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37화 (37/268)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2] >

“헤헤헤,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군요! 제가 연구동으로 모시겠습니다. 역병에 조예가 바다와 같이 깊으시니 일견에 단숨에 깨우치실 것이 아닙니까! 고견으로 요 우매한 이를 깨우쳐 주시지요.”

“아, 예.”

“아니, 말씀 부디 편하게 해 주시지요. 헤헤. 그러니시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 그래.”

시엔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벨티가 씩씩하게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환자들을 지나쳐 계단을 타고 위로 또 위로. 한때는 도시의 업무가 한창이던 곳에 지금은 새 가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이 알은 척을 해 온다.

“새로 온 친구인가?”

“어이쿠, 이 사람아! 이 분이 바로 시엔 티란디스 공자님이시네! 경을 치려고 작정했나!”

“아. 공자님이셨습니까.”

의사가 까닥 고개를 숙인다. 벨티의 목청이 워낙 컸던 탓에, 의사들이 어색하게 시엔에게 목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그뿐, 이내 저들이 하던 일에 고개를 돌려 부리를 기울였다.

원래는 이런 반응이 정상이 아닌가.

귀족가의 도련님이라고 해도 그 뿐. 어차피 저네와 상관없는 이라 그저 최소한의 예의만 표한다면야 굳이 뭐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이 사람들이. 도련님이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 해 주셨는데 말이야! 에잉, 쯧쯧. 아이고, 도련님 죄송합니다. 요 치들이 워낙에 못 배워먹어서 그러니 용서하여 주시지요.”

“아니. 뭐.”

“자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침 표본이 하나 나온 참이라 오늘 중에 배를 가른다고 모여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련님께서도 참관하시겠지요?”

부검이 진행될 예정이었나 보다. 역병에 사망자가 좀체 나오지 않는다 했으니 어쨌거나 좋은 기회임에는 틀림없다. 시엔이 딱히 다른 할 말도 없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벨티! 유난 좀 떨지 말라니까! 내가 못 살아!”

짝! 덩치가 큰 이가 다가와 벨티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벨티가 억 소리를 내며 팔을 꺾었다. 어떻게든 등을 문지르고 싶은 모양이나 뻣뻣한 관절 탓에 뒤틀린 모양새에 그치고 말았지만.

덩치가 큰 새 부리 가면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문득 시엔을 바라보았다.

“아휴. 티란디스의 도련님이시라구요? 이이가 워낙에 극성인 사람이라. 많이 곤란하셨지요?”

“뭐, 그렇죠.”

“로즈 하세어랍니다. 남편이란 사람이 워낙에 저래 놔서요. 나쁜 이는 아니지만서도 저리 오냐오냐 받아주시면 더 심해진다니까요.”

들어보니 내외가 나란히 의사인 모양이었다.

시엔이 로즈의 두툼한 손을 바라보았다. 장갑까지 끼고 있으니 그야말로 곰발바닥이 따로 없다. 맞으면 손자국 그대로 멍이 남으리라.

시엔이 이태까지도 손에 닿지 않는 등과 그 통증에 펄쩍펄쩍 뛰는 벨티를 바라보곤, 다시 로즈를 돌아보았다.

“심해진다구요?”

“귀족분들만 만났다 하면 아주 앞잡이를 자처해서 저러는데······. 흠. 검시는 도련님께서 보아 불쾌할 수 있으실 텐데요.”

로즈가 벨티에게 부리를 겨누었다. 그러자 벨티가 찔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로즈의 어깨가 크게 움직이니 한숨을 쉬는 모양. 그리곤 시엔에게 말했다.

“혹시 저이가 멋대로 굴어 여기까지 오셨다면 어울려 주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검시는 불쾌하실 수 있으니······”

“여보, 그게 아니라니까! 도련님께선 이미 의술이 경지에 이르신 분이셔. 참관하시어 고견을 여쭙고자 모신 거여!”

“아니, 이이가 정말!”

“아니 증말이라니까! 아까도 환자의 용태만 보시고 바리바라의 변종이 아니겠냐 하셨다니까!”

“바리바라?”

로즈가 멈칫 제 턱을 긁으려다, 새 부리 가면에 막혀 어색하게 손을 털어내고 말았다.

