대던 시엔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궤도로 쏘아지는 뷔아의 돌진에 들이받히고 말았다.

남녀가 하나로 포개져 바닥에 누웠다.

포개어 넘어진 시엔이 퍽! 뒷통수를 호되게 바닥에 부딪쳤다. 강렬한 충격에 뇌가 흔들리니 순간 어지럽기 그지없다.

“성녀님?”

“어. 어? 어.”

수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엔 위에 올라탄 뷔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수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저는 아무것도 못 보았답니다. 이크.”

수히가 급히 제 눈을 가리며 다시 문을 닫았다. 뷔아가 당황해 그대로 굳었다.

시엔이 깔린 채 바로 지척에 맞닿은 뷔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뷔아 역시 시엔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자 가면의 눈구멍 안, 의외로 유순한 눈매가 참 곱다.

잠시간 서로 눈이 마주친다.

시엔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우욱······! 웩.”

시엔이 급히 가면을 벗어 고개를 돌렸다.

재림 전이나 후나 살며 만나본 적이 없는 강대한 성녀였다. 아예 몸을 맞대고 눈을 마주하니 음차원 에너지가 도저히 버티질 못하고 날뛴다.

그러니 결국 쓰린 속을 다스리지 못하고 먹은 것을 토해내고 만다.

뷔아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제 신체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 거기 부딪쳐 속이 상한 것이 분명하다.

“어, 그 괜찮, 괜찮은 거지?”

“······치워.”

“뭐?”

“제발 그 얼굴 좀 치워. 역겨우니까······ 우엑, 웨에엑······!”

시엔이 뷔아를 거칠게 밀쳐내며 다시 반쯤 소화된 점심을 바닥에 토해놓았다.

뭐야. 지금 내 얼굴을 보고 토하는 거야?

이 미모를 보고?

말은 안 해도 자신이 있는 외모였으니 그 충격이 크다. 뷔아가 혼란에 빠져 그저 우두커니 굳었다.

시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속은 아직도 울렁이고, 두통에 더해 뒷통수에 느껴지는 통증도 보통이 아니다.

어떻게든 상태를 돌보려면, 일단 성녀와 멀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시엔이 몸을 홱 돌렸다. 뷔아의 시선이 급히 떠나는 시엔의 뒷모습을 담았다.

생전 처음 당한 일에 대한 황망함과 설움이 밀려들었다. 뷔아의 눈에서 문득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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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딴 게 성녀라고······”

“도련님? 아이고, 도련님! 가면을 벗으시면 안 됩니다요! 어서 쓰시지요! 귀하신 몸이 혹여 상하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아. 벨티.”

“어서 쓰십시오! 어서!”

항상 비굴하던 벨티의 말투가 웬일로 준엄하다. 그만큼 시엔이 맨 얼굴을 드러낸 것을 걱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이미 역병을 지배해 몸에 품었으니 가면이 아니라 아예 벗고 다녀도 역병에 걸릴 일은 없다. 허나 벨티가 그 사실을 어찌 알랴.

“어. 응.”

시엔이 경황중에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가면을 다시 뒤집어썼다. 다행히 가면엔 오물이 묻지 않았으니, 그 당황스러운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잘 챙긴 것이리라.

“혹여 몸이 나른하고 열이 오르면 지체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바로 약을 가져다 드릴 터이니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드셔야 합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안 됩니다. 여기 계십시오.”

시엔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한 벨티가 급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잠시 후, 금방 뛰어 돌아온 벨티가 헉헉거리며 약을 내밀었다.

“자. 헥. 여기, 받으십시오. 후우. 헥. 후우.”

“고마워.”

“아닙, 니다. 후우우우. 헤헤헤. 먼저 제 몸을 돌봐야 남을 돌보는 법입니다. 아시겠지요? 헤헤헤.”

벨티의 말투가 다시 되돌아왔다.

허나 걱정하는 마음을 눈으로 보았으니 괜히 멋쩍어 시엔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날 찾았어?”

“아! 헤헤. 최초 감염자를 찾은 것 같습니다요. 하니 가장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아 이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거 잘 됐네. 이제 본 둥지를 찾으러 가면 되는 건가?”

“허나 그것이 조금······.”

벨티가 말끝을 흐렸다.

시엔이 왜 그러느냐 묻자 일단 환자를 보라 한다. 그렇게 벨티의 뒤를 따라 최초 감염자로 추정되는 이를 찾아갔다.

아븐 케이즈라는 이였다.

그는 목림생산길드의 벌목꾼으로, 그중에서도 벌목대장을 맡은 베테랑이었다.

벌목꾼이 그저 보이는 나무라고 다 베는 것이 아니다.

베는 나무는 곧고 속병이 없어야 한다. 또한 베어 쓰러뜨릴 방도가 눈에 보여야 하고, 베어냄으로서 인근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이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나무를 선별하는 사람이 벌목대장이니, 수해를 돌아다니며 나무에 표식을 남기는 것이 그 하는 일이다.

