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4] >
의사들이 역병의 치료성분을 모아 치료제를 만들었다. 수십 번의 배합 끝에 만들어진 치료제다.
증상이 확연히 가라앉았으며, 일부 환자는 의식을 되찾기까지 했다.
벨티의 도제 쿠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쿠게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 입안이 까끌한 느낌이 드는데요. 우웁, 쿨럭. 왁, 뭐야!”
쿠게가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곤 기겁을 하며 내보인다. 온전한 모양의 치아 한 개가 손바닥 위에 놓였다.
“크크, 잘 됐다. 이놈. 그러게 내가 가면을 벗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말은 죽어라도 안 듯더니 이젠 고기도 못 씹게 생겼네.”
“아니, 선생님.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럼 안 나오냐? 도제가 스승보다 먼저 틀니를 끼겠어. 아우, 고소하다. 예끼, 스승 말을 도대체 들어처먹질 않으니 그런 거야.”
쿠게가 울상을 지었다.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벌써 이가······”
“결혼은 무슨. 의사도 못된 도제 나부랭이가. 결혼이 정 하고 싶으면 능력이나 키워 욘석아. 여인은 사내의 능력을 보고 함께하겠다 마음먹는 법이야, 이것아.”
벨티가 코웃음을 쳤다. 허나 쿠게의 표정은 억울하기만 하니 잔뜩 불만이 낀 목소리로 반론을 펼친다. 아니, 펼치려 했다.
“하지만 스승님은 그게 아니라······”
“걱정 마렴. 때가 되면 짝이 나타나게 되어 있단다.”
“사모님!”
로즈가 자상히 도제를 타일렀다.
쿠게가 급히 자세를 정돈했다. 구부정하던 허리가 펴고, 공손하게 꿇은 무릎 위에 양 주먹이 얌전히 놓였다. 예의 바른 도제의 참모습이었다.
벨티가 인상을 구겼다.
“아니, 누가 스승이야, 대체?”
“이이도 참. 그나저나 결과가 나왔는데.”
“그래? 어떻게 되었고? 완치야? 완치지?”
로즈가 고개를 저었다. 새 부리가 좌우로 까닥거린다. 벨티의 어깨가 축 처졌다.
“뭐가 문제인데?”
“아무래도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아. 남은 둥지를 얇게 쳐서 내부 도식이 나왔는데, 부자연스럽게 빈 공간이 계속 나와.”
“비었다고?”
“아교 역할을 하는 역병이 하나 있어. 거기에 다른 역병들이 기생을 한 걸로 보이는데. 시약이 맞지 않았는지 검출이 안 되네······.”
“결국 치료제가 아니라 진정제란 말이지?”
“뭐. 환자가 의식을 되찾았으니까. 본 둥지를 찾아야겠지. 누군가 접촉한 이가 있을 거야. 일단 도련님께 말씀드리고.”
“오오. 그거 내가 가지. 내가 가야겠어.”
벨티가 벌떡 일어나 몸을 툭툭 털었다.
시엔 티란디스는 첫 둥지의 해체 후에 무슨 생각인지 얌전히 방에 틀어박혔다. 그게 바로 닷새 전이다.
그간 의사들이 백방으로 뛰며 만들어낸 것이 이 치료제, 아니 진정제였다. 이걸 빌미로 잘 구슬리면 막대한 연구비를 후원받을 수도 있으리라.
“여보, 좀 적당히 하면 안 될까?”
“적당히가 어디 있어? 티란디스가 얼마나 부자인 줄 알아? 황금을 쌓아두기만 해봐야 똥무더기지. 좋은 일에 써서 누군가 살면 그때야 황금이 귀한거 아냐, 이 사람아.”
“음.”
로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구구절절 맞는 소리기는 한데, 기분이 언짢다.
그래도 제 남편이 아닌가. 귀족 앞에서 헤헤거리며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하며 아양을 떨고 있으면 부인된 이가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그 마음도 몰라주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입네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지겠는가.
제일 화가 나는 건, 딱히 항변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명분이란 녀석이 무서운 이유다.
“하아. 알아서 해. 진짜 이런 걸······.”
“히힛, 나만 믿으라니까.”
“아. 쫌! 그렇게 웃지 말아! 선생이나 되어가지곤 체신머리없게!”