“바리바라라고?”

“그건 사병 아닌가? 완파 선언이 벌써 몇백년 전인데.”

“바리바라? 흠. 일리가 있긴 한데.”

새 부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급히 책을 펼치고, 누구는 부리를 맞대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실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도련님께서 의술에 뜻을 두셨을 줄은 몰랐어요.”

“거봐, 내가 뭐랬······”

벨티가 의기양양하여 제멋대로 말을 내뱉다 로즈의 부리질에 바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문득 베른닐의 두건이 떠오르는 이유가 무얼까. 결혼은 사내의 무덤이라 말하는 베른닐은 시엔이 본 가장 진지한 태도가 아니었던가.

“검시를 참관하시겠어요?”

“이왕이면 칼을 좀 잡았으면 하는데요.”

“도련님께서 직접이요? 흠.”

로즈가 새 부리들을 쭉 둘러보았다. 부리와 부리가 마주칠 때마다 위아래, 혹은 좌우로 미묘한 흔들림이 보인다.

그렇게 한 바퀴 돌아본 로즈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대신 제가 보조를 맡아드려도 되겠어요?”

일단 맡기긴 할 테지만, 여차하면 옆에서 두고 보다 제가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그러라 대답하자, 로즈가 짝짝 박수를 치며 이목을 모았다.

여간해선 검시란 대장 의사, 지휘의가 하는 일이 아니던가. 의견을 모았다 하나 선뜻 내줄 수 있는 이다.

지휘의가 바로 이 여인이었다.

“자자. 여러분. 그럼 이제부터 제13차 검시를 시작하겠습니다. 본디 제가 검의에 나서기로 했으나 이번에 특별히, 검의에 시엔 티란디스 도련님께서 참가하실 겁니다. 보조에 제가, 기록에 카렌스 선생님과 제이드 선생님이 준비해 주세요.”

로즈의 말에 까마귀들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바퀴가 달린 수레가 달달달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니 그 위로 시체 한 구가 놓였다.

이내 도구들이 속속 자리를 갖췄다.

긴 막대기 끝에 날이 붙은 것이 여러 종류요, 헤치고 고정하는 실이며 집게 따위가 달린 것이 또 여럿이다.

꽤 오랜만에 잡아보는걸. 시엔이 도구들을 한 번씩 쥐어 보며 감을 짚었다.

장갑을 벗어버리고 맨손으로 짚어보는 것이 가장 편안하나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직 그 힘이 미약한 흑마법사들은 역병 의사와 마찬가지로 병마에 취약하니 이러한 도구를 썼다. 천 년 전의 흑마법사도 시작부터 강력하지는 않았으니. 하여 못쓸 것도 아니다.

시엔이 시체의 배를 갈랐다. 단숨에 그어내려가는 칼날에 반쯤 굳어 떠오른 피막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확히 자르지 않으면 피막이 상해 속것이 튀어나오니 능숙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꽉 쥐고 있던 로즈의 주먹이 자연스레 펴졌다.

도구를 잡는 품새는 자연스럽고, 차례차례 떨어져 나오는 장기는 흠집없이 온전하다.

다만 의문이 들 뿐이다.

저 정도면 이미 산전수전 겪은 노련한 이의 실력이 아니던가. 허나 티란디스의 도련님들 중 누가 의술에 뜻이 있다 들은 적이 없다.

애초에 귀족이 의술을 들여다보는 일이 드물다. 그네들이야 원래 신전에 바치는 금화만큼이나 신관들과 친하니.

의술은 원래 연구에 금화가 녹아난다. 하여 귀족이 부유함으로 의술에 뜻을 두면 그 아래 참으로 유익한 연구가 이루어지곤 했다.

하여 귀족 자제가 의술에 뜻을 두었다더라 하면 내노라하는 큰 선생들이 손수 나서 지도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로즈 역시 학계에선 제 이름자 알렸다 할 정도라 소문에 밝았으나 시엔이란 도련님에 대핸 들어본 바가 없었다.

‘배우긴 제대로 배웠는데. 누가 가르쳤담?’