역병 둥지가 보이는 곳에 있지 않을 테니, 수해에 속에 있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러한 이유로 숲을 돌아다니는 이를 먼저 탐문하여 조사했다. 그 결과 아븐 케이즈라는 이가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 벨티의 설명이었다.

허나 아븐의 증언이 심상치 않았다.

“몬스터?”

“예. 도련님.”

“수해야 미개척지니 당연히 몬스터가 있겠지만, 벌목 대상지까지 나오지는 않잖아요?”

“맞습니다. 가끔 트롤이나 괴물 늑대가 나타나긴 합니다만, 그건 길을 잃은 놈들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요.”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아븐이 제 상의를 걷어올리자, 벨티가 나서 복부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짐승의 이빨 자국따라 난 상처가 배와 등에 선명했다.

시엔이 상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뭔지는 모르나 아가리가 제법 큰 놈이다.

허나 이빨 자국이 반원을 그리니 주둥이가 긴 종류는 아니었다. 그러니 자이언트 울프나 브리싱 테일 등의 맹수 형태를 한 몬스터는 아니리라.

“살짝 물었네요?”

하지만 몬스터에 아가리에 사람이 들어가면 대개는 악물어 그 살점을 먹고자 한다.

이빨 자국을 보면 옆구리를 크게 물렸으나, 생채기만 내고 다시 놔 준 꼴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괴물이었는데, 덥썩 물어 깜짝 놀라 쳐내는데, 순순히 놓고는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때는 그런가 싶어, 집에 돌아와 대충 약을 바르고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깨어보니 보인 것이 의사 선생들이라. 제가 역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까무룩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병세가 그렇게나 빨리 번졌다는 뜻이니 최초 감염자가 거의 확실한 일이다.

“그러니 몬스터가 역병을 옮겼다고 보고 있습니다요. 그러니 그것의 서식지를 찾으면 둥지 또한 거기 있겠습니다만······.”

벨티가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아쉬움은 괜한 것이 아니다.

몬스터가 역병을 옮기고, 또 그 둥지가 몬스터의 서식지에 있다면? 의사들끼리 가서 둥지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몬스터와 싸울 병력이 필요하니, 그 전문가라 하면 바로 성기사들이 아니겠는가.

결국 신전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뜻.

벨티가 아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엔이 아븐에게 다시 물었다.

“처음 보는 종류라고 했죠? 어떤 생김새였죠?”

“그게, 그것이 말입니다.”

아븐이 머뭇거렸다. 시엔이 가만히 기다리자, 아븐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토끼 비슷한 놈이였습니다.”

“토끼요? 이게 토끼한테 물린 거라구요?”

시엔이 아븐의 배를 가리켰다.

옆구리부터 배꼽 너머까지 아치를 그리는 이빨의 흔적이다. 적어도 토끼는 아니었다.

토끼는 어간해선 물지도 않거니와, 물려도 살점 조금 떨어져 피나 좀 나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 보는 놈이었습니다. 토끼랑 비슷하니 귀가 길고 눈이 똥그라니 복슬복슬해 귀여운 것이, 그게 또 사람 무서운 줄도 모르고 깡총깡총 뛰어오지 않겠습니까.”

“흠. 그런데요?”

“그게 아가리를 벌리는데, 대가리가 가로로 쭉 찢어지다 못해 몸통까지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토끼는 절대 아닌데, 저도 수해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보았으나 그런 건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자 시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짚이는 놈이 있으니 라프라크라는 놈이라.

부정 세계의 마물들은 제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어찌 알고 그에 준하는 악의를 가졌다.

라프라크는 그런 부정 세계의 마물 중 하나다. 인간이 혹할 귀여운 생김새이나, 신체의 반절을 차지하는 거대한 아가리로 적을 물어뜯었다.

물론 부정 세계의 마물이 현상 세계에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정이 한 자리에 쌓이고 쌓이면 부정한 땅이 되어 더욱 부정이 쌓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계를 넘으면 심연이 열려 부정 세계와 통하니 곧 허수에 불과한 마물이 실체를 얻어 땅을 디딘다.

하지만 아븐의 증언대로라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끝없는 허기에 떠는 부정 세계의 마물이 제 아가리에 걸린 인간을 놓아줄 리가 없으니까.

마치 역병에 감염시키기 위해 물었다 놓아준 모양새가 아닌가.

마물을 부리는 것은 흑마법사의 일이다.

허나 흑마법사가 이미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세간의 눈을 피해 비맥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뜻일까.

“신전에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비맥이건 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랴.

흑마법사가 마물을 부려 내 땅 내 영민을 상하게 했다. 그러니 사연과 상관없이 내 적이라.

흑마법사에겐 가장 치명적인 이들이 바로 성기사들이다. 그리고 마침 내 손 닿는 곳에 아군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은가.

“역시 그렇게 됩니까요······”

옆에서 벨티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5]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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