퍽! 결국 벨티가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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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순백으로 가득찬 공간. 수천 수만의 검은 점들이 떠오른다. 검은 점들이 요동을 친다. 좌우로, 위아래로 분리된 검은 점이 둘로, 넷으로 점점 그 숫자를 늘려나간다.
시엔이 그 사이에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선 채로 누워 조용히 공간을 표류한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엔이 눈을 떠 손을 뻗었다.
검은 구체들이 손바닥 위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원. 시엔이 손을 쥐었다.
“후.”
정신 세계는 관념을 심상화한 무형의 공간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러나 세상에 그 의지로 세상과 이어 접점을 만드는 이들이 있어 마법사라 불렸다.
그중 뛰어난 마법사들은 정신 세계의 관념으로 신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천 년 전의 흑마법사가 진즉에 이루었던 경지였다.
시엔은 역병을 삼켰다.
숙주를 만난 병마가 신이 나 그 신체를 타고 퍼졌다. 피가 오염되어 흐르니 어디 한 군데 역병에 굴복하지 않는 신체가 없었다.
지금 그 병마가 한데 뭉쳤다.
작은 점이 된 역병이 얌전히 시엔의 몸 속 한 군데에 자리잡았다. 정신 세계의 심상으로 현상 세계의 역병을 다스린 것이다.
똑똑. 때맞추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라 하니 새 가면이 고개를 조심스레 들이민다. 저게 누구인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헤헤헤, 공자님. 간만입니다. 그간 영준한 모습을 뵙지 못하여 이 벨티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니 삶에 인연이 있어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헤헤헤헤.”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벨티, 치료제가 완성이 된 모양이지?”
“아이고오, 송구합니다! 도련님!”
벨티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도련님께서 손수 미천한 치들을 깨우쳐 주셨으나, 천한 것들이 능력이 미치지 못해 그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눈이 막히고 코가 멀어, 음? 아니지. 눈이 멀고 코가 막히는 일입니다. 하니 송구스럽기가 짝이 없어 이 벨티 앞으로 평생 고개를 땅에 치박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에이, 적당히 해두고. 치료제가 아직 완성이 안 된 거야, 아니면 완성이 되긴 되었는데 진정제에 그치게 된 거야?”
“헤헤헤, 역시 영민하시다. 증상 대부분이 가라앉고 의식을 찾기까지는 이르렀습니다만, 역병이 독해 그 뿌리가 지워지지가 않습니다요.”
“뿌리가 안 지워져? 뭐가 문제인데?”
“저희들의 몽매한 의견으론 중심이 되는 역병이 있어 그걸 발견하지 못했다 합니다. 허나 환자가 의식을 차리니 곧 역학 조사에 들어가 본 둥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임은요. 헤헤헤.”
“뭐. 잘 하고 있네.”
시엔이 대답했다.
누군가 역병을 퍼뜨렸다면 그 방법이란 대개 두 가지다. 감염된 이를 사람들 속에 밀어넣거나, 혹은 가까운 곳에 둥지를 키우거나.
전자는 흑마법사나 가능한 방법이오, 후자는 역병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
그러니 역학 조사를 통해 감염지를 특정해 둥지를 발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적의 능력 또한 알게 되리라.
“다만 문제가 좀 있습니다만······”
벨티가 애석한 목소리를 냈다.
“뭔데?”
“진정제에 들어갈 약재가 한둘이 아닙니다요.”
“티란디스의 이름으로 수매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그러지 마시고, 여기 그 목록이 있으니 한번 보아 주시지요.”
시엔이 벨티가 내미는 목록을 받아들었다.
흔한 약초인 뱀발뿌리에서 귀한 오드레취리까지. 그런데 목록의 맨 아래에는 생뚱맞은 약재가 끼었다. 시엔이 알기로 현 상황에서 그리 도움이 될 것들은 아니었다.
“아래쪽은 뭐야?”
“헤헤헤헤.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나 효과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지는 재료들입니다. 그 조합과 배분에 있어 여러 시도를 하여 개선된 약을 만들고자 하여 그리 추가한 것입니다. 그리 수매해도 되는지 여쭙고자 제 송구함을 알고서도 직접 찾아뵙지 않았겠습니까. 헤헤.”
요것 봐라? 시엔이 다시 물었다.
“전부 치료제 개발에 쓸 거지?”