순서나 방식이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오래된 것이다. 손에 익었다 하여 고집스레 뜻을 꺾지 않는 늙은 선생들이나 쓰는 고루한 해부가 아닌가.

어쨌거나 걱정과는 달리 잘하고 있으니 잘된 일이다.

역병이 독하나 삶을 끊지 않으니 하루 한 명이나 나올법한 죽은 이다. 검시를 잘못하여 버린다면 그나마 죽은 이가 제 죽음으로 타인의 삶을 밝힐 기회마저 앗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아.”

로즈가 안까타운 탄성을 흘렸다.

압력을 잘못 계산한 모양인지, 반쯤 썩은 피가 찌익, 세차게 튀고 말았다. 시엔의 앞섶, 흰 천에 검은 피가 묻어 흘렀다.

하지만 시엔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해서 해체된 장기들이 차곡차곡 유리병에 담겨 라벨이 붙었다. 달달달 수레가 물러나고 나니 로즈가 말을 붙여왔다.

“수고하셨어요.”

“뭘 이 정도로 수고까지야 있나요.”

“잘하시던데요? 도제를 들이셔도 되겠어요.”

“거 보라니까. 내가 딱 보고 알았다니까. 도련님께서 이미 의술이 극의에 달하셨다니까. 보자마자 후광이 일어나는데 아찔할 정도······”

“여보.”

“흠, 흠.”

벨티가 끼어들었다 로즈의 말 한 마디에 다시 찌그러졌다.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리는 차에 로즈가 다시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선생을 사사하셨나요? 꽤. 음. 전통적인 방법을 쓰시던데요.”

전통적인 방법. 즉 낡은 방법이라는 뜻이라. 그러고 보니 제 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시엔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차피 가면을 쓰니 누가 볼 것은 아니었다.

“그냥 책 보고 익혔습니다. 오래된 의서라 그런 모양이네요.”

“예? 독학을 하셨다구요? 씁. 여보.”

옆에서 한마디 쏟아내려던 벨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쪼그라들었다. 아마 놔뒀다면 천재니 뭐니 하니 낯뜨거운 찬양이 이어졌으리라.

“독학일 수가 없는데. 음. 하긴 티란디스에 선생이 있다 들은 바가 없으니 그러하시겠지요. 대단하시네요. 혹시 제가 뛰어난 분을 소개해 드려도 될까요?”

“관심이 있으나 의술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 선생님들이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아니 가벼운 마음으로 익힌 것은 아니지만요.”

“그러시군요.”

로즈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짙게 스몄다.

보기에 절대 독학으로 나올 수 없는 실력이다. 특히나 검시란 몸에 익는 것이라 선생의 엄격한 지도 아래 혹독히 연습해 얻는 것이 아니던가.

검시란 왕국법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 귀족이라 하여 딱히 방법이 있지 않다.

‘그럼 뭐야? 재능? 이걸 재능이라 하나?’

하지만 귀족 자제에게 의술을 강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랴.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깊이 접어둘 수밖에.

“오래된 의서라. 바리바라도 그렇고, 상당히 오래된 물건임엔 틀림없네요. 이 난리가 해결되고 나면 최신 의서를 보내드릴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뭐.”

“그래서 어떠세요? 사실 유행이란 첨단이어도 한편으론 머리가 굳는 것이기도 해서. 옛 지식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도련님 보시기에 뭔가 집히는 거라도 있으세요?”

“바리바라에 근접하긴 한데, 안티 테트랄에 간에 연잎모양 멍우리가 있으니 카르베덜, 안구 뒤편엔 다프로시델 반응도 보였네요.”

“아니, 대체 얼마나 오래된 의서를 보신 건가요? 하나같이 죽은 역병들이네요. 하지만 일리가 있는데······”

로즈가 손을 들었다. 턱을 붙잡으려다 가면을 건드리고 또 무안한 손을 털기를 한 차례.

“지금 시약을 바탕으로 역병 둥지를 키우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유의미한 성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같이 가 보시겠어요?”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어도 되겠죠?”

시엔이 제 앞섶을 가리켰다. 죽은 이에게 튄 죽은 피가 슬슬 말라 검게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아. 제가 주책을. 여보, 여분 로브 좀 챙겨 드려.”

“헤헤헤. 그러믄요! 도련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장 좋은 것으로다가 따로 구해 놔 두지 않았겠습니까. 간밤에 꾼 꿈에 귀인께서 오실 것이라 하여 쟁여둔 것이 이제 제 주인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헤헤헤헤.”

“아, 쫌! 여보!”

“이크. 이쪽입니다. 도련님.”

벨티가 잽싸게 앞장을 섰다.

귀족만 보면 앞잡이 노릇을 한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간신 중의 간신이 따로 없는 꼴이다.

“그나저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것이 살며 그러한 솜씨를 이 눈으로 목도할 것이라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 그 용태를 눈과 마음에 새겨 두고두고 물려줄 것입니다요. 헤헤.”

이 정도쯤 되면 시엔도 얼굴이 홧홧하다.

아니, 대체 뭐 하는 양반이야?

그렇게 얼굴에 금칠을 받으니 도금이 지나쳐 금덩어리가 되는 기분이다.

겨우 탈의실에 도착하고 나니 이번엔 불쾌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방이 하얗게 깨끗한 좁은 방 안에, 모서리마다 성물이 있어 그 기운이 강력하기 짝이 없다.

탈의실이란 의사들이 가장 취약한 때니 어쩔 수 없는 조치라 하나 흑마법사에겐 불쾌할 뿐이다.

시엔이 가면을 올려 이마의 땀을 한 번 훔치고, 뒤이어 장갑을 벗은 손으로 앞섶의 검은 피를 콕 찍어냈다. 역병이 깃든 피딱지가 묻어나온 손가락을 그대로 제 입에 쑤셔넣는다.

“흠.”

흑마법사는 부정을 다루는 이라. 가장 좋은 방법은 부정을 바로 제가 겪어보는 것이었다.

한 번 걸려 역병을 눌러 잠재우고 나면, 그때부턴 질병이 아니라 흑마법사의 병기가 되는 법이다.

혹여 모르나 전쟁이란 비정하니 적에게는 어떤 자비조차 베풀 가치가 없는 것. 병기가 참혹하다 한들 그게 제 영민을 지킬 무기라면 얼마든지 휘두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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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히 알렌티는 젊은 나이에 주교 직위를 꿰찬 여사제였다. 물론 주교라고 해도 허울 뿐인 것에 불과했지만.

주교란 제 교구를 이끄는 이나 수히는 그저 성녀를 보좌하며 곁을 지킬 뿐이었으니까.

모시는 이가 성녀쯤 되면 그 보좌관에게도 적당한 권위가 필요하니 얼결에 주교의 법모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허나 성녀에게 무슨 보좌가 필요하랴. 자체로 걸어다니는 기적일 이가 아닌가.

그러니 말뿐인 주교, 말뿐인 보좌관이었다.

실상은 늘 곁에 붙은 절친한 벗이고.

“우리 성녀님이 웬일로 화장을 다 하셨대?”

수히가 놀라 물었다.

성녀는 성력도 사기, 신체 능력도 사기, 그리고 미모도 사기였다. 그건 피부 역시 마찬가지라 달라붙어 보아도 티 하나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성녀는 화장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웬일로 제 뺨에 분칠을 하는 것이 아닌가.

뷔아가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아이 씨. 몰라.”

“아니. 본인이 모르면 누가 알아? 화장이라면 질색을 하드니만. 어어, 그렇게 바르는 거 아냐. 아주 떡칠을 할 기세네. 이리 내.”

“됐어. 내가 할 거거든?”

뷔아가 수히의 손을 탁 쳐냈다. 워낙에 친하여 벗보다는 친언니에 가까운 이라, 성녀가 응석을 부리는 이도 오직 수히뿐이었다.

“요거요거요거, 봐라? 왜 갑자기 화장을 하실까. 흐흐.”

“뭐야? 왜 그렇게 봐?”

“여자가 화장을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어디 잘 보일 님이 계시나? 요게 남자라면 길가에 개미만도 못하게 보더니만. 누구야? 누가 감히 세상 가장 아름다운 성녀님의 마음을 훔쳐가셨나?”