“아이고, 치료제 개발이 곧 의료 연구가 아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혹여나 어떤 성과가 나오면야 온 세상 의술에 보탬이 되니 온 세상 사람들이 도련님의 이름을 높이 사 흠모할 것이 아닙니까요. 헤헤.”
“그러니까, 이 참에 비싼 약재로 연구를 좀 해보시겠다?”
벨티가 몸을 움찔 떨었다.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정곡을 찔려 여기저기 시선을 굴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로즈가 그러지 않았던가. 앞잡이 노릇들 자처하며 입 안의 혀처럼 굴다 은근슬쩍 후원을 요구할 것이라고.
그런 이라면 필요한 약재라고 야료를 부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미리 귀띔을 받지 않았다면 깜박 속아넘어갈 만한 목록이다.
목록 말단의 약재들은 귀하고 비싸기만 하지 그 효능이 필요한가 싶은 것이나, 아는 의술이 아주 옛것이니 요즘은 이러히 쓰는구나 여겼을 테니.
“오, 오해십니다! 제 본심이 그러하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이 참람한 사태를 해결하여 도련님께 한 줌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헤헤, 혹시 저어하시다면 그 부분은······”
“됐어. 그냥 이대로 수매하도록 해.”
“예? 그대로요?”
“아니지. 이걸로 되겠어?”
벨티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나야 의술을 흉내라도 내지만 어차피 우리 재무관은 약초 이름도 하나 모르거든. 그러니까 눈치보지 말고 이 참에 필요한 거 있음 좀 채워두고 그래.”
시엔이 의술을 익혔다 하니, 그나마 아예 의심스런 약재는 적지 않았을 것이 뻔하지 않은다.
약재가 그 값이 비싸다 하나 티란디스의 재정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역병 의사가 어떤 이들인가. 제게 속한 영민을 위해 달려와준 이들을 위해 베풀지 못할 것도 없다.
그 뜻마저 나쁘지 않다면 더욱이.
쿵! 벨티가 격하게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바닥을 찍는다.
“오오. 도련님이야 말로 이 세상에 강림한 성자님이나 다름없으십니다. 아니, 성자님 그 자체십니다! 저 벨티 아모르세, 평생을 이 은혜에 감동하며 매사 공자님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요.”
“금칠은 그쯤 해 두고. 그래서. 진정제는 양이 얼마나 돼? 만들 약재는 충분하고?”
“적은 양은 아닙니다만, 역병이 독하니 계속하여 먹지 않으면 언제 재발을 할지 모르니 양이 모자라긴 합니다. 헤헤, 하지만 구하기 힘든 것은 아니라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요.”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헤헤. 예, 알겠습니다요. 헤헤헤헤.”
문득 벨티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목소리며 굽실한 태도는 보면 간신 중의 간신이 아닌가. 낯이란 제 쓰는 대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라 비굴한 이는 그 성정이 얼굴에도 그대로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지금 가면을 벗어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상상이나 해 볼 수밖에.
아마 염소수염에 비실한 웃는 상을 가진, 그런 중년인쯤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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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배포한 진정제가 빠르게 효력을 발위했다. 이태까지 자리에 누워 숨조차 힘겹던 이가 눈을 떠 말을 하니 적막했던 도시에 그나마 색이 드리운다. 희망의 색이었다.
“시엔 공자님께서 발 벗고 나서셨다며?”
“독학으로 익힌 의술에 의사 선생들도 놀라 자빠졌다던데.”
“시엔 공자님께서 말하시길, 내 영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들 못 할것이 없으니 천금 만금이 아깝지 않아 그리 풀리라 하셨다잖아.”
의식을 찾은 환자들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시엔 공자가 환자를 찾아다니며 피고름 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더라. 꼬박 일주야를 잠도 자지 않고 환자 돌보기에 열심이었다고도 하고. 역병의를 직접 지휘하여 진정제 개발의 핵심으로 활약했다는 말도 있었다.
시엔은 역병의들과 함께 환자들의 증언들을 기반으로 최초 감염자 및 감염자를 찾는 역학 조사 중이었다.
벨티는 오른팔이라도 되는 것마냥 시엔 옆에 붙었으니 어느새부턴가 둘이 한 세트다.
시엔이 환자의 증언을 듣기 위해 다가갔을 때였다.
“선생님이십니까? 저 목에 가시가 걸린 것마냥 따끔거립니다만, 이거 괜찮은 겁니까?”
“예끼, 이 사람. 이분이 바로 시엔 공자님이시다.”
“아! 세상에.”
환자가 시엔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째 너무 가깝지 않나 싶더니 양손으로 시엔의 구두를 부여잡곤 조심스레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바쳐 최대한의 존경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시엔이 기겁을 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뭐, 뭐야?”
“제 아내도 자식들도 모두 도련님께서 살려주신 거요. 제가 해드릴 것은 없지만서도, 그래서 이렇습니다요.”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이 은혜가 전부 도련님이 준거라 다 들었습죠. 약도 그렇고, 전부 다 말입니다. 제가 무식해도 은혜는 압니다.”
시엔은 그저 둥지 한 번 자른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엔 집어삼킨 역병을 제 것으로 다스리느라 방에 틀어박혔을 뿐이고.
나머지는 역병의들이 알아서 하지 않았던가.
시엔이 황당하여 할 말을 잃은 사이, 벨티가 손을 비비며 맞장구를 쳤다.
“헤헤헤. 역시 공자님의 덕이 세상에 빛을 발하는군요. 눈이 있다면 볼 것이오, 귀가 있다는 들을 것인데 공자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모르겠습니까?”
“벨티. 설마.”
“헤헤헤. 아유, 저야 그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저들이 감격하여 이러는군요. 하기사, 공자님의 덕이 높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공자님의 명성이 드높고 이 일화가 길이길이 남지 않겠나 싶습니다. 헤헤헤.”
“아니. 무슨.”
제가 했다는 뜻이다.
시엔이 기가 막혀 말문도 같이 막혔다.
문득 왕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던 하란돌 영감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민이란 눈이 어두워 작은 소문을 큰 것이라 여겨 쉬이 현혹되는 것이니, 왕자께선 작은 허물조차 남지 않도록 조심하시지요.
진정한 제왕은 진실한 언행이 세상에 널리 퍼져 만백성이 기꺼이 칭송하여 이름이 높으나, 사특한 이는 거짓으로 현혹해 선동하여 그 이름을 높입니다.
이러한 거짓은 곧 죄요,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이들이 스스로 죄가 죄임을 모르고 죄를 짓게 만드니 죄악이 깊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 주둥이를 놀려 선동하는 이는 간악하기로는 견줄 놈이 없으니 그 심성이 악독하기 짝이 없어 엄벌로 조져놓도록 하시죠. 왕자님.
그러고 보면 꼭 잘 나가다 끝에 가서 체면을 망치는 양반이었다. 그런 이가 이름난 현자라니. 그러니 천 년 전에 현자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고 하고.
어쨌든 그렇다 하니 헛소문에 선동질을 하는 이는 악독하다 했다. 하지만 벨티는 대체 어찌 평가해야 하나?
앞잡이 노릇이란 게 비단 앞에서 알랑거리며 금칠을 해 주는 데에 그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가하면, 또 제 뜻도 챙겨갔다.
찬양을 받는 이가 시엔과 그 뜻을 받은 의사들이지 않은가. 거기에 신관만 쏙 빠졌다.
벌써 역병이 다 해결된 듯한 분위기에다, 누가 들어도 신관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여길 것이 뻔했으니.
영리한 이다.
벨티가 의술에 뜻을 둔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희대의 간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됐고. 앞으로 그런 건 하지 마. 안 한 일을 했다고 감사를 받아봐야 그게 뭐 기분이 좋은 일이라고.”
“아이고, 이런. 제가 공자님의 뜻을 곡해하여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요. 헤헤헤. 혹여 기분이 상하신 것이 아닌가 이 벨티 속이 무너지고 깨지고 찢어지는 것 같으니 고통이 세상에 견줄 데가 없습니다. 으윽.”
벨티가 제 가슴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시엔이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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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티는 신관이 없어야 의술이 더욱 발전한다 여겨 그 태도가 과격하여 극단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한 것은 좋지 않다. 신념이 해악하지 않다 하여 그 결과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교단이 곤란해졌다.
“이거 상황이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신전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환자들 중 성녀님을 찾는 이가 없고, 연신 티란디스를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하우드란드의 교구장을 비롯한 몇몇 성가대장, 그리고 파견 대주교와 성기사장 일부가 모여 연신 한탄을 거듭했다.