“아씨, 그런 거 아니거든?”

“아. 섭섭하다. 세상천지 그래도 나한텐 숨기는 거 없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남자 생기고 나니 나는 이제 뒷전이다 이거지?”

“아이 씨! 아니라니까!”

뷔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나 하루이틀 듣는 소리가 아니다. 세상에 저 성질머리의 진가를 가장 잘 아는 이가 있으니 바로 수히가 아니던가.

“어디 보자. 아까 보니까 티란디스의 공자님하고 아주 찌이이인한 포옹을 하시던데. 어머어머. 티란디스? 오오! 그러고보니 그 분이시네. 시엔 티란디스! 세기의 로맨티스트!”

“세기의 로맨티스트?”

“몰라? 떠나간 연인에 슬퍼 목숨을 끊으신 분이잖아. 세상에,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랑이 있을까. 아아.”

“목숨을 끊었는데 왜 살아있어?”

“안 죽었으니까 살아있겠지. 그럼 시체가 움직이고 있게? 좋아. 이 언니가 허락하지.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 뷔를 맡겨도 될 것 같아.”

“아이 씨! 그거 절대 아니거든! 딴 놈을 몰라도 그 새끼는 절대로 싫어!”

뷔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 무슨 남자가 그리 치졸하고 약은 데에다. 세상에 여자의 뺨을 꼬집다니. 대체 그러한 이야기 비슷한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세기의 로맨티스트? 연인이 떠나자 목숨을 끊어? 딱 보니까 연인이 왜 떠났는지 알겠네.

도대체 얼마나 세게 꼬집었길래 손가락 두 개가 닿았던 자리에 파랗게 멍이 남았겠는가. 하여 챙피하니 생전 안 쓰던 분을 발라 가리고 있던 참에 수히가 들어와 약을 올리고 있었다.

“히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누가 그래? 강한 부정은 강한 부정이지.”

“그래? 그럼 우리 뷔는 왜 처음 보는 공자님의 단추를 손수 고쳐 주셨을까? 응?”

“그거 아니거든? 살짝 실력을 보여준 것 뿐이거든?”

“초면에? 그건 세 번째잖아.”

수히가 되물었다.

뷔아는 아름다우니 대처 노소를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놈이 한가득이었다.

마음 같아선 꺼지라 소리치겠지만 교단의 체면도 있고 성녀가 그래서야 다 같이 곤란한 참이다.

그러니 첫 번째는 우아하게 거절, 두 번째는 좀 더 강하게 거절이다.

그리고 세 번째.

그래도 정신 못 차리는 머저리에겐 살짝 목을 조르거나 팔목을 죄는 정도의 실력 행사로 쫓아낸다.

“몰라. 걘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어떤데.”

“몰라. 뭔가 속이 좀 답답하고, 뭔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이 거슬린단 말야.”

그럴 수밖에. 속에 부정한 기운을 품은 이가 가까이 있으니 신성이 반응하는 것이라. 허나 흑마법사가 세상에 없던 지가 오래니 성녀라 하여 어찌 알까.

“속이 답답하고, 심장을 찌르는 것 같다? 어디 아파? 몰래 먹은 밥이 체했던 거 아냐? 어쩐지 3인분을 그냥 들이키더니만.”

“나 성녀거든?”

“그렇다 이거지.”

수히의 눈빛이 기묘하다.

뷔아가 멈칫했다.

“뭐, 왜, 왜? 왜 그렇게 봐?”

“아니. 이제 우리 뷔도 다 컸구나 싶어서.”

“무슨 개소리야?”

“입에 문 걸레 빼세요. 성녀님. 누가 들어요.”

“소리같은 소리를 해야 소리로 들어주지.”

“그래. 부정하렴. 언니가 다 알아.”

수히가 게슴츠레 눈알을 돌리며 흐흐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 언니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렴.”

“뭐, 뭘 도와?”

“우리 뷔 마음 언니가 다 아니까. 그래, 처음엔 다 그런 법이지. 응. 응.”

“이상한 짓 할 생각이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다.”

“응. 응. 알았어. 알았다니까.”

대답하는 모양새가 건성이다.

뷔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대단히 불안한 느낌이 든다.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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