말 그대로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섯 성가대와 그를 호위하는 성기사단 셋. 그리고 대주교 둘과 성녀가 포함된 교단의 구호대가 아니던가.
이만한 규모의 구호대가 정작 역병 지대에서 활약한 일이 없다? 신전의 위세가 크게 흔들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구호대는 성심을 다했다.
축성한 물을 도시에 뿌려 오염을 밀어냈고, 생사가 경각에 달린 급한 환자들에게 신성을 전달하여 그 명줄을 붙여놓기도 했다. 성물을 통해 의사들이 감염되지 않도록 막아준 것도 교단이다.
그런가 하면 성녀는 벌써 몇 번을 쓰러지며 역병 퇴치를 위한 성가 완성에 힘쓰지 않았던가.
“쯧쯧. 모든 것이 천신님의 은혜인 것을. 어리석은 이들이 높은 뜻을 모르니. 쯧쯧.”
한 신관이 크게 한탄하며 연신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본 수히가 생각했다.
‘파헤베 대주교께선 좀 닥치셨음 좋겠는데. 환자 한 번 안 돌보시고선 주둥이만 살아서.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천신님, 죄송합니다. 제가 나쁜 것이 아니라 누구 옆에 있다보니 말뽄새가 옮았나봐요.’
수히가 찔끔하여 천신께 몰래 기도를 드렸다.
신관이라 하여 모두가 존경받을 만한 이는 아니다. 수히는 성녀를 모시며 이러한 이를 많이 봐 왔다.
하지만 이 자리엔 그런 허울뿐인 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레울 대주교는 재산이 성복 두벌 뿐이라, 나머지로 빈자를 먹이고 입힌다.
성기사장 라이벵 경은 대가 없이 마물을 퇴치하는 데에 성심을 다하는 이다.
그런 이들마저 여기에 모였다.
교단의 위세는 곧 믿음의 문제가 된다. 천신께 드리는 목소리가 작아짐은 쉬이 볼 문제가 아니었다.
수히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지금이 기회였다.
“여러분,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오, 수히 형제님.”
“아시다시피 저희 교단은 언제나 천신님의 가르침대로 헌신과 희생을 해왔답니다. 저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아쉬워할 것은 아닙니다만, 성도분들께서 천신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도 저희들의 의무겠지요.”
“맞습니다.”
“맞소. 옳은 말씀이오.”
“그러니 이러면 어떻까요? 성녀님께서 시엔 티란디스에게 명예 성직을 부여하고, 그 옆에서 함께 성도들을 도우시는 거죠.”
신관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탄성이 터져나온다. 이해하지 못한 이도 있어 손을 들어 물으니 수히가 다시 풀어 설명한다.
명예 성직을 수여하면 시엔 티란디스 역시 교단의 사람이요, 그 옆에 성녀가 꼭 붙어서. 그러니까 꼭 붙어다녀야 하는데. 그리하면 성도들이 천신의 은혜가 저들을 인도하심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고.
“오오. 과연 그거 명안이요.”
다들 수긍을 하는 분위기다.
수히가 새 가면 아래에 미소지었다.
뷔아가 그를 보고 심장이 떨리고 속이 답답하다 했다. 그게 무엇이랴. 사랑이다.
사랑!
사랑이란 어떠한 것도 아름다운 것. 얼굴도 모르는 이를 보아 그러하니 천신님께서 점지하신 짝이 아니면 무엇이라.
의식이 든 환자들이 말하기는 그 인품이 훌륭하고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니, 섭섭하긴 해도 뷔아를 맡기지 못할 이도 아니다.
‘남여가 붙어다니면 정분이 나는 거지 뭐.’
뷔아는 제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나 언제까지 그러하진 않으리라. 시엔 공자야 뭐. 뷔아 얼굴에 세상 어떤 사내가 연모하지 않을까.
걱정이라면 뷔아 고것의 흉포한 성정이긴 한데. 그 얼굴이면 충분할꺼야. 뷔아 얼굴은 천하무적이지, 그럼.
수히가 또 생각했다.
‘나중에 이 언니한테 고마우면 멋진 사내라도 한 명 소개해달라 해야지. 히힛. 천신님, 이 정도는 허용되는 거죠?’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4]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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